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에 처해야죠!
- 알렉세이 카라마조프
- 알렉세이 카라마조프
이 글을 써야 하나 오래 고민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불확실한 사태에는 되도록 말을 아껴야겠다. 둘째, 다른 사람들이 그에 관해 충분히 많은 말을 했다. 셋째, 나도 사실 충분히 많은 말을 했다. 1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일리야 레핀
따라서 이 글은 여러 주장을 정리하는 수준이며, 그에서 크게 벗어날 필요가 없다. 사실 굳이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괜찮은 글들이 많이 나온다. 참고가 될 글을 꼽아 보자.
참고 기사
http://h21.hani.co.kr/arti/COLUMN/142/29364.html
진중권-정재승의 크로스. 사유의 기초가 될 만하다.
http://www.ddanzi.com/news/65745.html
딴지 기사들은 대체로 발상은 참신한데 치밀하지 못하다.
http://news.nate.com/view/20110531n11698?mid=e0103
몇 가지 적절한 지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202138535&code=990000
"사연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게 목적이다."
http://www.ddanzi.com/news/66252.html
구설수, 그리고 옥주현에 대한 '편견'.
http://media.daum.net/entertain/enews/view?newsid=20110601094304933&RIGHT_ENTER=R4
http://news.nate.com/view/20110608n06145?mid=e0102
아마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지적.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55
가요계의 지형 정리.
서론. 욕구는 삶의 모든 국면의 표현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의 열풍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 프로그램의 컨셉과 대중의 소망 사이의 일치. 다시 말하면, 프로그램이 표방하는 내용이 여러 사람의 욕망에 부합하는 것.
'대중'이란 말을 쓰기 전에, 일단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사람들의 욕망은 각각 다르다. 대중의 욕망은, 엄밀히 말하면, 개개인들이 사회 안에서 갖는 특수한 욕망의 총체일 뿐이다. 그것은 사실 단일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다. 일종의 경향성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대중이라는 어떤 실체 하나를 간편히 상정하면 위험하다. 따라서 "'나가수'라는 현상에 참여하는 어떤 일반인 A, B, C" 따위를 가정하는 게 오히려 옳다.
하지만 어쨌든 편의를 위해, 일단 대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 사실 '나가수' 현상에서 보이는 경향성은 전에 없이 강력하기도 하다. 이 경향성은 인정하되, 다른 생각이 있다는 걸 수용하고, 개개인을 군중에서 완전히 독립시켜도 안 된다.
이제 그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이야기할 때다. 대중의 소망은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정의.
2. 허영.
3. 유희.
4. 질시.
네 가지 소망 - 정의, 허영, 유희, 질시
정의란 곧 도덕의 요구다. 물론 도덕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이 대중이라는 '참여자'들이 대체로 내세우는 도덕은 일정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표적으로 공정성에 대한 요구다.
김건모를 까고, 이소라를 까고, 김제동을 까는 정당성을 부여해 줬던 그 공정성이다. 그 공정성의 정체는 대체로 무엇일까? 프로이트 식으로,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동등한 대우를 말하는 것일까?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은 이런 표현이라고 본다 - 저들에게 벌을, 다름아닌 내가 저 상황이라면 응당 받았을 벌을 주어라. 이것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 '벌칙'을 반전하면 다음과 같다 - 상을 받을 만한 자에게 상을 주어라.
이 두 묶음이 정의다. 사람들이 '나가수'에 이 '정의'란 걸 기대한 이유는 명백하다. 그 정의가 현실에서 부재해서다. 그리고 '나가수'는 그 정의란 걸 실현할 것처럼 행세했다. 2
시청자는 TV를 시청하고, 또는 인터넷 게시판에 글 몇 개를 쓰는 것만으로도 이 대단한 과정에 '참여'한다. 적어도 그렇다고 다들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참여자는, 다른 뭣도 아닌, 그 엄청난 정의를 몸소 실현하는 셈이다. 여기에서 허영심이 나온다. 이는 투표를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약간의 뿌듯함과 비슷하다. 일명 '운동권'의 여러분들에게서 이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3
하지만 허영만으로는 흥행에 뭔가 부족하다. 선거만 봐도 그렇다.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허영 이상의, 뭔가 절박한 목적의식이 필요하다. 아니면 선거 자체가 어떻게 재미있는 양상을 띄든가. 그런 것이 아니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이익이나 재미를 찾아 떠날 것이다. 여기서 예능 본연의 역할이 나온다. 재미를 줘야 한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질시가 등장한다. 연예인은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질투를 사고 있다. 괜히 연예인 기사에 악플이 그렇게 많이 달리는 게 아니다. '나가수'는 이 질시를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바로 "의인의 치욕"을 볼 수가 있다.
정의 - 1. 무지개의 뿌리
대중은 분명히 정의를 원하고는 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도덕을 원한다는 걸 굳이 부정하거나 나쁘게 말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나는 지적하고자 하는데, 그 도덕이란 건 사실 개개인의 어떤 사적 욕망을 사회적으로 말이 되게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나가수'의 경우는 그것이 심하다. 정의에 대한 대단한 열망은 허영과 질시에 물들어 있다.
물론 이면이야 어떠하든, 그 소망에 따른 행동이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사실 허영심이라도 있는 정치가가 단순한 속물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지만 '나가수'건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찾고자 하는 무언가가 현실에서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든지, 아니면 '나가수'의 방법으로 찾을 수 없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나가수'의 문제와 많은 논란은 상당 부분 이 괴리에서 출현한다. 이를 좀더 자세히 풀어 보자.
정의 - 2. 상과 벌
사람들에게 정의는 상과 벌이다. 물론 아예 상과 벌을 전제하지 않거나, 덜 중요하게 여기는 도덕론도 있다. 사실 상벌에 집착하는 사회는 문화수준이 아무래도 낮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주장하는 건 '정의가 상과 벌이 되어야 한다'가 아니다. 단지 지금 사람들의 도덕 수준이 그 정도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나가수'에서의 상(賞)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사회적인 인정'이다. 사회적 인정에서 명예가 나오고, 그것에서 아마도 금전적 이익이 나온다. 그것은 물론 가수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기에서 소위 '생각없는 대중'뿐만 아니라, 나름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양반들까지 모두 동의하는 전제가 발견된다. 곧
"지금 가요계는 뭔가 잘못되었다"
올바른 대우를 받아야 되는 가수들은 받지 못하고, 그럴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 대우를 받는다. 이 문제의식이 '나가수'를 있게 했다. 누구나 대체로 동의하는 부정적 사실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인가? 그리고 누가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있는가? 상과 벌, 곧 그들의 정의를 위해서는, 이것에 대해 분명한 답이 필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정, 부당을 판가름할 방식이 있어야만 한다.
예술에는 우열이 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전제한다. 베를린의 오케스트라 공연과, 내가 기왓장을 두드리며 내는 소리를 예술적으로 동급으로 칠 인간은 지구상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고급인지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나가수'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가수들을 무대에 세웠다. 그럼으로 자신이 고급이며, 그리고 전에 없었던 고급이라는 사실을 선언했다.
이제 다른 저급들은 필연적으로 배척된다. 심지어 다른 급이 낮은 가수들은 '가짜'처럼 된다. 그리고 대중에게도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자체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무엇이 고급이냐, 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 선문답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까지 어떤 놈들이 잘못된 문화생활을 하면서 '저급'들을 먹고 살게 해줬느냐다.
정의 - 3. 범인은 우리 안에 있다
누가 아이돌을 소비하고 허벅지와 복근에 열광했는가? '나가수'는 여기서 대단히 교묘한 해답을 내놓는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대중이다. 그들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라는 식으로. 그런데 이 말은 가장 중요한 하나를 빼놓고 있다. 그건 바로
너
다. 과연 대중 대부분이 잘못된 선택을 해 왔다면, '나가수'에 열광하는 대부분의 사람 개개인이 그랬을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이돌에 지나친 찬사를 보내 왔다. 그들은, 설령 아이돌을 비판하는 기사가 있으면, '꼰대들의 발악' 이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취향을 주장했으며, 아이돌 따위와는 급이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의견에 대해 상대주의적 관점을 옹호해 오지 않았는가? 애초에 음악이라곤 아이돌조차 소비하지 않은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째서 '나가수'같은 이질적인 문법에 열광하게 된 걸까.
매우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을 그 때마다 선택해 온 셈이다. 그리고 웃기게도, 대중이란 모호한 표현으로 괴상한 선택을 해 온 자신을 싹 지워버렸다. 자신은 언제나 옳은 결정을 하는 셈이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꼭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나가수'의 메시지를 정리하면 딱 이렇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전부 다 나빴어. 단 너만 빼고. 이제부터 우리는 옳은 일을 할 거야.
하지만 가요계를 개판으로 만든 사람 중에 많은 '너'가 절대 빠질 수가 없다. 죄책감은 많은 개인의 마음 속 어딘가에 안개처럼 움츠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느끼는 정체모를 불안감의 주된 원흉이다. 이 불안감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녀사냥인 것 같다.
허영
뭐 그건 일단 그렇다치고, 이제부터 시작되는 '옳은 일들'에 '참여'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매우 괜찮은 기분을 선사한다. 사실 이 '참여'는 아이돌에 대한 자질구레한 변명보다 더 정당하기도 하다. 참여에서 느끼는 이 괜찮은 기분이 허영이다. 물론 '참여자'는 가수들처럼 평소에 연습을 하거나, 무대에서 기력을 쏟아붓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닥본사' 하는 것만으로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양 생각하고 있다. 물론 위 기사들 중 어디엔가에도 나와 있듯, '1박 2일'을 보는 것보다는 분명 좋은 일이긴 하다. 4
지적했듯 허영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사실 예술은, 어떻게 생각하면, '자뻑'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분야다. 문제는 대중들의 허영의 기초가 작위적이라는 데에 있다. 이 프로그램은 '진짜' 가수가 등장하고, '진짜' 노래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이다 5. 무엇이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사실 애초에 판단할 수도 없는 문제다 - 일단 직관적으로 선명한 진짜들이 등장한다. 옥주현이 여기서 명백히 문제가 된다. 직관적으로 지금까지의 가수들과는 달리 보일 뿐더러, 아무래도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6
돌고래는 물고기인가? 어처구니없는 질문인지 모르지만, 직관적으로야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옳아 보이고, 돌고래는 사람이나 곰보다 고등어에 더 가까워 보인다. 어째서 돌고래는 물고기가 아닌가? 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사람들은 그저 책이나 선생, 부모가 가르쳐 준 대로 따를 뿐이다. 언어라는 게 원래 그 모양이다. 7
사람들은 선입견을 깨는 걸 잘 용납하지 못하고, 예외적 현상에 설득력 있는 해명을 요구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옥주현은 다른 이유로 어쨌든 '자격미달'이라고 생각하긴 한다. 하지만, 아마 임재범만 없었더라면, 옥주현은 첫날 선보인 재주만으로 면죄부를 받았을 수 있었을 테다. 그런데 전편에 임재범이 너무 '쎘'던 바람에, 그냥 괜찮은 가창력만으로는 사람들을 낚을 수가 없었다. 옥주현은 그런 면에서 뭔가 여러가지로 좀 운이 없었던 셈이다.
유희 - 1. 이것은 음악프로그램이 아니다
확실히 옥주현은 여러가지로 운이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그제도 김어준씨가 적절하게 지적 - 8링크 - 한 대로, 그리고 위 경향신문 칼럼이 정확하게 분석한 대로, '나는 가수다'가 본질적으로 스토리를 파는 프로그램이라서다. '나가수'는 노래를 파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프로그램의 제목이 '이것은 노래다'가 아닌 이유다. 물론 음원은 잘 팔리는 모양이다만.
'쌀집 아저씨'의 프로그램이 '예능의 탈을 쓴 공익 프로그램'으로 자주 오해되듯, 이 '나가수'도 '예능의 탈을 쓴 음악프로그램'으로 자주 오해된다. 진실은 '공익의 탈을 쓴 예능'이고 '음악의 탈을 쓴 예능'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어설픈 공익과 음악도 우리에게는 소중할지 모른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어째서 간주중에 인터뷰가 나오고, 개그맨의 리액션이 나오는가? 왜 프로그램은 가수의 사연을 시시콜콜히 소개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해 상상하도록 권유하는가? 답은 원래 그것이 '주'라서다. '나가수'는 그것을 팔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실 가수들의 노래는 잘 만들어진 OST다 9. 10
어째서 노래가 부이고 예능이 주인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나가수'식으로 이야기하면,
노래가 주면, 너만 빼고 다른 사람들이 안 보니까
다. 간주중에 들리는 뻘소리는 원래부터 없었으면 절대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시청률은 물론이고 음원판매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예상된 비판에 의해 제거되어야만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토리는 뺄 수도 없고 빼서도 안 된다. 어차피 그것은 노래하는 도중에 대놓고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것은 가수들이 노래하는 중에도 분명히 이야기되고 있다. 어쩌면 노래보다 더 큰 목소리로 11. 12
이것은 정말로 만화 '나나'를 연상하게 한다. 작중에서의 사람들은 음악을 듣기보다 가수의 캐릭터나 스토리를 소비한다. 그리고 그것을 표상하기 위해 음반을 구입한다. 음악가들은 음악으로 평가받길 원하지만, 신상을 제대로 팔아먹어야 인기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그 만화 자체도 음악이 주제인 작품이지만, 정작 작품이 직접 말하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스토리 13다. 물론 영화 OST를 팔기는 한다. 14
그리고 '나나'에는 더욱 우리 현실에서 특별하게 다가오는 요소가 있다. 바로
'자본의 입장에서 구설수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라는 사실이다.
유희 - 2. 자극적인 화제
대중매체는 얘깃거리를 먹고 산다. '나가수'는 그 정도가 훨씬 높다. 김어준이 예전 인터뷰에서 역시 적절하게 지적했듯, 왠지 '나가수'를 보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바꿔 말하면 '나가수' 자체에 담화를 이끌어내는 요인이 있다. 그런데 김어준의 결론과는 달리, 이 요인이 얼마나 예술에서 기인하나에는 물음표를 달아야 한다. 16
나는 아줌마들이(때로는 젊은 아가씨들도) 왜 그렇게 드라마에 집착하는지 오랫동안 의아해했다. 한 가지 해답은 이렇다. 만약 드라마를 안 보면 대화의 화제가 없거나, 다른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서 유리되어서다. 하긴 대화에 끼지 못하는 상황은 남자의 경우라도 별로 즐겁지 않다. sns가 성행하는 세태를 보면, 이런 화젯거리의 제공은 오히려 더 중요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가수'는 압축된 시간 안에 최소한 아홉 가지 화제를 제공한다. 7명의 가수와 그들의 곡, 1위, 꼴지. 실제로 제공되는 화제는 이보다 훨씬 많다. 게다가 순위싸움은 개개의 노래에 대해 나름대로의 근거 있는 의견을 요구한다. 그래야 뭔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이것은 사실 나의 경우에도 적중하는 문제다. 나도 어쩌면 이야기하고 글을 쓰기 위해 '나가수'를 보고 있으니까. 프로그램이 화제를 낳고, 화제가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다시 높아진 관심이 화제를 낳는다. 돌고 돈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 자극적인 화제를 양산하는 게 프로그램의 흥행에, 적어도 단기적인 흥행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화제가 긍정적인 내용이건 부정적인 내용이건, 사람들은 건수가 있으면 일단 욕하면서라도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1위를 한 곡이 보이면 호기심에서라도 사서 듣는다' '나가수'는 이런 자극적인 화제에 힘입어 매우 '잘' 굴러왔다. 물론 방송사라는 회사의 입장에서 말이다. 17
실제 돌아가는 꼴을 보면, 방송사가 구설수를 막기 위해 얼마나 노력이라는 걸 하는지 의문이다. 구설수가 회사의 이익이기에, 이것은 또 필연적으로 의심을 낳을 수밖에 없다. 방송사나 소속사에서 이야기를 대놓고 흘리는 게 아닌가, 까지 공상이 이어지는 건도 있다. 물론 내가 지금 하는 소리는 전부 근거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굳이 어떤 방송-연예회사-언론의 카르텔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순간의 이익에 무의식적으로 편향적 행동을 하는 게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라, 구설수가 어떻게 자본의 이익이 된다 한들, 그것이 가수들이나 다른 출연자들의 이익일까? 일단 음원을 많이 팔아서, 또는 시청률이 잘 나와서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구설수로 장사하는 건 당사자들에게는 확실히 짜증나고 피곤한 일을 부른다.
경쟁 - 1. 유희의 왕
이처럼 허영은 대체로 환상에 기반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그림을 망가뜨리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그것이 허상이란 걸 알게 모르게 인식하면서도. 따라서 그 허영은 '정의'와는 꼭 연관이 없는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 점이 특히 위험하다. 바로 '나가수'의 서바이벌이란 포맷이다.
현체제는 올바른가? 뭐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공정하게 표현하자면, '현재의 사회체제에는 양 극단으로 포섭하기 힘든 다양한 면이 있으며,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다' 정도가 된다. 어쨌든 지금의 사회체제가 완벽한 정의는 아니다. 정의라고 주장하는 인간은 미친놈이다. 과연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가지겠는가.
현체제가 얼마만큼 올바르건 아니건간에, 현체제의 특징이 '경쟁'이라는 점에는 대개 동의하실 것이다. 한국인들은 빠르면 유치원, 늦어도 초등학교 때부터 아마 늙어 죽을 때까지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낙오자는 그냥 없어지고, 남은 자들은 계속 경쟁을 한다. 죽지 않는 자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라고 믿으면서.
'나가수'의 포맷이 정확히 이렇다. 굳이 경쟁이 필요할까 싶은 분야에서 경쟁을 하고 일정 비율로 낙오자를 양산한다. 지극히 한국적이다. 이처럼 세태를 정확히 반영하는 프로그램에 사람들은 관심을 가진다. 게다가 그 출연자들은 이미 달인이며 유명인들이다. 이미 높은 경지에 오른 이들 사이에서의 서바이벌은, 진중권의 지적대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탈락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물론 그를 구경하는 대중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문득 킬 빌이 생각난다. 금발 여인들의 진흙탕 싸움이 보고 싶었다는 요지의 감독의 말이. 18
경쟁은 말 그대로 경쟁 그 자체의 유흥거리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의 허영 속에서, 그리고 어쩌면 가수들까지, 서바이벌이라는 프로그램의 형식 자체가 어떤 올바른 것, 또는 그에 가까운 일이라고 종종 착각해 버린다.
물론 형식이 부여하는 이런 유희적인 면이 '나가수'의 흥행에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다. '나가수'의 흥행이 가수들에 대한 대우나 정당한 사회적 평가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는 건 다들 동의하는 바다. 그런 면에서 예술에 대한 간접적 지원이 될 수 있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흥행은 예술 그 자체의 영역이 아니다. 19
순수하게 예술적으로, '나는 가수다'의 무대는 과연 뛰어난가? 만약 무대가 뛰어나다고 순순히 인정하더라도, 그 뛰어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 내가 볼 때, '나가수'의 무대는 상대적으로 그리 뛰어나지 않다. 그리고 무대가 절대적으로 뛰어나다면, 그것은 프로그램의 탓이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나가수'의 무대가 뛰어난 건 가수들이 원래 뛰어나서다. 프로그램의 형식은 대체로 그것을 보여 줄 뿐이지, 그 뛰어남을 이끌어내지는 않는다. 긴장한다고 노래를 더 잘 부르는 건 절대 아니며, 아무리 보아도 그 반대다. 물론 경쟁의 압박이 어떤 절박함을 노래에 부여해 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절실함을 꼭 경쟁으로만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결론적으로 경쟁은 별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20
하지만 '나가수'에서는 그것의 형식, 포맷이 마치 제대로 된 노래를 이끌어냈다는 듯 오해되고 있다. 물론 '나가수'의 관계자들은 변호를 위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형식은 오히려 위험한 정치성을 띈다.
경쟁 - 2. 경쟁은 정의롭지 않다
경쟁이란 포맷이 프로그램 내적으로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 착각을 부르는 것과는 별도로, 이 경쟁이라는 형식은 프로그램의 다른 요인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일단 경쟁은 정의에 절대 포섭할 수 없는 가치다. 그리고 정의와 발을 맞출 수도 없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정의로운 경쟁'이라는 허황된 기치를 내건다. 이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는지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다.
경쟁의 기초는 청중평가단의 평가다. 하지만 이 청중평가단은 공정할 수 있는가? 청중평가단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몇몇 이들의 편견의 모음에 불과하다. 사람들 중 일부는 청중평가단과 자신의 견해가 다른 것을 보고,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며 긍정적으로 말한다. 어차피 다른 생각들인데, 그렇다면 뭣 하러 생각의 갯수를 세고 있는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쩌면 여러 기사에서 지적한 대로, 애초부터 이 정도 레벨의 가수들 사이에서 평가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었다. 21
게다가 경쟁은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인식'과도 충돌한다. 경쟁을 중시하는 사회적 담론은 성공과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전가한다. 성패는 개인의 것이다. 그렇다면, 가령, 수입이 없어 빈곤했던 임재범은 소녀시대나 슈퍼주니어보다 당연히 열등한 가수가 되었어야 한다. 청중평가단과는 비할 수 없는 거대한 '평가단', 즉 대중이 소녀시대를 선택했으니까. 이미 경쟁에 의해 평가가 나와 있는데, 뭐 하러 순위놀음을 다시 하는가? 22
경쟁은 또 열심히 부작용을 낳는다. 나는 처음 프로그램이 나올 때, 과연 한 주 사이에 편곡과 무대구성과 연습을 끝내고 온전한 경연이 이루어질까 꽤 의심했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가능했다. 가수들의 재능 덕이기도 했겠지만, 또한 그들이 많이 노력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리고 그 '많은 노력' 덕분에, 여러 가수들 중 안 아픈 사람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가수들의 그 컨디션 저하의 다른 큰 원인 중 하나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안 그래도 구설수가 난무하고 있다. 일정마저 빡빡한데, 거기다 경쟁이 스트레스를 부른다. 이런 지속적인 채찍질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건사하는 이들은 운이 좋거나 이상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육체적, 정신적 피로에 시달리게 된다. 극한경쟁이 순간의 진지함을 낳을지는 몰라도, 피로 때문에 지속가능한 노력은 아마도 불가능하다. 이 상황에서 관리자격인 PD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그야말로 한국적이다. 그대로는 운영이 어려우니 전부 잘라낸다. 그리고 다른 새로운, 좀 음험하게 말하면 싱싱한 인간들로 채운다. '나가수'는 이 점에서 진정 세태를 반영하는 프로그램이 된다.
질시 - 1. 의인의 치욕
이것으로 경쟁의 역설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경쟁할 수 없는 주제로 경쟁을 하고, 경쟁의 불공정함 때문에 다시 경쟁을 하고, 평가가 불가능한 청중평가단이 평가를 하고, 경쟁의 이익은 상쇄되며 부작용은 다난하다. 경쟁이 주는 좋은 것은 오로지 흥행이다. 하지만 그 흥행이 가져올 정치성은 오히려 '나가수'의 예고된 강점을 허물기에 충분하다. 물론 그 흥행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그것은 대중의 관심이 갖는 어두운 면과 연관을 맺는다.
사실 지금에 와서야 쉽게 상상하기 어렵지만, '나가수'가 초반 그렇게 관심을 끌었던 건 탈락이라는 형식이었다. 어쩌면 경쟁 자체보다는 그에 따른 탈락이 더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가수들은 다들 꼴찌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당시 가수들이 두려워한 건 한 마디로 치욕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몰락이 가능했고, 만약 꼴지를 하면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처럼 이야기했다. 시청자들은 그들이 느끼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적했던 것처럼 긴장감이 노래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것 같다. 23
물론 제작진은 순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한 번 사고가 제대로 터진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그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애초에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순위 매기기를 적극적으로 홍보한 것은 그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순위가 중요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 역시 말장난이다.
한 발 물러선다면, 순위란 그저 시선을 끌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주장이 나올 것이다. 좋다. 하지만 순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멘트가 나가는 와중에도 순위 맞추기 ARS는 화면 상단을 장식했고, 연출은 숫자와 결과에 집중되어 있다. 어째서 세상에는 스포일러가 난무하고, 그것이 재미를 깎는다는 비판이 빗발치는가? 순위와 탈락이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중요하게 취급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정한 평가'를 위해 순위매기기의 방식을 '변경'한다 - 3주 2회, 1인 3표 - 는 주장을 상기한다면, 다음 그림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다.
넌센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도 탈락의 굴욕을 맛보지 않았다. 김건모는 결과적으로 명예롭게 무대에서 내려갔고, 정엽은 최대의 수혜자로 생각되고 있으며, 김연우의 경우는 청중평가단이 애초에 평가란 걸 내릴 수 없는 집단인 것만 증거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제 발로 걸어내려간 이들은 오히려 영광을 얻었다.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대했던 건 분명 이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의인의 몰락과 치욕을 원한다.
- 카라마조프의 형제, 조시마 장로의 마지막 말 중.
- 카라마조프의 형제, 조시마 장로의 마지막 말 중.
이 문장에 주목하라, 이제, 지금까지의 내가 했던 이야기는 약간 다른 결을 지니게 된다. 사실 무대의 진정한 주연은 어쩌면 사람들의 질시였을지도 모른다. 질투 말이다. 그것이 도덕의 뒤에 숨어, 도덕을 빌미로, 또는 도덕을 자극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낳았다.
진짜 노래가 존재해야 한다는 슬로건은 진짜 노래의 부재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현실에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고상한 이면에는 '의인의 치욕'을 보여 주겠다는 예고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치욕은 없었고, 모든 것이 약간의 사고 끝에 무난하게 넘어갔다. 이제 사람들은 '치욕'의 부재를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 무대는 막을 내렸으니, 무대 밖에서. 24
물론 나는 '나가수'가 사람들의 질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복수심이 횡행하는 건 그냥 사회가 이상해서다. 그것은 예능의 차원을 뛰어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나가수'가 '의식 있는 과실'로 그 질시가 이루고자 하는 무언가를 달성하게 해 주겠다는 선언을 한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나가수'는 그 컨셉들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을 안고 있다.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게다가 현실인의 스토리를 팔아먹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구설수를 몰고 다닌다.
이제 필연적으로 누군가 까이는 일만 남았다. 그가 잘못했는지 잘못하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 어차피 이런 경우, 잘못이란 까이기 시작한 후에 등장하는 법이다.
질시 - 2. 곧 노래가 저물고 무대가 파하면, 아름다움과 추함은 어디에 있는가 25
일은 이렇게 저질러졌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책임을 질 수가 없다. 프로그램의 컨셉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미 시청률은 순항중이고, 음원은 잘 팔리고 있다. 그러니 정신없는 사장이 '쌀집 아저씨'는 잘랐을지 몰라도, 프로그램을 폐지하는 헛짓거리를 또 저지르지는 못한다. 하긴 애초에 책임을 질 생각도 없어 보이지만. 혹시 이 질시를 프로그램 차원에서 수용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것 역시 불가능하다.
옛날 중국에서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삼국지 연극을 했는데, 청중들이 공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조조역의 배우를 살해해 버린 것이다. 물론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관객들은 가면의 캐릭터와 현실의 인간을 당연히 구분할 수 있다. 아무래도 살해당한 배우의 연기가 너무 실감났던 모양이다.
'나가수'의 문제도 여기서 발생한다. '나가수' 안에서는 현실의 치욕이 발생할 수 없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원래부터 가면과 인간의 구분이 없어서다. 갈등을 조성하고 그 해결을 이끌어낼 악역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악역을 하려 들지 않아서다. 이 프로그램은 '무한도전'이나 '1박2일'과는 리얼리티의 수위가 다르다.
실제 김건모는 프로그램의 형식 안에서 치욕을 당할 뻔했다. 하지만 그것을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쉽게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프로그램 안에서의 치욕은 현실의 치욕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는 직접 사태를 대면하지 않기에 김건모란 인간을 별로 배려하지 않는다. 그저 TV프로의 등장인물쯤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가 맞는 사태는 진짜 현실이고, 무대와 그 주변의 사람은 그 현실성을 살갗으로 체감하고 있다. 그 상황에서 파열음이 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물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 그런 고난과 치욕은 현실에서도 늘 일어나는 것이라고. 김건모의 경우는 전혀 예외가 아니라고.
동의한다. 그런 사태는 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어쩌면 현실은 더 잔혹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이지 다른 건 없다. 우리 현실에서도 그 '파열음'이 똑같이 들리고 있지 않은가! 어째서 그것은 못 들은 척하는 것인가?
다른 점이라면 이거다. '나가수' 안에서는 협의와 타협이 당장의 문제를 봉합했지만,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건 곤봉이다. 정 억울한 사람들에게는 재도전이 아니라 자살할 기회가 주어져 있다. 뭐 그렇다.
사람 대 사람의 대면관계에는 잔혹성을 맘대로 행사하기가 어렵다. 친밀한 사이에서까지 태연하게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진정 미친 세상이다. '나가수'는 그런 면에서 본의 아니게, 대통령 각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 떨어질지 모를 사회의 품격을 지켜 준 셈이다. 현대인들은 '깽판'을 부린 여러 사람에게 감사해야 마땅할 것이다. 26
하지만, 이렇게 '나가수' 무대 주변의 문제는 일단 정리되었지만, 이미 끓어오를 대로 끓어오른 사람들이 질시는 해결불가능의 것으로 남는다. 지적했듯 누구도 프로그램 내에서 악역을 맡을 수는 없다. 가령 박명수는 무한도전에서 악역을 맡고는 있다. 그런데 '무한도전'은 적어도 무대의 인물과 현실의 인물이 약간이나마 구분되는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박명수가 하는 독설을 보면 뭔가 허황되든지 미묘하게 핀트가 빗나가 있다. 덕분에 포켓몬스터의 로켓단 수준의 얄미움만 남기게 된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독설도 '나가수'에서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완전한 진실의 모습으로 착각해 버릴 것이다. 어차피 '나가수'엔 유재석도 없고. 나는 처음에 개그맨들을 보면서, 저들이 적절하게 서로 씹어 주는 건가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프로그램은 원래 의도를 넘어설 정도로 심각해져 버렸다. 소리 한 번 질렀다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판에, 그 이상의 것은 기대하지도 못한다.
질시 - 3. 대속 27
이제 대중의 질시는 (너, 아니 당신은 좀 얌전히 지내셨는가? 그렇다면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칭찬해달라고 하시라) 열심히 희생양을 찾아 헤메게 된다. 대중들은 그들의 질시에 여러 가지 근거를 대고 있다. 하지만 말했던 대로, 근거보다 우선하는 것은 복수심이다.
샤일록은 계약서를 내보이며 원칙과 정의를 호소한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건 사실 피다. 재판관이 그것을 지적하자 그는 무너지고 만다. 우리의 대중도 계약 28 같은 걸 들먹이며 정의를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려는 것 역시 인간사냥에 불과하다 29. 30
며칠 전의 살인사건이 생각난다. 아내에게 원한을 품은 자는 아내와 비슷한(사실 별로 비슷하지는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여성을 살해했다. '나가수'의 경우는 뭐가 다를까. 대중의 행각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단지 그 언어와 사고가 사회적 형식을 갖추었을 뿐이다. 하긴 절도범을 교수형시키는 유사한 풍습과는 다르게, 우리의 게임에서 정말 죽는 사람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가끔 자살하는 사람 몇을 제외한다면. 이것은 분명 좋은 점이라고 해야겠다.
결론
이것으로 대중의 소망, 그리고 그것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해 잠정적인 정리를 낸 것 같다. 간단히 말하면 '나가수'는 그들이 이룰 수 없는 걸 공약했고, 대중은 그에 대해 불합리한 기대를 건 셈이다. '나가수'는 어떤 예술프로그램은 명백히 아니며, 예능의 역할에 충실할 때 그것의 한계는 명확해질 것이다. '나가수'가 정의를 실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허영은 언젠가 끝이 보일 것이고, 질시는 무의미하다. 사람들은 그들의 소망을 무릇 정치의 영역에서 찾아야 한다. 정치는 그 짓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혐오를 무슨 자랑인 양 떠들고 다니는 무식한 짓거리는 접어두고.
나는 공중파의 어떤 시간에 음악이 나온다고 해서 뭔가 바뀐다는 의견에 회의적이다. 지적했듯 '나가수'는 대체로 완성된 가수를 보여 주는 프로그램이지, 가수를 완성시키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굳이 하는 짓을 찬찬히 구경하지 않더라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으니, 이 프로그램은 근본적으로 과거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 특히 대중예술을 위해서는 교육과 더 여유로운 사회 분위기, 그리고 사회적 투자가 필요하다. 이것은 오히려 경쟁의 이념과는 정반대에 서는 것이다. 곧 오늘날의 체제에서는 쉽지 않다. 예술은 이런 면에서, 그 자신이 자랄 환경을 위해서라도, 더 급진적이어야 한다. 31
물론 '나가수'가 갖는 예술적 의의를 굳이 꼽으라면 하나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가수들은, 물론 이번에 들어온 어떤 분은 빼고, 분명한 색깔을 갖고 있었다. 그 가수와 편곡자의 연계가 독자적 무대를 기획하고, 무대는 또 가수와 서브 보컬, 연주자로 구성된다. '나가수'는 그 프로세스에 배려를 기울였고, 가수 아닌 다른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었다. 32
이 무대에서 진정 강점을 보였던 이들은 누구였는가. 임재범과 이소라는 제멋대로에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다. 아마 '사회'의 일반인들에서 그런 유형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가수'의 형식에서는 그들이 진가를 보일 기회가 나온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독자적 주관으로 해석된 사태를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힘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나가수'의, 내가 생각하기에는 유일한 예술적 성과고, 이 둘이 모두 '나가수'의 무대를 떠나게 된다는 스포일러가 사실이라면, 개인적으로 좀 슬프기도 할 것 같다.
- 그런데 예상대로 일이 풀리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본문으로]
- 이하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이것은 현실 대중의 정의이지 정의(正義)의 보편적 정의(定義)가 아니다. [본문으로]
- 물론 이런 허영은 질시를 낳는다. [본문으로]
- '닥치고 본방 사수'의 약자. 본 방송 시간대에 방송을 시청하는 행위. [본문으로]
- [自뻑] 한자 스스로 자와 강렬한 자극으로 정신을 못차린다는 의미의 속어인 뻑이 합성된 신조어이다.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정신을 못차린다.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네이버 오픈사전. [본문으로]
- 정확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본문으로]
- 이에서 유추해 보면, 옥주현에 대한 언플은 PD가 아니라 교수들이 했어야 했다. PD에게는 권위가 없다. [본문으로]
- 딴지일보의 창립자답게, 역시 발상은 참신하지만 통찰이 좀 부족하다. 당위와 사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의 환상에 과한 애정을 품는 스타일. [본문으로]
- 가령 백지영의 경우 [본문으로]
- 잘 안 통할 이야기긴 하지만(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들을), 일본의 팔콤은 분명히 게임회사다. [본문으로]
- 슈스케도 본질적으로 도전자의 사생활과 그것으로 기초로 작성한 스토리를 팔아먹는 프로그램이었다. [본문으로]
- 옥주현의 불운은 역시 임재범과의 비교에서 나온다. 옥주현은 과거에 꼭 부당하게 낮게 대우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금전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임재범과의 대비가 여러 가지로 선명하다. [본문으로]
- 간단히 말하면, 음악이 좋아서 팬이 되는 게 아니라 팬이라서 음악을 산다. [본문으로]
- 그러니까 비주얼계라는 소리를... [본문으로]
- 문명(4)에서 대중매체가 등장하면 나오는 소리다. 정말 적절하기 그지없다. [본문으로]
- http://www.artsnews.co.kr/news/149120 [본문으로]
- '나나'에서 타쿠미가 한 말. [본문으로]
-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본문으로]
- 물론 당연히 그런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다. [본문으로]
- 어떤 배우의 말이 생각나는데, 자신뿐만이 아니라 대개의 배우들이 가장 연기를 잘 할 때는 바로 '돈이 궁할 때'란다. [본문으로]
-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원리가 아니다(사람들은 이 점을 너무 지독하게 오해하고 있다). 진리를 예정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본문으로]
- 시장이 왜곡되어 있다고? 아니, 그렇다면 세상에 왜곡되지 않은 시장이 있단 말인가? [본문으로]
- 당시 나는 다른 이유로 또 상당히 긴장했는데, 이소라가 아무래도 사고를 칠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본문으로]
- 뭐 사실 진짜 노래는 언제나 존재해 왔고, 이소라도 미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게으르기는 하지만 지속적으로 작업을 해 왔다. 그냥 사람들이, 나가수 식으로 말하면 너 빼고 다른 사람들이, 진짜 노래 - 뭐 '진짜'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말이지만 - 를 안 찾아 들었을 뿐이다. [본문으로]
- 優人傳粉調, 效姸醜於豪端, 俄而歌殘場罷, 姸醜何存. 채근담 중 [본문으로]
- 사실 이소라는 김건모와 별로 친하지 않다고 한다. 만약 재도전이 부정되었다면, 아마 윗사람한테 반말했다고 까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 redemption on behalf of another. 남의 죄를 대신하여 당하거나 속죄함(다음 사전).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 짊어짐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 어쩌면 샤일록도 당시 사람들이 유대인에게 가졌던 적개심의 거울이다. [본문으로]
- 사실 시청자와 방송사의 약속 같은 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방송은 시청자의 요구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시청자의 요청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프로그램치고 제대로 결말을 맺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본문으로]
- 그런 의미에서 MBC의 김영희 PD 경질은 적절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후임 피디가 그만큼의 능력을 보여 줄 거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본문으로]
- 옥주현 덕에 이 한정어가 들어가야만 한다. [본문으로]
- 그런 의미에서 이번 "~스케치북" 100회 특집은 인상적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