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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고 운 사람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을 때는 남군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풍속에 관해 글쓰기, 황현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가 마거릿 미첼은 애틀랜타 사람이다. 우리의 주인공 스칼렛이 살던 그 미국 남부의 애틀랜타.

 미첼은 남부인들의 관점에서 이 소설을 썼는데, 정확히 말하면, 남부 백인의 관점이다. 기억하는가, 스칼렛의 남자들을, 고결한 신사 애슐리를, 뻔뻔하고 영악하지만, 어쩌면 저리도 매력적으로 그려졌을까 싶은 그 레트 버틀러를, 순박하고 어리석은, 스칼렛의 둘째남편, 프랭크 케네디를. 

 소설에서 저 남정네들은 모종의 단체에 가입하고 있다. 그 단체는 KKK단이다.

 저 사실이 어색하다면, 아무래도 영화가 더 익숙한 시대여서이리라. 영화에서는 KKK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이것은 발전이라면 발전이리라).

 소설의 흑인들은 어떤가. 스칼렛의 노예들은 굳이 주인에게 다시 돌아와 하인으로 산다. 그들은 당시의 백인 노예주들 입장에서의 '개념 흑인'들이겠다. 

 이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인종문제에서 심각한 결함을 드러낸다. 이는 변명의 여지 없이 차별적인데, 이 차별적 소설은, 따라서, ‘망작’으로 남아야 할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른데, 왜냐하면, 위대한 작품은 자신의 결함마저 간혹 초월하는 까닭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확실히, 남부의 성-인종차별적인 가부장의 환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미첼에게서 그 환영은 환영의 자리를 찾아 사라진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점이 위대하다.

 그 위대함은 미첼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여성일 수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스칼렛은 편협하고 사악하지만, 동시에 매력적이고 유능하다. 많은 남성작가들은 욕망과 지향을 지닌 여성을 그리는 데 서툴다. 남성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남성의 매력을 통찰함에 있어 미첼은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독자들은 스칼렛의 눈으로 애슐리와 레트를 본다 - 하지만 어떤 매력은 주인공 앞에서 ‘사라진다'. 반면 어떤 매력은 여전히 매력적으로 남아 있다. 미첼은 애틀랜타의 이웃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관찰했을 것이다 - 애슐리처럼 귀족적인 사람들은 몰락했을 것이고, 레트처럼 자본주의적인 사람은 성공했으리라. 

 이 엇갈림은 세계사적으로 첫손에 꼽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남북전쟁의 본질 그 자체이기도 하다. 노예주의 대농장은 몰락하고,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승리한다. 이 거대한 운명이 총체화된 인물의 성격과 행동으로 구현되었다는 점이 탁월하다. 

 인종문제는 소설 외적인 면에서도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해티 맥대니얼이 스칼렛의 유모역으로, 아카데미에서 흑인 최초로 수상(여우조연상)한 것. 물론 그 역은 편협한 흑인 역할의 재생산이라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맥대니얼의 연기는 흑인 역시 인격이 있음을, 그리고 배우로서 그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재능이 있음을 보인다. 미첼이 그리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그리고 흑인들의 저 비판적 의식은 그 고루한 역할마저 극복해 왔으니, 흑인은 이제 여러 이야기의 어엿한 주인이며, 얼마 전까지는 백악관의 주인이기도 했다. 미첼이 이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그이의 소설에서 이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어떤 유령들을 본다. '다시 아메리카는 위대'해질 것인가? 다시 백인-남성-기독교도-이성애자만이 주인되는가? 그런 헛소리들이 곧 사라질 것임을 우리는 안다 - 그것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아메리카가 그것들과 함께 사라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