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최고의 만화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수작임은 확실하고, 굳이 그보다 나은 무언가를 내놓기도 어려운 작이 있으니 바로,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다.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다.
작가는 순정만화의 화법을 소년만화에 도입한 선구자다. 순정만화는 여자 관점에서의 연애를 다룬다. 그는 연애를 다루되 남자 관점에서의 연애를 다루었다. 그 이전의 남성들은 서사시의 영웅들처럼 권력, 또는 명예만을 추구했지, 굳이 힘들여 애정을 갈구하지 않았다. 이 시도 - 연애의 주인공으로서의 남성, 그리고 아이돌로서 기능하는 여성 - 는 성공이었고,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성공적인 효과를 낸다. 따라서 그는 현대 오덕물의 원조이다. 그가 없었으면 '화성인 십덕후' 역시 없었다.
"터치"에도 역시 그런 화법이 사용되고 있다. 남녀간의 연애는 여기에서도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굳이 언급하려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다.
종교 - 사자
종교의 기원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해 왔던 대로 주술과 종교를 구분한다면, 주술적인 행동과 뭔가 구분되는 종교적 특성을 지적해야만 하리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종교를 '초-현실적 존재에 대한 외경'으로 정의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시작되는 역사적 시점에서의 광경, 즉 종교의 원시적 모습을 추측할 수 있어야만 한다.
유력한 가설은 다음과 같다 - 조상숭배. 그렇다면 한국은, 주술과 마찬가지로, 이 분야에서도 대단히 고전적인 전통을 유지하는 셈이다. 최근의 급격한 사회변화가 그 전통인가 뭔가 하는 걸 모조리 말살하고 있지마는. 어쨌든 그간 한국인은 열심히 장지를 마련하고 제사를 지내는 등의 일을 해 왔다.
발달심리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역설적으로, 대단히 현세적인 행동의 발로이긴 하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던 것이 그대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게 되면서 성장한다. 아주 어린 아이는 어떤 물체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것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그것을 찾는다. 그렇게 사람은 어떤 사물이 영속한다는 관념을 학습한다. 우리는 어머니가 잠시 보이지 않아도 그가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울지 않고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학창 시절 수학을 배우며, 1=1이라는 무지막지하게 고차원적인 공식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제사나 성묘 따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는 그저 잘못된 귀납적 추론의 좋은 예일 뿐이다. 부모의 영혼은 죽어 사라졌다. 아이를 두고 잠시 외출했던 것처럼 돌아오지를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내심 그 귀환을 기대해 왔다. 따라서 기독교가 제사를 엄금하는 것은 어쨌든 논리적으로는 타당하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신념 역시 약간 고차원적 - 단 하나의 영속하는 아버지 - 인 망상에 불과해 보일 따름이지만. 1
이제까지 열심히 망자에 대한 어떤 관념을 비판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어떤 의미에서 이런 관념 - 죽은 이가 영속하리라는 관념 - 은 대단히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결론이 나게 된다. 이것은 심지어 이것을 비판하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산 사람과 똑같이 상상할 수 있다. 가령,
"돌아가신 A씨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했고 말을 느리게 끄는 버릇이 있었다."
이 문장의 주어를 멀쩡히 살아 있는 B씨로 바꾸어 놓아도 정말 차이가 없다. 관념적으로는 말이다.
따라서 관념 속에서, 그들은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 기대될 것이다.
맥베스의 눈 앞에 나타난 뱅코우(테오도르 샤세리오 작). 이 유령은 단 한 사람, 맥베스의 눈에만 보인다.
종교 - 적의
죽은 이들은 산 이들과 같이 있다. 재차 지적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차원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죽은 이들이 실존한다고 여기고, 그들이 산 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그런데 여기서, 프로이트는 한 가지 지적을 한다. 죽은 이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건 뭐 좋다. 그들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는 것 역시 좋다. 그런데 어째서 그 죽은 이들은 산 자에게 해코지를 한다고 여겨지는가?
한국의 풍습을 돌이켜보자. 우리의 부모들은 과연 그렇게도 찌질한 인간들이었는가? 당연히 정성을 다해 산 자들을 보살펴주었으면 주었지, 집이 좋지 않다는 둥, 밥이 맛이 없다는 둥의 하잘것없는 이유로 집구석을 망하게 만들 리는 없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들은, 물론 지금에야 아무래도 아니지만, 제수나 산소가 부실하면 집안에 앙화가 닥친다고 굳게 믿었다. 화를 부르는 주체는 누구인가? 악귀인가? 아니, 그런 잡귀신들은 핑계거리일 뿐이다. 범인은 엄연히 조상님들이다. 2
'오스트레일리아나 이런 동네의, 원시적 사회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 여러 부족'들을 보면, 좀더 솔직한 모습을 구경하게 된다. 죽은 자들은 복을 내려 주는 존재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악당들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을 어르고 구슬러서 나쁜 짓을 못하게 관리한다.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나 복을 받는 것이나 차이는 사실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 왜 우리의 돌아가신 부모들은 우리에게 악감정을 갖는 걸까? 프로이트의 결론은 이렇다 -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갖는 악감정의 거울일 뿐이다.
그렇다면 바로 우리가 부모에게 적의를 품는 것이다. 적의의 강도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고 집안을 말아먹어 버릴 정도다. 이제 사람들은 기겁을 하며 말하리라 - "세상에, 그럴 리가, 제가 부모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약간의 불만이야 있겠지만..."
하긴 이처럼 '패륜'적인 설을 내놓고 욕부터 얻어먹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그렇다면 좀 더 일반인이 수긍하기 쉬운 케이스를 들어 보자. 사람은 별다른 합리적인 이유 없이 가족을 대단히 증오할 수 있다는 예를 말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 가족 사이에 일어나는 매우 순수한 형태의 증오를 목격한다 - 형제간의 증오. 특히 손위 아이의, 이제 막 태어난 손아래 동생에 대한 증오.
형은 갓난 동생이 없어졌으면 하고 절실하게 바란다. 단지 직접 그것을 실행하기 꺼릴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아이는 아직 무력한 존재다.
우리는 이 증오의 원인을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아이는 부모의 관심 - 즉 애정 - 을 독점한다. 그러나 동생의 출생으로 인해 그는 애정의 상당 부분, 심정적으로는 거의 전부를 빼앗기고 만다. 이것은 배신당한 연인의 심정과 같다. 일단 이런 증오는 형이 동생이라는 사태를 납득함으로써 수면 아래에 가라앉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형제는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심리적 다툼을 계속한다. 어쩌면 영원히 계속할지도 모른다.
형제간의 질투에 관한 에세이 하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6&aid=0000008959
이 문제는 굉장히 옛날의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카인과 아벨의 신화.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카인은 동생을 살해한다.
카인과 아벨의 신화에서 다툼은 심리적 사태로 끝나지 않고, 범죄가 되어 현실에 자명하게 드러났다. 물론 이런 사고는 의외로 흔히 벌어지지는 않으며, 우리는 형이 동생을 죽이는 뉴스를 가끔 관찰하며 범죄가 얼마나 드물게 일어나는가만 확인한다. 어쨌든 나이를 먹으며, 형제의 관계는 신화보다는 덜 분명해진다. 그들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좀더 신화보다 현대적인 기법을 요청한다.
터치 - 닮음과 다름
이제 본격적으로 "터치"를 이야기해 보자. 여기에도 형제가 있다. 타츠야(위 왼쪽)는 형이고 카즈야(위 오른쪽)는 동생이다. 이 둘은 - 만화적인 설정이든 어떻든 - 쌍둥이지만, 서로 매우 다르다고 여겨진다.
초반의 장면 하나. 예식장 주인이 동생 카즈야를 사진 모델로 쓰기 위해 찾아왔으나, 카즈야는 외출해 없다.
예식장 주인 : (타츠야를 보며)네, 아주 닮았어요. 역시 형제군요.
아버지 : 그거야 뭐, 본래 쌍둥이니까... 하지만 성격이나 능력은 완전히 다르다구요.
예식장 주인 : 그런 건 사진에 찍히지 않습니다.
예식장 주인 : (타츠야를 보며)네, 아주 닮았어요. 역시 형제군요.
아버지 : 그거야 뭐, 본래 쌍둥이니까... 하지만 성격이나 능력은 완전히 다르다구요.
예식장 주인 : 그런 건 사진에 찍히지 않습니다.
형제의 주위 사람들은 대체로 생각한다. 카즈야는 성실하고 유능하며, 타츠야는 불성실하고 무능하다. 예식장 주인이 굳이 카즈야를 쓰려는 이유는 바로 성격과 능력이지만, 역설적으로 사진의 형식에서 그 성격과 능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장면이 시사하는 것처럼, 어쩌면 이 둘은 그저 형제라 더 달라 보일 뿐이지,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적 차이이건 어떻든, 작품 속 사람들은 타츠야와 카즈야, 둘을 완전히 상이하기까지 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이 둘은 말했듯 DNA와 생활환경이 완벽하게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다름이 가능할 것인가?
원인은 작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형제들 스스로가 부단히 다르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정확히 말하면, 각자는 상대방보다 더 우월해지려 골몰하고 있다. 그 결과 그 둘은 서로 달라 보인다.
일단 동생인 카즈야의 태도를 보자. 만화는 다음과 같은 과거를 제시한다 - 형 타츠야는 동생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반 발씩 앞서 나갔다. 이에 대한 동생 카즈야의 대응으로서 나타나는 게 바로 기를 쓰고 노력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형을 추월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성격과 재능의 차이가 발생한다. 3
여기서 형인 타츠야의 대응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그는 노력으로 동생을 다시 앞지르는 대신, 전혀 노력하지 않는 것으로 동생과 자신을 구분짓는다. 이것은 반동이다. 우리는 이런 사태를 교실에서도 흔히 관찰한다. 교사가 우등생을 칭찬하면, 상식적으로는, 모든 학생이 그 칭찬을 바라 열심히 공부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적지 않은 수의 아이들은 오히려 나태해져 버리고, 그러면서 우등생을 조소한다. 4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이 차이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형제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카즈야가 애정에 민감하고 쉽게 질투하는 성격이었다고 에둘러 이야기한다. 카즈야는 중학생인 작품 초반 시점에서, 굉장히 타인을 배려하는 - 적어도 겉으로는 - 태도를 지닌다. 여기에 더해 뛰어난 성격과 능력의 탓으로, 그는 매우 평판이 좋다.
반면 타츠야는 성격과 능력에 대한 반동으로 인해 동생과 상당히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물론 작중에서도 언급하지만, 타츠야는 사실 그래 봤자 정상의 범위 안에 있을 따름이며, 따라서 그리 큰 문제라고 여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를 동생과 너무 비교한다. 그러자 타츠야는 이 평판이라는 부분에서도 반동으로 나아간다.
이 반동의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의 논의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해답을 준비하고 있다. 적의.
터치 - 적의
지금까지의 전개를 따른다면, 반동의 원인은 동생에 대한 악감정이다. 타인의 행동을 어떤 위선으로 규정짓고, 그와 반대로 행동하면 주관적인 우월감을 누릴 수 있다. 타츠야의 겉으로 드러나는 나태함 아래에는 동생에 대한 어떤 조롱이 깔린 것이다. 타츠야의 행동은 보는 이들에게 어떤 고집스럽다는 인상을 갖게 하는데, 그 정체가 바로 반동의 집요함이다. 우리는 그 집요함으로 그가 동생에게 품는 적의를 미루어 상상할 수 있다.
형제의 부모님은 좋은 사람들이지만 다소 방임적이다. 과연 그 방임이 적절한 것인지 아닌지는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다. 나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타츠야의 반동을 제어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은 친구들이다. 물론 이 반동이 그리 세밀하게 파악되어서는 아니다 5. 단지 반동적 행동은 진정한 소망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고, 사회생활에도 당연히 일정한 악영향을 끼쳐서이다. 6
설명하자면 이렇다. 반동으로는 어떤 소망을 실현할 수 없다. 특히 그것이 사랑이라면. 언제까지나 우등생을 조소하고만 있으면, 영원히 칭찬 따위는 듣지 못할 것이다. 현실의 소망을 실현하려면, 현실의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반동이 주는 것은 주관적 우월감, 그저 약간의 자기위안에 불과하다.
이솝우화의 여우.
타츠야의 친구인 미나미는 이런 구조까지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녀는 이를테면 그저 상식인에 지나지 않는다. 하긴 고등학생에게 그 이상의 지적 이해를 바라는 것은 과한 요청이겠다. 미나미는 타츠야의 문제를 어떤 의지나 근성의 문제로 파악하고, 타츠야에게 노력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농땡을 피우면 갈구고 성실하게 행동하면 칭찬해준다.
그로 인해 타츠야의 행동은 변화를 맞는다. 타츠야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동아리에도 들어 연습을 한다. 그런데 그 동아리는 야구부가 아니다. 이것은 엄연히 야구만화인데 말이다. 작가의 캐릭터들은 모두 야구를 사랑한다. 작품 속 세계에서 이것은 심지어 당연한 것이다 7. 우리는 역시 그 야구가 아닌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데, 동생 카즈야가 먼저 야구부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반동은 소망 실현에 장애가 된다. 8
어쨌든 변화는 그 정도로도 긍정적이다. 어쩌면 2012년의 시점에서는 다분히 통념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미나미의 관점을 벗어나서도 그렇다. 타츠야는 상당히 성실해졌고, 맡은 일에 책임감을 갖고 있으며, 타인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그 덕에 타츠야는, 작품의 세계에서, '카즈야의 바보 형'이 아니라 '우에스기 타츠야' 개인으로서 차츰 인식된다. 9
이 변화의 가장 중요한 실마리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미 반동의 원인을 애정문제에서 찾았다. 따라서 변화의 해법 역시 사랑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었다. 따라서 타츠야가 사랑하는 여인, 바로 미나미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그녀는, 이해의 깊이는 별개로 하고라도, 타츠야에게 적절한 레시피를 건네 준 셈이다. 그 안에서, 사랑의 해법과 삶의 방법은 의도적으로 맞물려 있다.
이 시점에서 그와 동생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것은 그들이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놓고 경쟁하던 것의 제 2라운드다. 단지 대상이 부모로부터 미나미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이 대결은 종전까지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타츠야는 현실에서 그 대결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 타츠야는, 소망을 위해, 반동의 방법이 아니라 현실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평강공주와 온달의 설화...가 소재라는 어느 드라마.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서동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설화는 역사적인 사실의 서술이 아니다. 어떤 무명의 전래된 이야기가 유명인의 이름에 들러붙은 것이라고 추측하는 게 타당하다.
터치 - 죄의식
얼마 후 동생이 사고로 죽는다. 이것은 일상 언어에서 쓰는 의미로나 우리가 사건을 논리적으로 기술하는 의미로나, 그저 사고일 따름이다. 그 우연한 사고 이후, 카즈야는 다시 만화 속 현실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논했던 죽은 이들에 대한 기술을 돌이켜보자. 죽은 이들은, 정확하게 말하면 죽은 이들의 관념은 산 자의 심리 속에서 계속 등장한다. 이는 타츠야의 경우에도 동일해야만 한다.
Q&A. 작가의 최근작이다. 이 작품에서는 정말 죽은 형제의 유령이 나타난다. 비현실적인 전제이지만, 이 설정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타당할 수 있다.
형의 유령을 보는 이는 동생뿐이다. 사실 똑같은 유령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 유령은 관념의 반영일 따름이며, 누구도 동생이 형에게 갖고 있는 관념과 동일한 관념을 갖지는 아니하니까.
이 부분을 밀어놓고라도, 타츠야는 카즈야의 현존을 요청해야 할 강한 심리적 동기가 있다. 바로 죄책감이다.
적의의 목적은 대상의 제거다. 그렇다면 적의는 사실 살의, 즉 살인충동과 동일한 것이다. 물론 적의를 품었다고 해서 누구나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우리는 현실의 규제를 대체로 준수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적의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어떤 소망만을 놓고 보자. 소망은 무절제하다. 가령, 한국인들은 이렇게 말하는 버릇이 있다 -
"저 새끼 죽여 버리고 싶어." 또는
"너어, 자꾸 그러단 아주 주우우욱어?"
등등.
그러나 살인이 발생하는 경우는 극소수다. 어떻게 보면 한국인들은 오히려 유별난 케이스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일반적으로는 살의를 함부로 표현하지 않으니까. 10
그러나 우리가 이미 고찰한 바 있듯, 소망의 이런 무절제함은 갓 태어난 동생을 보는 어린아이의 사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카즈야의 죽음은, 타츠야에게는, 적의라는 소망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동생의 죽음은 타츠야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고였다. 만화는 카즈야의 죽음을 타츠야의 어떤 행동과 연관시키려는 시도조차 전혀 하지 않았으며, 이 둘을 현실세계에서 완벽하게 분리해 놓았다. 따라서 어떤 살의에 가까운 적의의 목적이 실현되었다 한들, 우리는 이것을 살인사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소망과 사건 사이의 우연적 일치만 있을 뿐이다. 12
그러나 인과관계란 것은 굉장히 경험적인 관념이다. 가령 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범죄율의 증감과는 별다른 인과적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일반인들의 현실감각과 어긋나며, 또 그들의 소망과도 어긋난다. 사람의 믿음은 과학적 이론이나 논리적 비판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따라서, 소망과 사건 사이의 우연적 일치도 인과관계로 파악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 있다. 프로이트에 말에 따르면 이렇다 - 13
"무의식적 사고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사한 사람도 타살당한 사람이다. 사악한 소망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14
그렇다면 타츠야의 사고의 일면은, 어쩌면 말마따나 무의식적 사고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내가 동생을 살해했다'. 여기서 타츠야에게 '너는 죄가 없다'고 이야기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사실 타츠야도 그런 객관적 사실쯤은 아주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15. 타츠야가 정말 자신이 현실에서 동생을 살해했다고 믿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정신병이라고 불러 마땅할 테다 16. 17
어쨌든 타츠야는 그가 저지른 죄상, 즉 친족살해에 변명해야 한다. 물론 죄악은 관념적인 죄악이며, 변명 역시 관념적인 방식의 변명이겠다.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 몇 가지 변론문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1. 나는 동생을 적대하지 않았다.
2. 동생은 죽지 않았다.
3. 동생이 죽은 것은 정당하다.
2. 동생은 죽지 않았다.
3. 동생이 죽은 것은 정당하다.
물론 우리는 3의 경우를 목격할 수 없다. 그러나 1이나 2의 변명은 찾아낼 수 있다. 이 '고요한' 변명은 타츠야의 어떤 제안에서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미나미에게 건넨, 카즈야의 사진을 걸어 놓자는 제안에서.
터치 - 사진
이 카즈야의 사진은 매우 커서, 피사체가 마치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날 정도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동생의 사진은 두 사람의 지내던 방의 책상 위에도 놓인다. 그리고 거실 한구석에도 카즈야의 사진이 있다. 거실의 사진은 일본의 풍습에 따른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유효하게 작동한다.
이 행동 - 사진걸기는 무엇을 요청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사진걸기의 동기와, 그것과는 약간 구분되는 사진걸기의 결과를 구분할 필요성을 느낀다. 사진걸기의 동기는 명백한데, 그것은 욕망의 억제다. 지적했듯 소망, 혹은 욕망은 무절제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현실적 상황에서 제어해야 한다.
타츠야도 그의 욕망 -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여자친구에 대한 성욕 - 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타츠야는 늘 소망을 단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은 오직 그의 동생이었다. 따라서 동생이 여전히 현존한다면, 타츠야도 능히 그 소망을 억제할 터이다.
따라서 사진걸기는 동생의 관념적 현존을 요청한다. 사진은 확실하게 동생의 존재감을 부여한다. 따라서 동생은 죽었으나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타츠야가 성적 충동을 절제하는 데 도움을 준다. 18
이 존재감은 또한 타츠야에게 상당한 위안을 줄 것이다. 동생의 죽음은 부정되었다(위 단락의 표 2번). 이제 타츠야는 죄책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살인은 실패했으며, 자신의 적의는 미수에 그쳤으니까.
그리고 부수적인 효과로 1번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싫어하는 사람의 얼굴을 좋이 마주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동생의 사진걸기는 동생에 대한 자신의 적의를 부정하는 의미를 지닌다. 동생을 죽어서까지 대면하고 있는데, 형제는 원래 친밀한, 적어도 원만한 사이였겠다. 그러니 절대로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잖겠는가!
이 두 효과는 기본적으로 타츠야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장치들은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효하다. 가령 타츠야네에 밥을 먹으러 온 야구부원들이 카즈야의 사진을 목격하고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지 눈여겨보자. 그들은 카즈야의 소망 - 죽어 없어진 사람인데, 의지나 감정이 어디 있겠는가? - 이 현존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하겠다고 다짐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장면에서 순수한 감상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타츠야뿐이다.
터치 - 형제
카즈야가 죽고 몇 달이 지났다. 타츠야는 야구부에 가입한다. 이것은 타츠야 자신의 소망이 실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를 영입한 야구부원들은 타츠야와 카즈야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관념적 유사성'에 따라 타츠야가 카즈야의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것은 실로 주술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타츠야의 독자적 재능을 간파하는 사람 - 야구부 매니저 - 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미나미의 평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한 착각'일 따름이며, 매니저가 견해를 고수하는 건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란다. 현상적으로 매우 올바른 비평이다.
그러나 예상대로라고 해야 하나, 의외라고 해야 하나, 타츠야는 가입 후 그럭저럭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물론 동생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타츠야는 야구하는 스타일도 동생과 상당히 다른 것 같다. 하지만 그에는 아무도 각별히 신경쓰지 않는다. 19
그 시점에서 요시다란 학생 하나가 등장하는데, 타츠야와 동년배인 학우다. 이 캐릭터는 타츠야의 동생과 같은 사람이다. 어쩌면 카즈야의 대신, 그렇다고 하기에는 꽤 많이 다르긴 한 갈음이라고 해야겠다. 동생과 같다, 그 예를 들자면 이렇다. 요시다는 타츠야를 동경하고, 관심을 보이고, 그와 똑같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결국 야구부에까지 따라 들어온다. 이것은 어린 동생이 흔히 형에게 보이는 태도와 정확히 동일하다. 동생에게는 형이 유년기의 모델이며 어쩌면 우상이니까 말이다. 어느 시점까지는.
동생의 그런 동경은 형이 굉장히 우월한 존재처럼 보일 때까지만 유효하다. 동생도 언젠가는 성장하기 마련이고, 몇 년의 차이는 그리 큰 것이 아니게 되니까. 시간이 지나 동생이 형과 거의 대등해졌을 경우, 동생은 어쩌면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되는지도 모른다 - 뒤집어 엎어버리자.
요시다도 이런 궤도를 정확히 밟는다. 처음에는 타츠야에게 대단한 호의를 보이다가, 나중에 와서는 적대하기 시작한다. 변화는 몇 가지 단서를 떨어뜨리며 시작하지만 확실히 급작스럽다. 얘가 왜 이러는지, 타츠야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대체-동생의 행동에는 나름의 동기가 있다. 형제의 존재 탓에 어머니의 사랑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듯, 타츠야를 제압하면 사회에서의 지위와 평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여기서 타츠야는 누가 짱을 먹건 야구부 돌아가는 데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이는 물론 타당하다. 하지만 사람의 권력욕은 그리 간단히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이 적의가 정점을 찍을 무렵, 작가는 이 문젯거리를 간단히 전학보내버린다.
다시, 터치 - 형제
1년이 지나자, 또다른 형제 한 쌍이 작품에 등장한다. 여기서 타츠야는 한층 더 노골적인 타인의 적의와 마주하게 된다.
타츠야의 야구부에 감독이 새로 부임한다. 타츠야네 학교 졸업생인 감독은 타츠야와 매우 비슷한 배경을 지닌 사람이다. "백치"에서 미쉬낀과 나스따시야가 그런 것처럼,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닮았다.
감독은 타츠야와 마찬가지로 형제가 하나 있다. 형제는 당연히 성이 같고, 타츠야-카즈야가 그런 것처럼 이름도 비슷하다. 쌍둥이처럼은 아니지만, 감독은 외모가 형과 매우 닮았다. 그리고 취미나 특기도 형과 닮았다. 동생은 형이 속했던 사회 조직 - 학교, 야구부 - 을 약간 늦게 따라간다. 그리고 바로 그 닮음으로 인해, 감독은 형과 비교당한다. 20
형제는 예외 없이 부모의 애정을 놓고 다툼을 벌인다. 당연히 감독도 형과 부모의 애정을 놓고 경쟁했을 것이다. 가정을 벗어난 사회에서도 이 둘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또한 타츠야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서도 형제와 경쟁을 했다. 타츠야와 카즈야의 대립은 애매모호하지만, 감독과 형 사이의 적의는 노골적이다.
감독 역시 야구가 취미이자 특기다. 그는 사실 형제 못지않은 재능과 열성이 있다. 그러나 감독은 타츠야와 비슷하게, 권력에는 무관심하며 사회적 평판에는 오히려 적대적이다. 사회성이 매우 좋은 형제와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감독은 생물학적 나이가 적은 만큼 출발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타츠야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형제보다 매우 불리한 입장이었다.
이렇듯 감독과 타츠야, 둘은 매우 닮았다. 둘의 운명 역시 비슷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유사한 유전자와 환경을 지닌 형제의 운명이 달라져 있듯, 둘의 처지 역시 사뭇 다르다. 둘이 첫 대면한 시점에서의 부모의 관심과, 연인의 애정과, 학교나 사회에서의 위치를 보자. 타츠야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고, 감독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이 극단적인 차이는 단지 하나의 사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감독은 이것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감독 : (카즈야가) 좋을 때 죽어줬군. 너(타츠야), 운이 좋은데?
감독과 타츠야의 관계는 복합적인 유사성을 띈다. 도식하면 이러하다.
감독에게 타츠야는 자신의 형과 매우 유사한 사람이다(그림2). 자기와 닮았지만,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따라서 타츠야는 감독이 가진 형에 대한 적의를 투사할 아주 좋은 대상이다. 그래서 감독은 복수를 계획한다. 얼핏 이것은 매우 불합리해 보일지도 모른다. 감독의 것을 가져간 건 타츠야가 아니라, 감독의 형이 아닌가?
하지만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한때 열심히 이소라와 김건모와 김제동과 옥주현을 깠다. 많은 시민들은 범죄자를 증오한다. '아고리언'은 현 대통령 각하를 까고, 소위 '정사충'들은 전 대통령들을 깐다. 어째서인가? 정말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었는가?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대답은 이것이겠다 - 사람들은 그저 나름의 적의의 대상을 찾고 있을 따름이다.
현대 한국의 사회현상을 보면 감독의 엇나간 복수는 오히려 그럴듯해 보이기까지 한다. 감독은 실제로 자기 형에게 피해를 입긴 했다. 게다가 타츠야와 감독의 형은 굉장한 관념적 유사성이라도 있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의 불행은 대체로 그들이 비난하는 것들의 탓이 아니다. 21
터치 - 분신
감독의 적의는 노골적이기에, 타츠야는 그것을 처음부터 쉽게 파악한다. 다른 야구부원들은 그것을 적의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녁의 정중앙에 있는 타츠야가 그것을 오해하기란 쉽지가 않다. 적의에 대한 타츠야의 처음 반응은 반발로서 나타난다. 물론 타츠야는 그 적의의 사적 동기까지는 알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 미나미는 그 적의의 개략적인 그림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타츠야에게 내막을 전하고, 감독을 경질시킬 기회라고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타츠야는 감독의 개인적인 사정을 대강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타츠야의 태도는 종전과 달라져 있다. 타츠야는 감독의 재능이 중요하지, 적의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재능 있는 감독만이 그들을 본선으로 데려가 줄 터이라고.
이것은 감독을 옹호하는 게 아닌가? 물론 타츠야는 자기네들이 감독을 그저 이용할 따름이라 역설하고 있다.
"원한이든 뭐든 좋아. 철저하게 훈련받아야 해."
실제로 훈련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은 나름대로 유용한 존재이긴 하다. 만화는 타츠야가 열심히 훈련해야겠다고 결심할 만한 사건까지 바로 앞에 준비해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의심해 보아야 한다. 감독의 개인적인 사정 - 유능한 형제를 둔 불량해 보이는 동생 - 을 안 것과, 감독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 둘은 과연 무관한 것일까?
이를테면 감독의 형이 모교를 방문했을 때를 보자. 감독은 부재중이지만 타츠야는 감독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야구부원들과 훈련하고 있다. 아니, '훈련시키고 있다'가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목적은 다를지 몰라도, 적어도 수단만큼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과연 일치하는 것은 방법론뿐일까? 과연 그 원한이란 아무래도 좋은 것일까? 미나미는 야구부 OB인 감독의 형에게, 훈련하는 야구부원들을 보여 준다. 미나미는 타츠야를 가리키며, 감독의 형에게 설명한다 - 당신 동생과 같은 사람이라고.
터치 - 죽음
감독은 타츠야에게 극심한 적의를 품지만, 감독에 대한 타츠야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일단 타츠야는 감독을 적대시할 만한 추억이 딱히 없다. 애초에 감독은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며, 자신이 내심 적대하던 누군가를 닮은 것도 아니니까. 물론 타츠야는 감독과 매우 닮은 사람 하나를 알고 있다 - 바로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자신이다(그림 1).
과거 타츠야는 형제에게 적의를 품었다. 감독이 형에게 적의를 품고, 형과 관념적 유사성을 갖는 타츠야에게도 적의를 품는 것처럼. 물론 타츠야는 그 적의를 현실에 분명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소망은, 어쩌면 인간의 무의식은, 지적했듯 절제를 모른다. 따라서 타츠야의 적의나 감독의 적의나 별 차이란 없다. 간단히 말해, 타츠야의 경우에는 감추어져 있던 것이 감독의 경우에는 드러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둘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 범죄를 소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론 감독 역시 살인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다. 무절제해 보이는 감독의 행동도 어떤 최소한의 사회적 규칙 정도는 준수한다. 가령 우리는 여느 무뢰한의 흔한 변명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 여자는 때리지 않습니다. 감독이 기획하는 것은 현실에서 가능한 보복이다.
그러나 타츠야는 적의의 궁극적인 목표- 살인 - 를 지적할 수 있다. 타츠야가 감독과 배팅연습을 하는 장면을 눈여겨보자. 타츠야는 공을 던지는 감독에게 말한다 -
"머리라도 맞았다간 죽겠어요."
감독은 정말 그것 - 죽음 - 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두들 무사하다. 역시 살인은 그렇게 흔하게 벌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과거의 타츠야가 감독을 닮았음은 명백하다. 그런데 현재의 타츠야가 감독을 닮았다고 이야기한다면 좀 이상한 게 아닐까. 카즈야는 죽었으며, 타츠야에게는 어떻게 질투할 사람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와 같은 물리적인 사실은 역시 결정적이지 않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관념적인 차원의 사태다. 뱅코우의 유령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카즈야의 사진을 생각해 보자. 카즈야는 죽었으나 아직 죽지 않았다.
터치 - 거울
이 포스트의 머리에서 말했듯, 인간의 관념은 죽은 이와 산 이를 명확히 구분할 능력 같은 게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꿈에서 죽은 사람을 절대 마주하지 않아야 한다. 원시인들은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그가 분명히 관념적으로 존재하는데 어떻게 죽었다고 이야기하는가?
사람들은 그 관념적 존재를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산 사람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기에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 바로 유령.
우리는 아주 가끔 유령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유령을 굉장히 자주 말했다. 그리고 그 유령이란 걸 지금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하게 믿었다. 그 유령이 현실에서 정말 존재하는지 검사해 볼 이유는 희박했다. 어차피 그들은 관념이 현실을 지배하는, 포스트모던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22. 23
물론 유령, 즉 현실감을 담보하는 사자에 대한 관념,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의 현실과 별 관련이 없다. 게다가 유령은 정작 현실에서 존재하던, 그, 살아 있었던 인간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우리의 관념이 어디까지나 주관적이기에 그렇다.
우리의 관념, 대표적으로 꿈이 지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냐지, 그 세상이 실제로 어떠하냐가 아니다. 원시인들은 꿈에서 자신이 누군가를 상해하면, 잠에서 깨어 그에게 사과하러 가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설령 꿈 속에서 누구를 살해했다 한들 사과할 이유가 없다. 단지 우리가 그 누군가에게 가지는 적개심을 추측할 따름이다.
따라서 유령은 그 사람이 생전에 어떠했는가를 보여 주기보다는, 유령을 보는 우리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렇다면, 유령은 죽은 사람보다는 오히려 산 사람을 더 닮은 것이다.
카즈야 역시 그렇다. 작품에서 카즈야의 사진을 보는 사람은 타츠야만이 아니다. 미나미나 형제의 어머니, 야구부원들도 카즈야의 얼굴을 보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야구부원들은 카즈야의 사진에 타츠야와는 확실히 다른 반응을 보인다. 미나미나 엄마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생각은 모두 다르다. 따라서 유령의 모습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이다.
타츠야가 갖는, 카즈야에 대한 관념 역시 타츠야 개인만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관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만화는 그 관념에 여느 유령처럼의 실체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품은 타츠야의 회상을 잠깐씩 언급하며 그 안에 카즈야를 등장시키지만, 어떤 문제적으로 느낄 만한 갈등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마치 살아 생전 형제의 적의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아니한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프로이트의 지적을 상기해야 한다 - 적의의 거울을.
터치 - 두 개의 거울
Carita의 화장품 광고. Isabelle Bonjean
카즈야의 사진은 일종의 거울이다.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거울을 상상해 보자.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과 같은 모습의 얼굴이 자신을 맞이하고, 우리는 그것으로 자신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다. 거울 안의 모습은 엄연한 외부의 존재이니까. 그래서일까, 가끔씩은, 거울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거울이 하는 말 - 너는 백설공주보다 예쁘지 않다 - 은 거울을 보는 자신이 갖는 생각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카즈야의 거울-사진이 어떻게 말하는지, 이미 답은 나와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비밀을 타츠야는 감히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 감히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는 타츠야와 수많은 유사성을, 그리고 결정적으로 형제에 대한 적의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현실의 거울이다. 카즈야의 사진이 관념의 거울이라면.
타츠야는 두 개의 거울과 마주하고 있다. 이제 여러분은 그 거울들 중 하나가 입술을 움직이는 것을 목격한다. 당연히 다른 하나의 거울도 똑같이 이야기해야만 한다...
"우에스기 카즈야가 뭘 생각하는지 가르쳐줄까? ...이 녀석은 말이지, 우에스기 타츠야가 난타당하는 걸 보고 싶어하고 있다고. 내가 없는데 고시엔 같은 델 갈 수 있겠냐고 말하고 싶어한단 말이다!" 24
터치 - 소망
이제 거울과, 거울에 비치는 사람 사이의 동일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적의의 완벽한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그 적의를 관찰하는 타츠야는 느낄 수 있다 - 그 적의의 모습은, 적의로서는 완벽할지 몰라도, 온전한 심리로서는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감독의 행동을 살펴보면, 적의를 불태우는 것치고는 어딘가 허술하다. 타츠야가 지적한 훈련의 문제를 보자.
"원한이든 뭐든 좋아. 철저하게 훈련받아야 해."
감독의 적의는 강렬하지만, 그가 수행하는 훈련의 성과는 명확하다. 그 수단으로서의 적절성은 이후 벌어지는 시합에서 정확히 증명된다. 타츠야와 야구부원들은 다져진 기본기로 그럭저럭 승리해간다. 감독은 벤치에 앉아 팔짱을 끼고 그 승리를 조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무난한 성과를 낸 것은 감독의 공이다.
감독은 성과가 나건 말건 야구에 적의를 품는다. 그는 승리보다는 패배를, 영광보다는 치욕을 기원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낳은 결과는 적의와는 정반대의 양상을 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타츠야와 야구부원들의 소망과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어느 샌가 감독은 야구부원들의 존경을 받게 되고, 그는 의도하지 않는 전개에 당황한다.
다시 타츠야의 경우를 돌이켜보자. 타츠야는 카즈야와는 다르게, 어떤 소망에 대해 반동의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실제 소망을 추정하려면 정확히 행동과 반대의 것을 상상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자, 사실은 드러난다. 타츠야는 그것 - 대표적으로 야구 - 를 원하고 있었다.
감독 역시 어떤 사태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열심히 관찰해 왔듯, 감독은 타츠야와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감독의 진정한 소망 역시 감춰져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소망하는 것은 바로 그가 부정하는 것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은 소망의 부정이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실제 행동은 소망 실현의 내용으로 변화해 있다. 이렇게 되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 된다. 그가 원하는 건 승리인가, 패배인가? 영광인가, 치욕인가?
터치 - 양가성
우리는 터치-형제의 단락에서 요시다의 경우를 관찰했다. 그의 행동은 명백한 호의와 명백한 적의로 양분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저 어느 한쪽이 극단적으로 드러나 있을 따름이다. 한쪽이 없어지고 다른 쪽이 생겨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사건은 사람의 어떤 심리를 호의와 적의 둘 중 하나로 명확히 분류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처음에 우리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적의를 논했다. 물론 극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를 사랑할 것이며,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부모의 사랑을 원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적의가 없다면 악령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다면 형제간의 다툼도 없었으리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그 누군가를 반드시 미워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요시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타츠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만화의 초반, 그러니까 타츠야가 1학년이고, 야구부가 아닐 때, 동생 카즈야가 치른 야구 예선 준결승전을 떠올려 보자. 타츠야는 경기장에 가지 않았지만, 경기는 TV에서 중계해주고 있다(고교야구 예선을). 그 경기를 타츠야는 안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동생이 이기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타츠야가 원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이 분의 말마따나, 둘 다이다. 타츠야는 자신과 닮은, 자신과는 그러나 다른 사람의 영광을, 다른 한편으로는 치욕을 원한다. 그렇기에 타츠야는 계속 갈팡질팡하고 있다. 결국, 타츠야는 당연하다는 듯 동생의 승리를 바라 야구장으로 달려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소년만화는 독자가 줄곧 그런 식 - 단순히 우애깊은 형제 - 으로 생각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승리를 목격한 타츠야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 용어로 양가감정(ambivalence)이라고 한다. 엇갈리는 감정이다. 이런 상반된 충동은 현실의 논리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심리적으로도 모순이다. 따라서 타츠야는 방황할 수밖에 없다. 타츠야가 얼핏 행동력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의 일부는 위에서 말한 반동이지만, 다른 일부는 이런 심리의 엇갈림이다.
이제 굉장히 비합리적인 그림이 된다. 하지만 이런, 이를테면 언캐니한 괴상함은 타츠야의 탓이 아니다. 누구나 적어도 약간씩은 그런 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터치"의 등장인물들 가운데서도 이런 양가성은 흔히 발견된다. 유사-동생인 요시다는 물론이고, 하라다, 니시무라, 유카, 그리고 감독의 형과 카즈야에 이르기까지. 그 중에서 타츠야가 유달리 섬세한 편이긴 하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오락가락하고 있었으면, 다들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테다. 양가성이란 면에서 카즈야는 타츠야와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타츠야와는 다르게 굉장히 성실하다. 그의 어떤 적의는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투쟁심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다. 카즈야는 현실의 원칙을 이해하고 충실하게 이행할 준비를 갖춘 사람이다. 26
우리 사회는 양가성에 대처하는 방법을 마련해 놓았다. 그 방법이 유효한가, 또는 적절한가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들은, 이제 다소 고전적이겠지만, 형제끼리 조금 다투기만 하면 바로 매를 드는 아버지의 모습을 쉽게 상상한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또는 비의도적으로 여러 금제와 이런저런 규칙을 발명해 그것을 계승해 왔다. 그 현실의 원칙에 따르는 사람은 찬양을 받을 것이다. 바로 카즈야처럼. 그리고 당연히, 감독이나 타츠야처럼 아웃사이더 기질이 다분한 이들은 좋지 못한 시선을 얻게 된다. 27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좋은 사람이란, 신에게 경건하고 친구에게 친절하며 전쟁에서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 사람이 어느 순간에는 완벽한 호의로, 다른 순간에는 완벽한 악의로 자아를 분리시킬 수 있단 말인가? 적의와 폭력을 반대하는 사람은 타인을 죽이는 데 당연히 거리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적인 좋은 사람이란, 마치 조울증처럼, 심리적으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간상이다.
그러나 사회는 부자연스러운 인간상을 제조해내는 기술이 있다. 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만큼 이상해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영웅들은 그러니 영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터치 - 동지
카즈야와는 다르게, 타츠야는 방황하는 사람이었다. 심리적으로나, 실제 행동에 있어서나. 타츠야는 적의에 솔직하지 못한 만큼, 애정표현에도 솔직하지 못하다. 소망은 반동으로 변하고, 애정은 적의와 반동에 섞여 독특한 색을 띈다. 하지만 지적했듯 타츠야는 문제아도 악당도 아니다. 오히려 정상인이라 불리는 사람들보다도 더 신사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가령 타츠야가 카즈야를 위해 글러브를 사는 에피소드를 보자. 이것은 어떤 호의의 형식이며, 그 형식은 어떤 애정을 주장하기만 할 뿐이다. 간략하게 말해 예절 자체에는 내용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건 안에서 형제 사이의 애정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형제간의 질투에 따른 어떤 긴장감까지도 조금은. 반면 감독은 형이 야구부에 기증한 글러브들을 태워버린다. 28
타츠야와 카즈야의 관계는 여러 문제에도, 대체로는, 정서적 유대로 귀결되는 듯하다. 따라서 독자들을 오직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안내하는 만화의 태도는, 어쨌든 결론적으로나마 타당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으로 타츠야의 심적 문제가 수학문제 풀리듯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감독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공정하지 못하다. 양가성의 한 쪽을 당연히 무시해버릴 수 있다면, 감독에게 남는 것은 적의밖에 없을 테니까.
감독의 심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그 복잡한 심사를, 반동 사이의 소망을, 적의 사이의 애정을 타츠야는 이해할 수 있다. 서로 닮은 사람이니까. 물론 서로 닮았다고 해서 바로 확고한 정서적 유대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형제간의 갈등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형제는 서로가 서로의 것을 강탈한다고 믿는 사이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서로에게 지지가 되어 준다고 여길 때, 우리는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 이는 둘 사이에 공동의 목표가 설정될 때 특히 효과적일 터이며, 정치가들은 이런 수법을 흔히 악용한다.
마침내 야구라는 공통의 소망 아래에서, 타츠야와 감독은 현실의 동지로 발전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쉬운 게 아니었다.
내가 좋아, 카즈야가 좋아?
이것으로 감독과 타츠야 사이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문제에서 아직 진전을 보지 못했다. 타츠야가 가졌던 반동이라든가, 죄책감이라든가, 양가성이 낳는 심적 문제들 말이다.
시시포스. 티치아노 작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 꼭 적의가 전부가 아니라면, 타츠야는 죄책감을 조금은 덜지 않을까? 하지만 이러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 사랑하는 사람을 살해한 셈이 되니까. 또는 감독과의 관계에서, 타츠야는 적의를 품은 형제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나? 그런데 카즈야는 이미 현실에 없는 사람이다.
타츠야는 예선 결승의 순간, 이런 문제들을 해결한 것으로 보였다. 덕분에 타츠야는 야구부원들과, 그리고 감독과, 지역예선을 성공적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내 카즈야에 대한 타츠야의 심적 태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듯하다. 타츠야는 때로 소망을 부정하고. 아무래도 호의적이지는 않은 듯한 형제의 유령을 만나며, 여전히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제 굳이 풀어 설명하기는커녕 이야기하는 것마저도 진부하게 느껴지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래 가지고야 대회 본선을 제대로 치를 수 없다. 타츠야는 돌을 다시 정상까지 끌어올린다. 그리고 대회가 끝난 후, 타츠야는 진전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 답은 "없음".
대체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타츠야의 문제는 사뭇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타개되는 모양을 띄기도 하지만, 감정의 원형 - 대표적으로 적의 - 은 언제까지나 그대로 남아 있다. 정말 극단적으로, 타츠야에 대한 감독의 문제만 해결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감독이 꼭 구원을 얻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만화는 감독이 그의 아버지나, 형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어디엔가 남겨 놓았음을 시사한다. 마음 한구석에서 감독은 그들과의 화해를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럴 일은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
만화의 끝에서, 인물들은 야구가 아닌, 각자 다른 일들과 마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작점에 선 것이다 - 어쩌면, 그저 다시 기슭에서 정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터치 - 종교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상기해 보자. 나도 이 주장의 진리성을 확신하지 못한다.
종교의 기원은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욕망을 제한하는 현실적 실체이다. 아들은 적의로 인해 아버지를 살해한다(보아 오셨듯, 그것이 관념적인 의미이건 사실로서의 의미이건 차이가 없다). 죽은 아버지는 추상적인 존재가 된다. 아버지가 죽었음에도, 아들은 여전히 욕망을 제어할 현실적 필요성이 있다. 이제 적의는 전면에서 퇴장하고, 죽은 아버지는 존경받는 존재가 된다. 그는 아들의 욕망을 온전히 소유하고, 그 욕망을 처벌하는 권력을 지닌다. 아들은 욕망을 단념하고, 그것으로 더 높은 문명적 성취를 달성할 수 있다. 그 성취는 아버지의 공으로 돌려진다. 하지만 일견 금지된 욕망은 여전히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사되고 있다.
이 가설은 "터치"에서 정확히 유효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죽은 카즈야의 사진은 일종의 우상으로 동작한다. 야구부원들은 우상의 소망 - 사실은 자신의 욕망 - 을 달성하기 위해 당장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달성한 위업은 우상에게 돌려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뜻 비합리적인 종교적 세계관과 전혀 동떨어져 보이는 이 만화는 강렬한 종교적 색채를 띈다. 단지 그 현상의 서술이 현대적 방식으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그런 입장을 일관한다면, 독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타츠야의 시지프스적 분투와, 그것으로 얻어 낸, 그리고 이내 형제에게 돌려진 사회적 성과가 된다. 이를테면 메이세이 고등학교의 본선 진출을 알리는 신문 기사라든가, 감독이 손에 든 코시엔 경기 입장권이라든가, 타츠야네 집 안에 놓인 상패 같은 것.
끝마치며
"이것은 수영 만화입니다."
작가의 다른 작인 "러프"의 대사다. 이를 "터치"에 적용시킨다면, 이것은 만화이며, 야구 만화이며, 그리고 야구를 주제로 한 소년만화일 따름이다. 작품은 소년만화의 미덕에 충실하다. 그리고 야구의 미덕에도 충실하다.
우리는 여기서 오직 심리적인, 또는 철학적인 비판만을 다루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이 만화를 보아도, 여러분은 아주 많은 것을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터치"는 극적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도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만화의 서술은 어디까지나 평이하고, 연출은 섬세하지만, 대사는 쓸데없이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이것은 소년만화니까.
따라서 여러분은, 설령 당신이 아직 어린 소년이어도, "터치"에 대해서 마음에 능히 많은 이야기를 적을 수 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리는, 어쩌면 고작 만화라고 불리는 한 장르 안에서, 감히 위대함을 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 유교는, 그것을 어떤 지식과 신념의 체계로 이해하더라도, 분명 종교적 면을 보유하고 있다. 단지 그 종교적인 면이 다른 체계들 - 이를테면 기독교 - 에 비해 넓지 아니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덜 중요해지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 부분이 넓든 좁든 전체에서 분리해낼 수 없다. 둘째, 유교를 채택하는 자들 중에서도 지식수준이 뒤떨어지는 부류들은 어김없이 존재한며, 이들의 경우 그 종교성이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강하게 드러난다. [본문으로]
- 사회변화에 따라 가부장제가 몰락하면서 이 분야에서도 엄청난 변동이 있었다. 대표적인 합리주의자이자 리버럴에 천주교인이기까지 했던 DJ도 대통령에 하도 떨어지니 명당 자리로 이장을 한 전력이 있다. 이게 대체 믿어지기나 하는 소리인가? 오늘에는 허경영마저 상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십몇년 전이 지금과 그렇게 달랐다. [본문으로]
-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아래에서 잠깐 언급할 취향의 문제다. 아니면 두번째로, 형은 대체로 동생보다 나을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물론 후자는 이 글의 한계를 넘어선 가설이다. [본문으로]
- reaction. 심리적 반작용. [본문으로]
- 타츠야의 행동은, 여러 번 이야기했듯, 문제적이라고 보기까지는 어렵다. [본문으로]
- 어울리지 않게 조숙한 애늙은이 청년 하나를 제외한다면. 작가는 어느 정도의 해설역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것은 소년만화니까. 물론 이런 캐릭터는 비현실적이다. [본문으로]
- 대체로 어떤 취향은 타츠야가 카즈야보다 선행했다. 따라서 어쩌면, 야구에 대한 애정 역시 타츠야가 동생보다 선행할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 가령, "러프"에서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야구선수의 동생이 얼마나 이질적으로 느껴지는지를 눈여겨보자. [본문으로]
- 터치는 81년에서 86년에 걸쳐 연재되었다. 따라서 인물의 행동에도 약간의 시대상이 반영된다. 작가의 최근 작 인물들은 "터치"에 비해 온화하고 덜 마초적인 편 - 그러나 솔직히 말해 작품성은 떨어지는 편 - 이다. [본문으로]
- 프랑스의 브리지뜨 바르도는, 일명 '개고기 사건' 당시, 한국인들에게서 수많은 '살해위협'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본문으로]
- 사진은 동명의 영화(1958년작)에서의 드미트리.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뭐 상관없어. [본문으로]
- 가령 타츠야가 어떤 부탁을 해서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다든가 [본문으로]
- 인과관계 자체도, 겉으로는 매우 단순해 보일지라도, 복잡한 철학적 논쟁의 주제가 된다. [본문으로]
- 토템과 터부, 114페이지 [본문으로]
- 따라서 타츠야가 닛타의 집에서 트로피를 들고 있는 장면. [본문으로]
- 이 점에서 타츠야는 오이디푸스와는 정반대가 된다. 친족살해의 객관적 행동은 없지만 주관적 그림이 있으니까. [본문으로]
- 작가의 다른 작품인 "러프"의 대사 하나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점이나 운명은 믿지 않지만, 암시에는 걸리기 쉽다. [본문으로]
- 즉 자신의 생각 속에서만큼은 살아 있다는 믿음. [본문으로]
- 둘의 헤어스타일을 떠올려 보자. [본문으로]
- 에이치로-에이지로. 이들 이름의 유사함이 계기가 되는 에피소드도 있다. [본문으로]
- 주사파들의 주장을 보자. 체제모순은 분단모순 운운. [본문으로]
- 나는 80년대의 지방 도시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영혼이 정말 찾아온다고 믿었다. 당시는 그런 믿음이 한창 붕괴되어갔던 시절이긴 했다. 제사를 교리대로 지내는 가정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본문으로]
- 물론 어느 시대에나 이단아는 존재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인물은 아마 삼국지의 조조이겠다. 그러나, 그래서인지 그는 사람을 죽이는 데 매우 과감했다. [본문으로]
- 일본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全国高等学校野球選手権大会). 코시엔은 대회가 개최되는 효고현의 야구장 이름으로, 대회의 별명처럼 쓰인다. 작중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대회 지역예선이다. [본문으로]
- The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 다마스쿠스 행로에서의 회심. [본문으로]
- 그런데 타츠야의 과거 회상을 보면, 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카즈야는 다소 고지식하고, 타츠야 쪽이 오히려 세상 사는 기술, 속칭 유도리가 뛰어났었다. [본문으로]
- 꼭 인간이 만드는 것들만이 현실의 원칙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본문으로]
- 야구장갑은 가죽제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작중의 글러브는 3만 5천엔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