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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대한 이야기

시간을 달리는 소녀 - 비상적 일상의 미학




  완벽한 글을 쓰려면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작가에 대해, 시류에 대해, 세계를 이루는 술어 하나에 이르기까지. 감독이 잘 때 어느 방향으로 돌아누워 꿈꾸는지 알아야, 화면에 등장하는 선풍기를 어느 철물점에서 공수해 왔는지 알아야, 현재까지 나온 모든 비평론과 철학사조를 모두 다 알고 있어야, 어떤 작품에 대해 온전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경우라면, 적어도 원작소설 정도는 읽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의 개략적인 성향 정도는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작품을 낳은 시공간적 배경은 꿰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럴 시간을 내려면 Wow는 이제 끊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적당한 타협을 선언한다. 나는 이 순간,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을 쓰려는 건 아니다. 라면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만화영화다. 만화는 현실과 다른 연출이 쉽게 가능하고, 그 덕에 '허황됐다'는 느낌을 줄 위험이 크다. 일본영화는 만화를 닮다 보니, 이런 악영향도 많이 받았단다. 이런 '허세'를 괴상하게 승화시킨 '킬 빌'같은 영화도 출현하지만.

  '시간을...' 에서도 비현실적인 연출은 왕왕 등장한다. 가령 주인공인 마코토가 뚱보 남자애에게 깔리는 장면이라던가. 카호의 두 친구가 마코토에게 따지는 장면이라던가. 수많은 '점프'장면들. 하지만 이런 비현실은 화면에 조화롭게 녹아들어가며, 대단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마치 협주곡을 듣는 것 같다고나 할까, 어쩌면 그 연출을 지배하는 어떤 '화음'이나 '리듬'같은 걸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약간의 비현실성은 '만화 나름'의 애교로 넘어가 주자. 영화는 계획적이고 섬세한 화면을 연출해낸다. 캐릭터뿐만 아니라, 일상의 자잘한 소품들도 정감 있게 묘사돼 있다. 마코토의 감정은 - 때로 아무 직접적인 발화가 없어도 - 호소력 있게 전달된다. 장면 장면을 떼어놓아 늘어놓으면, 흡족하지 않는 부분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물론 가장 매력적인 장면을 꼽자면, 마코토와 치아키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 그 중에서도 마코토의 표정이 세 번에 걸쳐 변하는 장면이겠다.

  구성은 결말로 갈수록 실망스러워지지만, 그렇다고 작품의 가치가 (약간은 떨어지겠지만) 엄청나게 훼손되는 건 아니다. 사건들은 대개 있을 법한 일이면서, 적어도 중반까지는 서로 타이트하게 짜여져 있다. 대체로 중간 이상은 줄 만한 점수다.

외계인이라니! 외계인이라니!

  ...이런 것들은 '백문이 불여일견'일 테니, 굳이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지도.



  마코토는 '타임 리프'라는 도깨비 방망이를 얻었다. 설화에서 '도깨비 방망이'를 얻은 소년은 금은보화를 원했고, '데스노트'를 얻은 라이토는 세상을 대개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마코토가 원하는 건 단지,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다. 노래방에서 원 없이 노래를 부르는 거라던가, 가사실습시간에 실수를 안 한다던가, 저녁에 철판구이를 먹는다던가. 그녀는 흘러간 선율에 도취하려, 일상의 악보에 계속 도돌이표를 그려넣는다.

  마코토는 반복되는 불운으로 인해 침울했었다. 그래서 약간의 운만 작용하면, 모든 행복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것은 행복은 일상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거라는, 강력한 가정을 필요로 한다. 사람이 이것저것 과욕을 부린다면, 그만큼 세상이 각박하다는 뜻이다.

  어쨌든 그녀는 일상을 반복시켜 행복을 얻으려고 했다. 그리고 성공하는 듯했다.


  개인이 현재 시점에서 갖는 사회적 위치는, 개인이 쌓아올린 업적으로 이루어진다. 사실 능력 그 자체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창의력을 갖춘 인재, 글로벌 리더 같은 문구는 다 허언이다. 오늘날의 한국 교육은 그냥 그럴싸하게 포장된, 잘난 집 자제들을 수집하는 강박증 환자가 되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인격 역시 쌓이고 쌓인 기억으로 이루어진다. 기억은 경험한 모든 사건의 집적체다. 마코토는 과거로 돌아가면 현재의 나쁜 사건들을 소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고백장면이 보여 주듯, 일단 발생한 과거사는 덮어 버릴 수 없다.

  마코토의 방법처럼, 과거를 물리적으로 삭제하고 시간을 되돌려 놓아도 사건은 온존한다. 그러니 나쁜 기억을 억압하여 마음 한구석에 밀어넣는 것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교과서를 왜곡해 봤자다. 아픈 과거는 여전히 자신을 배신할 뿐이다.

  '시간을...' 에서의 시간여행은 약간의 행복에 비할 수 없는 대가를 요구한다. 과거는 해결되기는커녕 현실을 억압하고, 현실의 자아는 오히려 '리셋 증후군'[각주:1]에 빠져버린다. 마코토는 과거를 삭제할 수 있다고 믿기에, 그녀가 내리는 결정은 고심의 그림자조차 없다. 고민 없이 선택한 일상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그래서 일상은 반복되며 점점 불행해지고, 결국 파국에 빠지고 만다.

  경험한 사건들을, 어느 정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더 나은 미래는 단지 운수로만 이룰 수 없다는 것.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 노력은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밑거름이 된다는 것. 인간이 성장하면서 배워야 할 중요한 진실이다. 물론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가 이것을 자각하며, 또 행동하는 게 아니기에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끝나면 이상의 '교훈'들은 자연스레 관객에게 제시된다. 그러니 '시간을...' 은 성장 드라마의 표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마코토가 빠진 악순환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시사해준다.


  행복한 일상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은,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마코토가 누릴 수 있는 일상의 조그만 행복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환경이 있기에 가능하다. 지금 한국의 여고생에게 '도깨비 방망이'를 쥐어 주면, 과연 '운 좋은 일상의 반복'을 선택할까? 그녀는 아마, 일상의 완전한 파괴를 원할 것이다.

  다시 마코토를 보자. 수업이 끝나면 명문대 진학에 도움이 안 될 야구나 하고, 노래방이나 가고, 시험을 망쳐도 '나 혹시 무능한가?' 라며 자문하기나 하고, 다리가 굵다고 놀려도 '은근히 신경 쓰는' 정도에 그친다. 학벌이 없으면, 외모가 딸리면 최하급 인간으로 낙인이 찍히는 한국 사회에선 어떨까. 덕분에 몰아치는 광신적 사교육과 성형의 폭풍 속에서, 그녀와 똑같이 행동할 수 있는 여자가 있을까.

  그래도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여자들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보면 행복은 어쩌면, 개인의 능력 밖의 문제로 보인다.


  사회가 가지는 특질 역시 개인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의 산업구조는 마코토의 안락한 삶을 보장하지만,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교육제도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과정적으로 성립된다. 시집도 안 간 고모가 주말에 몸이 다 녹도록 자면서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민주화된 환경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현재적 성과들은, 과거의 인민들이 흘린 피와 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또 어쩌면 현재 개도국 인민들의 피와 땀으로 얻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집적체들은, 과거에 빚지고 있으며, 과정적으로 성립한다는 것, 또한 아무 노력 없이 유지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개인사와 유사하다.

  고민 없는 일상의 행복은 결국 불행을 낳는다. 이것도 개인에 있어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완벽한 쾌락만으로 이루어진 현재는 공상 속에서나 존재한다. 민주주의는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는 무언가'로 착각했던 한국인들은, 이걸 절실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방송에서 언제까지나 '오늘은 나이스한 날'이라고만 떠든다면, 내일은 점점 더 나쁜 날이 되고 만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그나마 나았던 시절의 제도들이 점점 붕괴되어간다는 건 유감스럽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의지조차 없어 보여 더 안타깝다. 극에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등장해 간신히 마코토를 구원해 준다. 하지만 우리들의 진정한 현실에서, 신이 나타나 줄지 말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코토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야 할 운명을 지녔다. 그녀가 잠깐 누렸던 행복은, 어쩌면 인류 공통의 무의식 속에서도 존재할지 모른다. 바로 인류가 잠깐 누렸다고 여겨지는 '황금시대', 꼭 그것이다. 행복한 일상만이 무한대로 반복되는 세계, 지상의 천국이다.

  하지만 마코토의 경우를 보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많은 시인, 사상가들에 의해 예고되었던 황금시대 역시, 현실에서는 재현불가능한, 오직 상상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물질문명을 파괴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도, 탐욕에 빠진 인간들은 물질문명을 재건할 것이다. 미래 공산사회에 도달해도, (원시 공산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유재산이 생겨나고 계급은 분화할 것이다[각주:2]. 'Golden Age' 가 정말 다시 와도, 철제 무기를 만들어내는 놈들이 생겨날 것이다. 인류가 에덴동산에 돌아가도, 누군가는 또 선악과를 따먹을 것이다.

그러니 실재하는 곳은 없는지도 모른다

  곧 이상이란 부정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반대로 그것 덕분에 이만큼의 행복이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총탄에 쓰러진 노동자들 덕분에 근로기준법이 생겼고, 사회보장제도가 생겼다. 파리 시내를 행진하던 폭도들 때문에, 오늘에도 권력자들은 조금이나마 대중의 눈치를 본다. 이상은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들고, 투쟁하게 만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동인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삶이 더 황폐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꿈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 ‘만화’는 아이들을 위한 것도, 성장하는 소년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추억할 거리를 가진, 어느 정도 나이 든 사람들에게 외치는 강력한 호소다. 또한 그렇다면, 이 작품이 펼치는 감성은 성취의 쾌감도, 잔잔한 일상에서 느껴지는 흡족함도 아니다. 인류가 끊임없이 흔들어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부끼고 있을, 저 푸른 해원을 향한 영원한 노스탤지어다.






  1. 리셋 증후군 : 컴퓨터가 원활히 돌아가지 않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리셋 버튼만 누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현실세계에서도 리셋이 가능할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 과거 데이터를 '로드'할 수 있다는 작품의 발상은, 비디오게임 강국인 일본의 특성을 반영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본문으로]
  2. 그럴 리 없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