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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대한 이야기

花より男子


 얼마 전 "한겨레" 기사에서,
 
 "꽃보다 남자』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텔레비전을 끄면 환상과 현실의 단절이 비교적 분명한 편이다. 그러니 세련되게 포장된 여성 전문직 드라마보다 사회적 해악이 덜하다고 변명한다면, 우리 준표에 대한 편애일까, 퇴행일까?"

 라는 문구를 읽었다.



 현대라는 말을 쓰면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만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리 모던하지 못하니까. 80년대, 70년대, 심지어는 전쟁 전의 망령까지 떠도는 지금, 90년대의 '초 히트작'을 들고 나오는 것 정도는 복고라고 하기도 뭐한 재생산이다.

 만화책은 어림잡아 한 20권대 중반까지 봤다. 만화 자체는 뭐, 그리 나쁘지 않다. 물론 90년대의 감성으로 바라본대도 유치한 게 어디 가진 않는다. 하지만 만화는, 실사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비현실성을 내포하는 법이다. 그것이 중고딩들을 타겟으로 한, 심심풀이 수준의 만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 '사회적 해악이 덜하다고 변명할 만한' 드라마도 잠깐 봐 볼까 했지만 1화만 보고 말았다. 뭐랄까, 참기 힘들 정도로 엉성한 드라마였다. 구혜선의 연기는 영 어색했다. 비현실적인 배역을 맡아서 적응을 못하는지도 모르겠지만 - 그녀가 출연하는 딴 물건을 본 적이 없으니, 뭐라 단정할 순 없는 노릇이다 - 여튼 그쯤 되면 그 '미모'도 각도빨 화장빨이라고 우기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그 유명한 구준표도 별로 삘이 안 오는 것이, 내가 남자놈 턱선과 복근을 보고 뭘 느끼냔 말이다... 어쨌든 여러모로 적응이 안 되는 물건이었다.

 ...한국 드라마야 원래 엉성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각도빨, 화장빨이다.
우기고 보자.


 '꽃남'의 공식을 살펴보자. 부자 학교에 다니는 서민 여학생이 있다. 학교에는 재벌가 자제에, 꽃미남인 남학생 4명이 있다. 이 '킹카'들은 여학생의 시크함? 뭐 그런 거에 이끌려 그녀에게 목을 맨다.

 겉포장에 쓰여 있는 스토리는 그렇다. 하지만 '꽃남'의 많은 '설정'들을 좀 면밀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그런 '설정'들은 의도된 것이었을까? 개인적으론 애들 장난 같은, 즉흥적 발상에서 시작됐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운이 좋았던지, '꽃남'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덕분에 '꽃남'에 쓰인 구조는 다른 만화책에서 빈번히 쓰이는 도구가 됐다.

 

 기본적으로 신데렐라 스토리의 구조가 있다. 몸통은 다음과 같다 - 별 볼일 없는 여성이 남자를 잘 만난 덕에 성공한다.

 여기서 신데렐라의 노력이나 의지, 선량함을 들먹이는 건 별 의미 없는 일이다. 권력은 어쨌든 남자가 갖는 거란 사실을 잊지 말라. 서민 여자는 그 자신의 힘으로 성공할 수 없다. 여자는 필연적으로 남자에게 기생해야만 한다.

 츠쿠시도 신데렐라다. 그녀는 평범하다. 만화 속에서 그녀의 '성공'했고, '행복'이라고 여겨질 만한 그 모든 것들을 얻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성공과 행복은 츠카사를 전제해야만 성립할 수 있고, 전적으로 그의 재량에만 매달려 있다. 이것이 '꽃남'의 세계가 갖는 기본구조다. 만화는 물론 츠카사의 불변의 사랑을 전제하며, 츠쿠시가 거둔 성공의 허약한 기반을 지지한다.

 츠쿠시는 담대한 개성의 소유자로 여겨질 수 있고, 나름의 인격을 갖고 있는 존재이긴 하다. 하지만 그녀의 인격이 세계 내에서 가치를 갖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 인격이 일반적으로 좋게 받아들여지고 사회적 보상을 부여받아서가 아니다. 단지 츠카사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츠카사개인적인 특이취향 때문에 츠쿠시의 성격이 좋은 결과를 낳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운 좋게 남자 잘 만나서'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비주류들을 또한 눈여겨보자. 신데렐라의 계모와 자매들이다. 신데렐라와 그들은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서로 이리처럼 물어뜯는 존재들이다. 물론 신데렐라는 일방적인 피해자처럼 그려진다. 드물게 착한 애들도 등장하지만,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신데렐라인 츠쿠시 역시 계모와 자매들이 있다. 학교라는 공동체의 일원인 여학생들은, 처음부터 츠쿠시를 물어뜯기에 바쁘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 목적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신데렐라를 밟고 올라 왕자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만화 속의 세계는 '나' 빼고 다 개자식들만 존재하는 비열한 거리다.

 독자는 자신을 츠쿠시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공감을 느낀다. 공감을 느끼지 못한대서야 만화가 팔릴 리가 없다. 그렇게 세상에는 수많은 '츠쿠시'들이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을 주목하라 - 세상에 신데렐라는 하나뿐이어야 하고, 그녀 외에는 전부 계모나 언니들뿐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사람들은 전부 자신이 신데렐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독자는 이것이 잘 꾸며진 허영이라는 걸 눈치채야 한다. 결론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신데렐라란 완전무결한 캐릭터는 사실 허상이며, 현실의 인간은 '신데렐라'와 '나쁜 언니' 두 위상을 적당히 섞어 놓은 애매한 존재라는 걸 말이다.

 오늘의 연쇄살인범 건은 이와 비슷한 경우를 시사한다. 인격에는 선과 악 두 요소가 모두 혼재한다. 통념적인 선악관을 인정한다면, 세계에는 선과 악의 수직선 위에 사람들이 정규분포곡선을 그리며 배열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악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착한 놈이고, 나쁜 놈은 다른 어떤 사람이다. 자칭 '선인'들은 그래서 악당을 찾는 데 혈안이 된다. 자신의 '선함'이 불분명할수록 더 그렇다. 그래서 부시에겐 이라크가 필요하고, 조갑제에겐 김정일이 필요하고, 평범한 일반인들에게는 연쇄살인범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데렐라에게는 계모가 필요하다. 계모와 언니 없는 신데렐라는 상상할 수 없다.



나쁜 아이들 셋.

 이 세계가 상정하는 공동체는, 공동체라고 불리기에도 뭐한 약육강식의 세계다. 만화의 세계는 동화보다 더 참혹하고, 드라마는 그것보다 한술 더 뜬다. 당신을 둘러싼 타인은 다 당신의 경쟁자다. 당신이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인간들은 당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나이브한 애들이든지 - 만화에선 보통 주인공 못지않게 평범한 캐릭터가 '친구'로 등장한다 - 아니면 아예 딴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 인간들뿐이다. 일단 왕자님을 목표로 하면, 서로 피를 봐야 결판이 난다.

 여기서 츠쿠시의 이중성은 빛을 발한다. 아귀다툼을 하는 인간도 가끔씩 성자 흉내를 내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원래' 그녀는 출혈적 경쟁을 경멸했고, 권력에 목을 매는 빠순이들을 경멸했고, 권력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다고 믿는 F4를 경멸했다. 그녀 자신은 아무 야망도 없으며 출세에는 무관심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츠쿠시는 타인들의 질시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또 어쩔 수 없이, 세계 내에서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다 보니 남자를 - 또한 권력을 - 얻게 되었다는 거다. 이거야말로 대단한 사기극이다.

 우리는 공동체의식이 거의 붕괴되어버린 사회에서 산다.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서, 어째서 너는 네놈 자신과 네놈 집구석만 생각하냐는 비판에 대답해야만 한다. 가장 좋은 변명은 이거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어."

 사람들은, 딴엔 최소한의 자존만 기획하며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츠쿠시 자신처럼. 하지만 그녀의 눈으로 본 인간군상의 추악한 모습이,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들의 객관적인 모습이란 걸 잊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보면 츠쿠시의 '정의감'이라던가 '도도함' 이란 건, 온갖 나쁜 속성들을 타인에게 떠넘긴 다음 흘리는 악어의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사람들이 1. 정의라고 할 만한 게 존재하고, 2. 서로간의 투쟁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 여겨야 위와 같은 도식이 성립된다. 이 두 가지 도덕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건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화에서 이 당위적인(어쩌면) 명제들은 위선으로 작용할 뿐이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성경 말씀에 눈물을 흘리곤, 밖에 나와선 태연하게 정반대의 짓을 저지르는 것이다.

 


 신데렐라에 등장하는 마법을 보자. 마법사는 신데렐라에게 마법을 걸어 준다. 마법은 모든 걸 가능하게 한다. 마법은 부엌데기인 신데렐라에게 화려한 드레스와 유리 구두를 준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호박 마차까지 선물로 준다. '꽃남'에도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이 등장한다. 그 마법은 무엇인가? 바로 돈이다.

 돈은 모든 걸 이룩할 수 있다. 벤츠를 타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도, 수학여행을 북유럽으로 가는 것도, 전세기를 타고 영국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 일반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모든 것들을 돈은 그 막강한 권능으로 실현시킨다. 어디 그뿐이랴, 콧대 높은 현대인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것, 잘난 체하던 저 년놈들을 발 아래 무릎 꿇리는 것,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게 하는 것, 이런 엄청난 쾌감도 누릴 수 있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이 '마법'은 물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의 속성을 반영한다. '아니 츠쿠시츠카사의 성격을 갱생시키는 역사적 사명을...' 웃기는 소리다. 과연 츠카사가 그 더러운 성격에, 돈 없고 빽 없고 얼굴 안 되는 놈이었다면 츠쿠시가 관심을 가졌겠느냔 말이다. 만화는 아마 다른 왕자님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어쨌든 만화는 현실세계에서 '물리적으로만' 가능한 모든 마법들을 돈의 힘으로 선보이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나중에 가면 만화의 주제는 오히려 그 '마법'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할 정도니. 이런 돈의 마법은 신데렐라의 그것과는 달리, 12시가 된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신데렐라는 거대한 메시지를 선포한다. "여자의 최대의 성공은 왕자와의 결혼이야." '꽃남'도 마찬가지다. "여자의 최대의 성공은 재벌집 도련님과의 썸씽." 과연 이것은 성공일까? 좋은 것일까? 다원화된 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은 다양한 가치를 수용한다. 곧 무엇이 좋은 것인지 그들 나름의 판단에 맡겨두기로 - 다시 말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개개인의 그 대단한 개성들은 가장 강력한 메시지에 매몰되고 만다.

 최대의 목적은 권력이고, 부가 권력을 가져다 주는 오늘날에는 곧 돈이 된다. 여자들은 직접 벌려는 생각은 일단 접어두시고, 돈이 많은 남자를 만나는 게 베스트다. '꽃남'에는 비판이 없다. 욕하면서 열심히 보는 '막장 드라마' 처럼, 권력욕을 열심히 경멸했으면서도 결국 거기에 매몰돼 헤어나오질 못한다. 투쟁은 곧 일상이 되고,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여겨진 다음 사고가 정지해 버린다.

 2002년, 새로운 시대가 "부~자 되세요!"라는 복음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부~자가 되는 건 물리적으로나 화학적으로나 불가능하다. 하지만 새 시대의 복음은 '부~자'라는 목표를 획일적으로 설정해 놓고, 전 국민이 그곳을 향해 질주하라고 강요한다. 낙오하면 마치 죽음이 기다리는 양. 그런데, 결국 승리하는 자는 누구인가? 더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한 인간들이 99%다.

 여자들은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과연 왕자님을 만날 신데렐라는 우리 중에 몇이나 될까. 츠카사와 연애하는 데 성공할 츠쿠시는 몇이나 될까. 왕자님은 옆 나라 공주님이랑 결혼하지, 굳이 서민들을 보살필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백 년 가야 한 번 내려올까 말까 한 동아줄을 붙잡으려 진흙탕 싸움을 벌이다, 결국 전부 낙오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만화는 독자들을 모두 자신이 '성공한 츠쿠시'인 양 착각하게 만들어버린다. 재벌집 도련님한테 '하악하악' 대기보다, 재벌이 독점하는 구조를 박살내는 편이 훨씬 '경제적'일 테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사회학적으로 봐도 그렇지만, 미학적으로 봐도 '꽃남'은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다. '꽃남'은 히트 칠 만한 '설정'이 중심이 되는 만화지 작화나 장면 연출, 특히 스토리에 매진하는 만화가 아니다. 캐릭터는 나름 참신할지 모른다. 하지만 빈약한 이야기 구성 속에서, 그 잘난 캐릭터들은 이내 진부한 면을 드러낸다.

 만화의 직계인 몇몇 드라마들, 사생아 정도로 여기면 어떨까 하는 귀여니의 '그 놈은 멋있었다('늑대의 유혹'이였던가...?)' 에서 별 발전이 보이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한국판 드라마에선 실사가 만화만큼이나 유치함을 추구하니 '손발이 다 오그라들' 지경이다.

 더 문제되는 건 '꽃남'이 낳은 수많은 아류작들이다. '꽃남' 이후 여주인공 하나와 꽃미남 몇 놈 등장시키고, 처음에 짜놓은 특이한 설정과 '흥행요소'만으로 뽕을 뽑으려고 하는 만화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초반 설정빨이 떨어지면, 이야기가 치명적으로 다 똑같아진다.

 한국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에 백혈병에 고부갈등에 삼각관계 안 등장할 수 없듯, 이런 만화들도 여주인공과 남자애들 몇몇 얼기설기 엮다 출생의 비밀 등장하고 남자네 시어머니 나오고 가족관계가 어쩌니 저쩌니 남자애의 썩은 마인드를 구원하네 마네 하고 이어지는 전개가 거의 공식처럼 성립해 있다. 점점 가면 갈수록 어디서 봤던 얘기 또 나오면서 내용만 질질 끄는 게,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고 우리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드라마광이라면 '베토벤 바이러스' 같은 '명품 드라마'를 원하지, 불륜에 고부갈등으로 떡칠되어 있는 '막장 드라마'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막장 드라마'가 시청률 고공행진을 벌이는 걸 보며 유해하다, 적어도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또 드물 것이다. 그러니  내가 '꽃남'을 보며, 또 그것이 낳은 '풍조'를 보며,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 이해해줬으면 한다. '나나'도 히트했고, '노다메 칸타빌레'도 히트했고, '하니와 클로버'도 히트했다. 노력해서 잘 만들면 얼마든지 히트할 수 있고, 명작들은 대중들도 쉽게 외면하지 못한다. 고만고만한 작만 찍어 내서 적당히 벌어 보자는 사고는 거지 근성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덧붙인다. 위 기사의 필자가 갖고 있는 딜레마는 나에게도 있다. '디워'를 말할 때도, '추격자'를 말할 때도, 사실 '굳이 이런 것까지 파고들어 이 물건 비난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고민이 들곤 했다.

 솔직히 작품을 논하면서 '사회적 해악'이니 '반가치성' 이니 하는 작품외적인 요소를 들어 비판하는 것은 치졸하지 않은가. '리어 왕'의 '바람직하지 못한'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각색한 게 무려 한 세기 동안 흥행했다는 사실은, 지금 와선 원작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는 웃음거리일 뿐이다. 게다가 비평에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반대로 사회에 매우 위험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 검열이 악용되는 사례 - 아니, 대개 악용된다고 보면 맞다 - 를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내게는 좀 관용의 정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판단은 각자의 이성과 감성에 맡긴다면 어떨까. '추격자'를 보며 '또 골빈 영화 하나 나왔네. 관객들이 알아서 판단하겠지'라고 생각한다면. '텔미'를 보고 '사람들이 요새 많이 심심했나봐. 그냥 한두 번 재미 붙이고 말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이런 얄팍한 도전에 쉽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마음놓지 못하겠다. 내 깜냥에 사회는 심각한 위기상태고, '추격자'를 본 사람들은 범죄자를 처형하려고 날뛸 것이며, '텔미'를 듣는 사람들은 물신주의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리라 상상하고야 만다. 나는 그 정도로 오늘날의 대중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간통죄의 존치를 주장하시던 노교수님을 기억한다. 공동체의 붕괴는 심각하고, 통합은 우리 시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때론 강제적인 수단을 쓰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의 정신적 문제란 것에 대해선 공감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방법은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꽃남'에 대한 나의 비판을 본다면, 마찬가지로 지나친 방어심리라고 평가하게 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검열제도처럼, 나의 이런 '까칠한' 태도 자체가 부작용이고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요새 사람들은 너무 여유가 없고, 참을성이 없다. 그렇기에 김구라는 올해 들어 갑자기 욕을 먹기 시작하고 (안 보면 그만일 텐데), 흉악범은 죽여 버려야 한다고 아우성들이고, 건물에서 농성하는 시위자들은 여럿 죽여서까지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녕 갈피를 잡기 어려우면, 그냥 다 내 '꼴리는 대로' 판단해 버리고, "신과 역사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건 또 어떨까. 다름아닌 프랑코 총통이 했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