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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

국가주의의 파산




내가 쓰고 싶어하면서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는 소재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래다. 물기둥을 일으키면서 유유히 대양을 떠도는 고래와 이 순진무구한 고래들을 글자 그대로 작살낸 인간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이다.[각주:1]

- 조갑제



 일명 극우 기독교당이 창당한다는 소식[각주:2]을 들었다. 안 그래도 정신병자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라, 사실 좀 걱정이 되긴 한다. 하지만 이 분들의 증상은 최신의 트렌드와는 약간 동떨어져 있다. 목사 양반도 잉여분자들이 개신기독교도들을 깐다고 연설하지 않았는가. 뭐 성전에서 장사하는 양반들이야, 성전이 망한다고 해도, 다른 곳에서 좌판을 벌이면 그만이긴 하다.

 이 독사의 자제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놓자. 기사에서 내가 오히려 주목한 건 강사들의 면면이었다. 길자연이라든가 조용기라든가 하는 작자들보다도 먼저, 다름아닌 조갑제 선생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논리에 따라 그렇다는 것이니 굳이 트집을 잡을 일은 아니다. 그 외의 한국 사람들은 국가에 소속되었다는 의식이 상당히 투철하다. 일명 '사회주의자'들 중에서도 사실 대다수는 그렇다[각주:3]. 물론 조갑제 선생님만큼 투철한 사람은 아무래도 좀 드물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인의 이 '투철함'은 경향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투철한 소속감은 날이 갈수록 무뎌지고 있기까지 하다. 여러 극우분들이 정당을 창설하자는 이유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아 보인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즉 1. 소속감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2. 소속감이 옅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속감의 원인으로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토착적 유대다. 특정한 물리적 영역 내의 인간들은 정서적, 언어적, 문화적 유사성을 지닐 것이다. 그것이 국가의 심리적 기반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우리는 늘 한국이 단일민족이며, 단일언어를 쓰며, 심지어 단일한 문화를 지녔다고 교육받아 왔다. 하긴 한국이 상대적으로 문화적 공통성이 많은 개체로 이루어져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이 가설은 국가의 하부단위에서 암초를 만나게 된다. 곧 지역과 계층이다. 기업과 국가가 흔히 대립하듯, 지역색과 국가는 쉽게 양립하기 어려워서다. 예를 들어 언어를 보자. 개인은 가족과 지역, 계층이 쓰는 언어관계에 동참하며 언어를 배운다. 그러나 이것은 사투리와 은어의 성향을 지니며, 국가의 공식적인 언어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쯤 이야기하면 화를 내며 표준어의 필요성에 대해 강변하는 분이 나오실 것이다. 물론 나도 소통의 현실적 필요성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며, 표준어 사용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다[각주:4]. 하지만 표준어가 어떻게 구성되고, 또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띄는지는 고민해 볼 문제다.

 한국의 예를 생각하자. 굳이 국가 내의 의사소통이 목적이라면, 국어는 반드시 '교양 있는 서울 거주자'들이 쓰는 말일 필요는 없다. 이처럼 어떤 특정 집단의 언어만 공식적 표준으로 인정된다면, 오히려 다른 지역과 계층 고유의 언어에 대한 공적 배제를, 극단적인 경우 침묵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언어의 배제는 매우 높은 확률로 구성원들에 대한 배제를 끌고 올 것이다. 특히 약자들, 표준 언어에 대한 접근성을 획득할 현실적 수단이 부족한 이들은 더욱 불리한 위치에 선다.

 국가와 지역언어의 충돌이 어느 정도 선에서 조정되는가를 관찰해 보자. 한국 학생들은 서울로 상경하면 사투리를 의식적으로 쓰지 않는다[각주:5]. 한국 방송에서 사투리를 구경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딱히 사투리를 쓴다고 해서 의사소통에 지장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렇다.

 하지만 가령 영국 리버풀에 거주하는 스티븐 제라드(31, 축구선수)씨를 보자. 자비가 없는 토착 사투리를 구사하며, 심지어 대표팀에서 인터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표준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의지도 없고 그럴 이유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각주:6]. 이것은 선명한 차이다. 한국 국가대표의 주장이 사투리로 말할 수 있을까. 국가주의의 단면은 이런 사소한 곳에서도 엿볼 수 있다[각주:7].

 언어에서 보듯, 지리적-문화적 공통성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는 것은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 하위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그곳에 뿌리한다. 그런데 국가적 소속감은 개개의 하위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배제할수록 강력해진다. 따라서 국가적 소속감을 논한다면, 그것의 기초는 지리적-문화적 공통성이 아니다. 물론 문화를 획일화하는 것으로 개별 문화를 말살하고, 그럼으로써 지역적-계층적 소속감을 국가적 소속감으로 대체하는 것도 가능해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 이야기다.


 그렇다면 소속감의 다른 원인으로 무엇을 가정할 수 있을까? 상징과 환상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유사 아버지'인 셈이다.

 우리는 흔히 가족을 말하지만, 사실 가족은 범주에 불과하다. 가족이란 것의 실체란 없다. 가령 '신림9동 주민들의 집합'이 별다른 실체가 아닌 것처럼. 그저 몇 명의 인간과, 그들간의 관계 - 대체로 결혼과 혈연 - 만 존재한다[각주:8].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가족 자체를 어떤 실체로 관념하는데, 이로 인해 가족이란 단어는 그 이상의 사회적 함의를 지니게 된다.

 관념을 실체화하는 것에서 더 나가면, 그 대상을 영속화하거나, 인격화하거나, 다른 실체와 동일시할 수 있다. 가족을 영속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가족은 구성원들이 바뀌어도 지속된다. 즉 '가문'이 출현한다. 인격화에 따라 가족은 감정을 가진 주체로 인식된다. '가문의 명예' 같은 말이 가능하게 된다. 동일시에 따라 가족은 어떤 개인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 개인은 바로 가주이다.

 즉 가족은 영속하여 가문이 된다. 그 가문은 가주와 동일하며, 또 가주의 연속에 의해 다시 영속한다.


 포우의 "어셔 가의 몰락"을 보자. 여기서 '어셔'라는 이름은 일차적으로 가문을 표상한다. 그러나 이는 어셔라는 이름을 가진 가족 구성원 각각[각주:9]을 지칭하기도 한다. 어셔 가는 또한 그들이 살아 왔던 집 자체이기도 하다. 이런 '어셔'들은 공동 운명체이며, 심지어 서로 물리적 인과를 주고받는 것처럼 그려진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그럴 턱이 없다. 하지만 사태를 그렇게 인식하고 싶어하는 심적 동기가 사람에게 존재한다는 건 분명하다. 이와 객관적 현실과의 괴리에서 나타나는 기괴한 감성이 이 소설의 포인트다.



 이 관념은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단 가정 생활에서는 가부장제의 근거가 된다. 상상해 보라,

 당신의 아버지는 곧 당신의 가족이다. 그렇기에 당신은 아버지에게 복종해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계승하고, 그래서 가족은 또 그 아버지의 아들이다. 고로 당신은 아버지의 아들에게 또 복종해야 한다. 만약 대가 끊기면 가족은 없다[각주:10]. 고로 당신도 없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었다. 오늘날 가부장제가 상당 부분 해체되면서, 게다가 가족마저 해체되어 가는 판이니만큼, 이런 헛소리를 믿는 사람은 꽤 드물어졌다. 물론 이에 들러붙었던 온갖 악습들은 오늘날에도 버젓히 생존해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지만, 이런 불행한 가정사로 모든 사태가 끝난 건 아니다. 때로 정치적 체제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잘 생각해 보라, 저기서 가족을 국민으로 바꾸고, 가문을 국가로 바꾸고, 아버지를 '어버이 수령', '지도자 동지' 따위로 바꾸어 정권을 유지하는 동네가 한 군데, 지구상에 한 군데 있지 않은가!

 사실 이건 북한만의 아주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반적인 현상이기까지 했다. 중동에도 아직까지 전제군주국이 여럿 남아 있거니와, 전근대 사회에서 국민과 국가, 그리고 군주는 흔히 동일시되었으니까. 과거 한반도의 왕조들을 생각해 보자. 이 영속화-인격화-동일시의 기제는 정권을 지탱하는 한 축이었다. 가정에 대한 가부장의 지배가 정당화되는 것처럼.

  사직이 먹고사는 데 중요한 귀신들을 모시듯, 종묘는 조상 귀신들을 모신다. 이 둘은 주술신앙이 의례화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상 귀신들의 모음'은 곧 국가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유교는, 원래 그것이 무엇을 추구했든지간에, 이런 전근대적 지배체제를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관념의 만능'을 교리화하고, 그에 대한 의심을 처벌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굳이 공자에게 비난을 퍼부을 일은 아니다. 다른 종교들 - 이를테면 기독교 - 역시 이런 짓을 저질러 왔고, 티벳불교는 심지어 바로 얼마 전까지 이런 사기극[각주:11]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시켰으니까.

 이북 주체교의 꼬락서니는 이보다 전혀 나을 게 없다. 하지만 꼭 북한만을 문제삼을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 역시 이 방면에 있어, 물론 고조선이나 이씨조선이나 김씨조선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리 양호한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하니까 말이다. 떠올려 보자, 박정희라는 이름을. 


 박정희란 양반은 한국의 대표적인 '유사 아버지'에 해당한다. 이런 유사 아버지를 섬기는 망상체계가 극우의 심리적 본질이다. 이 분들은, 어떤 제사집단 - 씨족 - 처럼, 아버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으로 아버지-집단-집단 구성원의 동일시를 꾀하며,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대리로서의 권력을 향유하려 할 것이다. 전근대적인 행태다.

 국가나 집단의 경우, 가족과는 달리 실체로서의 아버지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환상으로서의 아버지상(像)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이 교도들은 어떤 실체화된 아버지를 창조해 내고자 하는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물론 그들은 모세처럼 종교를 창조해 낼 능력은 없다. 그렇다면, 가령 박정희처럼, 어떤 '유사-아버지적 상상체와 다시 유사한 존재'를 아버지로 옹립하는 수밖에.




 극우들은 고대인들이 신화를 만들었듯, 다시 그들만의 신화를 만들려고 노력중이다. 다시 국가가 부활하고, 국민이 부활하고, 그 완전한 부활을 위해서는 다시 국부가 부활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들과 관념적인 프랙탈 구조를 이루는 가부장제가 부활할 것이기도 하다.

  국부 만들기가 이들의 국가주의 프로젝트 중에서 현재 가장 역점을 둔 사업으로 보인다. 극우들은 그 중에서도 이승만의 무덤을 열심히 파고 있다. 물론 동기는 불순하겠지만, 순수 관념적인 것만 놓고 본다면, 국가와 아버지를 묶는 데 시초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추정을 가할 수 있다.

 국가의 성립시부터 국부가 존재했다는 관념이 있어야 국민을 세뇌하기 편하긴 하다. 예수는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인민들과 함께 하지는 않았기에, 예수 이전을 논하는 데 있어서 약간의 난점이 발생한다. 극우들은 '건국에 이승만이 있었으니 맥아더가 보기에 참 좋았더라' 라는 식으로 역사를 쓰려는 모양이다.

 그렇게 초대 교조를 만들어 놓고, 창조된 신화를 이야기하며 표상  - 태극기, 성조기[각주:15], 십자가[각주:16] - 을 흔들며 애국가(와 찬송가)를 부르는 식의 종교 집회가 창조된다. 유사-기독교는 이 단계에서 다시 한 번의 질적 부흥을 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어차피 같은 부류들이니 사실 어울린다고도[각주:17]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에는 논리적 문제가 여러 가지 있다. 일단 이승만이 국부로서의 격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굳이 그것을 나서서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 이를테면 김구처럼 - 그를 존경하고 있었을 테니까. 작금의 '국부'선전은 오히려 이씨가 사실은 국부가 아님을 증거하는 활동이나 다름없다. 

 물론 극우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좌파정부 10년. 그런데 그 이전에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바닥이었으며, 이는 어떻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를 어떻게 뭐라 할 수가 없는 것이, 단 하나도 잘한 일을 꼽기 어려운 인간을 어떻게 추앙하기도 힘든 노릇이니까. 하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어쩌면, 식민지시대에 대한 나쁜 기억이 대한민국의 반일교육 탓이라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창조한 사람이 이승만이니 그를 추앙해야 한다, 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국가는 정부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국가로서의 한국을 만든 주인공은 단군이나 김춘추나 왕건이 되어야지 이승만이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그저 이름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기원 역시 임시정부이지 이승만의 48년 정부가 아니다.

 몇몇 이들은 국가체제를 들먹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국가체제의 표상인 헌법은 국부가 누구인지에 대해 하등의 관심이 없다. 민주공화국의 역사적 근원은 역시 임정이며, 현행 헌법체제의 시작은 6.10 민주화운동이다. 심지어 48년의 제헌헌법조차 이승만이 만든 게 아니다. 결론적으로 작금의 국부론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하게 루마니아나 알바니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경우만 생각해 봐도, 국부론이 무의미함을 알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어째서 이들은, 이미 모시던 박정희나 열심히 모실 것이지, 사람들에게 먹히지도 않을 이승만을 들이대며 애를 쓰는 걸까? 여기서 이 극우분자들의 경직적인 파당성이 드러난다. 논리적으로 반드시 그럴 이유야 없지만, 이들은 어쨌든 현실적으로 여러 기득권 세력과 연관이 되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그 기득권 세력들'에게 조갑제 선생 류의 극우적 사고방식이 이용될 따름이지만.

 이를테면 계통적인 문제다. 이승만과 동류였던, 그리고 지금도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파당이 존재한다. 이 파당이 극우분자들의 난동에 강력한 동기가 된다. 이 파당은 딱히 어떤 이념적인 세력은 아니다. 단순한 현실정치적 집단, 어쩌면 이해관계에 따른 묶음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식민지 시절에 상당수가 친일세력이었고, 한국 사회에서서는 반공-친미[각주:18]라는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별다른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입장'일 뿐이다.

 극우들이 논리적이라면, 모든 대통령은 '아버지'가 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대통령의 '입장'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같은 '입장'인 국왕은 정통이고, 다른 입장인 국왕은 찬탈자 - 이를테면 광해군의 경우 - 로 관념할 필요가 생긴다[각주:19]. 이 지점에서 극우의 국가주의는 이념적 순수성을 상실하고 만다. 까놓고 말해 이런 '입장'은 전근대적 국가주의의 본질도 아닐 뿐더러, 무슨 대단한 철학적-사회학적 의의를 가진 것 역시 아니다. 사실 조선조의 붕당정치에서도 나름 거창한 명분은 걸려 있었다. 그 명분이 현실에 있어 별다른 의의를 갖지 못했던 게 문제일 따름이다.

 물론 여러 극우분자 여러분들께서는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박정희 때 경제가 발전하고 인민의 생활이 윤택해진 것을 보아라. 반대로 김일성과 김정일의 괴뢰도당이 저지른 참상을 보아라. 반공-친미가 갖는 현실적 의의가 명백하지 않느냐.

 역시 남한이 북한보다 상당히 양호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다. 그런데 문제는 저 '의의'가 직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부의 직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의의'란 그저 편견에 불과하다. 이것이 어떤 합리적 주장이 되려면, 바로 반공과 친미가 더 좋은 결과를 낸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증명할 수 없다. 애초에 증명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각주:20]. '우리가 모시는 신이 더 영험하다[각주:21]' 수준의, 주술적 사고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이 주술적 사고는 극우분들이 연관하는 파당성에서 논리적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그들의 '입장'인 이승만이나 현 대통령 각하의 실적이 참담하기에 그렇다. 그런데 다른 '입장'인 양반들의 실적은 오히려 그들보다 낫다. 이것은 사람들의 실상을 보나 기관의 통계를 보나 명백하다. 물론 이 상황에서 논리를 추종하는 극우분이 있다면 진정한 꼴통으로 존중받아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은 없다. 정확히 극우의 전부가 파당성으로 몰린다.

 어째서 꼭 파당성인가? 이 파당성이 그들에게 당장의 현실적 이익을 주리라고 기대되어서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사실 파당성을 견지하지 않는 극우는 당장 먹고살기부터 힘들거니와, 누구도 그런 극우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 주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파당성은 결국 국가주의의 기반을 흔들어버리게 된다.


 지금까지의 전개를 정리하면 이렇다. 한국 극우의 국가주의는 다음과 같은 양상을 띄는데,


 이라 도식할 만하다. 현실의 국가주의는 양자간의 충돌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이 충돌을 순순히 인정한다면, 이념을 이루는 부분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 김대중이나 노무현은 올바른 아버지가 아니기에 섬겨서는 안되지만, 이승만은 올바르지 않더라도 아버지라는 이유로 섬기라는 이야기가 되니까. 이런 파당성은 소망이 현실의 구조에서 온전히 그 모습을 찾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모순을 극복할 것인가? 방법이 하나 있다. 현실을 개조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그분들의 머릿속에서만 바뀔 뿐이다. 이런 현실 개조는 유사-아버지의 망상과는 약간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유사-아버지의 관념과 의례는 환상에 따른 것이며, 대체로 현실의 사물들 위에다고안된 설정을 덧씌우기만 한다. 하지만 극우의 이 편집증은 현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왜곡하려고 한다. 이 발전된 망상의 시스템 속에서, 객관적 현실은 뇌 안에서 화학적으로 변화한다.

 이제 망상적 현실에서 악마가 출현한다. 절대악이며 어떤 타협과 협상도 불가능하며, 오직 '우리'를 파괴하는 데만 온 힘을 쏟는 사탄의 수장 김정일씨, 그리고 그들의 수하 조직인 한총련, 전교조, 민노총, 민노당 따위가 발생하며, 이들과 한패로서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종북분자들인 김대중, 노무현 등등.

 이런 개인이나 집단들은 극우의 망상 속에서 반-국가가 된다. 김정일씨를 제외하면, 여러 분들의 말이나 행동이 실제 반-국가라서 악마화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는 그저 극우가 속하는 파당과 이해관계가 약간 다를 뿐이다. 노무현의 경우를 보면 그 이해관계가 까놓고 말해 많이 다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파당성과, 자신들의 국가주의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는 해법을 우리 극우는 찾지 못한다. 그렇기에 파당에 반하는 자들에게 반-국가라는 낙인을 찍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수법을 쓴다[각주:22]. 그리고 나중에 가면 이게 사실상 그들의 도덕이 된다[각주:23].

 하지만 극우들이 조작한 망상과 현실은 어쨌든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극우들이 비판하는 여러 인물이나 조직들은, 심지어 어떤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꼭 반-국가라고 여기기에는 난점이 많다. 어쩌면 오히려 더 국가주의적인 - 물론 국가주의의 도식은 다를 수 있다 - 양반들도 계신다. 잠깐 화제를 돌려서 이런 극우 아닌 이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다 제각각 이기적인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자기 식대로 막 나가며 살진 않는다. '요새 젊은이들'처럼 먹고살기 힘들다고 애 안 낳고 사는 이들도 있고, 대통령 각하처럼 여러 자녀[각주:24]를 낳아 키우는 모범적인 분들도 계시다. 안상수씨처럼 입대 전에 행불되는 분도 있고, 문재인씨처럼 특전사 사진으로 인기몰이를 하는 양반도 있고, 뭐 가지각색이다.

 어떻게 개개의 이기심을 지양하고 공동의 선을 꾀할 것인가? 아버지로서의 국가를 지향하는 분들과는 사뭇 다르게, 공동체의 이름을 쓰며 탈권위적인 체제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의회민주주주의의 체제에서 사민주의자들이 대체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데, 이들은 공동체-평등-복지-평화의 경향을 띈다.

 사민주의에서도 현실적으로는 국가의 힘에 의해 이런 목표가 달성된다. 간단히 말하면 국가가 인민을 보살핀다. 따라서 사민주의자들이 하려는 일은 국가주의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공동체에는 유사-아버지가 필요없다. 이들의 국가는 분노하고 위협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굳이 부모에 비하자면 아끼고 돌보는 어머니에 가깝다고 관념된다. 따라서 극우는, 실제 사민주의의 시책이 '국가'에 유익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민주의적 성향을 띈 이들에게 지독한 반감을 가지게 된다. 아버지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물론 유사-아버지는 원래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극우들은 망상 속의 아버지를 부정한 것만으로 - 사실은 상상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 사민주의자들에게 부친살해의 누명을 씌운다. 이들의 대단한 분노는 어느 정도는 도덕에 기인한 것이고, 또한 어느 정도는 역시 현실적 이해를 고려한 것이다. 즉 국가의 단위에서 벌어진 유사-아버지 살해로 인해, 자신이 사회에서, 특히 가정에서 행사할 대리적 권력을 상실했다는 공포로 말미암았다는 이야기다. 일종의 정신질환이며, 그것도 참 치졸하기 짝이 없는 정신병이다.

 최근 노르웨이의 테러사건도 이런 면에서 관찰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런 유형의 피해망상이 가장 주요한 원인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테러범은 확실히 국가-가족, 국가주의-가부장제를 연동시켰다. 그는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를 어떤 모델로 삼아 찬양했으며, 그 덕에 한국에서 더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인종주의는 그저 백인의 인종주의라기보다, 백인-남성의 인종주의에 더 가깝다.

 실제 이 작자는 이민자 핑계를 대면서 정작 이민자는 공격하지 않고, 사민주의자 캠프의 청년들을 공격했다. 물론 이민자 정책을 근본부터 공격하자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사민주의자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다른 사실 하나를 암시하는데, 사민주의자들에 대한 테러범의 증오가 이민자들에 대한 그것에 못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시겠지만 사람에게 총을 갈겨대는 건 심리적으로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사민주의와 극우의 관계는 대체로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현실에서는, 극우는 물론이거니와, 사민주의 역시 독특한 양상을 띄긴 한다. 맨 앞에서 지적했듯, 사민주의적 정책을 표방하는 인간들도 까놓고 보면 상당수가 국가주의적이라는 이야기다. 이례적인 현상이라 할 만하다.

 이 현상의 원인은 간단히, 사민주의의 이념 형성 당시의 강력했던 국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는 단순한 해설로 충분할 것 같다. 당시까지 계속되었던 유사-아버지에 대한 주술적인 믿음과, 전쟁과 개발을 통해 획득한 국가의 절대성이 결정적이었을 테다. 어쩌면 국가가 획득한 근대적 성격에 대한 동경, 그리고 완성되지 못한 국가에 대한 향수 비슷한 감정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극우와 비슷한 질환을 갖고 있다. 어쩌면 과거의 국민들도 역시 비슷한 증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국가주의-사민주의는 극우와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는데, 하나는 민족의 문제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문제다.

 민족의 문제를 보자. 사실 극우도 이에 있어서, 이른바 국가주의-사민주의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어야만 한다. 지적했듯 국가의 통합을 이루는 요소는 문화, 언어, 관습(법) 따위가 있다. 여기서 하나 더 꼽자면 혈연이 되는데, 물론 이것은 앞서의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상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민족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국가주의-사민주의자들은 하나의 민족적 실체를 현실의 것으로 관념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민족-국가의 동일성을 꾀하게 된다. 그것의 궁극적 해결책은 일명 통일이다.

 이런 소망은 '분단'의 현실 속에서 더 절박한 것이 된다. 통일이 제일가치인 이유는 뭐 별다른 게 아니라 이들이 국가주의자여서다. 이런 절박함은 때로 나치의 표어를 연상하게 한다 -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총통[각주:25]. 다행히 우리의 국가주의-사민주의자들은 대체로 민족-국가 이상으로 쉽게 나가지 않긴 한다. 민족-국가-총통까지 당당히 관념하는 분들도 몇 계시긴 한데 일명 김일성주의자들이다.

 북한은 봉건왕조의 체제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독특한 국가다. 강력한 국가와 충성스러운(혹은 적어도 충성스러워 보이는) 국민, 그리고 국부놀음까지 정확히 실현했다는 점에서 극우의 정치적 이상을 정확히 구현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 가부장적인 국가에서 가부장적인 사회가, 그리고 가부장적인 가정이 나온다. 이런 세계를 추종하는 정신병자들 모임의 꼬락서니는 안 봐도 뻔하다. 극우 이상으로 권위적이며 남성중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주사파와 극우의 여러분들은 매우 유사한 지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셈이 된다. 다수의 주사파들이 뉴라이트로 전향한 사태도 절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둘은 왜 서로를 증오하는 것인가? 모시는 신이 다른 종교인들, 또는 어떤 축구팀의 라이벌 팬들에 비할 수 있겠다. 이것은 일종의 동족혐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한정된 먹잇감을 놓고 싸우는 늑대들의 권력다툼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주사파는 주사파라고 치더라도, 극우 측에서는 여전히 국가주의-사민주의자들을 증오할 근거가 남아 있다. 국가주의-사민주의자들의 국가주의는 아무래도 순수한 그것보다는 많이 미약하기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버지를 대놓고 모시지는 않기에, 극우의 입장에서라면, 국가주의-사민주의를 국가주의적이지 않은 사민주의와 쉽게 동일시할 수 있어서다[각주:26]. 하긴 모든 종교는 어차피 이단과 투쟁을 벌인다.

 민주노동당을 보면, 어쩌면, 극우의 이런 혼동이 정당한 근거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민노당의 여러분은 일개 개인을 추대하거나 맹종하지는 않으며, 전쟁과 군비경쟁에 반대하고, 소수의 의견을 대변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들이 국가권력을 잡고서도 -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 자체가 희박하긴 하다 - 그런 모습을 보여 줄지에는 물음표를 달고 싶다.


 한국에서 국가주의의 문제를 논하자면 필연적으로 꼽아야 할 부류들이 또 있다. 일명 노빠들이다. 물론 현실에서의 친노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고, 어떤 특정한 정치세력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국민참여당은 노무현의 아우라를 끌어들이려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 연이어 정치적 실패를 경험하며 한계를 증명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노빠'들은 한때 80년대 운동권 부류라든지 또는 그의 영향을 받은 면이 있어, 구조적으로 민노당의 국가주의자들과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저 단순하게 말하면, 역시 파당성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의하자면 중도 정도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지닌 이들 중 국가주의가 투철한 자들. 물론 이들의 주장은, 극우와는 달리, 이념의 적실(適實)성이 어느 정도 담보되는 편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사상과 현실의 일치. 그렇다면 위에서 제기한 파당성으로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노빠들은 국민-국가의 문법을 공유한다. 이들은 국가를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삶의 위기가 닥쳤을 때 베드로처럼 딴청을 피웠던 경험이야 있겠지만 말이다. 국가와 국민의 기묘한 관념적 연계 - 이를테면 어셔 가의 몰락에서 논한 것처럼 - 를 인정하며, 심지어 둘을 공동운명체라 믿는다. 이들의 '아버지'는 당연히 노무현이다.

 노빠들은 언론에서 보여지는 것도 그렇고 실제로도 좀 그렇고 별로 폭력적이지는 않으며, 노무현도 뭐 대체로 그럭저럭이었기에 그들의 가부장성은 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극우보다 덜할 따름이다. 이들이 하는 행동들을 보면, 모든 게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은 대를 이어 충성하지도 않고, 달라이 라마처럼 부활과 윤회를 믿지도 않는다. 하지만 국가와 국민을 위해, 노무현적인 어떤 인물을 지도자로 추대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현대과학이 없었으면 아마, 이들은 노무현의 부활을 믿는 신흥종교집단이 되어 버렸으리라. 이들은 교과서를 고치거나 과거사위를 해체하는 등의 막장 행각을 벌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노무현의 시대는 얼토당토않은 수준의 태평성대가 되어 있다. 그의 목적은 모두 옳았고, 모든 문제는 그의 과오에서 비롯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남 탓이었다는 레파토리다. 하긴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렇다 여겨질 수도 있기야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엄연한 왜곡이다.

 노무현의 무오성, 그리고 노무현적인 인물의 추대. 참여당에 있기까지 한 분들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사실 좀 중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많은 참여당원 여러분의 진정성을 의심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진정성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각주:27]. 이런 류의 국가주의자들의 기관지라 하면 딴지일보를 들 수밖에 없다. 그들이 '민족정론지'를 자칭하는 것도 과장이 아니다.


 정리하자면 국가주의적 부류는 이 정도다. 대단히 많이 논한 것 같다. 하지만 차분히 세어 본다면 알 것이니, 투철한 국가주의자들은, 좌우를 합친다고 해도, 전체 국민의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늘날 일반인들은 국가주의적 성향이 현격하게 약해졌다. 옛날에는 분명 이러지 않았다. 위에서 국가주의-사민주의자들을 논하며, 그들의 국가주의적 성향이 일반 국민들의 경향에서 기인했다, 고 분석하기까지 했잖은가? 어째서 단지 수십년 사이에 이렇게 된 것일까? 역시 극우분들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 좌파정부 10년.

 극우분들의 망상체계야 적들을 탓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다를 수밖에 없다. 원인은 국가주의라는 관념적 그림이 현실적 근거를 상실한 것이다. 세 가지 사태를 놓고 보자. 1. 자유 사상의 유입. 2. 가족의 해체. 3. 국가가 국민에게 주는 이익의 상실.


 논했던 대로 국가-국민-아버지의 연관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그나마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습관과 그에 따른 편견이다. 그런데 학문은 이런 게 다 헛소리라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인지시킨다. 이런 학문은 여러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열심히 수입해 왔으며, 따라서 극우가 이들에게 적의를 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적의는 단지 하나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 극우가 틀렸다는 사실을.

 그러나 사상이 가장 큰 원인은 아니다. 소위 '운동권'을 봐도, 말로는 민주를 외치면서 온갖 구습의 작태를 펼치지 않았는가. 국가관의 침몰에서 우리가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건 하부구조다. 그것의 하나로 가족의 해체를 아니 들 수가 없다.

 국가-국민-아버지는 가문-가족 구성원-가주와의 관념적 동일시에 의해 현실의 옷을 입는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을 보면, 가문이란 게 어디 존재할 수가 없는 환경이다. 산업화에 따라 친족은 물론이거니와 가족 구성원 모두가 흩어지고, 종래의 제사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가족 구성원이 두셋인데 가주의 권력이 뭐 그리 유별날 리가 없다. 게다가 출산률이 1에 가깝다. 가주가 연속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따라서 가문의 의의는 제로로 수렴한다.

 이런 '자본주의적' 상황에서 수컷의 역할이란 참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아버지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거니와[각주:28], 아버지가 되어 봤자 별 대단한 게 있을 리가 없다. 꼴이 이럴진대 가문과 관념적 유사체인 국가의 권위가 살지 않음은 당연지사다. 여기서 국부를 논함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기초가 붕괴한 국가주의의 관념은 그 현실적 이익을 구성원들에게 주지 못하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파국을 맞는다. 사실 굳이 현실의 이익을 줄 필요는 없다. 국가가 이익을 준다는 환상, 또는 앞으로 이익을 줄 것이라는 환상만 존재해도 충분했을 테다. 문제는 구성원들이 정반대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다. 현실을 보자. 누구나 각박한 삶을 사는데, 국가는 고난에 별 조력을 제공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람들은, 오히려 현체제가 때로 수단을 강구하여 국민들을 못살게 군다, 고 믿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지적대로 주술적 사고는 어쩌면 인과보다 소망에 기초하는 것이다. 복권을 사는 심리와도 비슷하다. 실제 가부장적 국가가 국민에게 혜택을 주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유사-아버지의 권력을 대리할 가능성, 또는 그런 시스템에서 어떤 현실적 이익을 얻을 가능성[각주:29]만 있으면 체제를 지지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이득이란 게 없다는 사실만 사람들에게 각인시킨다. 기왕이면 더 영험한 우상이 낫다. 사람들은 부권과 국가를 떠나, 금전으로 몰려갔다.

 물론 인민의 신념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게다가 사람들에게는 일단 유리한 것이라면 추종하고 보는 다신론적인 성향이 있는 것 같다. 나만 해도 야훼를 안 믿어서 그렇지 십계를 대체로 준수하며 살고 있다[각주:30]. 유사-아버지를 추종하는 성향도, 역시 옛날에 비해서 참혹하다 이런 수준이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적어도 노르웨이 테러범이 찬양할 만한 수준은 된다.

 따라서 조금만 노력하면 가부장적 체제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극우분들이 생각하는 해법은 편협하다.


 지적했듯 국가주의의 불황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사상의 변화, 가족의 해체, 이익의 상실. 극우들은 여기서 오로지 첫번째 원인, 사상의 변화에만 집중한다. 마치 국가와 유사-아버지를 섬기지 않는 사상의 난립이 모든 문제를 몰고 온 것으로 넘겨짚고, 여러 사상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유사-아버지의 부활을 노린다.

 그런데 우리의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사상의 자유를,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보장한다. 그렇다면 극우들은 그들의 행동으로 자유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극우들이 흔히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주의는 사실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것', 즉 이름-자유민주주의의 정체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반-사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충돌하지 않으며,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와도 사실 충돌하지 않는다. 이건 그 잘난 48년 헌법을 보아도 대단히 명백하다. 그런데 이 극우의 이름-자유민주주의는 반민주적 주장을 하며 사회주의적 요소를 배격하는 데 앞장을 선다. 이 대단한 극우적 노력의 현실적 양태는 신자유주의의 홍위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극우는 자유민주주의를 추종하지도 않으며, 애초에 그것이 무엇인지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유사-아버지의 현실적 부활이 중요할 뿐이다[각주:31]. 그를 위해서 사회주의를 혐오하는 신자유주의적 파당과 손을 잡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극우의 이런 사상적 노력이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밀어놓고라도, 국가주의의 위축의 원인이 되는 다른 두 현실적 요인과의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말했듯 사상은 사회변화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북한이 아무리 국민을 세뇌시키려 애를 써 봐야 나라 꼴은 여전히 개막장일 것이다. 실제 사회 구조를 개혁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즉 극우 국가주의의 경우에도, 가족의 해체와 국가가 주는 이익의 상실, 이 두 가지를 해결하는 것이 더 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유사-아버지의 부활은 불가능하다. 극우들 역시 그들이 원하는 것 - 대리적 권력[각주:32] - 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현상들의 원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대가족의 분리는 산업화 때문이고, 저출산은 사회의 지나친 경쟁구조 때문이다. 국가가 국민들에게 혜택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는, 노무현 말마따나,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국가가 국민을 오히려 탄압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국가가 자본권력의 손에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늘날 가부장적 국가의 몰락은 자본주의의 탓이다.

 따라서 국부를 논하는 국가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반대해야 한다. 현실의 자본주의는 국가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경제적으로 독점자본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가부건 가족이건 국부건 국가건 성립할 수가 없다. 따라서 국가주의의 경제정책은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강력한 사회주의적 성향을 띄어야만 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명백하다.


 가깝게 극우의 히어로인 박정희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그 시절의 국가경제를 운용하는 축은 국가적 결단과 강력한 통제였다. 단순한 결과론이 아니라, 그 과정을 놓고 보았을 때에도 어떻게 신자유주의적이라거나, 재벌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수입품 썼다고 매국노 취급하던 시절이 어떻게 자유시장경제의 부흥기가 된단 말인가? 재벌들에게도, 어쨌든 좋은 시절이긴 했지만, 아주 좋은 시절은 아니었다. 물론 재벌들은 당시 성장의 기반을 닦긴 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재벌의 태평천하는 유사 이래 없었다. 이제 국가중대사를 결정하는 주체는 재벌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열매를 따는 것도 재벌이다. 하지만 과실에 따른 책임은 절대 지지 않는다. 한진중공업 건을 보자. 엄연히 국가의 산업을, 그것도 평시에나 전시에나 중요한 산업을, 통째로 들어다 외국으로 빼내는 행위다[각주:33]. 박정희 때라면 어땠을까. 미처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언감 그런 시도라도 했다간 일가가 모조리 끌려가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았을 것이다.

 재벌은 현체제에서 최고의 특권을 누린다. 이들은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세제상의 혜택을 얻는다. 국가는 심지어 전기료도 깎고  - 이번 정전의 큰 원인이 아닐 수 없다 - 환율도 '조율'하는 등 많은 비정상적[각주:34] 수단으로 재벌을 먹여살리고 있다. 이 재벌이란 자들은 도덕적으로도 방종한 생활을 일삼으며, 사회상규를 흐뜨러뜨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아니 애초에 정해 놓은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이런 행태들은 일반인의 선망의 대상이 되긴 한다. 하지만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기득권적 가치의 표징이 도덕과 법이다. 다름아닌 우리 극우분들께서도 열심히 법과 도덕을 운운하고 계신다. 하지만 그들은 왜 반-재벌이 되지 않는가? 논리적으로라면 재벌 해체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계셔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그 이유는 역시 파당성이다.

 물론 극우분들은 강한 자의식에 충만해 계시겠지만, 정치역학적으로 보면 그들은 재벌-정치권에 동원된 것에 불과하다. 지적했듯 이 과정에 동원되지 않는 극우는 정치적 영향력은커녕 먹고사는 것도 장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극우들은 열심히 현실을 개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개조된 현실인식에서 나온 행동은 실제 현실에서 (그들이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 (가부장적)국가주의를 외치면서 반-국가주의적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한진중공업 건을 보면, 물론 버스를 타고 온 '외부세력'들은 대체로 별 국가주의적 성향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어떤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지지될 수 있다. 아니, 지지되어야만 한다. 한 예로 영도와 강정의 '외부세력'에 대한 딴지일보의 상반된 기사[각주:35]를 보라. 재벌의 반-국가적 행위를 저지하고, 노동계급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관점에서 중요하다. 따라서 국가주의자라면 희망버스에 전략적 지지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재벌을 지지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극우분들은 무엇을 했는가?


 물론 재벌이 반드시 관념적으로 가부장제와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재벌가만 해도 매우 가부장적이고, 기업 문화도 가부장적인 면이 막강했던 시절이 있었다. 기업을 가족과 국가의 사이에 놓는 관념도 가능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국가를 재벌로 대체하는 상상도 할 수 있는데, 이런 망상들은 재벌독점의 현실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지닌다고도 할 수 있다. 극우의 사고를 보면, 재벌을 어떤 가부장제의 새로운 모범으로 삼는 경향이 실제로 나타난다.

 그러나 재벌과 국가의 대체는, 재벌이 전 국민의 생활을 책임진다고 했을 때에나 가능하다. 극우는 재벌이 국민을 '먹여살린다'는 모호한 어구를 반복하며 이를 정당화시키려 한다. 이런 헛소리는 왕의 땅에서 왕의 은덕으로 백성이 먹고 산다, 는 전근대적 발상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끊임없이 반복한 덕에 많은 사람들이 솔깃하게 된 수준에까지는 이르렀지만 말이다. 어쨌든 정말 재벌이 국민을 먹여살리기라도 하면 다행이었을 테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정말 재벌이 아버지의 위격을 가지려면, 인민을 모두 포용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은 협력업체를 열심히 등쳐먹고나 있으며, 심지어 자기네 '회사'안의 사원들까지 착취하기에 여념이 없다. 사원들은 탈출을 궁리한다. 어차피 계속 남아 있어도 언젠가는 잘리겠지만. 이런 작태들을 도저히 가부장제의 이념에 포섭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가부장제에서 가부의 의무는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이니까.

 그나마라도 되면 모를까, 기업은 그들과는 전혀 관련없었던 사람들의 생활까지 위협한다. 원래 재벌은 제조업을 위해 '만들어진' 독특한 조직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재벌은 오히려 금융에 관심을 두고, 유통과 서비스업에 주력하는 듯하다. 심지어 닭집이나 동네 구멍가게에까지 '진출'하는 꼬락서니다. '자식'들의 목에 칼을 겨누는데, 누가 그를 아버지라고 생각하겠는가? 이래서야 재벌이 국민을 먹여살린다는 헛소리가 통할 턱이 없다. 언론들은 이 와중에도 선동질에 여념이 없지만, 지적했듯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선동을 해 봤자 소용이 없다.

 국가주의는 국가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재벌을 들이대는 것은 이념의 오염 - 어차피 망상일 따름인데 오염이라고 하기도 우습지만 - 에 불과하다. 그래 놓고도 태극기와 애국가를 운운하다니 소가 웃을 노릇이다[각주:36]. 역시나 극우분들은 노조와 북한간의 '보이지 않는 끈'을 상상하고 계시긴 한다. 노조[각주:37]가 반-국가니 그와 이익이 반하는 재벌은 우리 편이라는 전개다[각주:38]. 그런데 작금의 현실을 보면 재벌도 얄짤없는 반-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어째서 재벌이 북한의 지령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재벌이 차악이라는 변명이라도 할 법한데, 그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역시 해답은 파당성일 수밖에 없다. 극우는 재벌과 한나라당을 공격할 수 없다. 같은 파당이고, 게다가 '몸통'이니까 말이다. 이것이 극우의 그 대단한 애국심의 실체다. 전혀 한국의 실상을 모르는 관찰자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치열한 파당성은 극우의 이념을 뒤엎어 버릴 것이라고 말이다.


 극우의 이런 헛짓거리가 정확히 발현된 게 이번 무상급식 건이다. 복지는 사민주의의 전유물이라고 흔히 생각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복지가 꼭 사민주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유명한 예로,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를 개시한 건 비스마르크다. 국가의 통합을 위한 것임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의 사회보험제도도 박정희 때 만들어졌다.

 독일의 예를 더 보면 흥미로운데, 어린이들의 '자유로운' 노동을 규제한 이들은 다름아닌 장성들이었다. 이유는 역시 별다른 게 아니고, 징집병들의 발육상태가 나빠진다고 걱정해서였다[각주:39]. 이처럼 제도는 국가주의자들의 주요 관심사이기도 하다. 심지어 왕정 때에도 지주의 착취를 막는 게 국가적 관심사 - 물론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때에만 -  였지 않은가? 지나치게 착취해대면 국가로서는 남는 게 없으니까 말이다.

 무상급식은 어쨌든 사민주의적 담론에서 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 해법은, 독일 군국주의자들의 경우처럼, 국가주의자가 수용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출산으로 나라가 망할 판 아닌가[각주:40]? 무상급식은, 사회적으로 보면, 자녀양육을 국가가 보조한다는  - 물론 무상급식으로 국가가 지는 부담은 부모가 지는 부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형식을 지닌다. 이것을 시작으로 국가의 보조가 더 늘어난다면, 저출산의 세태에 긍정적인 변화[각주:41]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통계적으로는 확실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무상급식만으로도 그렇다.

 순수 심리적 요소 역시, 계산 못지않게 국가주의의 이념에 있어 중요하다. 사민주의의 입장에서도 어떤 심리적 효과를 고려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 가족을 생각해 보라.

 어머니는 자식에게 밥을 준다. 아버지는 그 밥을 살 돈을 벌었을 것이다.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은 이렇고, 아직도 대체로는 그렇다. 자식들은 부모들의 여러 도움을 받으며 자란다. 이 자식들이 나중에 자라서 효도를 하느냐는 별개의 문제고, 어쨌든 중요한 건 이거다 - 부모들은 양육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나중에 그 보답을 기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식에게 쏟은 비용을 직접 청구하지는 않는다.

 가족은 금전으로 결합된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금전문제는 배제되는 속성을 띈다. 식사 후 어머니가 다른 가족에게 저녁값을 청구한다면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서로간의 돈 계산은 부부가 이혼할 때나 열심히 하는 것이다. 가족관계에 있어 서로간의 베품은 당연한 일이고, 이것이 없는 가정은 심지어 문제적이라고 여겨진다. 양육과 부양은 법적인 의무이기도 하나[각주:42], 그것은 통념에 기인한 것이지 정책적 결단이 아니다. 게다가 이 두 의무는 대가적인 관계도 아니다.

 학교는 사람이 가정을 벗어나 처음 경험하는 세계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개인을 사회화하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교육은 국가적 관심사이며, 또한 매우 국가적인 역사를 지녔기도 하다. 식민지 시절 교육은 국가주의적 국민을 창조하는 사업의 첨병이었고, 박정희 시절은 정확히 그것의 모방이었으며, 지금도 아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요새는 정도가 좀 덜해지긴 했다.

 이런 국가주의적 교육은 근대적 발명이라는 점에서 가부장제적 국가관과는 약간의 사상적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각주:43]. 그러나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은 정확히 같다. 권위를 맹종하는 사회 분위기는 사실 국가권력에나 기업 오너나 가부에게 모두 만족스러울 것이다. 극우들이 기를 쓰고 교과서를 왜곡해대려 함은 물주들의 이익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가부장적 국가주의는 가족과 국가의 관념적 동일시, 즉 혼동에서 출현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국가는 아버지의 역할을, 때로는 어머니의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선생은 아버지의 격을 입어야 하며, 학교는 학생의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돈 문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당연히 국가-학교와 학생과의 사이에서 돈이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집에서 밥을 주는 것처럼 국가도 밥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집에서 교육의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 것처럼 국가도 비용을 청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가족과 국가를 동일시하고,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가질 것이다. 어찌 소소한 것부터 대가를 바라면서, 국민이 국가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충성하길 원한단 말인가? 어린 아이에게 돈을 요구하며 효도하길 바란다는 얘기와 별 다를 바 아니다.

 따라서 진정 국가주의자라면 무상급식에 찬성해야 한다. 오히려, 전략적으로 생각한다면, 사민주의자들보다 한 발 앞질러 이런 안건을 추진했어야 한다. 사민주의 쪽에서 먼저 제기되었다 한들, 무상급식은 단지 수단에 불과할 따름이며, 같은 제도도 운용의 실질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법이다. 국가주의자들이 오직 그랬어야만, 사민주의적인 공동체-구성원의 연대라는 모델을 국가주의적 형식으로 대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국가주의자들의 현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무상급식에 거품을 물고 반대한 이유도 간단히 결론내릴 수 있다. 그들은 박정희가 '밥을 주었다'는 환상으로 오늘날 그 정도 위치에 올랐다는 사실마저 망각했다. 오로지 파당성이다. 그들은 교회[각주:44]와 자본과 정치권력의 의도에 따라 그대로 행동한다. 그리고 '몸통'이 적대시하는 집단을 악마화시켜 적대시한다. 그들의 실제적 행동은 반-사회주의이기도 하겠지만, 반-국가의 강력한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반-국가, 반-자유주의, 반-민주주의다[각주:45]. 국가주의의 이념은 자기부정으로 자멸한다.


 이제 현실을 조금 더 명확히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마주하던 것은 이념의 논쟁이 아니었다. 한쪽 이념은 이미 이념으로서의 내용을 잃었으니까 말이다. 국가주의는 사상이 아니라 질환이다. 따라서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것은 비판이 아니라 선고여야만 한다. 그러니 소리 높여 외치는 바이다, 국가주의가 파산했음을.




  1. 이하와는 별 관련이 없다. 그냥 문득 생각이 나서 따라 적었다. [본문으로]
  2.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8387 [본문으로]
  3. 아니, 오히려 한 술 더 뜰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 나는 개인적으로 표준어를 매우 좋아한다. 특히 그 억양 없고 건조한 말투를 좋아한다. [본문으로]
  5. 그럼으로써 이 '엘리트'들은 지역에서 분리된다. [본문으로]
  6. 어쩌면 이런 지역-팀으로서의 강력한 소속감 덕에 그의 대표팀이 지리멸렬한지도 모른다. 꼭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겠다만. [본문으로]
  7. 물론 한국에서도 사투리를 '굳이' 교정할 필요성이 크지 않은 집단이 하나 있긴 하다. 이 경우에도 남는 건 '억양'뿐이긴 하지만. [본문으로]
  8. 물론 가족의 이유는 정서적 유대다. 하지만 이 정서적 유대란 대면적 교감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요청하는 것은 영원한 사랑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유대에 있어 다른 절대적인 원인을 찾게 된다. 그 원인으로 창조된 것이 결혼과 혈연이다. 이런 외부적 형식으로 사람들은 안도하고, 망각의 잠에 빠져들 수 있다. [본문으로]
  9. 어쩌면 죽어 있는 양반들까지도 몽땅 [본문으로]
  10. 물론 어느 나라나 가부장제가 존재하긴 했지만, 조선은 병적으로 부계 혈연의 연속에 집착했던 경우다. [본문으로]
  11. 여기서는 인간이 '환생'까지 한다. 만세일계가 아니라 만세일인인 셈이다. [본문으로]
  12. 유대인이 아니니 당연히 바리새인이 될 리도 없다. [본문으로]
  13. 사실, 이제 나는 같이 기도할 준비까지 되어 있다. [본문으로]
  14. 목사들에게는 문화인류학적 가치가 전무하다. [본문으로]
  15. 어? [본문으로]
  16. 어!!?? [본문으로]
  17. 그런데 보기에는 참 좋지 않다. [본문으로]
  18. 이번 위키리크스 건에서 드러났듯이, 이런 분들은 아직까지도 여지없이 친일인 건 마찬가지다. [본문으로]
  19. 소위 '이승만 국부 옹립 프로젝트'가 의도하는 건 4.19의 부정일 것이다. [본문으로]
  20. 얼마 전부터 식민지 시대를 통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아직까지 이는 실패에 지나지 않으니, 그 시절 고생했던 양반들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이다. 이런 친일적 시도는 논리적으로도 허점이 있다. 기술과 의학의 발달에 따라 근대는 통계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은폐한 이론은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으로]
  21. 요사이, 교회의 전도에 '교회 다니는데요'라고 응하면, 전도자들은 '우리 교회/목사가 더 영험하다'라고 답한다지 않는가!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한국적 기독교의 미개성을 정확하게 증명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본문으로]
  22. 이승만의 행위는 이 반-국가에 대한 십자군적인 행위로서 정당화된다. [본문으로]
  23. 권력이 원하는 건 홍위병들의 행동이지 이상(理想)이 아니다. [본문으로]
  24. 각하의 존함과 '한국타이어'를 검색창에 넣어 보세요! [본문으로]
  25.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본문으로]
  26.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위에서 지적했듯, 파당성이다. [본문으로]
  27. 물론 나는 이런 의심은 하고 있다. 소위 그 '지도층'들은 혹 단순한 사기꾼들이 아닌가? [본문으로]
  28. 무턱대고 아들을 편애하고 선호한 세대의 자손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본문으로]
  29. 이를테면 장자 - 미래의 '아버지' - 를 낳은 여자의 경우. [본문으로]
  30. 25.7%도 아니고 7,8개는 얼추 지키고 있으니 '사실상' 준수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본문으로]
  31. '어버이연합'은 유사-아버지 부활을 위한 일종의 강령술 집단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이들 중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만 보아도 단체의 성격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32. 조갑제씨의 급격한 사상 변화는 많은 추측들을 불러왔다. 대공분실에서 당했던 것 때문에 그렇다는 둥 여러 억측이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가정사가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가정해 보고 싶다. [본문으로]
  33.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885044 [본문으로]
  34. 시장만능주의의 관점에서도 그렇다. [본문으로]
  35. http://www.ddanzi.com/news/32773.html http://www.ddanzi.com/news/9516.html [본문으로]
  36. 태극기를 밟았다는 꼬투리를 잡아 한명숙을 고발한 시점에서 희극은 정점을 찍고 있다. [본문으로]
  37. 점점 지리멸렬해가는 노동조합을 언제까지 공격할 수 있는지도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본문으로]
  38. 적의 적은 동지인가? 그런 식이라면 극우는 사노련을 적극 지지해야 한다. [본문으로]
  39. 제대로 잠도 안 재우고 하루종일 굴리는데(물론 제대로 먹이지도 않았다) 애들이 올바로 성장할 리 없었다. [본문으로]
  40. 기독교당을 창당한다는 목사 양반도 이에 대해 한 말씀 하신 바 있다. [본문으로]
  41. 물론 국가주의자의 관점에서. [본문으로]
  42. 물론 이게 법제화되어 있다는 건 의무를 어기는 경우가 의외로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시사하긴 한다. [본문으로]
  43.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별다를 건 없다. [본문으로]
  44. 국가주의자라면 종교재단이 국가의 뜻에 반하여 멋대로 교육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그들이 전교조를 반대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종교재단은 종교 자신을 생각하지 국가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45. 이것은 과거 나치당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분노로 맺어진, 허술한 사상조직을 가졌던 나치는 초기 반-시장, 반-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그들의 경제정책은 실제 상당히 사회주의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집권에는(그리고 권력 유지에는) 자본의 역할이 필수적이었고, 이런 모순의 해결은 당내 좌파의 숙청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