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트 김현회 칼럼(2010년 12월 16일, 링크)에 대한 잡설.
위 김현회 글의 논지를 대강 요약하자면,
1. 아시안컵은 중요한 대회다.
2. 아시안컵에 선수를 차출하는 것은 당연하다.
3. 박지성도 아시안컵 우승을 원한다.
4. 따라서 박지성을 아시안컵 차출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며,
5. 논쟁 자체도 바람직하지 않다.
정도가 되겠다.
여기서 논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발언은 어떤 뜻인가? 일단, 논쟁이 의미가 없는 대상을 놓고 행해진다거나, 논쟁에 별다른 공적 의의가 없는, 그저 사생활에 관련된, 개인적인 문제를 놓고 벌어진다거나 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바람직하지 않다' 는 단지 이런 정도 뜻으로만 보인다 : 결론이 명백하기에 논쟁이 '불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결론은 과연 명백한가? 독자를 결론으로 이끌어가는 논리는 정당한가? 일단 1번을 보자.
아시안컵은 중요한 대회인가? 물론 아시안컵은 동네 운동회가 아니다. 하지만 동네 운동회보다 더 사회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는 대회인가는 의심스럽다. 가령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친선과 화합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런데 아시안컵이 아시아 평화에 기여한다는 건 뭐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상호 이해에 조금이라도 기여했는가, 여기에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과연 친목을 따진다면, 현재의 아시안컵보다는 오히려 동네 운동회에 더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축구는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한국도 마찬가지다). 이건 분명히 아프리카와는 다른 점이다. 전 아시아를 통틀어 어떤 보편적 인기를 구가하는 수준조차 아니다.
아시안컵이 별로 화합의 장이 아니라면, 단순히 아시안컵은 크고 권위 있는 대회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글쎄올시다'다.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는 그렇다.
이 부분에서 김현회의 서술은 유별나다고 할 것 없이 흔한 도식을 따른다. 곧 <대륙컵은 중요하다 -> 따라서 아시안컵은 중요하다> 라는 간단한 연역에 의한다. 그런데 피파 주관의 대륙컵이 어떻게 존재한다고 해서, 그 대륙컵이란 게 반드시 '중요하다'는 결론이 논리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건 아니다. 가령 피파가 무슨 자선축구대회를 전 지구 차원에서 성대하게 개최했다고 하자(뭐 애초에 이런 일을 할 작자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그 대회가 어떻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여겨질까? 사회적으로든, 아니면 단순히 축구 내적으로든.
물론 대륙컵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역이 있다. 유럽이나 아프리카나 남미나.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사정일 뿐이며, 그들의 사정이 꼭 아시아의 사정이 될 이유는 딱히 없다. 김현회의 전개는, 학교에서 배우겠지만, 잘못된 귀납법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제비에게는 날개가 중요하다. 참새에게도 중요하다. 따라서 새들에게는 날개가 중요하다. 따라서 닭에게도 (비슷한 수준으로) 중요하다.>
한국인들은 아시안컵을 경시하였으나, 그것은 미처 그들이 아시안컵의 중요성을 간파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 대회가 현실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그리고 그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상황은 지금에 와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애초에 아시안컵이 진짜 중요한 대회였으면 이라크 애들의 사진 - 이라크는 당시 특수한 상황이었다 - 을 걸어 놓을 이유도 없다. 김현회의 주장은 전형적인 시뮬라시옹의 기법이다. 1
뭐, 시간이 흐르면 아시안컵이 아시아에서도 유럽의 그것처럼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래도 훗날의 이야기지 바로 지금의 이야기는 아니다. '미래를 보고 지금 투자하자'라는 경제학적 이야기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측의 문제이지, 논리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여기서 아시안컵이 '중요해야 하는 대회'라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시아 축구의 권력관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솔직히 나는 한국 팀이나 한국 선수가 반드시 우수해 줘야 할 어떤 필연적 이유 같은 것도 잘 모르겠다. 물론 잘 하면 좋고, 열심히 하면 좋다. 하지만 그뿐이다. 축구가 꼭 한국에서 번성해야 할 이유 따위도 찾지 못하겠다. 어차피 한국의 대중적 지지는 야구에 쏠려 있으며, 축구가 야구보다 우월한 운동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일이다. 한국은 두세 개의 프로스포츠가 흥행할 만큼 인구가 많지도, 자본이 풍족하지도, 우매한 대중들이 들어차 있지도 않은 나라다.
선수차출의 문제에 대해 보자. 선수차출이 규범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각국 축구협회의 권리인 건 맞다. 하지만 권리는 반드시 행사해야 하는 게 아니다. 반드시 모든 필요한 선수를 차출할 당위 같은 건 없으며, 그것은 경우에 따라 다르게 생각해야 할 문제다. 2
여기서 실제 발로 뛰는 선수들의 입장을 고려해 본다면 문제는 약간 복잡해진다. 어쨌든 한국은 예전 같은 독재국가가 아니다. 적어도 축구선수는 국가대표로 의무적으로 뛸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이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다. 그나마 민주화되었다는 이 현실에서도 말이다.
선수는 대체로 국가대표팀에 실제 개인적 목적이 있어 참가할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딱히 볼 일이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불만도 없이 참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국가대표팀에 참가하기 싫지만, 비난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참가하는 경우다. 게다가 발언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운동선수의 의사표현을 오히려 불건전한 것으로 치부하는 한국의 풍토는 진의를 다시 왜곡시킨다. 국가대표는 모두가 원하는 것으로 포장된다. 하긴 극히 대부분이 국가대표를 원하는 건 맞다.
이런 모호한 세계에서 아시안컵은 의심의 중심이 된다. 국민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대회라면 국가주의의 준동으로 선수 개개인의 의사는 간단히 매몰될 것이다. 하지만 아시안컵이라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회'는 팬덤과 대표팀 사이의 대결을, 인습적인 국가주의의 층위에서 쉽게 비난하지 못하게 만든다. 오히려 '우리 모두의 아들'인 박지성을, 적어도 여기서는 보호하는 게 대단히 민족주의적 결단일 수도 있는 것이다. 축구판에 이해관계가 없는, 평범한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3
물론 박지성은, 단순한 언론플레이의 차원이 아니라, 진정 아시안컵의 우승을 바라는 심정으로 국가대표에 참여한다고 봐야 옳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의사는 일단 존중해 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의사를 낳게 하는 독특한 환경이라든가, 그의 의사를 대변하고 싶어하는 몇몇 이들의 생각 또한 쉽게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꼭 선수가 부른다고 와야 하나' 라는 질문을 던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쓸 데가 있는 논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