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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믿으리라, 도민을 위하여


 롤러코스터 남녀탐구생활 결혼준비편을 보니,  "땅 불 바람을 외치면 레이저가 쏘아올라갈 것 같은 촌스럽기 그지없는 왕 반지..." 라는 나레이션이 등장한다.

 나와 나이가 어슷비슷한 또래들은 기억할 것이다. 레이저가 쏘아올라가면, 요 엉아가 나타나 지구를 지킨다.



 70년대 박통께서는 환경오염에 관한 기사가 처음 신문에 실리자 화를 버럭 내셨다던데 - 물론 기업이 환경을 오염시켰다는 거에 '분노'하신 건 아니다 - 나는 한창 환경문제가 한국에서 이슈화될 때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외산 만화영화들은 상당수가 환경에 관한 테마를 채용했는데,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위 만화도 대충 그런 내용이다.

 덕분에 우리 세대가 환경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냐 하면 딱히 그건 아닌 것 같다. 물론 생태주의 같은 거에 물들어 반기업적 사고를 하는 인간들도 있기야 있겠지만 말이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들은 그런 소수를 두고, '어린 시절 만화영화 때문'이라고 원인을 결과에 끌어다 맞추지 않을까.

 어쨌든 우리는, 우리 인간이 지구를 파괴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인간이 어쩌면 인간 자신도 모를 화학적 기제로 인해 인간을 해칠 수 있다는 걸 안다. 실제로 우리는 현실화되는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산다. 작년 광우병이 히트한 것에 질세라, 올해는 돼지독감(신종플루)이 전국을 휩쓸었다.


 노대통령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러니까 노태우 정권은 임기말이 다가오자 땅부터 파고 봤다. 그 자체로는 뭐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졸속 중 졸속으로 시행된 경부고속철이 대표적이다. 이후 프랑스와의 정상회담에서 선보인 김영삼의 'TGV-직지심경 빅딜' 드립은 한국외교사상 최악의 희극 중 하나로 남았다.

 그리고 '호남발전' 또는 '호남민심 어쩌구'로 개시된 새만금간척사업은 그 자체로 최악이었다. 사업은 시대를 역행하는 황당한 목적과 발상으로 시작되었다. TV는 가을이면 항상 수확기를 모는 노태우를 방영하며 '대풍'이 마치 성군의 업적인 양 찬양했지만, 쌀이 이제 전혀 모자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남아돌기 시작했다는 분명한 진실은 무시하고 있었다.

 개발독재는 빵으로 그 모든 걸 살 수 있다 믿었다. 더 많은 빵...이 아니라 쌀을 위한 새만금사업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근거를 상실해 갔다.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미쳐 있었던 한국인들에게, 몇몇 외국어 잘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사실은 황당한 것이었다. 그 잘난 선진국에서는 더 이상 간척사업 같은 짓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에는 환경vs개발이었던 것 같은데, 좀 지나자 개발의 논리도 침몰해 버렸다. 대체 경지가 간석지보다 우월할 것도 별로 없었을뿐더러, 시간이 지날수록 간석지의 가치는 상승하고 경지의 가치는 추락했다. 환경론자들의 주장은 의외로 디테일했고, 개발의 논리는 담론이고 논거고간에 제대로 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사업을 계속할 이유는 사라져버렸고, 정부는 손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그 미친 짓은 결국 재개되었다. 제방은 완성되었고 물을 빼냈다. 간석지는 사라지고 있으며, 만들 필요도 없던 땅이 생긴다. 그 땅은 농지로 쓸 이유가 어디에도 없어 공장으로 쓴다지만,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 안 그래도 요새 세종시 때문에 시끌시끌한데 - 그곳에 들어올지는 미지수다. 이제 머지않아, 20세기에서 21세기에 걸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삽질극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하는 것이다[각주:1].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전북에서 20년을 살았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이권이다.

 흔히 산 위에서 구르기 시작하는 눈뭉치에 비유하곤 한다. 고속철도 마찬가지고, 대운하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 모든 토건사업이 그렇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늘 그렇듯, 사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완전한 황무지며, 하이에나 몇몇만 침을 흘리며 배회할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업의 이름이 생기는 날엔, 우리 모두 긴장 타야 된다. 흔히 기공식에서 테이프 자르고 축포 터뜨리는 걸 일의 시작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니다. 그런 작태는 사실, 일이 모두 마무리되었음을 축하하는 기념행사인 거다.

 기획이 생겨날 때부터 엄청난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다. 전쟁은 바로 이 때부터 시작이다. 야수들은 치열하게 눈치를 살피며 수중전을 벌인다. 계획은 과연 성사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성사될 것인가? 그것을 살펴야 한다. 그 계획대로 공사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건 그들에게 부수적인 문제다. 어째서 그런, 사람의 생명과 국가, 사회의 이익이 달린 중요한 문제를 부수적이라고 하는가? 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들의 머릿속엔 오로지 돈밖에 없기 때문이다.

 계획이 완성되어 정부가 계획을 선포하면 게임 끝이다. 그에 따르는 설계, 시공, 감리는 모두 돈이다. 엄청난 돈이다. 절대 정부는 지불을 유예하지 않는다. 그 시점에서 돈은 이미 지불된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말이다. 대운하라고 뭐 다르겠는가. 각하가 당선되셨을 때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물론 각하께서는 국민이 반대하면 안 하신다고 하셨고, 실제로도 대운하는 안 하고 계시지만 말이다.

 한 번 시작된 사업은 그래서 절대 멈출 수 없다. 공사를 중단한다? 이건 줬던 돈을 다시 뺏는 짓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개가 뜯어먹을 풀뿌리 민주주의제는 이권과 엿가락처럼 달라붙어 있다[각주:2]. 좀 암담하게 말하면, 자치단체, 의회는 한나라당이고 민주당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자본권력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일 뿐이다[각주:3]. 도지사, 시의원님들께서 '몸통'에게 가해지는 이런 불공정한 작태를 두고 볼 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믿는다. 얼마나 시의원들 중 조폭들이 다수 관찰된다는 근거없는 낭설이 횡행하고, 단체장들은 다들 금권과 영합하여 자기 잇속 채우기에만 급급하다는 소문이 떠돌아도, 나는 믿는다. 그래도 개중에 멀쩡한 인간이 있기는 있지 않겠는가, 하는 걸 말이다. 그래서 투표장에도 꼬박꼬박 가는 거고.

 그리고 나는 역시 믿고 싶다. 역시 우리 고향 지역[각주:4]의 높으신 어르신들은 선량하셨을 테구나 하고 말이다. 우리 동네 분들이 행여나 공돈을 받아먹거나 뒤를 봐주는 대가로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몇몇 낮으신 분들이야 그냥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하셨던 거고, 설마 빵부스러기나 받아먹으려는 심산으로 더러운 수작질을 자행하시진 않으셨으리라 믿는다. 비록 별의별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이를테면 삼성-부산 음모론[각주:5] 따위) 가지각색의 대중 선동질과 이미 모조리 반박될 대로 반박된 허위 논리와 그 동안 당한 만큼 떼어먹자는 보상심리와 보복심리가 온 지역을 휩쓸었음에도, 나는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다.

 오직 끔찍한 도민 생각으로 하여 당시 도지사님[각주:6]께서는 머리를 자르시지 않았겠는가... 설마 '칼로 목을 댕강!' 이라고 알아듣지는 않았겠지, 삭발을 하셨다. 모 시의원께서는 무려 혈서를 쓰셨다! 주민들을 어떻게 '자발적'으로 동원하여 서울에 상경투쟁도 하고, 그 셀 수 없는 난리판을 벌인 끝에 그들은, 아아 전북 도민 여러분은, 결국 승리했다.

 노무현 이 망할 작자는 공사를 알음알음 강행했고, 대법원은 '환경파괴? 몰라 그거 뭐야 무서워'라는 요지의 판결[각주:7]로 정부의 행각을 정당화했다. 사무관들에게 판결문 타자만 치게 하고, 심리할 의무를 완전히 면탈한 대법관들의 수당은 그 사건이 속행된 시간만큼 계산하여 반환추징해야 할 것이다.


 '승리' 이후 주요 도로에 나붙었던 광란의 현수막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니, 잠깐... 그와 어떻게 비슷한 과정으로 내걸린 현수막들과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그 이후 몇 년간, 어디 출신이라고 밝히기도 꺼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광주-전남 지역의 높으신 분들이 또 얘기거리를 낳았다. 하지만 그 여러분들의 행각들을 보면서도, 나는 올곧게 믿고 싶다. 하긴 비슷한(별로 그 동네 사람들과 유사한 점은 없지만 말이다) 지역 출신이라고 도매금으로 넘어가기도 하니까. 또 하기야 나도 각하를 때로는(아니, 요새는 상당히 자주)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가끔은 경의를 표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나는 믿으리라. 그리고 믿고 싶다. 여러 감투 쓰신 양반들이, 4대강이 어쩌면 수질개선에 도움이 되고 그 짓을 하는 공사비를 한푼이라도 더 따내야 지역주민의 복리에 도움이 된다, 라고 굳게 믿고 계시다는 걸 나도 믿고 싶다. 어떻게 나으리들의 양심을 문제삼겠는가, 그 분들은 그냥 좀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 나으리들께선 오로지 도민들을 위해 그런 괴상한 노력을 기울이고 계시다니까.



  1. 물론 속편이 여럿 나오기야 하겠지만. [본문으로]
  2. 지방자치제도가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견해에는 나도 물론 동의한다. 이런 말을 했다고 설마 나를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미친 놈으로 여기지 않길 바란다. [본문으로]
  3. 우리는 이런, 소위 '한국식 민주주의'의 본질을 파악할 필요가 있겠다. [본문으로]
  4. 사실 나는 이제 법적으로 전북도민이 아니다. [본문으로]
  5. 이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도저히 설명해드릴 수가 없다, 양해를 부탁드린다. [본문으로]
  6. 그때 도지사님께서는 지금... 아... 그만두자. [본문으로]
  7. 그 때 마침 WBC를 했었다. 찬호형은 왜 하필이면 그 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