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즘 이야기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3)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1)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2)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4)




오스만의 술탄 메메트 4세에게 답장하는 자포로제 카자크들, 일리야 레핀





스비드가일로프


 그래서 내가 우리는 같은 들판에 열린 딸기라는 겁니다!

- 죄와 벌, 4부 1장



 진중권의 주장은, 일단 현 시점에서, 숱한 반여성주의적 망동에 대한 먹물적 정당화 중 가장 교묘한 것이다. 이 점에서 진중권은 김태훈과 숱한 다른 장동민 쉴더들, 나무위키의 떨거지 등을 모두 능가한다.


 진중권은 5월 2일에 처음 트위터상에서 장동민 사건에 대해 발언하였고, 이후 6월 2일, 자신의 주장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Jul 2

이 사안을 보는 나의 세 가지 시각. (1) 광대의 철학. 연예인은 도덕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의 대변자다. 따라서 광대에게는 폭넓은 언행의 자유를 부여하자. 이런 생각으로 유승준, 신정환 등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을 옹호해 왔던 것이고.....


Jul 2

(2) 실천의 가상화. 진짜 중요한 것은 현실의 공직자 검증. 그게 잘 안 되니, 그 좌절된 정의의 감정을 '연예'와 같은 가상의 영역에서 대리실현하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저는 그것도 살짝 왜곡된 욕망이라고 봐요.


Jul 2

(3) 운동의 '법정화' 경향. 아마도 이게 저를 제일 불편하게 했을 겁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 찾아가서 '입장 밝혀라, 입장 안 밝히면 동조자다.' 몰아부치고, 입장 밝히면 거기서 꼬치꼬치 말꼬리 잡아 온갖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이 사이 3, 법정화 경향에 대한 자세한 설명)

Jul 2

자, 이런 이유에서 옹달샘의 발언은 비난 받을 만하고, 대중들의 불매운동은 정당하다. 다만, 1년 전에 사과하고 끝낸 일 다시 끄집어내어 아예 밥줄까지 끊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과도하다. 저는 이렇게 얘기했고, 그 죄로 여혐러가 된 겁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진중권의 이러한 주장은 5월부터 즉시 비판받았다. 이에 진중권이 대응하였고, 현재까지도 싸움이 이어지는 중이다.

 우선 진중권의 희극론을 보자.




#1 광대의 철학?


 진중권 본인이 스테디셀러인 "미학 오디세이"에서 희극을 다룬 바가 있다. 여기서 진중권은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인용하는데, 목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대한 설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이론은 현재 실전되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으며, 내용을 미약하게 추정할 수 있는 몇몇 언급들만 남아 있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희극의 핵심을 관통한다.


 미학 오디세이의 단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은데, "먼저 희극이 '코마이'에서 비롯되었다거나, 또는 평균 이하의 인간 행위를 모방한다는 얘기는 이미 <비극론>에 나온다. 희극의 주인공이 '사악하지 않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희극이 웃음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행한다는 건 비극의 효과인 '공포와 연민'의 반대를 취하면 저절로 나온다. 또 '실상은 이러한 것인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는 희극에서 '재인식'이 일어나는 형태로, 비극에서 이루어지는 운명의 재인식과 대칭을 이룬다."


 희극이 추구하는 것은 웃음이다. 하지만 모든 웃음이 희극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가령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짓는 웃음은, 치킨과 맥주 앞에서의 행복한 웃음은, 또는 업무상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놓는 의례적인 웃음은 전혀 희극적이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 희극의 웃음이란 어떤 웃음인가? 무엇이 그런 웃음을 가능하게 하는가? 블라지미르 쁘로프가 이런 문제들을 "희극성과 웃음[각주:1]"에서 상세히 정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대로 희극은 1. 인민의 삶(코마이:시골 마을[각주:2])에 기반한 것이며, 2. 인간적 결점에 주목하며, 3. 윤리적으로 사소한 결점들을 다룬다. 물론 희극 안에는 살인 같은 사소하지 않은 죄악들이 등장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죄악들 자체는 희극적이지 않다. 가령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단락을 보자.


 위 2분이 안 되는 장면에서 희극적인 요소들이 여럿 등장한다.


 1. 송강호가 막대기로 발자국 주변에 동그라미를 치는 장면.

 2. 엉터리인 사건현장 보존.

 3. 논두렁에서 변희봉이 넘어지는 장면.

 4. 살인 현장에 몰려든 마을 주민들.

 5. 마냥 신난 아이들.

 6. 감식반이 오지 않음.

 7. 팬티를 머리에 쓴 희생자.

 8. 어이 경운기!

 9. 어리버리한 부하 경찰.

 10. 또 논두렁에서 넘어진다. 논두렁에 꿀발라놨나!


 살인사건 현장이지만 굉장히 희극적이다. 우리는 21세기를 살며, 영화의 무대인 80년대를 보며, 당시의 특정한 열등함을 쉽게 알아차린다. 이 세계에는 합리성이 부족하며, 이는 코마이 그 자체인 배경에서 더없이 잘 드러난다. 이 결함은 사람들에게, 심지어 경찰들에게까지 모두 부여되어 있다. 따라서 범인의 검거라는 당위는 실현되기 당연히 어렵다. 위 1, 2, 4, 6, 9는 모두 그런 부적절성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3, 5, 8, 10 역시 간접적으로 이 세계가 갖는 어리석음을 암시한다.


 가령 경운기 운전자는 남의 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완고함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여겨지지는 않는 악덕이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고집에 자부심마저 느낀다. 하지만 이는 악덕임이 명백한데, 그렇지 않다면 증거의 인멸로 귀결되지 않았으리라.


 경운기는 그럼에도 분명히 웃기다. 그런데 희생자는 우스운가? 가령 팬티를 얼굴에 쓰는 행위는 온갖 희극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소재이다. 얼굴은 사람들이 가장 드러내는 부위이고, 팬티는 정반대의 부위를 가리는 물건이니까. 하지만 웃겨야 할 지점인데도 사람들은,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7의 대목에서 똑같이 웃기를 꺼려한다. 그것은 범죄로 죽은 육신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사소하지 않다.


 따라서, 쁘로쁘의 말에 따르면, 희극이 다루는 것은 '매우 심한 혐오감이나 극도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범죄성과 비도덕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소한 성격의 단점들[각주:3]'이다. 위 영화 장면에서 희극성을 부여하는 사태들은 모두 저런 공통성을 갖는다. 주민의 무신경함. 경찰의 어리바리함. 경운기의 완고함.


 그런데 저런 요소들은 예술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상태에서라도 반드시 희극성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능한 경찰들을 보며 짜증을 낸다. 여기서 다른 요건이 나오는데, 그것은 의외성이다. 송강호는 나무 막대를 처음부터 들고 있지 않다. 그이는 즉흥적으로 옆에서 막대를 집어들어 동그라미를 친다. 경운기도 갑자기 등장한다. 그리고 변희봉이 넘어지는 장면도 급작스럽다.


 변희봉이 넘어지는 대목을 자세히 보자. 극중 변희봉이 연기한 형사는 퇴직을 눈앞에 두었으며, 매우 무능하다. 위 장면에서는 이 무능의 직접적인 증거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형사는 논두렁에서 급작스레 넘어짐으로써[각주:4] 자신의 어떤 재주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는 업무상의 무능을 암시한다. 하기야 경찰이 되어서 운동신경이 없다는 것은 결점이다. 관객들은 뒤이어 넘어지는 위인 역시 실무에 무지한 샌님임을 쉽게 추측한다.


 "희극성과 웃음"은 이를 적절히 요약한다. "단점들은 숨겨져 있으며 폭로를 필요로 한다.[각주:5]"


 이 점으로 말미암아 희극의 첫번째 조건, 바로 삶에 기반해야 한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거된다. 희극이 주목하고자 하는 결점들은 우리의 삶에 숨겨져 있는 것들이다. 그것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인민의 삶을 성실하게 살펴야 한다. 위 영화에 담겨 있는 소재들은 모두 80년대 한국인의 삶을 구성하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희극의 의의란 어디에 있겠는가? 바로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과의 대면이다. 이는 우화 등의 여타한 풍자적 문학이, 그리고 다른 장르들도 궁극적인 목표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경계삼음으로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요한 참고로 삼는 쁘로쁘의 책을 인용하면, "풍자는 이러한 결점들을 무관심하거나 관대하게 대하는, 혹은 이러한 결점들을 모른 척하고 싶어하거나, 어쩌면 이런 결함들이 존재하는지를 정말로 모르는 이들의 의지에 작용한다.[각주:6]"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핵심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았다. 그런데 진중권이 5월 2일 이후로 설파한 희극론은 이와 차이가 있다. 물론 트위터는 240자의 단문의 형식이고, 교정이 불가능한 특성상, 어떤 이론을 정치하게 정리할 만한 포맷은 아니다. 진중권의 주장에서도 이런 형식상의 어려움들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진중권은 장동민이 광대라고 정의한다. 광대는 전근대 사회(에서부터)의 직업적 예능인인데, 이들은 때로 묘기로 청중들에게 경탄을 안겼겠지만, 주된 역할을 따지자면 역시 남을 웃기는 것이었다. 그들이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이 희극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진중권은 여기서 광대란 말이 함의하는 몇 가지 측면을 애매하게 지칭하는데, 즉 1. 전근대 사회에서 남을 골탕먹이고 조롱하던 특정한 광대의 역할. 2. 희극인. 그리고 3. 연예인 일반이다.


 1의 광대는 대체로 유럽에서 양식화되고 또 이론화되었지만, 한국인들도 영화 "왕의 남자"나 봉산탈춤 등으로 이런 형식에 익숙하며, 이런 광대들 간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여겨진다. 이들의 행위는 말했듯 희극적인 것의 일부이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위에서 말한 '매우 심한 혐오감이나 극도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범죄성과 비도덕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소한 성격의 단점들'이 소재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중세나 르네상스기의 광대들의 행동을 보면,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다소 부적절하다고 여겨질 만한 행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광대들은 자신들의 적에게 치명적인 파멸을 안긴다. 마치 신데렐라의 계모들과 누이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것처럼. 이런 광대극과 비슷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여우 이야기 - 특히 프랑스의 것이 유명하다 - 역시 장난으로 여기기에는 과하다.


 쁘로쁘는 이런 폭력성이 현대인들에게는 적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가령 "왕의 남자"의 광대들만 보더라도 이런 잔혹성이 없다. 그럼에도 쁘로쁘는 과거의 잔혹한 광대 이야기들이 나름의 법칙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그 법칙이란 두 가지다. 첫째는 그것이 청중에게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는 희생자들이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민중의 입장에서 그들에게는 동정의 여지가 없었으리라는 점이다.


 진중권은 이런, 광대가 광대라고 불릴 수 있는 조건들을 실종시켰다.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희극에서 도덕성은 오히려 굉장히 중요하다. 광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대로 '사악하지 않아'야 하고, 그이는 결점을 은폐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 결점을 드러내 보이는 자이다. 그 결점은 사소해야 한다. 관객 입장에서 이렇게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 "정확히 말하자면 웃고 있는 이가 도덕적 요구라는 관점이나 그저 건전한 한 인간의 천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당연하고 옳은 것으로 이해되는 완전히 무의식적인 어떤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데 이 조건이 있는 것이다.[각주:7]"


 희극의 신은 광대에게 무소불위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희극에는 틀림없는 내적 한계가 있고, 그 원칙에서 일탈할 경우 광대는 더 이상 광대가 아니게 된다. 그러나 진중권은 광대의 표현들 자체에는 한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중권은 광대에게 윤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광대는 도덕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아래 장면의 행동들은 희극적인가?


 "주위에서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웃어대고 있었다.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허약한 암말이 그 무게를 싣고 전속력으로 달린다는데! 수레에서는 두 청년이 미꼴까를 도우려고 재빨리 채찍을 들었다. 소리가 울렸다. "자, 가자!" 여윈 말은 온 힘을 다해 수레를 끌어당겼지만, 빨리 달리기는커녕,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다리만 허우적거리며, 세사람의 채찍에서 콩 떨어지듯 인정사정없이 떨어지는 매 때문에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웅크렸다.[각주:8]"


 진중권의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의 저런 채찍질 역시 희극에 포함되리라. 이로써 광대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이가 광대라는 점만으로도 무제한의 희극성을 얻는다. 이것은 현대에 나타난 일종의 광대권신수설이다. 마치 왕권신수론자들이 왕권에 내적 한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광대권은 심지어 누가 봐도 광대적이지 않을 영역까지 뻗쳐나가는데, 바로 유승준과 신정환을 언급하는 지점이다. 유승준의 죄상은 국방부와 대한민국인들(특히 군대가는 남성들)을 기만한 것이고, 신정환도 기만이라는 점에서는 뭐 비슷하며 도박죄의 전과가 있다. 이런 결점들은 뭐 사소한 것들로 보아야 할 테고(물론 유승준의 죄악을 사소하게 보지 않을 분들이 많으리라는 건 인정한다), 그들의 연예인적 직분과는 무관하다. 바로 그렇기에 그들이 연예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부당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진중권은 이런 문제들마저 광대권에 의한 자유의 영역인 것마냥 주장하고 있다.


 물론 왕권신수론자들처럼, 광대권신수론자인 진중권은 광대의 행위에 외적 한계까지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May 2

이 문제는.... 사회가 광대에게 표현의 자유를 주고, 광대는 사회에 대해 철학을 가지는 방식으로 해결돼야겠죠.


 진중권의 이 철학이란 다음과 같은 것인데,


May 2

그리고 또 하나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두로프라는 광대는 황제 빌헬름 2세를 풍자한 죄로 잡혀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릿광대의 왕이다. 하지만 결코 왕의 어릿광대는 아니다. 우리는 지고한 대중의 어릿광대다.'"


 즉 기득권에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이것이 조건임을, 즉 일부 광대들의 폭력적 행위를 정당화할 두 조건 중 하나라는 것을 관찰했다. 광대가 기득권을 공격하고, 폭력이 현실의 것이 아니어야, 아무래도 현대적이지 못한 희극성이나마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진중권에게는 조건과 결과와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 광대의 행동은 무조건적으로 희극적이며, 대중은 광대가 기득권에 저항하기만을 막연히 바랄 뿐이다.


 이것을 패러디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될 것이다 - 국민은 박근혜에게 국정의 자유를 주고, 박근혜는 국민에 대해 철학을 가지는 방식으로 해결돼야겠죠.


 진중권은 이러한 논리로 장동민을 변호하고 있다. 장동민 패거리의 발언을 요약해 보자 - 그들은 주장하니, 여성은 자신이 과거 성적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암시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요구한다. 그들은 여성의 성적 자유를 용납하지 못하지만 간신히 인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인내심마저 깨뜨릴 경우, 그네들은 여성을 맞다 개 같은 년, 개보년, 창녀, 혀를 뽑아야 한다, 등등으로 공격할 것이다.


 이것이 어느 의미에서 희극적인가? 대체 희극의 어떤 일반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가? 애초에 저것들이 웃기기라도 한가? 그러나 진중권은 여기서 독특한 재미를 느낀 듯한데, 다음의 막가는 패러디가 그것을 추측하게 한다.


Jun 30

"맞다, 개죽음!" 보수우익들이 일제히 일어나 연평해전의 전사가 개죽음이었다고 외치는 엽기적 풍경.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보다 여당의원을 수호하는 게 더 중요한가 봅니다.


 장동민의 발언은 일단, 여성이 본질적으로 이등인간이어야만 어떤 유머로서 성립할 수 있다. 즉, 원래 여성에게 성적 자유란 없으며 그것이 현실에서 부당하게 허용되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장동민의 발언이 어떤 결점 - 즉 주어져서는 안 되는 자유를 얻으려는 여성들의 헛된 망동 - 을 지적하는 것이 될 터이다.


 장동민의 말대로 여성이 정말 '멍청'하고 딱히 그 이유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간에 남자에 비해 열등한 존재이며 권리의 제한을 받아야 마땅하다 한들, 장동민 일당의 사악성은 면제될 수가 없다. 그들은 기득권을 공격하는 대신 약자를 공격하였고, 비현실의 사태를 상정하는 대신 현실의 여성을 매도하였다. 이 현실성은 일부 장동민빠들이 장동민을 옹호하겠답시고 늘어놓은 주장에서 오히려 더 잘 드러난다. 바로 장동민의 막말이 여성 방청자에 대한 조언의 형식을 띄었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이지 말을 채찍으로 쳐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죄와 벌"에서 잘 드러나듯, 이것을 재미있어하는 위인들도 있는 법이다. 쁘로쁘는 이런 악의적 웃음을 희극성과 명백하게 구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용하면,


 "악의의 웃음을 웃을 때에 결점들은 때로는 사실이 아닌 공상적이고 지어낸 것들까지도 과장되고 부풀려져서는 악하고 선량하지 않은 감정들과 적의를 키운다. 그 어떤 고결한 충동들도 믿지 않고 모든 곳에서 오로지 거짓과 위선, 그리고 인간혐오만을 보며 훌륭한 행위의 외적 발현들 속에 훌륭한 내적 모티브들이 진정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개 이런 웃음을 웃는다. 그들은 이러한 의도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고결한 사람들이나 감성이 발달한 사람들은 비웃음만 사는 멍청이거나 감상에 빠진 이상주의자들이다. 앞서 살펴본 다른 모든 유형의 웃음들과는 달리 악의적 웃음은 희극성과는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와 같은 웃음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각주:9]"


 장동민에, 그리고 그이가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르는) 웃음에 대해, 이보다 더 적절한 설명은 없으리라.


 장동민의 행동은, 진중권의 광대권신수설과는 정반대로, 희극성이 결여되어 있다. 결국 그것은 희극이 주는 것과는 분리된, 아니,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공감을 얻지 못한다. 설령 동감하는 이들 몇이 있다 한들, 그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아보기는커녕, 타인의 결점을 파내는 데, 더 나아가 결점을 상상하는 데 매진할 것이다.


 이런 경향은 바로 IS로 떠난 소년의 것이며,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것이며, 과거의 숱한 반여성주의자들의 것이다. 그리고 장동민 역시 이와 마찬가지인데, 그것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있는 대 무갤제국인들과 식민사이트 주민들, 그리고 몇몇 오덕사이트 등의 동조자들이 벌인 행태들로 명확하게 증명된다. 그리고 진중권에게서도 이것을 찾을 수 있다.


 진중권의 희극론은 이론상의 심각한 난점이 있었으며,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자 붕괴하였다. 심지어 자신이 전에 써놓은 것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테면 조선일보 주필이 그와 같은 주장을 한다고 했을 때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런 자들은 정파적 이익을 따라 헛소리를 늘어놓는 자들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진중권에게 그런 것을 기대했을 것인가?


 여기서 저 '실천의 가상화'를 둘러싼, 현실정치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문제로 진입하게 된다.




#2 실천의 가상화?


 진중권과 다른 몇몇 인물과 집단들과의 관계에 대해 서술해 볼 필요가 있겠다. 먼저 이야기할 정치사는 독자들에게 다소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겠으며, 귀찮으신 분들은 그냥 넘어가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믿는다.



 위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유시민이 영도하는 일부 노빠들은 구 통진당의 좌파민족주의자들과 영합해 놓고, 수가 틀리자마자 그들을 종북으로 몰아 파멸시켰다. 현재 그들은 정의당에 있는데, 정의당은 대략 일부 원조 노빠들과 일부 전향 노빠들과 일부 사민주의 운동가로 구성된 정당이다.


 논객으로서의 진중권 개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프레시안 기고 - 두 번째 '박통' 맞은 진중권, 파란만장 '스타트렉'! - 가, 물론 2013년 당시의 시점에서, 가장 충실한 것이겠다.


 원래 진중권은 운동권이었으며 PD계열로 분류되었다. PD계열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다수가 사민주의자로 전향했는데, 이는 진중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여느 사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진중권은 민주노동당 분당 때 분당파에 속했으며, 신생 진보신당에 참여하였다.


 진보신당 인사 중에서 (당직을 맡고 있지 않았음에도) 진중권은 가장 유명인이었다. 진중권은 90년대 말부터 안티조선 운동 등 반보수 활동을 하였으며, 그 시작부터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그이는 '논객' 이상의 대중성을 얻었으니, 바로 황우석과 심형래를 교주로 삼았던 저 국가주의의 광풍 속에서였다. 사람들은 안개 속에서 진중권이 밝힌 등불을 보았다. 광기가 가라앉자, 진중권은 시대의 양심이 되었다.


 2008년의 촛불집회는 진중권을 일약 스타로 발돋움시켰다. 이는 당시 좌파정당의 지리멸렬함과 명확히 대비되어서, 사람들은 진보신당을 진중권이 끌고 가는 책상들쯤으로 비유했다(강기갑 왈 민주노동당은 아마 세계에서 가방끈이 가장 긴 정당이었는데, 이에서 유추해 보면 진보신당은 인류역사상 가장 길었을 것이다). 진중권은 여기서 진보신당이 현실정치에 적합한 형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이는 당이 분열되기 이전에 이미 탈당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대략 이 시점에서 진중권은 자유주의자로 정치성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뭐 원인은 내가 진중권 본인이 아니며 그와 어떻게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도 아니기에,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세 가지 요인을 생각하는데, 하나는 저 지리멸렬한 좌파들에 대한 환멸이다.


 다른 하나는 극우들에 대한 원한이겠다. 김대중-노무현 때는 어떤 인텔리가 정부와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한들 그냥 욕만 먹는 수준 - 이것 역시 피해자의 정신건강상 굉장히 유해한 일이기는 한데 - 이었고 다른 별다른 해악을 입지 않았다. 물론 이는 먹물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실제 현장에서 뛰는 활동가들은 소위 진보정권도 마찬가지로 탄압하였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지식인 개인을 타겟으로 삼은 졸렬한 수작들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진중권은 이것의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포스트모던함이다. 나는 포스트모던은 실체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곧 그것은 증상인 데다가, 솔직히 말해 유행도 지났으니, 이런 포스트모던함들을 일일이 비판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한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몇 마디 지껄여 보아야겠다(김규항이 얼마 전 이 비슷하게 치사한 글을 썼다).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운동권들은 새로운 이론적 기반을 찾아야 했는데, 다수의 사회주의자들, 특히 PD에 속했던 사람들의 지적 도피처가 되어 준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 이론에 따르면, 누구도 타인의 삶에 대한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성과 합리는 오히려 나쁜 것이다. 그 강력한 일반성으로 말미암아 사상의 획일화를 가져오니까. 이것은 틀림없는 반문명적 이론이겠지만, 문명사회가 굴러가는 데 어떤 심각한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진중권은 틀림없이 탈-권위적인 인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과거 인터넷 게시판과 오늘날 트위터에서까지 이어지는 격의없는 언행에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획일성과 교조주의란 천성적으로 불편한 것인데, 그래서 운동권 시절에는 PD였을 것이고, 공산권 붕괴 이후에는 포스트모던에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대문자 A, 즉 이념으로 타인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대-명제는 그 무엇보다 그이에게 솔깃했으리라.


 초기 진중권이 내놓은 적-녹-흑의 '별자리 진보'론이 대체로 그러하다. 여기서는 동질적 사상을 갖는 집단 셋이 각각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은 교조성을 지양하고 진보라는 가치 안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다. 공자왈 군자는 화이부동이라. 이는 다분히 후기 비트겐슈타인적인 것인데, 물론 여기서도 어째서 진보인지, 어떻게 진보라는 가족 유사성을 따질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이를테면, 왜 사람은 진보적이어야 하는가? 사상의 정-부당성을 따질 수 없다면, 보수를 해도 괜찮은 것 아닌가? 또는, 언중은 유시민 휘하의 노빠들도 진보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그들도 진보로 되는 것인가?


 뭐 후기 비트겐슈타인이라고 해서 꼭 '포스트'한 것도 아니다. 포스트 사상가들을 즐겨 인용했음에도, 진중권의 가장 강력했던 무기는 그들이 적대하던 이성과 합리였다. 하긴 그런 것 없이 어떻게 글을 쓰겠나 싶지만. 이것이 '논리학의 교과서'라고까지 칭송받은 진중권의 논객생활 초기와 중기의 개성이다.


 이것으로 진중권은 황우석이나 심형래, 박정희와 조선일보의 국가주의에 대항하였다. 이는 또한 반-교조적인 것으로, 우리는 여기서 어떤 모순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논리대로라면, 진보를 자처하는, 실상은 중도우파인 민주당에 대한 입장이 말했듯 애매해진다. 하지만 진중권은 노빠들을 경계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좌파적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가령 극렬 노빠이자 희대의 음모론가인 김어준은 황우석과 심형래 사건 때 진중권과 상극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말했듯, 일명 진보정당들의 상황은 교조성의 지양과 상호협력이라는 진중권의 소망과는 정반대였다. 그들의 완고함은 끊임없는 이합집산을 낳았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진보정당의 세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더욱 심각하였다. 분배할 이익이랄 게 없으니 서로 타협할 이유가 없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논쟁이 개인들 대 개인들의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이것은 진중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고,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랬겠듯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현재 진보정치세력에 속해 있는 어느 누구도 서로 힘을 합해야 한다는 대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아니한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함께하지 않으려 든다. 내가 보았을 때 가장 큰 이유는 숱한 분당 과정에서 벌어진 감정의 골이다. 하긴 내가 진중권을 지금 비판하는 동기도 마찬가지인지도 또 모르겠다.


 진중권의 논리는 여기서 완전히 '포스트' 쪽으로 넘어가 버릴 조건을 갖추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바로 이념성 자체가 문제라고 결론내린 것이다. 사실을 따지자면, 좌파들도 다른 이들과 별다르지는 않아서, 이념을 내세우는 것은 말싸움의 현장에서나이고 실제 파당이 갈리는 것은 대부분 사적 관계에 기인한다. 운동권 시절 잘난 선배 하나가 민족주의자이면 후배들이 모두 민족주의자가 되는 것처럼. 뭐 이념의 경직성이 당파들 사이의 합의를 어렵게 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진중권은 무-이념의 완벽한 포스트모던의 세계로 날아갔다. 진리는 사라지고 취향만이 남았다. 이것을 현실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정당이 바로 정의당이다. 노동, 즉 노동계급을 증오하는 노빠가 노동운동가와 어떻게 한 정당에서 활동할 수 있는가?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실제로 서로 잘 지내는 것 같다.


 하나의 꿈, 하나의 팀, 경향신문 칼럼


 즉 이 당에는 강령이 없다. 나는 위 칼럼이 말하는 것처럼 천호선이 사람 좋다는 걸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그 평화가 논쟁 없는 평화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박정희 시대는 딱히 시위도 없고 평화롭지 않았는가? 며칠 전에 논란이 되었던 "동상이몽(아버지가 딸에게 성추행에 가까운 스킨십을 함)"의 가정도 딸이 분란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화목하지 않겠는가? 저 '하나의 꿈'과 박근혜가 선거운동 기간에 운운했던 '5천만의 꿈'은 숫자 외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희대의 개혁 사기꾼 유시민과, 과거 그 일당이 삼성에 아부하는 통에 의원직을 잃었던 노회찬과, 진중권 셋이 팟캐스트 방송을 한다. 심상정의 비서관이 버스에 낙서를 하다 적발되어 비서관직을 사퇴하였다 - 심상정, 비서 ‘경찰버스 음란낙서’ 사과…사표 수리. 그로 인해 낙서자의 신상이 알려졌는데, 이 자는 딴지일보 소속이었으며, 굉장히 오래 전부터 민주당원이었다. 그런데 낙서를 트위터에 올려 사방팔방 퍼뜨린 사람이 비서관 본인이었으며, 민주당원임을 과거 밝혔던 것도 본인이었다. 이것들은 그야말로 포스트모던의 세계에서나 나올 법한 코미디들이다.


 이런 사태들은 이념이 여전히 중요함을 웅변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이 없다면, 남은 것은 친구와 적뿐이요, 그렇다면 모든 정치-사회적 투쟁이며 논쟁이란 진영논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김어준화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꿈', 즉 노빠적 꿈이라고 하겠다.


 이로 인해 노빠적 꿈이 아닌 것은 단지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격하되는바, 가령 장동민의 여성비하발언에 대한 대응은 진중권에게 있어 가상의 영역으로 퇴각하고 만다. 그것은 과연 현실의 것이 아니었는가? 아니, 그럴 리가! 그것들은 단지 '더욱 현실적'인 것 앞에서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았을 뿐이다. 유시민이 바로 이런 노빠적 교조주의에 대해 적절한 명언을 남긴 바 있다 -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


 이제 디오게네스는 더 이상 등불을 들지 않는다. 여기서 그이의 글쓰기도 전환을 맞았다. 어떤 특정한 대의를 위해, 사태들에 대한 정당한 판단을 유보하여야 한다는 강력한 경향이 나타났다.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1)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2)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4)




  1. Bladimir Propp, 『희극성과 웃음』,. 나남, 2010. [본문으로]
  2. κώμη(코메:시골 마을. 복수 코마이) → κῶμος(코모스:술판) → κωμῳδία(코모디아:희극) [본문으로]
  3. 252페이지. [본문으로]
  4. 여담이지만 이 적절하기 짝이 없는 넘어짐은 원래 시나리오에 없었다고. [본문으로]
  5. 252페이지. [본문으로]
  6. 307페이지. [본문으로]
  7. 250페이지. [본문으로]
  8. 죄와 벌, 1부 5장 [본문으로]
  9. 233페이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