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man's Library의 02년판 "백치"의 표지. 이 글은 열린책들 09년판의 표기를 따랐습니다.
주인공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으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다양한 인간과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발견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꼭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나름대로의 인격과 사상을 소유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조연들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어쩌면 주연보다도 더.
"백치" 역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숫자와 그 출신을 살펴보면, 다른 작품보다도 풍성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다른 작품과는 사뭇 달리, 이들은 대체로 어떤 정리된 이념 같은 걸 갖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오직 주인공인 미쉬낀의 반영 또는 그와의 대비로서 표현될 뿐입니다. 따라서 '백치'에서 미쉬낀은 작품의 전부, 적어도 거의 모두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쨌든 미쉬낀론일 터이나, 거의 온전한 서평으로도 기능할 것입니다.
이름 - '백치'
주인공 미쉬낀은 백치라 불립니다. 소설 안의 사람들은, 그리고 작가는, 이 말로 미쉬낀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백치'란 말은 원래 의학용어로 쓰였습니다. 정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는 병자를 지칭했습니다 1. 이 때 '백치'란 말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고, 그 의미가 현실에서 가리키는 물리적 실체들을 준비합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돌고래'라는 단어를 보고, 지구상 어느 바다에선가 헤엄치는 많은 돌고래들을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이 의학용어는 언제부턴가 일상어로도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2
이 경우, an idiot, 즉 백치는 심신상실자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의미를 따지자면 '멍청이' 정도에 지나지 않지요. 물론 그냥 '바보', '멍청이' 보다는 약간 강한 표현이긴 합니다. 소설에서 화자들은 대체로 이 의미로 '백치'란 말을 사용하려 의도합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이 '백치'는 흔히 '바보'나 '병신', 혹은 '또라이'가 그런 것처럼 딱히 지적으로 모자란 짓을 하는 경우를 가리키지 않기도 합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 봅시다. 노무현이 가장 좋아한 자신의 별명은 '바보'였다고 합니다. 이 때 '바보'의 의미는 '지적으로 모자란'의 뜻이 아니지요.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1181.html
위 기사에 나와 있듯이, '바보'의 의미는 '손해를 감수하며 대의를 지키는 사람, 그렇기에 어쩌면 모자라 보일 수도 있는 사람' 정도 됩니다. 물론 노무현이 정말 그런 사람이었는가, 또는 수두룩한 노빠들이 그런 시늉이라도 낼 만한 작자들인가, 이런 것은 별개의 문제겠지만요.
'백치'란 말은 여러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소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브릴라의 백치, 아글라야의 백치, 레베제프나 페르디쉬첸꼬의 백치는 각각 다르며, 또한 각각의 발화에서의 의미 역시 다릅니다. 그렇다면 여러 의미들을 정리해 표로 만들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가령
소설에서의 백치의 의미.
1. 사물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
2. 지적으로 떨어지는 사람.
3. 세상물정 몰라 사기쳐먹기 좋은 사람.
4. 너무 고지식하여 답답한 사람.
5. 사람 마음도 몰라주는 바보. 그러니까 "네놈은 분명하게 행동으로 나한테 사랑을 보여 줘야 해!" 라는 엄중한 경고. 3
등등.
1. 사물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
2. 지적으로 떨어지는 사람.
3. 세상물정 몰라 사기쳐먹기 좋은 사람.
4. 너무 고지식하여 답답한 사람.
5. 사람 마음도 몰라주는 바보. 그러니까 "네놈은 분명하게 행동으로 나한테 사랑을 보여 줘야 해!" 라는 엄중한 경고. 3
등등.
노력을 기울인다면, 개별 상황에서 각각의 의미들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설령 구분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이 '백치'들은 서로 미약한 의미의 관련은 맺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이름은 연상을 불러일으니까요. 따라서 가브릴라가 미쉬낀에게 "이 지적으로 모자란 놈아!" 라는 의도로 '백치'라 말했더라도, 그 말은 다른 모든 의미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형식에서, 그 다른 의미는 일종의 암시로서 작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번역의 문제와 마주합니다. 한국어에서 '백치'는 흔히 쓰이는 말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아무 정보 없이 번역본을 읽는 이는, 독서의 과정에서, 위의 전개를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없을 겁니다. 백치를 다른 한국어 단어 - 이를테면 또라이라든가 - 로 바꾸는 것 역시 불완전성을 내포합니다. 따라서 '백치'의 번역본은 미리 어떤 상상력을 독자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요구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뜻이 다양한 단어 하나를 이해하는 수고만 기울이면 됩니다.
역설 - 이름
미쉬낀 공작은 소설의 시작부터 등장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백치'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정확히 위 표의 1번 의미에 해당합니다. 그는 병의 치료를 위해 스위스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몸이 거의 회복되어 러시아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이제 미쉬낀은 편견과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그가 백치 2 - 즉 지적으로 떨어진다는 편견입니다. 이는 그가 자신을 백치였다고 소개한 탓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미쉬낀이 위 '표-백치'의 1번과 2번 사이에 있다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이 편견은 이내 독자들에게 오류로 드러납니다.
처음 미쉬낀이 예빤친 장군의 집에 와서 나누는 대화를 상기해봅시다. 미쉬낀은 예빤친가의 시종에게 사형제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예빤친네 여인들과 여러 분야에 대해 대화를 나눕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평이하면서도 조리 있게 설명할 능력이 있습니다. 미쉬낀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좋은 인상을 얻기까지 하지요.
소설 안의 사람들도 차차, 미쉬낀이 백치라는 선입견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미쉬낀이 그리 부족하지 않은 이해력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확고하게 통용됩니다. 공작은 '그다지 배웠다고는 볼 수 없'고, 병 때문에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를 놓치'기까지 했지요. 그렇다면 그는 지적으로 오히려 뛰어난 편이 아닐까요.
백치라는 간판은 이해보다 오해를 불렀습니다. 소설은 미쉬낀의 지성에 대해 적절하게 표현합니다. 인용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들이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역설 - 선의
미쉬낀이 양호한 지적 수준을 가졌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소설 안의 사람들은 그를 백치 - 지적으로 떨어지는 사람 - 라고 수없이 오인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이 빗나갔을 때 놀라지요. 제대로 낚인 가브릴라는 말합니다. 어떤 까닭으로 사람들이 미쉬낀을 백치라고 부르는지 알 수가 없다고.
그렇다면 그 오해의 이유란 무엇일까요? 백치라는 이름이 첫번째 범인이겠지만, 다른 요인들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미쉬낀의 행색(각반에 짧은 망토 차림, 보따리), 어색한 태도(스위스에서 막 도착한 사람), 그리고 선량함.
여러분은 이런 사람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 초등학생인 당신에겐 급우가 하나 있습니다. 이 친구는 우등생이며, 매우 선량하여 사람들의 신임을 얻지만, 묘하게 순진하고 때로 허둥대기도 합니다. 당신도 이와 같은 사람을 적어도 한 명쯤은 만나보았을 겁이다. 이 친구는, 어쩌면, 보통 사람들보다도 세상사의 치열한 면에 잘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친구가 지적 열등자인가요? 물론 그럴 리가 없습니다. 4
미쉬낀은 선량합니다. 너무 선량한 나머지 바보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극단적으로, 항상 바보같아 보일지도 모릅니다. 다시 노무현의 경우 - 적어도 노무현은 상당 부분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 를 떠올려 볼까요. 여러분은 쉽게 이 '바보같음'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굳이 이익을 추구하지 않기에, 이익을 추구할 지성이 없는 것으로 오인될 따름입니다.
미쉬낀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해를 끼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간단히 내보이고 자신의 이익을 쉽게 포기합니다. 이것이 타인들에게 그를 '계산에 능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치게 합니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계산에 매우 능합니다 5! 하지만 계산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선의, 혹은 정의입니다. 6
역설 - 유용성
미쉬낀의 선한 의지는 그 자신에게 강제하니,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익과 동떨어져 행동해야 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 주고,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늘 협력합니다. 사람들에게 화도 잘 내지 않습니다. 그는 그의 선량함을 핑계로 사람들이 이익을 챙기려는 것을 잘 압니다. 사기꾼들에게는 바보와 자선가의 구분이 없으며, 둘 다 등쳐먹을 사람으로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7.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쉬낀의 태도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8
여기서 또 다른 역설이 등장합니다. 미쉬낀의 의지는 이익과 무관합니다. 게다가 미쉬낀이 딱히 돈을 벌 재주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아니, 돈을 벌기는커녕 있는 돈마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인간입니다 9. 그에게는 돈을 벌 기술도 의지도 없습니다. 소설에서 잠깐씩 등장하는 쁘찌찐과는 정반대의 인간이지요.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미쉬낀은 전혀 무용지물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10
그러나 유능한 사업가인 예빤친 장군을 봅시다. 그는 미쉬낀을 만나고서, 미쉬낀이 매우 유용한 인물이라고 이내 알아차립니다. 어떻게 '경영학적으로' 전혀 무능한 인물에게서 유용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11
이후의 사건들을 보면 예빤친의 예측이 옳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 유용성이란 '추악한' 일들을 추진하는 데의 유용성입니다. 예빤친 장군은 불륜을 덮기 위해, 가브릴라는 아글라야를 낚기 위해, 로고진은 남의 집에 쳐들어가기 위해 미쉬낀을 이용하려 합니다. (심지어 아글라야가 가브릴라를 골탕먹이는 데에도 이용됩니다.) 이런 일들에는 금전문제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째서 미쉬낀은 그런 일에 말려들까요, 미쉬낀의 성정이 그런 추악한 일들과 명확하게 대비되고 있는데도?
놀이 - 국민들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나스타시야 필리포브나의 집에서 벌어지는 놀이가 해답을 줍니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지 말라고 그랬나요? 이렇게 현명한 사람들에게 배워 보라고요!"
다리야 알렉세예브나의 말입니다.
이 게임을 페르디쉬첸꼬가 제안했습니다. 게임의 내용이란, "살아오는 동안 저지른 고약한 짓 중에서 가장 못된 짓을 양심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얘기는 진실되어야 하고 거짓이 아니어야 하는 겁니다!"
먼저 페르디쉬첸꼬가 자신이 저지른, 정말 비열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를 고백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다들 화를 냅니다. 심지어는 '정직한' 페르디쉬첸꼬 자신마저도.
그런데 유능한 사업가인 또쯔끼와 예빤친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그들은 자신의 악행을 말하지만, 그 악행은 행위자의 악덕과는 무관한, 우발적인 충동의 결과물입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나쁜 일이 되어 버린 것 역시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합니다. 그들은 전혀 악의 없이 저지른 일이었으나 좋지 않게 끝난 것에 유감을 표합니다. 그리고 자선과 기부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잘못를 속죄하려 합니다. 이들의 말재주는 또 매우 뛰어나서, 듣는 이가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 시점에서 뭇 '사업가'의 수사는 완벽하게 간파당합니다. 한국 사업가들의 뻔뻔함은 페르디쉬첸꼬 수준이라, 여러분들에게 미처 와닿지 않을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를 살펴본다면, 이런 포장기술 - 나쁜 결과는 고의가 아니었다. 우리는 유감을 표한다. 우리는 대체로 기부라는 수단을 통에 그것을 속죄하겠다. - 은 사업가의, 또는 기업의 스토리를 정당화시키는 요점으로 기능합니다 12. 13
이런 '게임의 법칙'이 페르디쉬첸꼬 같은 날건달과 또쯔끼나 예빤친 같은 유능한 사업가를 구분하는 선입니다. 악행에는 정당화가 필요합니다. 적어도 악행을 덮는 흰색 천 정도는 있어야 하지요. 여기서 요청되는 게 정의며 도덕이며 문학적 기교입니다. 그것으로 악행은 '현명하게' 그 죄가 탈색됩니다. 이런 역할을 해 줄 적임자가 마침 나타났으니, 그가 미쉬낀입니다. 유능한 사업가는 이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14
이런 상황을 오스카 와일드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 "은행가들이 모이면 예술을 논하고, 예술가 15 16들이 모이면 돈을 논한다."
독창성 - 침묵하는 미인
미쉬낀의 선의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업가는 그것에 감탄하거나 동조하지 않아요. 그저 그 선의가 사업상 갖는 유용성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이 점에서 미쉬낀은 놀이가 벌어지는 파티 자리에 앉아 있는 어떤 사람과 매우 닮았습니다 - 침묵을 지키고 있는 아름다운 독일 여성 말이지요. 인용하자면, 17
"그녀는 독일 여자로서 러시아어를 전혀 몰랐다. 게다가 아름다운 만큼 멍청한 데가 있었다... ...마치 파티장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친지들 집에서 그림, 화병, 조각이나 병풍을 잠깐 빌려다 놓는 것처럼 그림을 걸어 두듯 이 여자를 앉혀 두곤 했던 것이다."
독일 여자가 그의 의사나 관심사와는 무관하게 어떤 수단으로서 유용하듯, 미쉬낀도 그의 이념과는 무관하게 어떤 수단으로서 유용합니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에서 어떤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하늘에서 돈이 떨어져내린 덕분입니다. 고모의 유산이 없었다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요?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
"(가브릴라) : 그래서 차라리 돈이라도 챙기자는 생각에 도달한 거지요. 돈을 벌면 그야말로 최고로 독창적인 사람이 되어 있을 겁니다. 돈보다 치사하고 증오스러운 게 없다는 말은, 그것이 인간에게 재능까지 부여하기 때문이지요."
이념이 아닌 돈이 사람을 독창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비판 - 오리지널리티
온갖 소동이 끝나고, 소설의 3부를 시작하자마자 도스토예프스키는 투덜거리기 시작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실무적인 인물이 없다는 불평이 끊이지 않고 들어온다. 예를 들어,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장군들, 그리고 언제나 수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온갖 분야의 경영인들은 많으나 실무적인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몇몇 기차역에는 제대로 된 역무원 하나 없고 어떤 선박 회사에서는 그럭저럭 쓸 만한 간부진을 갖추는 일조차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 개설한 어느 철로에서는 기차가 충돌했다느니, 어떤 철교에서는 객차가 떨어졌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간단히 말해 '사업가들'은 많은데 실무자들은 없는 게 러시아적 특색입니다. 그런데 작가에 따르면 뭐 굳이 통탄할 이유는 없는 것이, 다른 나라라 한들 별다를 게 없으니까요.
현대 한국만 해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회사나 관청에서는 사내정치에 유능한 사람 - 그런데 정치에 능통할수록 실무 지식은 결여되기 마련이지요 - 이 성공하고, 부모란 작자들은 자식이 어떻게 독창적으로 살 기미만 보이면 경악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합니다 - "우리 나라의 유모들은 먼 옛날부터 아이들을 얼러 주며 "장군이 되어 황금 옷을 입고 다니거라!" 라며 콧노래를 흥얼거려 왔다". 이곳에서는 '장군'이 판검사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세상은 실무자들에 의해 돌아갑니다. 세상을 발전시키는 것은 - 물론 '발전'이란 게 있다면 말이지만 - '발명가와 천재'들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권력은 예빤친 장군 같은 양반들, 바로 '경영인'들에게 있지요. 물론 사회에 이런 경영인들이 때로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경영인들은, 작가의 시대나 지금이나, 필요 이상으로 남아돌고 있지 않은가요.
따라서 가브릴라의 위 말은 좀더 비판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가브릴라의 '독창성'은 '권력'의 동의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권력이 사람을 사회의 문법 내에서 '특수하게' 만들어 주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리지널리티의 결과물이라고 해 봤자, '맷값'을 주고 사람을 구타하는 수준이잖는가요? 여전히 독창성은 사상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현실의 권력이 없는 이상, 그 사상이란 게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을까요?
실험 - 유대의 왕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쉬낀에게 아무 권력도 주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모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의 어떤 예비적 단계로, 미쉬낀에게 일단 상당한 권력을 허가해 주면 어떨까요? 가브릴라 말마따나 엄청난 돈이 주어진다면, 미쉬낀의 이념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이것은 일종의 사고실험에 해당합니다. 물론 이런 '실험'은 과학적인 그것만큼 엄밀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참고로서 이용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이제 하늘에서 미쉬낀에게 막대한 유산이 떨어집니다. 이것으로 미쉬낀은 황야를 떠돌던 방랑자에서 갑자기 '유대의 왕'이 됩니다. 이 권력자가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눈여겨볼까요,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18
장주 - 나비같은 소리
장주(莊周)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입니다. 흔히 장자라고 불립니다. 그의 저작은 독특한 표현으로 유명하며, 그에 못지 않은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어쨌든 그의 견해를 어떻게 서술하자면, 그나마 명확한 부분부터 기술해야 할 터입니다. 그의 정치론은 대단히 명확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19
유가(儒家)의 정치이념을 '도덕으로 구현되는 이상사회'라고 정리한다면,
장주는 이렇게 비판합니다 -
1. 보편도덕은 성립하지 않는다.
2. 유가가 주장하는 이상사회는 이상적이지 않다.
3. 도덕은 이상사회를 구현하지 못한다.
장주의 비판은 유가에 집중됩니다. 견해의 끝까지 도달하면, 문명을 해체하고 부시맨이나 에스키모처럼 살아야 된다는 주장을 목격하실 겁니다. 이 이론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비판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일단 장주의 유가 비판을 눈여겨봅시다. 이 비판의 양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실험에도 그대로 반영할 수 있습니다. 20
재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가 어느 편지에서 밝혔듯, 미쉬낀을 진정 아름다운 사람으로, 즉 최고의 이념을 구현하는 크리스트적 인물의 모델로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여러 비유적 장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뭐 굳이 예수가 아니더라도, 어떤 인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묘사하려 했다는 정도로 이해해 둡시다. 21
한스 홀바인의 그리스도(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이 그림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크리스트를 대상으로 합니다. 어떤 신성성도 그림에서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저 고통받은 한 인간의 시체만 보일 뿐입니다. 그림은 인간이 현실에서 갖는 한계를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신의 뜻이 그러하다는 듯.
(클릭하면 확대)
이 그림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크리스트를 대상으로 합니다. 어떤 신성성도 그림에서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저 고통받은 한 인간의 시체만 보일 뿐입니다. 그림은 인간이 현실에서 갖는 한계를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신의 뜻이 그러하다는 듯.
작가는 미쉬낀이 인간으로서 갖는 한계에 대해 주목합니다. 우리는 홀바인의 인간에서 신성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미쉬낀의 피와 살이 역시 어떤 최고의 이상을 담을 그릇이 될 수 있느냐 비판해야 합니다.
이미 충분히 우리는, 미쉬낀이라는 '아름다운 인간'이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 이후 온갖 역설과 마주한다는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까지 읽어 온 독자들은 어쩌면 상투적이기까지 한 스토리를 상상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 선한 인간이 사회적 악에 가로막혀 파멸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런 심리-외적 대결보다, 미쉬낀의 심리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물론 심리는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사태 자체가 아닙니다. 인물의 심리에는 세계의 문제가 그저 개인적 차원에서 반영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개인의 심리의 성립에 집중하는 시점에서, 소설은 사회학적 측면보다 심리학적 면을 띄게 됩니다.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
이 여인은 '세상을 뒤집을' 정도의 미모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작품 후반 예브게니 빠블로비치의 발언을 떠올려 볼까요 - 22"공작(미쉬낀)이 이 세상은 아름다움에 의해 구원받을 거라고 합니다." 구원과 전복은 사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나스따시야의 미모에서 미쉬낀의 도덕성을 상상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말이지요. 23
나스따시야는 소설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내러티브 안에서 사건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맡아서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미쉬낀의 심리의 외적 실체로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매우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 나스따시야는, 특히 어떤 면에서, 미쉬낀과 아주 닮았다.
나스따시야는 자잘한 부분에서부터 미쉬낀과 공통점을 드러냅니다. 소지주로 몰락한 귀족 계급 출신이며, 아버지 대에 완전히 몰락해 버렸다는 점. 부모가 없고, 지기의 경제적 지원으로 겨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점.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지적으로 뛰어나다는 점. 미인이고 얼굴은 여윈 편이라는 점까지. 그 둘의 인상에는 매우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을 겁니다. 24
심리적으로는 이 이상(以上)의 유사성이 있는데, 바로 둘 다 이상(理想)이 지나칠 정도로 높으며, 또 그에 집착한다는 점입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이 둘은 매우 강력한 '자아 이상'의 소유자들입니다. 미쉬낀이 이상주의자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고, 나스따시야 역시, 조금 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습니다. 또쯔끼는 이를 직감하고, '이상의 화신들인 공작, 근위기병, 외교관, 시인, 소설가, 심지어는 사회주의자'까지 나스따시야에게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뭐 별로였지만.
이상주의자
다시 피그말리온의 신화를 떠올려 봅시다. 피그말리온은 아름다움의 모범이 되는 조각상을 갖고 있습니다. 나스따시야 역시 어떤 모델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주의자로서, 그 모델처럼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에 직면합니다.
일단 지적인 부분을 볼까요.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의 지성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식은 많을수록 유익하긴 합니다. 그러나 일단 사업상 필요한 지식만 갖추고 나면, 그것을 넘어서는 지식은 개인에게 대단한 효용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굳이 나스따시야처럼 '러시아사'를 정독하거나 '앵데팡당스'를 구독하지 않아도, 사는 데 무슨 지장이 있는 건 아닙니다. 뿌쉬낀이 누군지도 모르는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도 잘만 지내지 않나요. 25
비하자면 이렇습니다. 누군가가 WSJ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읽는다 칩니다. 사람들은 그를 외국어 공부를 하는 학생이거나, 언론계 종사자나 학자이거나, 언론고시생이라고 추측할 겁니다. 만약 그 누군가가 그 셋 다 아니라고 답한다면, 지켜보던 사람들은 아마 깜짝 놀랄 겁이다. 그럼 그걸 뭐하러 읽는 것이냐? 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돌아오겠지요. 강준만의 '현대사' 따위를 읽는 이들은 그냥 괴이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이렇게 반문한다면 어떨까요 - 이런 출판물들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하는 것들인데, 너희들은 왜 이렇게 불성실하냐? 나스따시야가 딱 이런 식입니다.
그녀는 로고진에게 "너는 왜 이렇게 무식하니. 책 좀 읽어라. 이를테면 이것저것 같은 책들을 말이지." 라고 태연하게 지적합니다. 이것은 기필코 로고진을 갈구자는 것이 아니라, 나스따시야의 평소 생각이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침 이야기하는 차에 겸사겸사 로고진을 좀 못살게 굴게 되었을 따름이지요. 26
주목해야 할 점은, 나스따시야는 그 당시 여성들에게 기대되었던 지성만 갖도록 기대되었고, 그에 따라 형식적인 교육만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또쯔끼는 그녀에게 피상적 지식만을 기대했고, 나스따시야가 가끔 그런 모습을 보일 때 기뻐했습니다. 나스따시야가 그 이상의 것을 소유하게 된 건 노력의 결과입니다. 27
이것으로 세 가지 태도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나스따시야는 높은 지적 기준을 가졌다는 점. 자신이 그 기준에 부합하도록 강제한다는 점. 그리고 그 노력을 다른 사람에게도 은연중에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여러 모로 사람들이 재수 없게 여길 만한 사고방식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 기준을 요구하는 점이 특히 재수없게 여겨질 법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으로 말미암아, 나스따시야의 태도는 단순한 허영으로 여기기 어려워집니다.
정직한 공상가
사람의 머리 속에는 세계에 대한 관념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 일부에 대한 관념도 있고,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관념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의 인식에 속합니다.
인간의 소망은 사실과 논리적으로 구분됩니다. 별에게 소원을 빌어 봤자 천사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물론 사실의 인식에도 대체로 소망이 개입되기는 합니다. 종교인들이 흔히 기도와 의례의 효과를 과장하는 이유입니다. 어쨌든 개인이 세상을 원하는 대로 만들고자 한다면, 세계의 물리적 법칙에 따라 그것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28
나스따시야는 기본적으로 공상가입니다. 그것의 특징은 세계 전체(물론 자신도 포함해서)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존립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입니다. 이 점은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아글라야의 어머니)도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리자베따 같은 무지하고 또 편협한 공상가들은 오히려 매우 안전합니다. 반대로 나스따시야는 세계를 피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이미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위험합니다.
우리는, 19세기에서만이 아니고 현대에도, 가정 생활에서 찬사를 받으며 이런저런 사회활동에 동참하는 여러 부인들을 봅니다. 나는 굳이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나 그런 자비로운 부인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가정은 거의 언제나 여성의 인식을 제한하는 울타리로 기능합니다. 부인들의 대외활동 역시 사회를 대단히 피상적으로만 인식할 때나 성립할 수 있지요. 29
나스따시야에게 이런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세계 전체의 그림을 그릴 능력이 있으며, 허위에 속아넘어가지 않는 절제력을 소유하는 까닭입니다. 이볼긴 장군은 그녀 앞에서 성공적으로 헛소리를 늘어놓지만, 신문의 구독자인 그녀는 허풍에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가브릴라나 예빤친의 수작 역시 그녀에게는 훤히 보입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거짓말에도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30. 31
그런데 가브릴라 같은 속물과 결혼을 하라고? 어림없는 소리! 32
권력
나스따시야는 편견에 순응하며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 같은 '모난 돌'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려 하지요. 그럼에도, 이런 유형의 여인이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뒤바리 부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권력. 33
악착같이 남을 속이고 밟아버리든지 합시다. 그렇게 권력을 얻기만 하면, 오점은 지워지고 사람들은 그녀를 우러러볼 겁니다. 살아서는 추기경에게 추앙을 받고, 죽어서도 레베제프 같은 자들의 찬사를 얻을 것입니다. 권력은 독창성만이 아니라 도덕성까지 부여하는 셈입니다. 34
비판 - 도덕
나스따시야는 왜 뒤바리 부인처럼 살 수 없는가요? 이유는 도덕입니다. 지적으로 속는 게 불가능하다면, 도덕적으로 속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뻔뻔하게 사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세속적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래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 - 권력에 따른 세속적 행복 - 은 나스따시야에게 거부당합니다. 이것이 그녀 나름대로의 도덕적 자기표현입니다. 35
소설의 세계에서 그녀는 사람들에게 매우 부도덕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나스따시야는 나쁜 짓이라곤 한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미쉬낀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녀는 또쯔끼에게 불안과 공포를 안겨 주었지만, 그것은 정당한 보복입니다. 가브릴라와 예빤친 장군의 고난 역시 자업자득일 따름이지요. 심지어 그들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일 때도, 나스따시야는 '놀이'의 형식을 빌리지 않는가요?
그녀는 선량한 사람들은 존중하며, 나름대로 꽤 애정을 보이기도 합니다 36. 심지어 그녀는 하녀들과도 잘 지냈던 것 같지요. 그녀에게 덧씌워진 부도덕한 이미지는 말 그대로 근거 없는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독창성(오리지널리티)와 마찬가지로, 속물들의 도덕성 역시 비판되어야 합니다. 37
레베제프와 가브릴라 같은 자들의 도덕성은 권력의 속성이며,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권위를 의미합니다. 나스따시야의 행위가 부도덕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행위의 본질에 관계없이, 그 행위가 사회의 권위를 위협해서입니다. 그것은 권력의 질서를 어지럽힙니다. 따라서 사다리를 타고 이미 높이 올라간 속물들이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계획을 가진 속물들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38
하지만 사람은 도덕 원칙에 따르며 살아야지, 권력에 복종하며 살아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물론 레베제프도 이것을 인식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도덕 원칙이 사는 데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요? 그래서 레베제프는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는 둥... 39
컴플렉스
나스따시야가 매우 잘난 사람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미인에다, 지성인에다, 심지어 꽤 도덕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매우 불행하게 삽니다. 지적이지 않았다면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지나치게 도덕적이지 않았다면 역시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도덕은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이상주의적 경향을 낳고 후자는 규범 준수의 경향을 낳습니다. 나스따시야 같은 이상주의자는 대단히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회의 도덕과 반드시 충돌하게 됩니다. 그녀는 사회의 쓸데없는 비난에 일일히 대답해야 합니다. 실제 그녀가 트위터 같은 것도 하지 않고 속물들과 완전히 담을 쌓고 지내더라도, 관념적으로는 언제나 그 비난을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주의는 다른 방법으로도 정신적 스트레스를 몰고 옵니다. 나스따시야는 완벽한 세계의 모델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완벽한 - 적어도 완벽해 보이는 - 자신의 모델도 있을 겁이다. 현실의 자신을 그 모델처럼 만드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나스따시야에게는 어린 시절 또쯔끼 때문에 입은 마음의 상처까지 있습니다. 그녀는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 자신은 너무 부족하고, 따라서 열등한 존재다. 따라서 자신은 행복할 수 없다, 아니 현실의 행복 따위는 가당치 않다.
그녀의 높은 이상과 낮은 자기 평가는 극단적인 대비를 이룹니다. 속된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대체로 타인에게는 나스따시야의 자기 비난이 고려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그저 싫어하니까요. 비유하자면 그녀는 단순히 점수의 기준이 짠 교수에 해당합니다. 하긴 이렇게 날카로운 평자들은 흔히 평가에 자신을 제외하곤 합니다. 하지만 나스따시야는 반대로 더 가혹해져서 문제입니다. 그녀의 이상은 항상 그녀를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닿을 수 없는 목표에 닿으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 PTSD
이 글은 의학적 소견을 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니, 어차피 그럴 능력도 애초에 없습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본다면, 나스따시야의 경우, 심적 상처를 결정적 병인이라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그녀의 심리적 특성은 주제라기보다 배경으로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대한 위키백과 설명. http://ko.wikipedia.org/wiki/%EC%99%B8%EC%83%81%ED%9B%84_%EC%8A%A4%ED%8A%B8%EB%A0%88%EC%8A%A4_%EC%9E%A5%EC%95%A0
이 글은 의학적 소견을 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니, 어차피 그럴 능력도 애초에 없습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본다면, 나스따시야의 경우, 심적 상처를 결정적 병인이라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그녀의 심리적 특성은 주제라기보다 배경으로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대한 위키백과 설명. http://ko.wikipedia.org/wiki/%EC%99%B8%EC%83%81%ED%9B%84_%EC%8A%A4%ED%8A%B8%EB%A0%88%EC%8A%A4_%EC%9E%A5%EC%95%A0
거울
나스따시야와 미쉬낀의 결정적인 유사성이 이제 드러납니다. 둘은 모두 공상가이며 지독한 이상주의자들입니다. 총명하기에 선입견이 없고, 사회의 도덕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서 자신에 대한 평가는 너무 박합니다 41. 게다가 출신, 과거사, 외모, 그리고 지성까지, 나스따시야와 미쉬낀은 매우 닮은 인간들입니다. 42
이 둘은 마침내 서로 만납니다. 서로 만나, 그들은 서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둥 감상을 늘어놓습니다. 미쉬낀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똑같았어요... 나 역시 어디선가 당신을 본 적이 있는 듯했어요. ...나는 당신의 눈을 어디선가 분명히 보았어요...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그저... 나는 여기 온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요. 어쩌면 꿈속에서..."
이는 백설공주 이야기와도 비슷합니다. 현실의 거울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세계의 물리적 법칙을 온전히 따른다면, 왕비는 거울을 보고 혼잣말을 할 뿐입니다. 즉,
거울을 본다. 생각한다 - 어쩜 이런 미인이 있을 수가!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쁠까? 역시 나지.
거울을 본다, 생각한다 - 눈 밑에 주름이! 뺨에 잡티가! 모공이 언제 이렇게 커졌지? 내가 관리에 얼마나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데 이럴 수가... 십대 땐, 아니 이십 대까지만 해도 안 이랬는데! 그깟 백설이니 뭐니 하는 애보다 훨씬...
거울을 본다, 생각한다 - 눈 밑에 주름이! 뺨에 잡티가! 모공이 언제 이렇게 커졌지? 내가 관리에 얼마나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데 이럴 수가... 십대 땐, 아니 이십 대까지만 해도 안 이랬는데! 그깟 백설이니 뭐니 하는 애보다 훨씬...
이 혼잣말에서 왕비의 어떤 부분을 복제하여 거울이라는 외적 실체를 만들어 내면,
왕비 :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 : 와, 님, 그 나이에 허세 쩌네요. 이미 대세는 백설공주ㅇㅇ
거울 : 와, 님, 그 나이에 허세 쩌네요. 이미 대세는 백설공주ㅇㅇ
라는 식으로 됩니다.
그가 누구라 한들 만나지 못한 타인의 눈을 봤을 리 없습니다. 미쉬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쉬낀이 본 것은 자신의 관념이 만들어낸 자신 안의 어떤 모습입니다. 그 관념의 눈과 비슷한 눈을 한 사람이 '우연히' 등장했을 따름입니다 43. 44
편협한 현실주의자인 페르디쉬첸꼬는 무슨 헛소리냐며 미쉬낀을 달랩니다. 하지만 미쉬낀과 나스따시야, 두 당사자는 둘 사이에 일어난 문제를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둘의 유사성은 여러 가지 심리적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무엇보다, 이 둘은 서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
미쉬낀이 가장 잘 이해하는 나스따시야의 특성 - 또한 그 자신과의 유사성 - 은 심리적 고통입니다. 그 고통은 과거의 나쁜 기억에서 나오며, 지나치게 높은 도덕심에 의해 가중되며, 그녀의 지성 때문에 부인되지 않습니다.
미쉬낀은 나스따시야의 사진만 보고 그녀의 고통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빠블로프스끄의 음악회에서 그녀와 재회했을 때, 미쉬낀은 이렇게 느낍니다 -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거나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을 예감하고 있는데, 그녀가 쇠사슬에 묶여서 철창 안에 있다면, 또 간수의 몽둥이 아래서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있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미쉬낀이 나스따시야에게 품는 애정은 동일시에서 출발하지만, 그녀에 대한 이해에 따라 동정의 성격을 띕니다. 이는 다분히 자기애적입니다. 이런 성향은 그의 청혼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상권 264페이지).
광기
나스따시야 역시 미쉬낀에게 애정을 품는데, 이 애정 역시 자기애적입니다. 물론 사랑은 대체로 자기애에서 출발하고, 사랑은 또한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동일시를 이끌어냅니다 - 프로이트에 따르자면. 그런데 나스따시야는, 미쉬낀의 나스따시야에 대한 태도와는 다르게, 연인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물론 대상을 이상화하는 경향 역시 사랑에 빠진 이에게 일반적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그 대상에 비해, 자신이 너무 열등한 존재라는 자괴감을 품기도 하는데, 이런 현상 역시 매우 흔합니다. 그런데 나스따시야는 원래부터 그런 성향이 두드러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이념을 숭배하고, 현실의 자신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은 행복을 누릴 가치가 없다고 은연히 생각했습니다. 46
따라서 나스따시야 자신은 지나치게 낮아지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높아집니다. 결국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정말 그녀가 원하던 사람이 나타났는데도, 또는 오히려 정말 그녀가 원하는 사람이 나타났기에.
이에 더 나아가, 그녀는 어떤 심리적 주체성 역시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미쉬낀 - 이상적 대상 - 을 자신과 너무 동일시한 나머지, 자신이 누려야 할 어떤 행복 역시 온전히 미쉬낀의 것이라고 결정합니다. 얼핏 이것은 심리적으로 매우 타당한 해결책일 수도 있습니다. 즉,
1. 어차피 자신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없다.
2. 하지만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 그가 행복을 누린다고 하자.
3. 그러면 자신이 행복을 누리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2. 하지만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 그가 행복을 누린다고 하자.
3. 그러면 자신이 행복을 누리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뭐가 타당하며, 무슨 얼토당토않은 사고방식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념은 흔하게 보이며, 또 흔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어머니들을 보시지요. 그들의 사고는 이와 정확히 동일합니다.
한국의 어머니는 현실의 행복을 누리는 데 제약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존재, 즉 아들에게 집착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행복이 그들의 행복인 양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연애가 사실상 금지된 중고등학생이 팬덤에 쉽게 빠지는 것이나, 정치가 사실상 금지된 시민들이 어떤 정치인의 광신도가 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47
이런 관념은 분명히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논리적 문제는 밀어두고라도, 현실적으로도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행복 - 어머니
나스따시야는 자신의 행복이 아닌, 타인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은 다분히 주관적입니다. 또한 단지 어떤 행복이 사람의 이상적인 삶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도 위험합니다. 게다가 어떤 보편타당한 행복을 정의할 수 있다 한들, 타인의 관점에 의한 행복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니기 마련입니다. 쉬운 설명을 위해, 다시 한국 어머니들의 예를 들겠습니다.
한국의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아들의 행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어머니 자신의 행복이며, 아들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대리로 내세워질 뿐입니다. 이것은 흔한 온라인 역할 게임의 문법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아들은 캐릭터고 어머니는 플레이어입니다. 48
어머니는 아들을 수단으로 어떤 소망을 성취하려 합니다. 여기서 그 소망이란, 당연히 어머니가 현실에서 성취하지 못한 소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이 얻지 못하지만 남성이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사회적 지위입니다. 대체로 그 지위에서 권력이 나오니, 어머니의 이런 노력은 가족으로서, 나름 자신에게도 득이 되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49
어쨌든 사회적 지위라는 것을 얻자면, 사회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수행해야 합니다. 적어도 사회의 요구에 따르는 편이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겠지요. 따라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며 또 방법론적으로 매우 편협합니다.
순수 심리적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어머니의 행동은 부적절합니다. 일단 어머니의 소망은 아들의 소망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맹목적인 정의감을 벗겨내고 보면, 다른 인간을 자기 멋대로 부려먹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물론 아들이 사회적 지위 - 즉 권력 - 에 목을 매는 사람이라면, 둘의 관계를 좀 일방적인 동업 관계로 관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청소년들은 그와는 반대의 경향을 띕니다. 설령 모든 아들이 어머니의 뜻대로 언젠가 권력을 원하게 된다 한들, 전 국민이 권력을 향해 질주하는 세태를 반드시 좋다고 여기기는 어렵습니다. 50
어머니는 아들과 구분되는 타인이기도 합니다. 곧 아들은 어머니에게서 독립한 심리적 장치를 갖고 있으며, 어머니는 아들의 정신적 사태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즉 아들의 희노애락이나, 어떤 지적-도덕적 성찰이나 그에 따른 성취감은 어머니와 무관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런 부분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어차피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니까요. 51
그 결과, 어머니가 원하는 아들은 단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자신에게 잘해주기만 하면 되겠지요. 아들의 심적 상태 - 교양이 있건 없건,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건 불안정하건, 도덕적으로 치열하건 나태하건 - 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에 성공을 위한 방법론의 편협함까지 더해지면, 어머니야말로 사회를 망치는 범인이라고 감히 일러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52
그런데 설령, 어머니의 이 모든 계획이 성공으로 끝났다고 해도 말입니다, 애초에 자식농사라는 프로젝트가 완벽하게 성공하는 꼴을 본 적이 없긴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는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지위는 인간에게 있어 어차피 일부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그 지위를 어머니가 직접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결핍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어머니가 인생의 대부분을 걸고, 그 대단한 '희생'이란 걸 자처했는데도.
실패
이상의 전개는 나스따시야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나스따시야는 자신의 행복을 대리하여 성취할 대상으로 미쉬낀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괴상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하지요. 이름하여 미쉬낀-아글라야 결혼계획입니다.
미쉬낀과 아글라야는 원래부터 서로 호감을 갖고 있긴 했습니다. 또 나스따시야는 그녀답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창적인 디테일이 있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하지만 나스따시야의 계획은 본질에 있어 세속적인데다, 미쉬낀의 의사를 무시한 채 진행됩니다. 위 대한민국 어머니의 행각과 별로 다를 게 없지요? 미쉬낀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녀처럼 총명한 사람이 어째서 편협한 충동에 얽매이는 걸까, 하고요. 53
하지만 한국 어머니들도 꼭 멍청해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아니잖는가요? 한국 여성의 교육수준은, 물론 상대적인 이야기겠지만, 엄청나게 높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행을 따지자면 어머니가 고학력자일수록 심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지성이 아닌 이들의 정의감이 문제의 핵심인지도 모릅니다. 요약하자면,
"내가 얼마나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지 아느냐!" 54
정도 될까요. 이 절실한 정의감 앞에서 합리적 비판은 무의미해집니다. 결혼계획에 골몰하던 나스따시야도 어떤 비판을 듣는다면 아마 비슷한 반응을 보였겠지요. 이 경우, 정의감은 지적 사고에 일산화탄소 수준의 공헌을 합니다. 55
이 기획은 아글라야가 나스따시야를 적대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파탄을 맞습니다. 어차피 미쉬낀의 행복은 나스따시야의 행복이 아니니, 언젠가 필연적으로 한계에 직면할 운명이었겠지만요. 그녀는 울면서 미쉬낀에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스따시야는 또 미쉬낀으로부터 도망치고 맙니다. 56
이뽈리뜨
니꼴라이는 이볼긴 장군의 아들이며 가브릴라의 동생이고, 드물게 건전한 정신상태의 소유자입니다. 니꼴라이는 이뽈리뜨란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폐병 환자로, 죽을 날이 가깝습니다. 이 총명하고, 고집이 강하지만 나름 다정했을 것 같기도 한 친구는, 죽을 팔자가 되자 심각하게 음울하고 냉소적인 성격이 되었습니다.
미쉬낀은 그의 소망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과 관심입니다. 그런데 원래 사람은 타인에게 관심이,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갖는 만큼은 없습니다. 게다가 미쉬낀의 생일축하에 모인 인간들은 다정하지도 못한 주제에 또 예의바르지도 않아서, 이뽈리뜨에게
어쩌라고 병신아
정도의 반응만 보입니다. 상처받은 이뽈리뜨는 자살소동을 벌입니다. 미쉬낀은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애정을 표시했다 해서 이뽈리뜨가 만족할 수 있었을까요? 어차피 죽을 판인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요! 57
상처받은 여인
"정직하고 착하고 다소 어리석은 듯한 사람이 문득 나타나더니 '나스따시야, 당신은 죄가 없어요. 나는 당신을 존경해요!' 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러한 공상을 하다가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어요." 58
나스따시야가 원하는 것 역시, 이뽈리뜨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는 어떤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모델이 되는 사람은 위와 같이 이야기할 테지요. 나스따시야가 아글라야에게 분노하게 된 이유 역시 위의 아픈 점을 건드려서입니다. 미쉬낀은 이것 역시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미쉬낀이 나스따시야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한들, 나스따시야의 과거가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나스따시야의 과거 자체에는 도덕적 문제가 없으며, 문제는 단지 그 과거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열한 자들의 태도는 미쉬낀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영역에 속합니다. 이뽈리뜨의 문제와 유사하게 말이지요.
반면 미쉬낀이 사랑과 존중에 있어 완벽한 태도를 보일수록, 나스따시야에게 미쉬낀은 더 이상화됩니다. 그에 비해 나스따시야는 자신에 대해 비참한 심정을 잉태합니다. 모순이 폭발할 기회는 수두룩하게 깔려 있습니다. 결국 그녀는 결혼식장 앞에서 야유를 참지 못하고 도망쳐 버리고 맙니다. 이런 사건은 쳇바퀴 돌듯 계속되어 왔습니다 - 그녀는 이전까지 여러 번이나, 미쉬낀으로부터 도망치고서 다시 돌아오곤 했으니까요.
빠르펜 세묘노비치 로고진
미쉬낀에게 있어 지성과 도덕을 논한 것을 기억하신다면, 미쉬낀의 그런 모습과 가장 대비되는 인간을 바로 상상하실 수 있을 겁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의 시작부터, 두 청년의 모습을 상세히 대비합니다.
로고진의 지성은, 앞서 언급한 대로, 나스따시야의 조롱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는 돈벌이에 대한 지식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하게 무지합니다. 도덕적으로도 그는 수준이 그리 깊지 못합니다. 그가 인식하는 모든 가치는 돈에 달려 있습니다. 돈은 그것이 물적 가치를 표상하고, 또 그 가치가 곧 권력이 되기에 비로소 유용합니다. 그러나 그의 인식은 금전이 낳는 권력, 어쩌면 그것보다 돈 그 자체에만 머무르고 있습니다 60. 61
로고진의 인격을 더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입니다. 미쉬낀에 따르면,
"자네는 아주 가까운 미래에 저기 걸려 있는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되었을 거야. 순종적이고 과묵한 아내와 함께 이 집에서 혼자 살며 아무도 믿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으며, 간혹 엄한 말이나 한마디씩 내뱉으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없이 돈만 벌고 있을 걸세."
나스따시야도 이와 같은 말을 합니다. 로고진의 아버지 세묜이란 사람은 이래서야 왜 돈을 버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돈에 집착하던 양반입니다. 예빤친과 가브릴라에겐 돈이 수단이라는 인식 정도는 있지만, 이 노인네에게는 돈 그것이 목적입니다. 노인은 다이아몬드 귀걸이 때문에 나스따시야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스따시야는 기가 막혀하며 귀걸이를 돌려주지요.
이 노인에게는 예빤친 같은 사업가들에게서 관찰되는 수사적 기교 역시 없습니다. 행위에 대한 정당화고 뭐고 돈을 버는 데만 열정을 보입니다. 달리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약간의 신앙적 생활과, 집에 걸어 놓은 그림 몇 점뿐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란 것도 묘하게 정통과는 핀트가 어긋나 있으며, 그림들은 모두 모작들이며 대체로 별 가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가치있는 그림 하나가 바로 한스 홀바인의 그리스도입니다. 62
단순한 속물
실로 그 아버지의 아들이 로고진입니다. 소설 안에서 그는 미쉬낀의 반대편에 서, 다른 많은 속물들의 대표자격인 위치에 있습니다.
소설 초반 나스따시야의 결혼 소동을 다시 떠올려볼까요. 사람들 - 예빤친, 가브릴라, 또쯔끼 - 은 다들 나스따시야를 돈으로 사거나 흥정하려 합니다. 겉으로는 다들 점잔을 빼지만, 실상은 단지 그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로고진은 대략 이렇게 선언합니다.
"좋다. 속물들이여, 그렇다면 내가 가장 많은 돈을 제시하겠다."
로고진이 가져온 10만 루블로 세상사는 매우 솔직해집니다. 하지만 드러난 사태의 맨얼굴은 매우 불편하고 심지어 충격적입니다. 사람들이 늘 인식하고 있었던 진실일 따름인데도 말입니다. 사업가들은 로고진의 모습을 추악하다고 여기고, 몇몇은 자리를 뜰 결심을 합니다. 그러니 사업을 위해 필요했던 '도덕적 정당화'는, 어쩌면, 사업가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로고진은 가브릴라 - 유능한 사업가 '워너비' - 를 맹렬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가브릴라에게 '3루블에 바실리예프스끼 섬까지 기어갈 위인'이라고 선고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폭로이며, 곧 가브릴라가 자신과 똑같이 금전을 만능으로 여긴다는 뜻이지요. 이런 행동들은 '정직함'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페르디쉬첸꼬적이기도 합니다. 나스따시야가 내심 예뻐할 만한 솔직함입니다.
하지만 위선이 나쁘다고 해서, 로고진 같은 정직한 속물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스따시야는 로고진에게 '책을 읽으라'고 합니다. 출세하기 위한 지식은 경멸스럽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식한 것까지 좋게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로고진은 그 말을 받아들여 '러시아사'를 펼치고, 미쉬낀은 그것을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기야 뭐 어찌되었든간에.
형제
로고진이 책을 읽는 이유는 나스따시야의 호의를 얻기 위함에 다름 아닙니다. 물론 그 덕에 좀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필요한 건 지적 소양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하지요.
소설의 무대에서, 로고진은 나스따시야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 절실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뭔가 좀 힘에 겨워 보입니다. 로고진은 나스따시야를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또 설령 이해했다 한들 습관의 힘은 강력합니다. 따라서 순간 나스따시야가 원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그런데 로고진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정확히 위치하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미쉬낀입니다. 이제 미쉬낀은 로고진에게 애증의 대상이 됩니다.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점에서 동경을, 또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무언가를 마찬가지로 소유한다는 점에서 질투를 살 것입니다. 동경하는 마음은 자신을 미쉬낀의 위치로 끌어올리려 할 것이고, 질투하는 마음은 미쉬낀을 자신의 위치로 끌어내리려 할 것입니다.
소설의 3부에서 로고진은 미쉬낀에게 십자가 목걸이를 교환하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은 형식상으로는 형제의 의를 맺고자 하는 러시아적 표현이지만, 그것의 주된 의미는 주술입니다. 목걸이를 가짐으로써, 그것이 표상하는 미쉬낀의 어떤 속성을 건네 받고자 하는 시도이지요. 정말 그렇게 - 미쉬낀처럼 - 만 된다면, 나스따시야의 마음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목걸이 하나로 사람이 변하지는 않는 일이지만요.
이런 광경은 창세기의 오랜 신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카인과 아벨의 신화입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과 똑같이 노력하는데 주님은 그의 정성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태도가 어쨌다는 둥 카인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지요. 질투심에 눈이 먼 카인은 형제를 살해합니다.
적의
사람을 미워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말을 흔히 합니다. 하지만 심리적 현상에는 적어도 동기가 존재하고, 따라서 적의에도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을 겁니다. 단지 그 까닭이란 너무 비합리적이라, 타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따름이겠지요.
아벨이 만약 카인에게, 카인이 그에게 품는 만큼의 적대감을 품었다면, 그리 쉽게 들판으로 나와 살해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긴 사랑받는 아벨은 카인을 딱히 미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미쉬낀 역시 로고진을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뭐 애초에 미쉬낀은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만. 미쉬낀은 로고진을 형제처럼 대하려 합니다. 심지어 살해당할 뻔한 다음에도.
미쉬낀은, 다른 많은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로고진의 적의 자체는 잘 이해해고 있습니다. 어쩌면 적의의 동기도 이해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미쉬낀은 로고진의 적의를 볼 때마다 놀라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 적의는 자신의 예상을 넘어선 것이고, 또 노력에 따라 어떻게 해소되지도 않고 계속 나타나니까요.
미쉬낀은 로고진을 만날 때마다 이치에 닿게 이해를 구하고 그를 설득합니다. 하지만 설득의 효과는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고진의 태도는 늘 그대로 돌아가, 미쉬낀을 열정적으로 부러워하며, 또 열정적으로 미워합니다.
열정
사람들이 이해하는 로고진의 가장 큰 특성은 열정입니다. 로고진은 나스따시야를 처음 보고는 잠을 설치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의 돈을 훔치다시피 해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산을 받자마자, 현금 10만과 패당을 모아 나스따시야의 집에 쳐들어가지요. 이런 열정을 누구도 따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로고진의 충동은 정직하게 표현되고, 그 뒤로 신속하게 행동이 이어집니다. 지적한 대로 그의 표현과 행동에 문학적 기교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예빤친 장군 같은 인간한테까지 경멸을 삽니다. 따라서 그는,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모습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고도 하겠습니다. 태초에는, 아마도, 행동이 있었을 테니까요.
그는 미쉬낀보다도 더 아이에 가까운 인간인지도 모릅니다.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충동과 그에 따른 솔직한 행동이, 지식이 결여된 지능과 도덕에 대한 완벽한 몰이해가 있습니다. 물론 현대적 지성인이 이와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인간에게나 욕망이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단지 그것을 표현하고 해결하는 방법이 유년기와 다를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미쉬낀과도 로고진은 어느 정도 닮은 사람입니다. 미쉬낀 역시 인간인지라, 충동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니까요. 물론 평상시의 미쉬낀은 욕망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이념에 따른 삶이 가능할 테지요. 하지만 가끔 미쉬낀도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이를테면 그가 뻬쩨르부르그의 로고진의 집에서 나와, 나스따시야의 집에 방문하려 할 때.
이제 미쉬낀을 따라다니며 그를 주시하는 눈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분신
그것은 로고진의 눈이 아니었습니다! 미쉬낀 자신의 어떤 심리적 측면이 그를 자극하기 시작했고, 미쉬낀은 그 상황을 매우 불편해했습니다. 물론 로고진은 실제로 미쉬낀을 미행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미쉬낀은 모든 불편함을 그의 탓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불편함은 미쉬낀 자신의 문제입니다. 로고진이 우연히 그 불편함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이처럼, 불행하게도, 로고진이라는 외적 실체는 미쉬낀의 어느 부분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나스따시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제 세 사람의 그림을 그려 볼까요.
대략 이런 식으로 됩니다. 대체로 나스따시야는 이념을 표상하고, 로고진은 욕망을 표상합니다. 이 두 사람은 미쉬낀에 있어 어떤 부분이 되고 있습니다. 미쉬낀의 심리는 외부를 반영하며 외부 세계는 미쉬낀의 심리를 암시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소설은 외부 세계의 문제를 인간의 내적 문제와 등치시킵니다.
미쉬낀의 고통은 직접적으로 그 이유가 서술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스따시야나 로고진의 경우가 그것의 힌트가 됩니다. 나스따시야가 이룰 수 없는 이상 때문에 상처를 입었듯 미쉬낀도 상처입었을 것이고, 로고진이 역시 이룰 수 없는 충동에 괴로워하듯 미쉬낀도 괴로워할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미쉬낀의 심적 갈등이 됩니다. 미쉬낀은 말합니다.
"로고진, 나는 자네의 적이 아니네. 그러니 조금도 훼방을 놓을 생각이 없네."
미쉬낀은 나스따시야와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없으며 로고진을 속일 생각도 없다며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스따시야의 집에 찾아가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기까지 하지요. 그러나 미쉬낀은 결국 나스따시야의 집을 찾아갔고, 로고진을 속였으며, 소설 내내 로고진의 일에 훼방을 놓는 셈이었고, 나중에는 나스따시야와의 결혼식까지 열게 됩니다.
미쉬낀이 로고진의 적이 아니라는 말은, 굳이 로고진의 입장에 서지 않아도 우스운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쉬낀은 로고진에게 엄연한 적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습을 한, 미쉬낀 자신의 욕망에게도.
가난한 기사
"그 남자는 한번 이상을 세우면 그것을 믿고, 또 그 이상을 믿게 되면 평생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지요."
아글라야의 평입니다. 그녀는 뿌쉬낀의 시를 비평하는데, 이 시의 주인공인 '가난한 기사'는 미쉬낀과 같은 사람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기사는 미쉬낀의 이상적인 - 다시 말해 나스따시야적인 - 면을 닮았습니다. 두 문단의 그 짤막한 비평을 이해한다면, 저 위에서 제가 나열한 긴 논변이 필요없을 수준입니다. 그녀는 좋은 비평가입니다. 63
그녀는 가난한 기사가 또한 돈키호테와 유사성을 지닌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글라야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가난한 기사는 돈키호테와 같은 인물이지만, 희극적인 면은 없고 오로지 심각한 면만 있을 따름이에요." 그런데 소설에서는, '돈키호테와 같은 인물이지만 심각한 면은 없고 오로지 희극적인 면만 있을 따름'인 사람이 하나 등장합니다. 가브릴라의 아버지, 이볼긴 장군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안돼요 64!
가브릴라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본래 선량했었으며 단지 '지나치게 감격하길 잘'했을 뿐이었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언제부턴가 술을 진탕 마셔대기 시작했고, 판단이 혼탁해졌으며, 그에 발맞추어 사회적 지위가 내려갔습니다. 가정에서의 위치 역시 바닥입니다. 이볼긴 가(家)의 방 배치에 대한 설명에 이르면, 안구에 습기가 차오를 지경이지요.
돈키호테는 책을 읽다 정신이 삐끗한 나머지, 책과 현실을 혼동합니다. 이볼긴 장군도 비슷한 증상을 보입니다. 그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일과 조합해서 헛소리를 만들어냅니다. 그 헛소리가 정말 우연히 현실과 맞아떨어졌을 때, 그는 놀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65
미쉬낀이 나타나자 그는 미쉬낀을 붙잡고 헛소리를 늘어놓습니다. 헛소리는 날이 갈수록 장황해지고 어떻게 보면 서사적 수준이 향상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미쉬낀은 이상하게도 늘 바쁠 때 장군을 만나고, 그러면서도 그는 장군의 헛소리를 착실하게 경청합니다. 그리고 미쉬낀은 항상 후회합니다.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했으니까요.
이 무의미한 경청은 미쉬낀의 선량함과 사려깊음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쉬낀은 사실 듣고 싶은 마음에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이라고요. 술꾼의 이야기엔 어떤 괴상한 매력이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그 매력의 정체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환상에의 충동
여기 인생의 내리막만 있는 늙은이가 있습니다. 그에게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수염을 쓸며 가끔 헛기침이나 내뱉다가, 적당한 존경과 애도 속에 관 속으로 들어가는 최후를 상상해 볼까요. 이 정도면 그나마 이상적일 터입니다.
하지만 늙은이에게도 로맨스가 필요합니다. 더구나 이볼긴 장군은 원래부터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물론 현실에서 그것을 실현할 딱한 방법은 없습니다. 장군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혁명을 일으켜 현실의 구조를 바꾸거나, 환상으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혁명은 아시다시피 매우 위험하고, 성공 가능성이 낮습니다. 하지만 환상으로의 도피는 안전하지요. 그리고 환상에 빠져 있는 동안은 항상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돈 키호테는 혁명가인 동시에 공상가이지만, 이볼긴 장군은 그저 공상가에 불과합니다. 그는 절대 현실을 직시하지 않습니다.
환상은 주관적으로는 대단한 성공을 이루어 내는 마력이 있지요.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현실의 일에 쏟을 열정이 오용될 따름이니, 현실의 환상가는 점점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볼긴 장군이 아무리 자신을 까르스의 영웅이요 객차 안의 쿨가이로 포장을 해놔도, 현실에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술꾼만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심지어 장군 자신도 명백하게 알고 있는 진실입니다. 따라서 헛소리 속의 나폴레옹마저 이렇게 단언하는 것이겠지요 - 거짓말을 하면 안돼요!
그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누구나 이걸 알고 있지요. 그런데 이는 한 가지 역설적인 사실 하나를 시사해 줍니다. 잘 알고 있는데도, 환상에의 충동을 절제하는 게 쉽지가 않다는 겁니다. 이볼긴 장군이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대단한 절제가이며 장군을 사정없이 비판한 적까지 있었던 나스따시야마저, 나중에 가면, 환상에 넘어가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를 저지르고 다닙니다. 애초에 이 소설을 쓴 작가부터가 충동을 전혀 절제하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66. 67
그렇다면, 어째서 분주하고 또 피로한 와중에도 미쉬낀이 장군의 말을 경청하는지,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미쉬낀은 피로했기에 장군의 헛소리에서 어떤 위안을 찾았던 게 아닐까요.
하긴 미쉬낀은 피곤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잇속에 따라 일을 벌입니다. 미쉬낀은 (몰란다면 오히려 좋았을) 그들의 시커먼 속내를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야만 하지요. 사실 이 피곤의 원인을 굳이 찾는 것도 조금 우습습니다 - 그는 인생을 굳이 피곤하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 아닌가요? 게다가 미쉬낀은 일들의 연속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지요.
환상은 이성을, 복잡한 이런 현실의 일들에게서 잠시 도피하도록 내버려둡니다. 그렇다면 이 환상은 어쩌면 생리적 현상 - 꿈과 매우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병 - 백치
미쉬낀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서 여러 한계에 직면합니다. 이상주의는 미쉬낀의 아이덴티티이지만, 이는 현실의 자신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의무를 요구합니다. 사람인 미쉬낀에게는 욕망이 존재합니다. 욕망 역시 현실의 자신에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곤 하지요. 이 두 가지 요구는 실현이 가능한지는 그렇다치고라도, 대체로 완전한 반대 방향에서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 갈등은 강렬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을 낳습니다. 단적으로 나스따시야나 로고진, 그리고 다른 여타한 사람들의 심적 고통을 떠올려 봅시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돌아 버리게 만들 위력을 지니고 있지요. 그런데 미쉬낀은, 이런 사람들의 모든 심리적 문제들을, 마치 예수처럼, 한 몸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갈등이 첨예해질 때, 미쉬낀에게도 마음의 고통이 찾아옵니다. 소설은 미쉬낀의 심적 고통을 표현만 할 뿐이지, 그것의 원인을 직접 서술하지는 않습니다. 소설 안의 다른 사람들은 그 고통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고통이 절박한 지경에 이르면, 미쉬낀의 마음은 어떤 문제적 상황이라고 말해야 옳을 정도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68
여기에서 쉽게 프로이트의 지적을 떠올립니다. 그는 현실의 '나'와 양심, 욕망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를 평상적인 상태로 가정하며, 병적인 상태라야 비로소 위 셋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병이며 질환입니다. 질환은 사람에게 이성과 양심을 빼앗아가지요. 이볼긴 장군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미쉬낀의 경우 역시 그렇습니다. 69
이제 우리는 사고실험의 마지막에 다다랐습니다. 우리의 실험자, 도스토예프스키는 몇 가지 결과물을 들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였습니다 - 오직 피와 살, 그리고 백치입니다. 심혈을 기울여 표현하려 했던 지고의 이념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실험 - 보편 이념
전도서의 가락이 울려퍼지는 것 같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실험에 따르면, 지고의 이념은 사람 안에서 성립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름다움으로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원대한 기획은 그 시작부터 오류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념은 과연 보편타당한가, 보편타당한 이념은 현실에서도 보편타당한 효력을 지닐 것인가, 그 완성품은 과연 이념에 합치할 것인가... 이런 것은 이미 쓸모가 없어도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몇 발짝 건너가 이런 문제에도 노력을 기울인 바 있었습니다. "죄와 벌"이나 "악령"에서 정확하게 드러나지요. 이 소설들에서, 개인의 이념은 어떻게든 전체로서 성립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름의 타당한 근거나 요소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념이 어떤 현실의 행동으로서 인간의 세계에 출현했을 때, 그것은 대단히 문제적인 면면을 드러내고야 맙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여기서 타이밍 좋게 한 마디 외치는 걸 잊지 않습니다 - "좌파들은 나빠요!"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지고의 이념'이라 한들,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악마
이쯤 되면 원대한 기획은 정신적으로 거의 붕괴에 이를 지경으로 타격을 입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치명적인 질문을 하나 남겨 놓고 있습니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도 이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이 질문을 던지지 않으려 합니다.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놀랍게도 확고한 결단을 내려 버립니다. 그의 선택은 그 이전의 독일철학의 성과 - 따라서 이건 '순수 러시아적' 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뭐 어차피 지금까지 보아 오셨듯, 제정러시아나 현대 한국이나 별반 다를 것도 없겠지마는요 - 의 답습입니다. 바로 신을 70요청하는 것입니다. 71
도스토예프스키는 말년으로 갈수록 종교에 심취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매우 정통적이라고 생각했겠습니다. 물론 교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지요. 절대적인 신은 세상의 모든 모순들을 해결할 강력한 권능을 갖고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정의는 존재하며 보편타당한 형식을 지니며 현실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제 신앙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시 이볼긴 장군의 환상으로 돌아가 볼까요. 어쩌면 종교 자체도 거대한 환상이 아닐까요? 단지 그 환상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따름이겠지요. 물론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이런 문제를 일단 적극적으로 부정하려 듭니다. 그러나 냉철한 이성은, 장군의 이야기 안 나폴레옹처럼, 거짓말! 이라고 외쳐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반의 환상에서 나타난 악마는 사실, 도스토예프스키의 현실 앞에 나타났던 그 어떤 이질적인 체감과 본질이 동일할 터입니다.
끝마치며
삶은 모순으로 가득찬 채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궁핍하고 찌질하게 살던 시절 "백치"를 썼으며, 삶의 안정은 그의 인생 마지막의 잠깐에만 허가되었습니다. 그 최후의 저작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논했던 문제들은 다시 분장을 하고 무대 위에 오릅니다. 물론 그것들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새로운 인물들이 여러분과 마주할 겁니다. 비교적 현실적이고, 좀더 실천적인 모습을 하고. 72
그리고 여러분들은, 작품 안 어디엔가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으실 겁니다.
"이 양심도 없는 놈들! 악랄한 무신론자들! 무지하고 오만한 녀석들! 그래, 너희들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기로서니 우리 조국과 민중을 무시하려 드느냐? 네놈들은 간단히 우리 민중들의 전통과 종교를 무가치하다고 판결하지. 그리고 지금까지 나고 죽었던 우리 수천만 러시아 민중의 삶이 전혀 무의미했다고, 무의미하다고, 기쁨에 못 이겨서 지껄인단 말이다. 이런 패륜아들, 모국을 증오하는 범죄자들! 그리고서 네놈들은 수입 사상과 그 합리주읜가 뭔가 하는 걸로 민중을 계도시킨다고 떠벌인다. 하지만 이 바보들아! 너희들이 오히려 우리 민중에게 배워야 한다, 이 씨발새끼들아. 애비애미도 저울에 달아먹을 파렴치한 빨갱이놈들아! 너네 같은 놈들이 악당이 아니면 또 뭐란 말이냐..."
- 어원은 그리스어. ἰδιώτης, 사적 인간(私人)을 의미. [본문으로]
- 후일 IQ가 유행하기 시작하자, 더욱 구체적으로 IQ 25이하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으로]
- 블로그 간판 참조. 아글라야가 사용하는 '백치'는 대체로 이런 의미입니다. [본문으로]
- 여기에 '다른 지역에서 이사온 전학생' 정도의 설정만 붙이면 거의 완벽. [본문으로]
- 단적으로 작품 후반(2권 783페이지) 미쉬낀이 아글라야와 카드놀이를 하는 장면 참조. 미쉬낀은 도박사 같은 실력을 갖고 있지요. 오히려 문제는 계속 이기기만 했다는 데에서 발생했습니다! [본문으로]
- 그러니 미쉬낀이 수학에 능통한 것으로 묘사했다면 어땠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작가는 수학을 증오했습니다. [본문으로]
- 이런 습성이 교묘하게 기밀을 발설하게 되어, 가브릴라는 여러 번 분노했습니다. [본문으로]
- 그런 점에서 '백치'란 말은 나름의 실용성을 띕니다. 페르디쉬첸꼬가 나스타시야에게 미쉬낀을 간단히 '백치'라고 소개하는 걸 떠올려 봅시다. 즉, "저 놈은 만만한 놈이에요." [본문으로]
- 막대한 유산을 얻은 후에도, 어떤 직업을 가질 거냐는 질문에 - 이것은 사실 어떻게 돈을 불리려냐는 소리입니다 - 교사 자격증을 딸 거라는 소리나 하지요. [본문으로]
- 페르디쉬첸꼬의 첫번째 충고를 떠올려봅시다. "나한테 돈을 빌려 주지 마세요." [본문으로]
- 다른 '사업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브릴라는 수완이 좀 모자랐던 건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워낙 혼란해서였는지, 그 깨달음이 약간 늦습니다. [본문으로]
- 그러니까 너넨 닥치고 있어. [본문으로]
- 이런 사악한 기교의 결과물이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리 나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 진정 무시무시합니다! [본문으로]
- 알렉산드라(아글라야의 맏언니)에 따르면, "공작은 백치가 아냐. 대단한 협잡꾼 같아." [본문으로]
- 작품 후반에서 아글라야가 미쉬낀에게 재산을 묻습니다. 예빤친 부부는 이에 창피스럽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본문으로]
- 미쉬낀은, 잠깐 나오긴 했지만, 대단한 달필가입니다. 그의 서체는, 과장 좀 보태서 예술의 경지에 이르러 있습니다. 여러분은 소설을 읽으며, 이 '예술가' 역시 어쩔 수 없이 돈 이야기만 하게 된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본문으로]
- 가령 미쉬낀의 나스따시야에 대한 고백을 들은 또쯔끼의 반응. [본문으로]
- "15년 후에는 '저 사람이 유대의 왕 이볼긴이다' 라고 할 겁니다." 1권 196페이지. 돈이 독창성, 즉 권력을 부여한다는 가브릴라의 말입니다. 보시다시피 이 단락은 미쉬낀에게 기묘한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본문으로]
- 물론 이 사람과 책의 '역사적 확실성'은 예수와 성경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 관료국가나 전체주의는 굳이 열심히 비판할 이유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본문으로]
- 용모부터 예수를 연상하게 합니다(연상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기에, 역사적인 엄밀성을 논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당나귀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본문으로]
- 아젤라이다(아글라야의 언니)의 평. [본문으로]
- 하지만 여러분은 곧 상상하게 될 겁니다. [본문으로]
-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은 아닐지라도..." 위에 인용한 이 문구는 원래 나스따시야에 대한 서술입니다. [본문으로]
- 아글라야의 어머니. [본문으로]
- 본문을 인용하자면, "당신은 솔로비요프의 『고대 러시아 역사』라도 읽어서 교양을 쌓도록 해요. 당신은 아는 게 전혀 없어요." [본문으로]
- 이것은 심지어 현대에도 여성들에게 기대되는 덕목입니다. 옛날만큼 노골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본문으로]
- 따라서 가브릴라는 관념 속에서 불운한 천재로서의 자신을 볼 것이고, 또쯔끼는 성공한 천재로서의 - 그런데 어떤 조그만 실수로 인해 약간의 고난에 처한 - 자신을 볼 겁니다. 둘 다 객관적으로는 천재가 아닐 테지만. [본문으로]
- 물론 한국의 경우를 보면, 이런 것도 사치스러운 비판입니다. [본문으로]
- 좀 길지만 한 부분을 인용하자면, "처음에는 또쯔끼가 그녀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 시절이 있었다. ...그는 사치에 빠져 들기가 얼마나 쉬운가 하는 것과, 사치에 조금씩 맛들이다 보면 그것이 삶의 필수적 요인이 되어 거기서 헤어나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스따시야는 사치가 가져다 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치를 즐겼다. 그러나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도무지 사치에 굴복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언제라도 사치스런 생활을 헌신짝 버리듯 떨쳐 버릴 자세가 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 나스따시야가 페르디쉬첸꼬를 총애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정직'하기 때문이지요. [본문으로]
- 또쯔끼가 제시하는, 아니 어쩌면 여자에게 제시되는 모든 결혼의 뜻은 그저 이것입니다 : "집에서 얌전히 처박혀 지내라." [본문으로]
- 바리 백작 부인 (프랑스어: Madame du Barry, 1743년 8월 19일~1793년 12월 8일)은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정부로,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 함께 루이 15세의 대표적인 정부로 알려져 있다. 본명은 잔느 앙투아네트 베퀴 (프랑스어: Jeanne Antoinette Bécu)였다. 프랑스 혁명 기간에 단두대에서 사망하였다. 위키백과. [본문으로]
- 미쉬낀은 레베제프의 이런 행각을 어처구니없어합니다. [본문으로]
- 말했던 대로 그 도덕이 피상적인 지적 인식에 기반한 것이라면,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처럼 어쩌면, 나스따시야도 대체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겁이다. 하지만 그녀의 지성은 주인의 잠을 깨워버렸습니다. [본문으로]
- 이를테면 가브릴라나 로고진의 어머니. [본문으로]
- 파티장 자리에 앉아 있는 노선생의 경우. [본문으로]
- 물론 사람들을 바보라고 폭로하는 것도 때로 매우 부도덕하게 여겨질 때가 있긴 합니다. 소크라테스 시절 그리스에서,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에서. [본문으로]
- 그런데 레베제프의 집과 별장(...)에 머무르게 된 미쉬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습니다 - 레베제프는 사실 경제적으로 부족할 것 없이 잘 지내고 있었던 겁니다! 미쉬낀은 어이가 없어합니다. 레베제프는 이내 다른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아내가 젊어 죽었는데 아이들이 불쌍하지 않느냐는 둥... [본문으로]
- 1권 71페이지. [본문으로]
- 미쉬낀이 스위스 시절 겪었던, 마리와 아이들과의 일화를 떠올려 봅시다. 문제는 머리가 나쁜 게 아닙니다. 그 반대인 게 문제입니다. [본문으로]
- "내가 하는 말은 사상과 일치하지 않아요. 그것은 사상을 욕되게 하는 짓이에요. 때문에 나는 사상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어요." 하권 527페이지. 아글라야는 미쉬낀의 이런 태도에, 자부심이 없다며 분노합니다. [본문으로]
- 프로이트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초자아'를, 라캉주의자라면 '대타자'를 쉽게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으로]
- 물론 소설 창작의 문법 아래서는 필연이겠지만, 그 창작품이 전제하는 세계의 논리대로라면 우연입니다. 간단히 말해, 나스따시야와 미쉬낀의 관계는 작가의 창작에 따른 것이지만, 이 관계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의 모습과 같아야 합니다. [본문으로]
- 상권 261페이지. [본문으로]
- 지금까지의 과정에 대해 좀더 '프로이트적'인 설명을 원한다면, 프로이트의 논문 "나르시시즘 서론"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 어째서 딸은 아닌가요? 딸 역시 현실의 행복을 누리는 데 제약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 심지어 플레이어가 캐릭터의 이름 - 이를테면 영수 어머니 - 로 호칭되는 것마저 유사합니다. [본문으로]
- 이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더러 있겠습니다. 그럴 때 세상은 한층 더 무시무시해지지요. [본문으로]
- 위의 오리지널리티론을 떠올린다면, 오히려 대단히 나쁜 현상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런 현상을 막는 역할을 정치에 요청해야 하겠지요. [본문으로]
- 간단히 말해 '마음'. 종교적으로 윤색하자면 '영혼'. [본문으로]
- 물론 이것들이 사회적 성공에 영향을 주는 경우에는 관심을 보일 겁니다. 가령 지식은 성공에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공에 필요한 지식은 '앙데팡당스'나 '러시아사'가 아닌, 문제풀이능력입니다. 어머니의 관심은 후자에 있지 전자에 있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 사회의 통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배우자. 작가는 아글라야에 대해 소개하며, 이 세평이란 부분을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본문으로]
- 분석하면 이것은 대체로 두 가지 주장의 결합입니다. 첫째는 희생이 행위를 목적적으로 정당화한다는 것이고, 다음은 희생으로 아들에 대한 사적 권리를 획득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논리적으로 살펴보면, 행위의 정당성은 희생과 무관하고, 타인에 대한 사적 권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성립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이 두 주장은 서로 양립하기도 어렵겠습니다만. [본문으로]
- 남성들의 군대문제와도 비슷하겠습니다. [본문으로]
- 마치 고부갈등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실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 [본문으로]
- 이뽈리뜨(Hippolyte)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히폴리토스(Hippolytus)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히폴리토스의 신화에서, 말(言)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이지요. [본문으로]
- 나스따시야의 말. 상권 268페이지. [본문으로]
- 로고진의 외침. 상권 179페이지. [본문으로]
- 위 가브릴라의 오리지널리티론 참조. 가브릴라는 적어도 돈의 이런 속성을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본문으로]
- 프로이트를 읽으신 분이라면, 이 지점에서 쉽게 '고착'이란 용어를 떠올리실 겁니다. 이를 매우 거칠고, 또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애정결핍'입니다. [본문으로]
- 미쉬낀에 따르면 구교도(카톨릭이 아님.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보수파를 일컬음), 나스따시야에 따르면 거세파. 작가의 관점에서 보면 둘 다 이단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상기하자면 괴상할 정도로 종교문제에 편협했습니다. [본문으로]
- 상권 384~385페이지. [본문으로]
- Ne mentez jamais! Napoléon (votre ami sincère). 하권 772페이지. [본문으로]
- 어렸을 적의 아글라야 자매들과 놀아 줬던 이야기. [본문으로]
- 위에서 언급했던 미쉬낀-아글라야 결혼계획. [본문으로]
- 작가의 자전적 성격의 소설인 "미성년"의 주인공은 절제력을 키우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입니다. 빵에 소금만 찍어 먹고 산다거나, 옷에 솔질을 해 몇 년간 입고 다닌다거나...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본문으로]
- 빠블로프스끄 역의 음악회에서의 아글라야의 말을 떠올려 봅시다 : "백치!" 이것은 위의 백치-정의들에서 말했듯 단순한 불만의 표시입니다만, 작가는 그 단어의 가장 사전적인 의미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 프로이트의 용어에 따르면, Ich(나), Uber-Ich(위-나), Es(그거) [본문으로]
-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69263&page=1&menu=5003029&keyword=&sdate=&edate=&reporter= [본문으로]
- 피그말리온의 신화처럼. [본문으로]
- 그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했던 사람들과 어딘가 닮아 있습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