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래 검찰이 내놓았던 여러 명언들 중 최고봉은 단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가 되겠다. 이 기막힌 문장은 영원히 전설로 남아 기려질 것이다.
존재와 당위를 구분하는 것으로 과학은 출발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정의에 대해,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규범에 대해 두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1. 규범이란 무엇인가?
2. 규범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독일의 고전법학은 1번 문제만 연구하며 나날을 보냈다. 법질서란 무엇이고, 헌법과 일반법률은 어떻게 다르고, 법규는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고... 라는 등등의. 이런 '법학'은 진정한 사회학의 한 분야라 할 만하다.
당시 독일인들은 2번 문제는 윤리적인 문제로, 학문적으로 다루기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법 만드는 건 법 만드는 인간이 알아서 할 문제지, 학자들이 개입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법학의 몰가치화에는 나름 '실용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독일의 정치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국가에서 "법은 어때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었고, 때로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군주의 의사와 같으면 하나마나한 일이 되고, 군주의 의사와 다르면 반체제활동이 되어 버리니까 말이다.
어쨌든 법규범에 대해 구조적으로 분석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국가가 있다. 국가권력이 있다. 국가권력은 법을 만든다. 법은 국민에게 적용된다. 끗.
말하자면야 그렇겠지만, 현실 세계는 도식처럼 간단한 게 또 아니기 때문에 도식은 또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긴 하다. 그래도 사실이 대체로 그렇다는 건 확실하다. 독일인들의 방식은 구조화를 통해, 법의 해석과 집행을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생각하지 않는 대신에.
솔직히 좀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인 면이 있다. 총통 각하께서 결정하는 대로 고속도로 놓고 대운하 파면 빠르고 간편하다. 그런데 국회라고 만들어 놓으면 매일 싸움질만 일삼으니 이거... 가치판단을 배제시킨 정의론은, 정부활동의 효율성만을 따진다면 월등히 우월하긴 하다. 정부의 결정대로 따르기만 하면 그것이 곧 정의니까. 온 국민이 아무 의심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다. 결국 독일의 궁극적 결정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른 히틀러가 되었다.
파시즘은 전쟁을 낳았고, 전쟁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서, 독일 학자들은 이제 2번 문제, '규범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도 고민해보기로 했다. 법학은 단순한 법기술 이외에, 정의라는 이름의 틀도 함께 사용하게 된 것이다. 현대 국가의 정의란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자유민주적 질서' 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라는 명제는 다음의 두 가지 전제를 내포하는 게 된다.
1. 검찰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조직이다.
2. '성공한 쿠데타'는 곧 현재의 국가권력이다.
1번 전제를 보자. 심지어, 검찰은 실제로 독일의 구법학파의 이론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요새 유행하는 '영혼이 없는' 이라는 수식어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사례다. 검찰조직은 정부권력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개는 주인을 물 수 없다.
2번 전제를 보자. 이성계는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왜 처벌받지 않았는가? 단순히 '성공했기 때문에' 라고 말하면 오답이고, '계속 성공하고 있었기 때문에'라고 답하는 게 정답이다. 왕망의 단명정권이나,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를 떠올려 보라.
조선왕조는 500년을 갔고, 이성계 살아 생전에 '(몰가치적) 정통성'의 변경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주인이 지금에 와서도 계속 주인 됨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과거의 성공한 쿠데타'를 현재에 적용할 수 없을 거다.
상식적으로는 87년 개헌으로 5공화국의 '정통성'은 끝난 게 맞다. 헌법재판소도 6.10항쟁으로 5공화국은 땡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87년 사건도 92년 사건이나 부마항쟁 같은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고, 5공화국 정권은 약간 모양만 바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까놓고 말해 전통의 후계자가 노태우고 김영삼이며, 공화당이 민정당이고 민정당이 민자당이고 신한국당이잖는가.
그렇게 따지면 쿠데타는 1995년 당시에도 열심히 '성공'하고 있는 셈이 된다. 검찰 입장에서는 정통 정부 수립을 걸고 넘어지니 가소롭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어쩌다가 '국민'들의 심한 반발에 전통을 사형시키네 노씨를 무기징역에 처하네 쌩 난리를 쳤어도, 결국 유야무야 넘어가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노라면, 쿠데타의 정신은 여전히 사멸하지 않았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깨갱'했던 지난 10년 사이에도.
독일의 고전법학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전제권력에 아부했고, 의도야 뭐 그렇지 않았겠지만 파시즘의 출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한국의 '영혼이 없는' 법기술자들도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비로소 움츠렸던 날개를 펴고 있다. 오늘의 의회 쿠데타를 보며, 또 어제의 검찰총장의 망언을 보며, 검찰조직이 과연 잃어버렸던 주인을 만났음을, 파시즘과 군부독재의 망령이 지상에 이제 현현하고 있음을 새삼 알아차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