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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4)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1)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2)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3)




거미여왕의 무덤 일러스트.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진중권의 트위터 발언을 다시 인용하겠다.


Jul 2

이 사안을 보는 나의 세 가지 시각. (1) 광대의 철학. 연예인은 도덕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의 대변자다. 따라서 광대에게는 폭넓은 언행의 자유를 부여하자. 이런 생각으로 유승준, 신정환 등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을 옹호해 왔던 것이고.....


Jul 2

(2) 실천의 가상화. 진짜 중요한 것은 현실의 공직자 검증. 그게 잘 안 되니, 그 좌절된 정의의 감정을 '연예'와 같은 가상의 영역에서 대리실현하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저는 그것도 살짝 왜곡된 욕망이라고 봐요.


Jul 2

(3) 운동의 '법정화' 경향. 아마도 이게 저를 제일 불편하게 했을 겁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 찾아가서 '입장 밝혀라, 입장 안 밝히면 동조자다.' 몰아부치고, 입장 밝히면 거기서 꼬치꼬치 말꼬리 잡아 온갖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Jul 2

자, 이런 이유에서 옹달샘의 발언은 비난 받을 만하고, 대중들의 불매운동은 정당하다. 다만, 1년 전에 사과하고 끝낸 일 다시 끄집어내어 아예 밥줄까지 끊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과도하다. 저는 이렇게 얘기했고, 그 죄로 여혐러가 된 겁니다.


 앞서 진중권의 희극론과, 무엇이 가상이며 '진정한' 현실인지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제 '법정화 경향'을 논하겠다.



#3 법정화 경향?


 노정태가 일군의 자유주의자 트위터리안 페미니스트들과 일종의 그룹을 이루고 있다(LTFG)는 사실을 '페미니스트 선언'을 논하며 이야기하였다. 종전부터 노정태는 임근준과 제이슨 박이라는 트위터 유저들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사람들은 이 셋을 일러 임맨슨 패밀리라 하였다.


 시간을 거슬러, 그러니까 저 진중권의 자유주의자 전향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진중권은 논객의 대명사였고, 일종의 논설적인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롤 모델이었다. 물론 논객의 원조는 강준만이겠지만, 그이는 어쨌든 연구실의 학자였으며 인터넷상에서 쪼렙들과 다투지 않았다. 00년대 당시 미래의 진중권이라고 불렸던 청년들이 있었으니, 한윤형, 노정태, 김현진, 고은태, 박권일, 허지웅 등이었겠다.


 이런 '청년논객'들은 진중권을 무척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뭐 말했다시피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진중권은 최고의 논객이었고 시대의 양심이었으니까. 특히 한윤형과 고은태, 박권일, 허지웅은 2012년 초까지도 진중권과 팀블로그 '리트머스'를 공동 작업 - ‘나꼼수’에 얻어맞은 여섯명이 뭉쳤다 - 하며 서로 잘 지내는 듯 보였다.


 그런데 진중권이 자유주의자로 전향하면서 그이의 글도 바뀌기 시작했다.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 것이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결론만 놓고 말하면, 비록 문제제기자들의 비판이 섬세하지 못하고 요구가 과했다고 할지라도, 공지영과 출판사의 잘못이었다. 한윤형의 다음 글을 참고하라(한윤형은 이런 글을 써 온 사람이었다!) '의자놀이' 스캔들, 무슨 일이었나 (上)/'의자놀이' 스캔들, 편집자들에게 묻다(下)


 여기서 진중권은 공지영의 편을 들었고, 그 논리란 아무래도 대의를 위해 조그만 것은 넘어가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대의란 정권교체이다.


 이런 노빠적 꿈은 진중권의 과거 입장들과는 전혀 달랐다. 가령 황우석의 연구비리가 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국익이라는 대의를 생각하여 묻고 넘어가자는 주장을 한 것은 유시민이며, 진중권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논객으로서의 치밀한 논리와, 진영논리를 따지지 않는 양심은 어디로 갔는가? 특히 한윤형이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였으며, 결국 쌍욕을 퍼부으며 관계를 단절하였다.


 2012년, 그러니까 18대 대선 무렵부터 진중권은 계속 이런 식이었다. 한때는 좌파민족주의자들을 비판하였다, 합당이 필요해지자 다시 수용하였다, 이정희의 관악을 경선부정 논란이 일 무렵엔 진중권은 그들을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통합진보당 내분이 터지자 진중권에게 좌파민족주의자들이란 다시 미친 놈들이 되었고, 대선토론 국면에서 이것은 또다시 바뀌어 저 이정희마저 멀쩡한 사람이 되었다. 이런 '대의'를 위한 헛소리들로 인해, 청년논객들과 진중권과의 관계는(물론 허지웅과는 여전히 잘 지내는 듯 보인다) 차례차례 파탄을 맞았다.


 에우리피데스를 인용하자면, "하나 이제 미움뿐, 사랑은 아파하노라."


 2000년대 초반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에 대한 강준만과 진중권 논쟁의 재판인 셈이다. 물론 여기서 정권교체의 대의를 논했던 것은 강준만이요, 그 반대에 섰던 게 진중권이었다. 이 논쟁으로 강준만과 진중권은 서로 원한관계가 되었는데, 진중권은 이후 전혀 별개의 사안들에서 강준만을 다소 졸렬하게 비난해 왔다. 이런 소심함은 김규항이나 뭐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는데, 예전의 경우를 따지고 보자면 먼저 부당한 일을 당했던 것은 어쨌거나 진중권이라, 이런 사적 원한을 공적으로 푸는 행태는 그리 큰 오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치사한 것은 말했듯 김규항도 뭐 비슷했어서라.


 한때 문하생(이라고 해야 할까)들이 마치 박근혜에 대한 유승민의 그것처럼 자신을 '배신'한 것을, 진중권은 심히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가령 저 앞의 프레시안 기고에 대한 진중권의 반응을 보라.



 이 둘은 2014년 신해철의 사망 당시 심하게 다투었다. 진중권의 주장은 이러한데,


jungkwon chin @unheim

노정태의 것은...조사(弔詞)를 해야 할 맥락에서 분석을 내놓은 화용론적 오류. 게다가 그 '분석'이란 게 황당한 세대종말론. 그러니 이렇게 들리죠. "고인의 사망과 더불어 좋은 시절의 관성으로 버텨오던 시대도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한들 어쩌라고, 싶지만 진중권은 고 신해철의 절친이었다(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만큼 인내했어야 한다 싶기도 하지만).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노정태의 친구인 제이슨 박의 '고인드립'인데, 이 미국인은 대략 그것을 아메리칸 조크라고 주장하였다. 예상하시겠지만, 이 사례에서 진중권은 광대권 따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 진-노 관계는 험악했다.


 뭐 어차피 노정태도 현재 자유주의자이고, 노빠들과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만 빼면 진중권과 별 이념적 거리도 없다. LTFG를 논하며 지적하였듯, 페미니즘에 있어 완고하며 진영논리에 매몰된 모습을 보였다는 것 역시 현실정치에 있어서의 진중권과 비슷하다.


 그리고 시일이 지나 2015년 5월이 되었다. 진중권의 말마따나, 사람들은 진중권과 허지웅에게 트위터로 장동민 사건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물었다. 세상만사에 대해 한 마디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둘이 장동민 패거리와 JTBC의 '속사정쌀롱'에 같이 출연한 경력이 있었기에, 어떤 음험한 호기심이 작용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어쨌든 그 와중에


 진중권 vs 허지웅, 토론 배틀 '여자를 때리는 남자'


 의 방송내용이 돌았고, 이 방송에서 '머리 속의 꽃밭'을 인증한 허지웅이 가열차게 까이기 시작했다. 결국 허지웅은 정신승리를 외치고 트위터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진중권은 그 반대급부로 이 시대의 유일한 문명인 남성으로 - 방송을 보면 정말 유일하다 - 찬양받았다. 그러니까 당시까지만 해도 트위터의 페미니스트들이, 그리고 LTFG나 페페페나 심지어 노정태 역시 마찬가지로, 이 문제로 인해 진중권에게 별 적대감은 없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2일, 진중권이 장동민 사건에 대해 의견을 밝혔다. 진중권의 주장은, 앞서 희극론에서 논증했다시피, 일단 미학적으로 괴이한 것이다. 지적했듯 장동민의 발언에는 희극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것은 오히려 희극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진중권은 장동민의 발언을 희극성의 의도가 있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절대-광대권론으로 키워나간다. 그에 따르면, 장동민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여성에 대한 언어폭력이 되었을 뿐이며, 장동민은 그것에만 책임을 지면 된다.


 그래서 어떻게 책임을 지는가? 진중권은 장동민이 사과할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과의 적합성을 물을 수 없다. 불매운동은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불매운동으로 밥줄이 끊기는 것은 '과하다'. 여기서 진중권은 당시 불매운동의 목적이 장동민의 영구적 연예계 퇴출이 아니었음을 고의적으로 무시하였다. 즉 일시 퇴출 운동을 '밥줄을 끊는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옮기고, 그것을 다시 영구적 퇴출로 재정의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기다.


 진중권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장동민 건에 대해 어떤 유의미한 행동도 할 수 없다. 장동민에게 재차 사과를 요구할 수도 없고, 방송사에 장동민의 퇴출을 요구할 수도 없다. 그냥 화만 낼 수 있는데, 그것은 바깥에 어떤 피해도 줘서는 안 된다. 이것을 초과하는 행동을 진중권은 법정화 경향이라고 정의한다. 즉,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데 법정에서도 법관은 사건에 대해 사실판단을 하고 그에 따른 공권력의 행위를 판결로서 예정한다. 이것은 관념적으로 비슷해 보인다. 진중권은 무-이념의 편에서, 페미니즘이란 이념이 법정화이며, 곧 그들의 행동은 인민재판이고, 마치 어떤 스탈린주의적인 것들을 연상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이것은 관념적 유사성으로 현실의 동일성을 논하는, 그야말로 포스트모던한 주장이다. 진중권이 서로 비슷해 보이니 같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서로 명백히 다르다. 애초에 대중운동은 공권력을 소환할 권능이 없다. 정말 트위터의 페미니스트들이 법정화되어서, 장동민에 대한 어떤 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들은 JTBC의 명시적 의사에 반해 장동민 퇴출을 강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리력을 동원할 수도 있을 테고!


 물론 2015년의 여성혐오 대란을 다루는 이 글 묶음 (1)에서 언급한 LTFG 일부의 특정한 행동, 즉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서 특정한 입장 표명만을 강제하려는 행동 - 이를테면 노정태 작 '닥침력'의 요구 - 들은 법정화를 시도하는 행동이라고 부를 여지가 있다.


 그런데 LTFG의 저런 행동은 LTFG의 모든 행동이 아니다. 그리고 LTFG는 모든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페미니스트 역시 모든 여성이 아니다. 그런데 진중권은 장동민 사건 자체와는 무관한 LTFG의 잘못을 끌어와, 장동민의 행동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에 적용시키려 한다. 사람들이 진중권에게 가서 따진 것과 장동민이 저지른 비하발언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이 행태는 무도갤의 것과 아주 비슷하다. 즉 특정 집단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것이 다른 어떤 나쁜 것과 같다고 선전하며, 그 잘못이 집단의 다른 별개의 행동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관념하며,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을 모두 특정 집단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심각한 사기다.


 옛날 일을 갑자기 가져온다는 둥(1년도 안 되었다), 무도팬들이 문제라는 둥, 엉뚱한 것을 탓하는 것 역시 똑같다.


May 10

총리 같은 거 뽑을 때, '무도'에 출연시키면 인사청문회가 필요 없을 듯. 공영방송에서 따로 정치인 예능을 하나 만드는 게 어떨까? 그럼 검증 하나는 확실하게 이루어질 텐데....


 진중권에 따르면 장동민의 잘못은 단지 기득권을 공격함으로써 완전하게 교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득권이란 무엇인가? 진중권 자신이 그것은 이를테면 청문회, 즉 현실정치적인 것이라고 실토한다. 말했듯 그것만이 진중권에게 있어 '현실'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되면 노무현 정권 시절의 "환생경제(위키백과 설명)"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것 역시 의도상 희극이며, 노무현이라는 기성 정치권력을 공격하는 것이니 정당하고, 박근혜의 저 기쁨은 - 사람들은 박근혜가 저렇게 해맑게 웃는 표정을 다시 보지 못했다고 평가하는데 - 올바른 희극적 결과일 것이다. 일베는 어떤가? 일베야말로 노무현이라는, 자신보다 꽤 많이 권력자였던 위인을 희화화하는 자들이 아닌가? 뭐 '홍어택배'니 '세월호 어묵'이니 하며 세간에 충격을 안겼던 일베인들도, 경찰서에 끌려와서는 좀 웃겨 보려고 한 일이었다고 호소하지 않았는가?


 아니, 정녕 일베인들이야말로 진중권의 희극론에 적합한 광대들이다. 저들은 5.18 유족들과 세월호 유족들이 기득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까. 뭐 이런 믿음도 반여성주의의 그것처럼 집단-정신적으로 조작된 것이기는 한데, 진중권에 따르면, 바로 그것만 교정해도 일베인은 위대한 희극인이 될 것이다(하지만 이 포스트모던의 세계에서 관념의 잘못을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 일베가 이 문제에 있어 괜히 진중권을 찬양하는 게 아니다.


  May 2

사회 자체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 속에서 이미 다양한 편견들로 오염되어 있고, 우리는 그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살기 때문에, 제 아무리 조심해도 그 누구도 오염에서 100%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 그저 서로 조심하고 지적해주며 사는 수밖에.


 결국 진중권의 결론은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에는 그러니까 거미 혹은 그 비슷한 것밖에 없다. 밖에 나가 공기를 마셔도 결과는 같다. '공기'가 전부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범죄자이다. 따라서 재판은 물론이고 재판 비슷한 것들도 해서는 아니 되며, 단지 머리맡에 앉아, 조심스럽게 조언할 기회를 기다릴 뿐이겠다. 문학을 걷어내고 쉽게 말하면, '그러는 너희들은 얼마나 깨끗하냐?' 이것은 가장 반-희극적인 발언이다. 희극은 바로 저 오염을 다소 호들갑스럽게 겨냥하는 장르이니까.


 이상의 발언들로 진중권이 까였던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발언의 저질성만큼 까이지는 않았다. 광대권신수설은 미학적이지는 않았지만 미학자적인 외피가 있었다. 모두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불합리한 노스탤지어라는 평 이상을 내놓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들은 친구인 장동민을 편드느라 괴이한 주장이 나왔다는 식으로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논객'의 미덕은 아니었지만, 진중권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그런 것들과는 인연이 멀었다.


 진중권은 그리고 다른 극렬 반여성주의자들처럼 장동민이 아무 잘못도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잘못은 했으되 피해자들이 참아야 할 일이라고 말했을 뿐이지. 그리고 진중권은 꼭 저 허지웅과의 논변이 아니더라도, 그간 페미니스트들에게 평판이 아주 좋은 인물이었다.


 물론 진중권더러 여혐이라고 욕을 하는 사람은 나왔는데, 진중권이 이 떡밥을 물면서 사태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진중권과 LTFG와의 싸움이 붙었던 것이다. 여기서 진중권은 위의 저 사기법을 그대로 써먹어, 장동민을 비판하던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을 여혐으로 욕했다며 싸잡아 프레임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다른 페미니스트들의 제대로 된 비판 - 이를테면 Misun Yun의 - 에는 대답하지도 않고, 논쟁 상대방을 일부 LTFG로 한정하였다.


 진중권이 비난에 과민반응한 이유는 앞서 말했던 자신의 무-이념성에 따른 어떤 이념에 대한 불편함, 그리고 자신의 과거 제자에 대한 악감정, 이 둘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1세기에 이런 무협스러움이란.


 6월 2일 진중권은 승기를 잡았다. 실제 '너희들' 역시 안 깨끗하다는 명확한 증거가 나왔으니, 페페페가 저지른, 한윤형의 데이트폭력 사건에서의 2차 가해였다. 그들은 피해자의 사례를 여성주의의 땔감으로 부당하게 이용하려 했다. 이것은 지적했듯 용납할 수 없는 악행이며, 결국 페페페의 소멸을 낳았다. 그런데 이런 대단원을 낳은 것은 진중권 본인이 아니었다. 페페페는 이미 완전히 코너에 몰려 사과문을 고쳐 쓰던 상황이었으니까.


30 Aug 2013

루비가 다가가면 두세 배나 큰 길냥이들이 도망갑니다. 그럼 루비는 도망가는 길냥이들의 뒤를 쫓습니다. 추적본능. 실은 자기 뒤에 있는 나 때문에 도망가는 건데, 루비는 자기가 냥이계의 무적이라고 믿는 듯...


 그러니까 진중권은 폐허가 된 성에 올라가 깃발만 꽂은 셈이다. 페페페와 마찬가지로 써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땔감으로 써먹었다는 점에서 윤리적 우월성마저 보여 주지 못했다. 2차가해 사건에서 진중권이 도출한 결론은 대략 이렇다 - 역시 사과는 어려우니 대충 해도 된다. 페미니스트들도 성차별적 행각을 벌였으니 성차별도 그렇게 비난받을 것은 아니지 않느냐.


 곧 진중권에게 나쁜 것은 2차가해가 아니라 이념이었다. 심지어 여기서 '해일'이란 정권교체 따위조차 아니었다. 연예인을 까는 와중에 박근혜를 까는 동력이 낭비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우려였다! 아니면 단순한 친구 편들기이든가. 페페페 구성원 둘이 비록 엎드려 절받기였을지라도 피해자에게 결국 그럴듯한 사과문을 내놓고 트위터를 접었을 때, 진중권은 틀림없이 실망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어쨌든 진중권의 승리라고 평가하였다. 여기서 그만두었으면 그나마 좀 그럴듯했을 텐데, 그이는 여전히 페미니스트들과 싸우며 키워로서의 승리를 갉아먹는 중이다.


 하기야 진중권이 갉아먹는 것은 바로 직전의 과거만은 아니다. 진중권이 명성을 얻고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지금의 것들과 전혀 다른 말과 행동들이었다. 이것은 어떤 축적된 자본과 유사하다. 진중권은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자신에게 빚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어떤 결정적 유사성도 발견하지 못한다.


 테세우스의 배는 항해를 마쳤다. 그 항해를 기억하라, 아테나이인들이여, 그대들의 영원한 왕을 찬양할지어다!




 페이스북의 '상남자'

 6월, '광대'를 자처하는 아마추어 만화가가 등장했다. 그이는 페이스북에서 일명 '상남자 만화'를 게시했는데, 이 만화들의 주된 플롯은 이렇다.


1. 여자가 남자에게 A라는 행동을 권유한다. (자기야! 우리 벚꽃 보러 가자! / 오빠, 오늘 점심은 뭐 먹을 거야?)

2. 남자가 여자를 폭행한다.

3. 남자가 여자에게 A와 관련된 행동을 한다. (거울을 봐! 니가 꽃이아 / (모텔에 들어가며)오늘의 점심은 너다!)


 이이가 이런 류의 만화를 처음 올린 것은 4월 20일이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는 모양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만화를 계속 올리며, 그이는 전에 누려 보지 못했던 인기만큼이나 거센 비판에 직면하였다. 여기서 작자가 내놓은 변명이라는 것이 바로 '나는 광대다', 즉 일베인들의 '웃기려고 그랬다'에 진중권의 미학론을 끼얹은 것이겠다.


 어째서 저런 자를 광대로 부를 수 없는지는 앞서에서 논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여기서 별도로 논할 것은 저런 만화에 '좋아요'를 누르는 인간들에 대한 것이다. 만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ize기사, ‘상남자’와 ‘김치녀’에 ‘좋아요’를 누르면을 참고하라.


 위 기사에 따르면, 폭력 후 애정을 보이는 만화 속 남자의 행동은 남성뿐만이 아니라 허다한 여성들, 그러니까 조선의 마르파 뻬뜨로브나[각주:1]들에게도 '좋아요'를 얻는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판단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만일 그런 주변인들이 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서 신속히 도망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적으로는 도주가 합리적인 행동이겠지만,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간다면, 저런 자들의 수가 많다는 것은 해결해야만 할 문제로 성격이 바뀐다. 어째서 사람들은 폭력 속의 애정에, 실제 있는지도 없는지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런 애정에 매달리려 하는가? 가령 '속사정쌀롱'의 허지웅처럼.


 생각해 보면 숱한 한국인들의 유사-아버지인 박정희도 정확히 '상남자 만화'적인 위인이었다. 가령 조갑제 선생의 유고 - 인간 박정희의 변모(1) 를 보자. 박정희는 그 시절치고는 정말 놀랍게도 부하를 때리지 않고 욕도 하지 않는 신사적인 군인이었지만, 마누라는 열심히 팼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육영수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잠든 부인의 얼굴을 보며 시를 짓는 등의 기행을 벌였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유고를 쓸 당시 반정부 언론인이었던 선생께서는 이제 극렬 박정희빠이다. 하긴 저 글에서도 미묘한 공감 같은 게 느껴지지만.


 어쩌면 이것은 그야말로 '아이다움'의 징표라고 하겠다. 아이는 자신을 때리는 아버지가 어쨌든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조선생이 나이가 들어서 갑자기 국가와 국부를 찾기 시작한 것처럼, 이것은 연령과는 무관하다. '상남자 만화'에 자발적으로 '좋아요'를 찍는 여성은, 그만큼 아이-되기를 자처하고 있다는 이야기겠다. 뭐 아이라는 표현은 사실 정신적인 측면에 한정하여 사태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사실은 노예-되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겠지만.


 남성들 사이에서도 이런 '폭력적이지만 속내는 다정한' 인물들에 대한 애호가 조선생에게서 보듯 널리 퍼져 있다. 21세기의 인터넷 세계에서만 한정하자면 주요한 세 가지 사례를 들 수 있다. 일단 '싱하횽'과 '용개'에 대해서.


 이 '싱하'라는 위인은 인터넷 언어의 막장사에 한 획을 그은 악플러이다. 그이는 딴지독투 침공 이후 막말이 막 차오르던 디시에 혜성처럼 등장하였다(싱하가 원래 독투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음).



 뭐 대체로 이런 위인이었다. 자신을 형이라고 지칭하며, 다른 '애새퀴' 유저들에게, 맞기 싫으면 컴퓨터를 당장 끄든가 10초 안에 한강 굴다리 밑으로 튀어오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물론 당시의 싱하는 미친놈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후 이런 막말이 디시에서 표준 문체로 정립되면서, 싱하에게는 일종의 아우라가 생겼다. 인터넷에서 ~횽이라고 부르는 일견 올드해 보이는 문화는 이 악플러의 영향이다.


 이런 문화에서 싱하는 졸라짱쎈 형이라는 이미지로 재탄생했다. 처음에는 물론 누구나 다 아는 컨셉트 놀이에 가까웠지만, 장동민 건에서 보듯, 이런 컨셉트들은 매력이 있기에 발생하는 것이며 많은 경우 현실을 대체해 버릴 만한 힘이 있다. 여기에 미묘한 친근감을 부여한 게 '늦은 시간이니 컴퓨터를 끄라'는 싱하의 폭력적 조언이었다. '말은 폭력적이지만, 속으로는 동생들을 생각해 준다'는 속성이 붙은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용개'를 보자. 용개란 다중접속 역할 수행 게임(MMORPG. 다수의 플레이어가 인터넷을 통해 모두 같은 가상 공간에서 각자의 가상적 역할을 수행하며 플레이하는 게임이다.)을 하던 유저의 게임 내 이름이다. 대표적으로 했던 게임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여기서 용개의 가상-역할이란 악당이었다. 그이는 친구들과 게임상에서 허용되는 최악의 나쁜 짓들을 하고 다녔는데, 막말과 욕설은 물론 게임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어쨌든 했다.


 뭐 당시 용개와 친구들에 대한 이미지는 습관적으로 도둑질하고 수틀리면 욕을 해대는 미친놈들 정도였다. 단 용개는 기행이라도 아주 독창적인 기행들[각주:2]을 선보였으며, 그런 점에서는 인정받았다. 그리고 2007년, 문제의 사건이 일어난다.


 어떤 낚시꾼 유저가 용개의 친구에게 용개네 길드(게임 내 커뮤니티)에 가입하고 싶다고 수작을 걸었다. 친구는 게임상의 화폐 4000골드를 요구했는데, 당시 실가로 5만원을 넘는 돈이었다. 낚시꾼은 딜을 수락하였고, 골드 대신 쓰레기에 가까운 아이템을 전달했다. 친구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 다른 유저들이 용개에게 몰려가 집단적 항의를 표했고, 용개 역시 욕설로 그들을 맞이했다. "더러운 트롤 새끼들"


 나중에 디시의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갤러리에 후기가 올라왔는데, 작성자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용개가 다른 유저들과 함께 찍은 스크린샷 아래 이런 문구가 있었다 - '욕하면서도 결국은 (유저들과 기념촬영을) 해주는 츤데레 용개짱'. 이것으로 용개는 싱하형과 비슷한 캐릭터로 정립되었다. 즉 폭력성 안의 선량함이다. 물론 그 나중의 일들을 짚어보자면, 역시나 용개 본인은 그리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 상상된 내면의 선량함의 세번째 사례는 바로 장동민이다.




 페이스북의 유식대장


 디시인사이드의 운영자 김유식이 다른 비하발언은 전혀 제재하지 않으면서 '김치남'만을 금칙어로 지정했다는 이야기를 앞서 하였다. 페북도 이와 동일한 행태를 보였는데, 위 상남자를 논한 ize의 기사가 이 역시 같이 지적하고 있다.


 페북은 여성에 대한 혐오발언을 게시하는 일명 '김치녀' 커뮤니티 페이지에 대한 제재를 거부하였다. 페이스북이 내놓은 것은 "커뮤니티 표준을 위반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라는 무성의한 답변뿐이었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였을까? 그런데 반대의 경우는 전혀 대처가 달랐다.


 디시가 메르스 갤러리의 글을 무더기로 삭제한 이후, 페이스북에 기존 메르스 갤러리 글의 저장 목적으로 '메갈리아'라는 페이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페이스북 관리자는 이 페이지는 삭제하였다. 말했듯 메르스 갤러리의 글들은 기존의 여성비하발언의 한계를 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제재인가? 페이스북은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않았고, 이에 페이스북의 한국 관리자는 성차별적인 위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현재 메갈리아 4(1,2,3은 삭제됨) - https://www.facebook.com/mersgall4 - 가 운영중이다. 단, 현재는 여성혐오에 대한 혐오발언의 기록을 목적으로 하는 페이지가 아니다.




 디오도토스적 변론


 뮈틸레네 논쟁 - https://en.wikipedia.org/wiki/Mytilenian_Debate - 에서 디오도토스는 윤리에 호소하기보다는 이익에 호소하는 데 집중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윤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면 그이의 편을 이미 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역시 마지막으로 이익에 호소하려 한다. 반여성주의적 행동과 그것들을 정당화하려는 주장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잘못되었으며, 이미 앞에서 충분히 증명하였다고 여기니까.


 현재의 한국이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에게는 각기 다른 목록과, 그에 대한 분석과, 나름의 해법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의 두 가지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 바로 저출산과 노동생산성의 문제이다.


 박근혜의 선거 당시 경제정책, 소위 경제민주화는 집권하자마자 침몰하였다. 나는 뭐 애초부터 박근혜(더 정확히 말하면 박근혜 주변의 인사들)가 여기에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의욕이 전혀 없던 것만큼이나 나쁘다.


 박근혜 정부는 저출산 문제마저 포기한 듯하다. 그나마 열심히 추진하는 듯 보였던 보육지원 사업마저 완전히 도로아미타불이다. 아니나다를까 출산율은 조금 오르는 듯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간다면 아마 쭉 마찬가지일 것이다.


 낮은 출산률은 인류 멸망을, 또는 '헬조선'의 종말을 바라는 분들에게는 뿌듯한 일이겠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좋지 않다. 첫째, 국가경제가 축소된다. 둘째. 노년층의 복지부담을 지탱할 수가 없다. 셋째, 궁극적으로 한민족이 소멸한다.


 첫번째 문제가 아마 가장 심각한 것일 테다. 인구가 줄면 총생산이 줄고, 기업들의 투자와 고용도 그에 맞추어 줄어든다. 한국 경제는 저성장 상태이고, 단지 낮은 성장만으로도 다들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인구가 감소하면 그런 정도마저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특히 몇몇 업종, 즉 영-유아와 청소년들을 타겟으로 하는 업종 - 대표적으로 학원업 - 의 전망은 이미 망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두번째 문제는 특히 국민연금이 잘 보여 주고 있다. 아마 극히 일부가 될 수혜자들이 연금재정을 소모시키고 나면, 이 저출산의 상황에서, 기금은 신속히 고갈될 것이며 채워넣을 재원도 없다. 그러니 우리들 대부분에게 노후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아니, 평생 노예처럼 일하게 될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의 노후(奴後)란 있을 수 있겠지. 죽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세번째 문제는 다소 심리적이다. 저출산이 이대로 간다면, 한 300년쯤 지나 누구도 한국어를 쓰지 않고, 누구도 우리를 계승하고 있지 않으며, 인류 역사에서 한국인들이란 IS가 폭탄을 설치하고 있는 아시리아의 사자상 정도에 지나지 않을 테다. 이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분들은 많지 않으리라.


 노동생산성은 어떠한가?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낮기로 유명한데, 이는 직장에서 상명하복을 강제하고 쓸데없는 야근과 단체활동을 요구하는 한국적 문화 탓이 크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보상은, 애초에 쥐꼬리만한 보상이지만 하여튼, 술자리에서 쌓는 인맥과 정치질에 크게 좌우된다. 이것은 약자와 소수자를 배제한 카르텔로 기능하여, 개인이 업무에 대한 전문성을 쌓지 못하게 방해한다.


 여성주의는 이런 문제들을 타개할 방법론으로서 반드시 수용되어야 한다.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실사회주의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더 이상 가부장제의 틀 속에서 여성에게 출산과 육아를 강제할 수 없다. 레바의 집값 5:5드립이 함의하는 것처럼, 소득을 올리는 노동자의 역할이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되니까. 노동자로서의 여성을 육아를 빌미로 차별한다면, 그이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반여성주의는 대한민국을 멸망시키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여자들을 윽박지르면, 그럼으로써 여성을 차별하는 구조를 온존시킨다면, 결국에는 그 마초들에게도 나쁜 결과 - 저출산으로 인한 국가경제의 몰락 - 가 찾아올 것이다. 출산율을 올리려면 제도적 차원에서 여성이 갖는 짐이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하고, 그 목표는 국가가 제도를 관리하고 감독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이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한국이 과연 민주적이라면[각주:3], 그것은 오직 시민들의 여성주의적 노력과 행동으로만 성취할 수 있다.


 노동생산성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적 남성성을 전제하는 직장의 괴습들은 남성을 가정에서 유리시키고 여성을 직장에서 배제시킨다. 이 문제는 기존 문화의 반성과 재구축으로만 개선가능하다. 진중권의 주장대로 '서로 조심'한다고 오염된 공기가 정화되겠는가? 즉 여성주의 없이는 칼퇴도, 육아휴직도, 죄책감 없이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도, 어머니가 되는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설령 사람이 저 아메리카의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신봉한다 할지라도, 시장의 배분을 올바르게 기능하게 하는 주요한 동인은 여성주의이리라.


 그러니 유시민이여, 진중권이여, 이것이 '해일'이다! 해일이 밀려오는데 언제까지 노빠들이나 줍고 있으려는가? 물론 나는 사회주의자로서 더 거대한 해일을 상상하고 있지만, 그것은 노동당의 강령에서 보듯, 반드시 그 이념 안으로 여성주의를 수용해야만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겠다.




 이상으로 2015년 상반기의 여성주의적 논란들을 정리하였다. 7월의 뮤즈 논란이나 가정 내 성추행의 문제, 일명 '산부인과 래퍼' 따위는 반년 후에 말할 기회가 돌아오겠지. 이 앞으로 벌어질 소동은 지금까지보다 모쪼록 발전한 모습이기를! 그리고 지난 논란이 더 나은 미래를 구축할 계기였기를.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1)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2)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3)







  1. 스비드가일로프의 아내. [본문으로]
  2. 특히 유튜브를 이용한 게임 플레이 동영상 편집-공유라는 분야. [본문으로]
  3. 뭐, 사실 그렇지는 않지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