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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

타인의 가정사에 관하여


 한때는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도 마니교도였단다. 참회합니다, 또 참회합니다! 나는 어릴 적 장난삼아 사과를 훔쳐먹었으니, 씻을 수 없는 극악한 죄입나이다. 주님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저를 어여삐 여기사, 오직 당신만이 능히 은총으로... 별 게 아니라, 진중권이 마니교도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서 하는 말이다.

 루소는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냈다. 이것은 최고급 '떡밥[각주:1]'이었는데, 하고 많은 막장짓을 루소가 저질렀음에도 단지 이 행위만은 지지자들마저 참아 주기 어려웠다. 『레미제라블』에서도 '아베쎄의 벗들'중 하나가 이를 두고 개드립을 시전, 이어 반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고승덕의 '생물학적' 따님에 관한 기사가 나와서 말이다.

 이혼은 불가피한 법적 사건이긴 하지만 - 그리스도는 아내를 버린 자 간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일갈한 바 있는데, 그렇다면 고승덕은 저 수많은 동성애자들과 함께, 아니 동성애자들은 설령 구원받을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지없이, 지옥불에서 지글지글 타야만 할 것인데 - 바람직한 일은 아무래도 아니다. 본인에게도 좋지 않은 일일 뿐더러, 만약 아이가 있다면, 그들에게 역시 만만찮은 슬픔을 안겨 줄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아이는 부모를 필요로 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 - 이런 일은 의외로 너무 빈번하게 일어난다 - 역시 자식에게 유감스러운 일이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래도 부모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낫다고 여길 것이다. 아무리 병신같은 부모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조건 아래에서는, 일정한 심리적 안정감을 줄 테니까.

 부모님이 이혼을 하는 사태는 분명 유감스럽다! 하지만 이 경우는 저 위의 논리를 그대로 끌어올 수 없는데, 부모 둘 중 하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혼을 했다면, 그리고 부모가 재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사태에 가깝다. 이것이 대단히 슬픈 일이라고 전제하기 위해서는, 편모 가정이 부모자식으로 구성된 '정상적' 가정보다 반드시 열등하다고 단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편모 가정이 양친의 가정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하다는 어떤 근거도 갖고 있지 못하다.

 물론 편모 가정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갖는다. 많은 경우 어머니는 일을 해야 할 것이며, 아이들은 부모와의 정서적 유대를 힘들어할 것이다. 여성의 경제력에 대체로 한계가 있는 만큼, 가정은 금전상의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인 편견도 골칫거리다. 사회는 대체로 부모가 모두 있는 가정을 정상적인 것으로 관념하고, 그에 맞추어 의례나 법적 행위들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C. Koh가 어떤 부당한 짓을 당했는지 고찰해 보자. 우리는 편모가정이라는 을 듣고 우리 자신이 가진 편견들과 함께 그들이 흔히 겪는 온갖 어려움까지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이 사례에서는 저러한 고난의 거대한 영역이 불가피하게 삭제되어야 한다. 그래야 할 것이, 이 '버림받은' 불행한 아이께서는 다름아닌 재벌가의 후손이다. 이 분께서는 금전적인 곤란을 어떻게 제대로 공상했을 가능성조차 없다.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시련을 겪는 다른 평범한 가정보다도 명백히 유리하지 않은가?

 경제적인 유리함은 다시 정서적인 유리함을 낳는다. 어머니는, 그리고 폐지 수집을 업으로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재산을 가진 할아버지는,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생긴다. 이런 점에서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는 듯한 뉘앙스의 페이스북 글은, 객관적인 시점에서는, 좀 갸우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어차피 대부분의 한국 아버지들은 자녀와 교감 같은 걸 별로 나누지 않으며, 경제적인 부분을 제외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대학 진학에 성공한 케이스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이런 세태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C. Koh가 유별난 고난을 겪었다고 여기기는 좀 무리라는 이야기이다.

 사회적 편견에 의해 고통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주제이다. 우리는 그녀의 페이스북 글과 인터뷰를 종합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선진국이자 PC함과 개인사에 대한 존중이 넘쳐 흐르는 이상향으로만 여겨졌던 미국에서도, 물론 그녀의 말이 올바르다는 전제 아래, 온갖 개념없는 짓들이 자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르는 이혼률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아버지의 날에 아버지를 위한 카드를 쓰라고 학생들에게 강요하며, 친구와 이웃들은 편모가정의 자녀에게 부친의 안부를 시시콜콜히 묻는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사회체제와 문화에 만연한 무개념함에 주목하게 된다. 아버지를 당연하게 여기는 세태는, 물론 한국이 훨씬 악랄하기야 하겠지마는, 우리와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이에 따르는 고통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문제이겠지마는, 이것이 꼭 고승덕의 탓인지는 좀 의문스럽다. 책임을 개인에게 묻기 시작하면 이혼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되고, 그렇다면 다른 유형의 고통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는 다음의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혼한 아버지는, 그리고 그가 양육권을 맡지 아니하였다면, 아버지로서의 권리 또는 의무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하는가? 이는 역시 당연하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논쟁적인 주제이다. 이혼한 배우자가 자녀의 인생에 계속 끼어드는 행위는 사람에 따라 매우 불만스러울 수 있다. 물론 법은 일정한 개입을 허용하고 있기는 하나, 그런 개입이 역으로 떨어져 나간 부모 개인에게 강요되어야만 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어쨌든 현행법은 그것을 강요할 수 없다고 보고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다분히 아이의 개인적인 불만으로 남는다.

 따라서 C. Koh의 여러 고난을 종합할 때, 고승덕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을 찾기란 대단히 어렵다. 말했듯 이혼은 대체로 좋지 않은 결과를 낳긴 하는데, 이것을 굳이 문제삼으려면 애초에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그렇게 따진다면 초기 교부들처럼 결혼마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C. koh의 글은 정치적 파괴력이 있는 사적인 감정의 토로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이 매우 잘 쓴 선동글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만약 누군가 그것이 선동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렇다면 의도되지 않았다는 점이 진정한 재능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반박하겠다.

 물론 약간 다른 의미에서겠지만, 고승덕의 고난은 여전히 자업자득이며 동정할 가치가 전혀 없다. 아들을 두고 되도 않는 눈물연기를 자행한 것이 이번 사태의 직접적 계기[각주:2] 아닌가. 게다가 교육감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던 것 역시 개인적 영역 -  고시왕 - 을 공적 영역 - 교육공무원으로서의 자질 - 과 혼동시키는 사기극에서 기인했다. 그 와중에 고승덕은 열렬히 개인사를 팔아왔으니, 이제 와서 그가 과거의 업에서 빠져나오고자 한들 가능할 턱이 있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주님께서만이 가능하시다! 하지만 말했듯 고승덕은 지옥행 확정이므로 구원받을 가능성은 유감스럽게도 전무하다.






  1. 낚시질에 이은 분란을 조장하는 소재. 가령 탕수육 부먹vs찍먹, 지단vs호나우두 [본문으로]
  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248450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