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말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구소련이 '자체모순'에 의해 붕괴했다. 진정한 '역사의 종말'이 다가온 것이다. 레닌그라드는 혁명 전의 이름으로 바뀌었고, 섬나라 쿠바만 나찌 광신도들에게 포위된 레닌그라드로 남았다. 종말의 물결을 거부한 나라가 또 하나 있긴 한데, 바로 북한 되겠다. 그들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개명천지가 열리고,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만국은 곧 부유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난의 행군'을 시작해야 하는 나라가 또 있었으니, 바로 방금 전까지 초호황을 누리던 자본주의 국가 일본 되겠다. 강만수 전 장관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통화주권 어쩌고가 얼마나 힘을 발휘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행군은 시작되었다. 물론 일본에서는 감자농사 흉작으로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한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럭저럭 먹고는 살았다.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윤상의 '달리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후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으로 끝난다.
그런데 일본의 '행군'은 도무지 끝이 나지 않았다. 상당히 최근에 와서는 '드디어' 굶어 죽은 인간이 나왔다. 그는 '주먹밥을 먹고 싶다' 는 말을 남겼다.
다카하시 루미코의 단편집들 표지에도 이런 '행군'이 그려져 있다.
이 편들은 단편집이란 말에 걸맞게, 서로를 아우르는 기막힌 공통점 같은 건 없다. 단지 작가의 인성이 작품들마다 어떤 유사성을 부여할 뿐이다.
앞의 3작은 버블이 정점에 달했을 때 등장한 반역적인 물건들이다. 약간은 음울하고, 조금은 말세론적 느낌마저 풍긴다. 앞의 2작품은 전형적인 멜랑콜리라고 해야 하나, 우수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렇다. 3번째도 죽음과 아주 미묘하게 맞닿아 있다. 하지만 작가는 능숙하게 무난한 결말을 선사한다.
타이틀인 'P의 비극'은 일견 도시에 대한 반기다. 이 때부터 일본에 본격적인 불황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다. 주목할 점은 아랫집 아줌마의 두 얼굴이다. 아니, 세심한 독자라면 또 다른 얼굴들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학적인. 비극의 주인공은, 사실 펭귄이 아니라 그녀다.
5번째는 그냥 무난하다. "저희 집 앞은 쓰레기장이 아니었어요." 여섯 번째에서는 갑자기 먼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하지만 추억은 이상하게 뒤섞여 버리고, 남아 있는 건 현실이다.
"전무의 개"의 시대에 오자, 모든 인물들이 공유하는 테마가 등장한다. 바로 불황이다. 단편들은 불현듯 어떤 결집성을 띄기 시작한다.
'방랑가족F'에서는 파산이 등장하고, '당신이 있는 것만으로도'에서는 도산이, '열세 살 아저씨'에서는 해직의 공포가 사람들을 지배한다. 게다가 아무 문제도 없을 듯했던 - 고부갈등을 제외한다면 - 가족이란 공동체는, 이제 본격적으로 삐걱대기 시작한다. '전무의 개'에서 가족은 분열의 조짐을 보이더니, '방랑가족F'에서는 일가 동반자살을 시도하고, '거실의 러브송'에선 유령만 남아 있다, '열세 살 아저씨'에서는 둘로 찢어진다.
여기서 흥미롭게 보아야 할 사람은 가장(家長)이다. "란마1/2" 중 '도박왕K'란 에피소드에서 '수컷'들의 속성에 대해 나름대로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기도 했던 루미코씨다. 그러나 그들 권위의 이런 갑작스런 추락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남자들은 급작스레 소심해진다. 사실 소심해졌다기보단, 그들을 둘러싸던 허세가 무너진 탓이겠지만.
제대로 하는 일 없는 인간이라며 신나게 갈굼당하다('전무의 개'), 실패자가 되고('방랑가족F'), 무능력자가 되고('당신이 있는 것만으로도'), 변화에 정신 못 차리던 중에('거실의 러브송'), 끝내는 소년기로 퇴행('열세 살 아저씨')한다.
이것들과 완전히 서로 떨어진 에피소드는 코바토가 등장하는, 마지막 것뿐이다. 코바토씨, 당신은 왜....
코바토 : "남편은 의사고...."
아 그렇군요. 슬슬 동남아 외국인도 조연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작가의 평가는 '일본인들보다도 훨씬 착하던데?' 정도가 되겠다. 심리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대화자간의 사회적, 성적, 인종적 유사성이 아니며, 심지어는 상담자의 언어능력 또한 아니라는 교훈을 남기면서.
"붉은 꽃다발"에 이르자, 사람들은 나름대로 '행군'에 적응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애들은 비뚤어지고, 마누라는 퉁명스럽다. 자식들은 이제 소통불가능의 외계인 같은 존재가 된 것 같다. 아줌마들은 이제 남편의 범주에서 탈출해 버린다. 때맞춰 적절한 우상이 등장했으니 바로 '욘사마'다. 그러자 아저씨들은 어처구니없는 환상에 빠지기 시작하는데, 뭔가 목표가 점점 현실적으로 변화(자식뻘인 여사무원 -> 여고딩(원조교제) -> 첫사랑의 그녀 -> 미용실 직원)한다는 점에서 더욱 무시무시하다.
지옥같이 느껴졌던 조금 전 시대와 비교해도 훨씬 나쁘다. 누군가는 회사에서 아무 이유 없이 짤리고, 누군가는 심지어 굶어 죽는다. 사람들은 우수를 느낄 틈도 없이 불행해진다. 그러나 다들 꾸역꾸역 살긴 사는 것이다.
루미코의 작품들은 사회의 변화와, 개개인의 삶 속에 내재된 어떤 특질을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그녀는 불황이라는 일차적인 원인과, (어쩌면)그것에서 파생되어 나왔을 여러 사회문제 - 실업, 생활수준의 하락, 가정의 붕괴, 가장의 권위 추락, 이산가족 등 - 를 적극적으로 작품 안에 끌어들인다.
초창기의 3작에서 '버블경제 속의 본능적 공허감' 같은 걸 읽어내자면 무리한 해석이 될까. 어쨌든 90년 이후 작들에선 확실히,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리저리 쓸려다니는 개인들의 모습이 있다. 그들 앞에 닥친 변화의 모습은 다양하고, 그들의 대처 역시 다양하게 그려진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그런 행동양식이 매우 실제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실제적인 이유는,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이 실제적인 인격을 갖췄기 때문이라는 것. 두 가지다. 오늘날 수많은 문화상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라. 그들은 과연 인간들처럼 행동하는가?
만화나 영화나 드라마나 할 것 없이, 현실에서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공상적인 인격의 소유자들이 오히려 대다수를 이룬다. 심하게는 - 요새 '막장 드라마'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듯 - 아예 인격이란 게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러니 우리들이 보며 사는 건 인간들이 아니다. 항상 브라운관 안에서 괴물들만 보고 사니, 현실의 인간마저 괴물이 되지 않을까 무섭기까지 하다. 덕분에 루미코씨가 만들어 낸 '현실적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들에게 더 귀중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미코 단편집 속 인간들의 '대처'는 개인과 가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근본적 원인을 뜯어고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이 개인이나 가족으로 남아서는, 영원히 홀로 발악하다 인생을 마칠 도리밖에 없다. '죽으면 이제 우리 다시 못 만나'는 것이다('방랑가족F' 중의 대사).
하지만 그런 비극마저도, 어쩌면 세태의 정확한 반영이라고 해야잖겠는가. 또 이러한 개인의 비극들은, 어쩌면 펭귄의 비극까지도, 예술의 소재가 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러니 나는 이 작품들에 찬사를 보내야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