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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수치심, 그리고 관용

 역사엔 여러 면이 있다. 그것 덕분에 역사는 재미있다. 그리고 그것 덕분에 어렵다.

 플라톤은 말할 것이다. 독자는 기록의 관점들을 초월한, 역사적 진실을 캐내야 한다고. 푸코는 말할 것이다. 진실은 없고, 각기 다른 관점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기록에 접근해야 할까?

 누구의 의견을 따르건,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번의 소위 '좌편향 역사교과서 시정' 에 관한 사건에서, 우리는 '관점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았다. 사실 '좌편향' 금성교과서도, '뉴라이트' 교과서도, 어디서도 대놓고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단지 사실을 편집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 '서로 시각이 달랐을 뿐이야' 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61639 - 모처에 연재되는 조봉암 평전. 만약 30년쯤 지나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다면, 일제시대는 '발전과 번영의 시대'로 묘사될까?


 상앙의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사서에는 그의 전체주의적 개혁이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인민을 가혹하게 부렸으며, 결국 '꼴 좋게' 보복당한 전형으로 그려진다. 사마천은 상앙의 행적을 나열하며, 그의 더러운 인간성을 비난한다. '시체를 뜯어먹었다'란 개연성 없는 이야기도 나도는 거 보니(출처는 대체 어딘지...) 그에 대한 증오가 심하긴 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질문을 던져 보자. 과연 모든 사람들이 그를 지독히 증오했을까?

 단지 광해군의 예처럼, 오직 '기록하는 사람들'만 그를 싫어했는지도 모른다는 걸 염두에 두자. 흔히 말하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대개는 승자의 관점만 있고, 패자의 관점은 찾기 힘들다. 그리고 어차피 승자나 패자나 전부 권력자이기 때문에 -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 사이의 정치다툼이 '역사'의 주요한 내용이 되기에 - 권력자 아닌 민중의 목소리는 역사 속에서 거의 들리지 않는다.

 어쨌든 상앙에 대한 일차적인 기록은 전부, 그를 제거한 적들이 남긴 것이다. 사마천도 이해심이 깊었다뿐이지, 이념적으로 상앙에 공감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상앙은 이래저래 불리한 입장이다. 그래도 사마천은 패배자 쪽에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팩트도 여럿 남겼다. 상앙이 임관할 때의 일화, 그리고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신법체제를 좋게 보는 백성들도 많았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물론 상앙은 변태라서, 신법이 좋다고 떠드는 인간들도 모조리 유형을 보냈다...


 사실 법집행이 너무 엄격해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면 피곤한 건 서민이 아니라 권력층이다. 한국일보답지 않은 대히트작인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902/h2009022606180621950.htm 기사를 참조하라. 법을 안 지키는 건 정부고 기업이고 정치인이지, 서민들은 꼼짝없이 법을 잘 지키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서민들은 법을 잘 지킬 수밖에 없다. 안 지키면 무사하지 못하니.

 도덕과 형법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강제력이겠지만, 다른 하나를 꼽으라면 명확성이 된다. 보편도덕을 발견했다고 외치는 사상가들마다 도덕의 구체적 내용이 다르다. 뭉뚱그려 말할 수는 있지만, 도덕은 정확히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단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형법은 범죄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처벌 방법을 예고한다. 일부러 풀어 주지 않는 한, 빠져나갈 구멍을 찾긴 힘들다.

 검찰의 권력이 막강한 건 수사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수사권이 종횡무진 행사된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 남성의 2/3은 불법 다운로드죄로 벌금형에 처해질 것이다. 뭐 야동이야 안 보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법 집행이 빡빡하면 권력자들에겐 아예 권력을 제멋대로 사용할 여지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권력자로 사는 의미가 없다!

 원래 중국의 전통은 "형은 위로 대부에게 미치지 못하고, 예는 아래로 서인에게 미치지 못한다" 였다. 지배층은 '예'란 걸로 적당적당하게 다 넘어가는데, 상앙은 이 특권을 박살냈다. 지배층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갈구고 어기면 형을 때리니, 살 맛이 나지 않읍니다. 상앙, 이런 뭐 찢어죽일 놈이 따로 없겠다. 모르긴 몰라도, 캐서민들보다는 높으신 분들이 상앙을 훨씬, 훠얼씬 더 증오하지 않았을까. 상앙은 종부세에 비할 바 아닌 말뚝을 귀족 분들 가슴에 박았던 거다.


  그렇다면 상앙 이후의 제도개변도 좀 달리 볼 수도 있다. 한고조가 약법삼장을 발표했을 때, 부역에 시달리던 서민들은 좀 기뻤을 거다. 그런데 '살인과 절도 빼곤 맘대로 해도 되는 세상'이 열렸다고, 지방 유지들은 오히려 훨씬 기뻐하지 않았을까? 이건 뭐 권력이 사또한테서 대감님 댁으로 넘어간 셈이니까. 하지만, 기록은 그렇다치더라도, 실제로 보통 사람들 사는 게 대체 어떻게 변했을지, 추측하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노무현이 정부 이름을 참여로 짓고 이런저런 제도를 만들었다고, 국민의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었느냔 말이다. 안타깝게도 간판 갖고는 알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어쨌든 예와 도덕이 만인의 것임을 선포한 공자를 엿먹이며, 그의 후계 유학자들은 고래의 이분적 제도를 열심히 옹호했다. 쌍놈들은 존나 패고, 높으신 분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고져스한 삶을 즐기시는 거다. 지배계급은 절대, 절~대 형벌을 받지 않았다. 가끔씩 귀족들에게 정말 형이 선고될 때도 있었는데, 그건 '그냥 알아서 죽어'란 뜻이었다.

 귀족들은, 형을 받는 건 귀족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수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드시 죽을 필요도 또 없어서, 거금을 내면 방면되는 나이스한 탈출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마천은 집안에 쩐이 없었다. 그는 거시기가 짤리기 전에, 알아서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양반은 죽은 셈치고 그냥 살기로 했다... 당대의 관념으로 보면 캐 쪽팔리는 이야기다.


 오늘 세상을 보노라면, 인간 사회란 별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위에 한국일보 기사에도 나오지 않았는가. 오늘날에도 법이란 없는 놈들한테만 들이대지, 있는 분들에게는 전혀 적용되지도 않는다. 예전의 대부-서인은 아닐지라도, 그와 비슷하게, 얼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는 건 아닐까? 요새 돌아가는 걸 보면 꼭 그럴 것 같다. '미네르바'는 왜 사문화된 법에 의해 기소되었는가?

 이번 정부 들어 얼마나 많은 권력자가 처벌되었는가? 내가 알기론 한 명도 없다. 법이 자신의 죄과를 치르게 만든 대기업 회장님들이 몇이나 되는가? 역시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허황된 집시법, 도로교통법 따위로 처벌을 받았는가? 법정에 선 회장님들 손가락 발가락을 모두 합쳐도 그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대법관은 마땅히 할 일을 했다면서, 어째서 국회에서는 위증을 했는가? 사퇴하지 못할 정도로 당당하시다면, 어째서 사람들을 피해 개구멍으로 드나드는가? 무지한 나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소속사 대표는 무고하다며, 어째서 입국하여 문상도 오지 않는가? 떳떳하다는 그 잘나신 분들은,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포털 댓글들을 전부 막아놓았는가? 이것도 나의 무지의 탓으로 돌려야 하나!

 심지어 얼마 전에는 범죄자들이 고발자를 기소하질 않나, 법원은 또 거기에 유죄를 때렸다. 이런 건 전례도 찾기 힘들 노릇이다. 그렇더라도, 적어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이 대단한 법리는 거의 '관습헌법' 수준의 형성력을 갖췄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내 깜냥에야 관습헌법이란 건 말짱 개소리지만, 잘나신 헌법재판관님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건 경국대전보다 2000년은 더 오래 된 형사법의 대원칙 아닌가! 아, 지강헌은 정녕 위대한 재판관이었다...

 하지만 그 옛날과 정녕 변하여버린 게 있으니, 그것은 바로 수치심이다. 고대의 권력자들은 백성을 착취하는 악당이었을지는 몰라도, 형을 받는 게 수치스럽다 하여 자결할 정도의 용기는 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사마천처럼 닥치고 죽은 것처럼 묻어 지내는 자세라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권력자들은 어떠한가? 사법의 권위를 길바닥에 내팽개쳐 욕보이고도 어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가 있는가! 꽃다운 나이의 여인이 목숨을 끊었건만, 누구 하나 나서서 사죄하는 인간이 또 있느냔 말이다. 이런 후안무치함에 양식 있는 사람들은 다들 분노하면서도, 아무도 그들에게 죽으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또 그런 걸 기대하지조차 않으니, 이런 무던함이야말로 인간세가 지독한 야만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유일한 증거가 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