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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1)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2)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3)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4)




"만일 그곳에 거미들 혹은 그 비슷한 어떤 것밖에 없다면 어떨까요." 그는 문득 말했다.

'이 사람은 미쳤구나.' 라스꼴리니코프는 생각했다.

- 『죄와 벌』, 4부 1장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어요 - IS로 간 청소년


 정월, 일명 '김군'이라는 히키코모리 18세 소년이 IS로 떠났다. IS는 희대의 미치광이 집단으로 그간 악명이 높았고, 그것은, 그것이 미국이 저지른 숱한 악행의 결과물일지라도, 어쨌든 뭐 사실이긴 하다. 김군의 IS행은 한국인들에게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 정신나간 작자들에게 동감을 표했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IS의 광기는 한국과는 아주 다른 문화의 광기이어서였다.


 원래 다른 집단의 광기와 괴습들은 역겨운 것이다. 조선 말기 영성체와 제사가, 그 둘이 사실 동일한 것이나 다름없는 의례임에도, 상대 신도들에게 적의를 불러일으켰던 사실을 상기해보자. 마찬가지로 이슬람과 한국의 문화 사이에는 외형적 유사성이 거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김군과 IS 모집책과의 트위터 대화에서 연결고리를 찾아냈는데, 바로 반여성주의였다.


터키 실종 10대男… SNS로 IS 합류 방법 물었다


 김군은 이렇게 말했다 - "지금의 시대는 남자가 차별을 받는 시대다",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IS가 좋다". 이것은 피해의식이다. 그런데 김군이 단 한 번이라도 페미니스트를 만나 본 적이 있었을까? 그녀에게 어떤 피해를 받은 적이 있었을까? 이 피해의식은 직접적인 체험에 뿌리박은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어중이떠중이류의 정보의 총합이다. 이 특성 - 인터넷상에서의 검증되지 않은 정보의 집합 - 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대표하는 사이트가 있으니 바로 구 엔하위키다. 이 '위키', 즉 일종의 백과사전을 지향하는 사이트에서는 불특정다수의 유저들이 항목에 제각각 개입하여 문서를 만들어낸다. 이는 구전문학과 비슷하다고 하겠는데, 물론 구전문학처럼 신뢰성은 없다. 하지만 역시 구전문학처럼, 이런 것들을 사실로 믿는 위인들도 있는 법이다.


 김군은 인터넷으로 세상을 배웠다. 마치 일베에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학생처럼. 김군이 엔하위키를 열심히 봤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김군의 사유의 특성은 대체로 엔하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이는 타인의 주관성을 실제 세계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현실에서 남녀간 격차는 온존하며, 차별받는 것은 바로 여성이다. 하지만 김군의 주관성에서는 남자가 피해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피해자-남성인 자신을 탄압하는 악마들이다.


 아니나다를까 엔하위키 - 현재는 리그베다위키로 개편됨 - 의 성차별 항목은 오히려 남자 쪽이 받는 차별이 더 장황하고 자세하다.


 http://rigvedawiki.net/%EC%84%B1%EC%B0%A8%EB%B3%84


 이게 그 유명한 '역차별'론인데, 이것은 김군뿐만이 아닌 한국의 남자 청년-청소년들 상당수가 공유하는 상상으로서의 세계상이다.


 물론 청소년은 억압받는다. 누구에게? 체제에 의해. 그리고 청소년이 체제에 의해 유달리 억압받는 객체인 것도 사실이다. 체제는 청소년에게 사회에 걸맞는 성인이 될 준비과정을 거치라고 요구하며, 그들에게 별다른 선택의 자유나 권력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니까. 청소년들이 만약 그런 억압에 반하여 투쟁한다면, 대상은 당연히 야간자율학습이나 두발규제, 이성교제 금지, 사교육 등이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김군의 투쟁대상은 페미니스트들이었다.





IS보다 페미니즘이 나빠 - 김태훈


오마이뉴스 기사. 문제된 칼럼 전문이 실려 있다.


 2월 2일, 칼럼니스트 김태훈이 잡지 "그라치아"에,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위험해요' 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이 글은 위 김군의 IS행이 갖는 문제성을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다.


 김태훈의 주장은 요약하면 대체로 이렇다 - 남녀는 이미 충분히 평등하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들은 이기적이며 공평함에 대한 사유가 결여되어 있다. 이에 대한 반발은 남성의 생존투쟁의 결과물이며 정당하다. (하위계급인) 여성들과 남성들은 서로 싸우지 말고 불공정한 시스템을 타파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칼럼 서두는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남자가 피해를 받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바로 저 엔하위키의 역차별론이다. 즉, 이혼시 재산분할은 반반이다(그런데 왜 결혼자금은 반반이 아니냐); 성범죄를 저지르는 남자는 매장당한다(그런데 왜 남자만 갖고 그러냐? 여자들도 저지르는 거 아니냐?); 그리고 남자들은 군대에 가는데 가산점도 못받아 등등.


 역차별은 엔하위키 안에서나 진리로 통했지, 공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아니다. 황교안이 강연회에서 '부산 여자들은 드세서 맞는다' 라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것과 같다. 이 지점에서, 일부 남성들은 다시 '자신의 표현의 자유' 따위가 탄압받는 상상을 한다. 여기서 일베인들이나 뭐 그런 위인들이 공유하는, 묘한 지사적 자세가 나온다. 이것을 다음 사진이 잘 요약한다.



 하지만 동성애 혐오자들, 그리고 김태훈 같은 반여성주의자들이 비판받는 이유는 단지 주장이 사실과 달라서이다. 이것은 김태훈도 아주 '비겁'하게 인정하는 부분인데, 바로 칼럼 막바지에 '불평등을 조장하는 시스템' 운운하는 지점에서다. 그러니까 이 칼럼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모순된 주장이 병존한다. 1. 남녀는 평등하다. 2. 여자가 나쁘고 남자가 피해자다. 3. 남녀가 불평등하기는 하지만(곧 여자가 약자인 것은 인정하지만) 시스템이 문제야.


 여기서 우리는 김태훈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을 가져다 놓아야 한다. 가령 군가산점의 문제를 보자. 가산점이 인정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전역자들에게 온당한 보상이 되지 않는 동시에 무관한 제3자들에게 해를 끼쳐서이다. 따라서 군가산점 불인정은 이익이 아니라 공평함의 원리에 따른 결정이었으며, 군역에 대한 대안은 군가산점의 회복이 아닌 제도-군대라는 시스템의 개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김태훈의 망상적 세계관과는 정확히 반대이다.


 그렇다 - 시스템을 공격할 생각은 않고, 공평함 따위 역시 생각하지 않고, 단지 특정 젠더로서의 상상된 정체감과 또 그에 따른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는 사실 김태훈이었다.


 김태훈은 칼럼에서 구조적-제도적 개혁이라는 당위를 말하고 있으며, 이는 분명 타당한 것이다. 하지만 개선해야 할 것은 정작 자기 자신이었다. 이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김태훈은 정신과적인 사태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순된 망상들을 끌어와, 실제 현실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김태훈의 칼럼은 IS로 떠난 김군의 '사상', 또는 정체성의 먹물적 구현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즉 일종의 분신으로서, 김태훈이란 위인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거나 어쨌거나 이 칼럼은 개인적으로 매우 기분이 나쁜 것이었다. 이 정신분열적 칼럼으로 인해, 그간 구조개혁을 부르짖어 온 좌파들만 괜히 도매금으로 까였지 뭔가!




우리는 페미니스트들입니다 - 해쉬태그[각주:1] 페미니즘 운동


 김태훈의 칼럼은 김태훈 본인에게는 다소 불행한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라든가 뭐 그런 자리 몇 곳을 잃은 것이다. 한편 저 얼토당토않은 망발에 사람들은 분노하였는데, 이에 트위터에서의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라고 선언하기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UN성평등캠페인 홍보대사 엠마 왓슨이 2014년 10월에 하였던 '페미니스트 선언'에 다분히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엠마 왓슨의 말에 따르면, 페미니스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 "평등을 지지한다면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다. 미안하지만, 페미니스트 맞아요.[각주:2]"


 페미니즘은 이 엠마 왓슨의 발언이나, 그에 대해 소박하게 평한 조선일보 기고에서 보듯, 단순한 기초에서 출발한다. 바로 평등의 신념이다.


 반면 네이버 백과사전(두산백과)의 기술은 이와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여성억압의 원인과 상태를 기술하고 여성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운동 또는 그 이론."


 나는 이 두 가지 정의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신념은 그것이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만약 우리가 서로 정치적-사회적 권리에 있어 평등하며, 우리의 수고 없이도 그 상태가 자체로 지속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굳이 평등을 지지할 이유가 없다. 어떤 신념의 구현을 위해서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개인의 단순한 개심이나 도덕적 자기반성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떤 한 개인으로서의 출발점은 그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개인을 전환으로 인도하거나 또는 추동할, 그리고 특정한 경우에 있어서는 개인의 개심을 관철시킬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당이건 시민단체건 노동조합이건, 아니면 '느슨한 연대체'이건, 집단적인 활동이 필수적이다.


 적지 않은 경우 개인은 귀차니스트의 기질을 갖고 있다(나 역시 그러하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려는 강력한 경향성이 있으며, 이런 편견들은 관습을 제2의 자연으로 수용하는 포스트모던한 믿음에 따라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개인의 심리에만 맡긴다면, 좋은 인간이란 좋은 노예주에 불과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노예제 시대에 좋은 노예주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며, 내가 그 시절로 간다 한들 그들보다 더 좋은 주인이 되리라고 자부하는 것 역시 아니다.


 나는 위와 같이 믿는다. 하지만 나는 이에 사람들이 이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가령 고종석처럼 모든 혁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프랑스혁명도 마찬가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에게는, 저 페미니즘의 두 정의 사이의 간극은 메울 수 없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들은 저 둘 사이의 어디쯤엔가에 있겠다.


 페미니즘들은 존재한다. 이것은 정의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인데, 운동에는 그것의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을 것이어서이다. 페미니즘들의 노선 차이를 여기서 상세히 서술하지는 않겠다.


 어쨌든 트위터에서 일어난 페미니스트 자기선언 운동은 그것에 참여한 개인들에게 성평등으로의 지향을 설정한다거나 그것을 재-정체화하는 의의를 가졌을 것이다. 물론 이것 자체는 미미한 시작일 뿐이겠다. 그럼에도 이 시점 이후, 민우회 등의 기존 여성단체의 가입 건수와 기부금 납입이 증가하였고, 대학 등 학술단체에서의 페미니즘 학습이 활기를 띄는 등, 여러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여기서 저 다양한 페미니즘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바로 특정 성향과 노선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어떤 '느슨한 연대'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트위터 이용자들이고, 정치적-경제적으로 자유주의를 옹호하며, 대체로 서구의 확인된 성평등적 성과들을 한국에 이식하려는 방법론적 특질을 지녔다. 신희주와 차유진 등의 여성들이 단체 "페페페"를 결성하였고, 평론가인 노정태와 임근준 등이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다. 참고로 후자의 둘은 남성이다.


 페페페는 현재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고, 실제 이런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페페페에 확정적으로 참여한 것도 아닌 데다,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이들과 같은 성향을 보인 것도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트위터 안팎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사람들을 그들이 총체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도, 뭐 이들이 목소리가 가장 큰 집단이었던 것은 사실이긴 하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니다. 애초에 이들은 그렇게 견결하게 묶인 조직을 만들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들을 정의하기 매우 애매하긴 하나, 여기서는 편의상 자유주의자 트위터리안 페미니스트 그룹, 줄여 LTFG라고 호칭하겠다.


 LTFG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호명하면서, 다른 사람들 역시 페미니스트라고 자기호명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고종석 등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LFTG의 행동은 그런데 이런 비-동의자들에 대한 공격적 비판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여성주의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옹호적인 시선을 보이는 사람들에까지 감정의 틈이 벌어졌다.


 여성해방에 우려를 표하나 여성 일반에 심정적인 동조 또는 지지를 보낸다는 말은, 물론 내 개인의 관점에서, 흑인해방에 우려를 표하나 흑인에게 동정을 표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운동의 전략이라는 문제로 들어가면 사뭇 달라지는데, 운동은, 그것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라면, 동조자를 늘리고 적을 줄여야 함이 기본이어서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대체로 가만히 있을 터이며, 잘 설득하면 운동의 개별적 실천 목표에 관해 지지까지 표명해 줄 사람들의 불필요한 적의를 살 이유는 없다.


 하지만 말했듯 LTFG는 이와 정반대로 행동하였다. 대표적으로, 베트남에서 여성의 날에 여성들에게 꽃을 선물하는 등의 이벤트를 한다는 요의 트위터 글을 올린 배우 김의성에게 날선 비판을 한 경우를 들겠다. 물론 베트남의 풍습이 성의 불평등성을 전제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런 전제하에서는 긍정적인 행사로 봐 줄 여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저 트윗 자체가 베트남 같은 행사라도 하는 게 낫지 않냐는 취지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설령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다르게 볼 여지가 있다고 평가하면 그만이지 여성주의에 옹호적인 이를 두고 조리돌림을 벌일 일은 아니었다.


 이런 완고함이 잘 드러난 것이 노정태의 경향신문 기고, "페미니즘을 위하여"이겠다. 여기서 글쓴이는 비-여성, 즉 남성에게 소위 '닥침력'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논리적 모순이 있다. 첫째, 노정태 역시 여성이 아니라는 것. 둘째, 누구도 다른 상대적 약자들의 주체적 행동 - 이를테면 샤를리엡도 테러범들 - 에 그런 기준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 고로 이것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했듯 LTFG는 모든 여성은커녕 페미니스트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도 없다. 따라서 셋째, 외부비판이 없을 경우 집단 내의 완고함에서 기인한 문제들이 자체적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마지막 문제가 드러난다.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성향도 묘한 갈등을 불렀는데, 구-운동권이라고 애매하게 통칭할 수 있을까 싶은 - 비칭으로는 '꿘저씨'가 되겠다. 이런 과거의 좌파들은 현재 상당수가 노빠로 전향하거나 새누리당으로 투신한 상태이다 - 위인들을 적대하여서였다. 그리고 이들의 인텔리-부르주아적 계급성향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무비판성은 기존 여성주의 운동의 원칙을 상당 부분 구성하고 있었다고 할 만한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와도 틈이 있었다. 이는 서구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과 유사한 점이다.


 어쨌든 이들의 친-자본주의적 성향 - 물론 이들의 이상향은 미국이며, 이들은 한국적 자본주의까지 옹호하지는 않는다 - 은 스캔들을 불렀는데, 바로 차유진의 '개천남은 개천 냄새가 난다' 발언 소동이다. 물론 이것이 정말 하층계급 출신에 대한 차별적 또는 경멸적 언사인지는 맥락에 비추어도 불명확하다. 하지만 이들이 그러고도 남을 위인들이라는 사실이 의심을 확신으로 이끌었고, 앞서 말한 대로 조리돌림하는 행태들은 전체적으로 보아 LTFG들이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현재 활동중인 페미니스트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정희진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뭐 갈등의 시발이 된 정희진의 글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악문으로, 정희진답지 못하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거야 어쨌든간에 LTFG의 발언들에서는 기성 여성주의 집단에 대한 불신이 드러났는데, 사실을 나중에 안 정희진은 감정이 상했음을 솔직히 드러냈다. 기존 페미니스트들의 대략적인 견해는 열성적인 인물들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는 - 물론 내 생각 역시 여전히 그러한데 - 생각이었던 것 같다.


 뭐 사견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성은 사회에서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있는데, 이는 여성의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들은 아니다. 바로 남성과 대등한 폭력적 수단 - 이는 군대로 대표된다 - 을 갖추기 어렵다는 것과, 임신과 출산을 남성의 역할로 돌리기 어렵다는 것, 두 가지다. 미래에 과학기술이 놀랍게 발전하지 않는 이상 그러하리라. 따라서 성문제를 제외한 사회 전반의 평등주의적 기조가 불분명할 경우, 즉 인민을 차별하려는 체제의 기제가 작동할 여지를 남겨 둘 경우, 국가나 자본의 이름으로, 여성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나는 따라서 사회주의 너머의 성평등은 없다고 본다. 물론 스탈린주의의 역사는 현실사회주의 안의 성평등에도 의문을 갖게 만들지만 말이다(그럼에도 현실사회주의자들은 인류의 성평등에 지대하게 공헌했다!). 어쨌든 사실이 그러하다면 LTFG의 운동은 성취될 수 없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수렴할 것인데, 성평등 역시 오늘날의 사회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인 이상 - 노동당의 강령에는 어엿이 여성주의가 있다  -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영원한 전략적 동반자인 셈이다.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2)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3)

2015년, 여성혐오 대란의 해 - 상반기 결산 (4)




  1.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 social network service)인 트위터에서 '#특정단어' 형식으로, 특정 단어에 대한 글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기능.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본문으로]
  2. http://www.huffingtonpost.kr/2015/03/09/--un-------_n_6829092.html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