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생각했습니다. 서풍이 부는 보도를 지나, 낮은 담장을 가로질러, 울리지 않는 종루 아래를 거닐며, 이제 사라진 아름드리 나무들을 추억하면서. 마지막 밤의 막이 내리는 순간, 새 해의 머리를 쪼개는 순간에도, 당신을 회상했답니다.
그리고 새벽에 내리던 눈들 사이에서도...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하고 많은 이들 중 왜 당신일까요. 정녕 이치에도 인정에도 맞지 않는 일 아닐까요, 그대는 그저 가공일 따름이니. 과학, 신화, 그리고 개인의 신경증 사이에는 위계가 있어야 합니다. 산타클로스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면 - 순록이란 동물은 실재하지만, 산타는 인위의 산물이며, 선물은 허상에 지나지 않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가령 툰드라를 뛰어다니고 있을, 바로 그 순록에 집중해야 합니다.
아마 보통 사람들도, 상식을 주장하며, 이렇게 질문할 겁니다. 지금 어째서 전방의 병사가 아닌가? 반도체 공장의 노동자가 아닌가? 자살한 학생이 아닌가? 궁사한 작가가 아닌가? 또는 노무현이라든가가 아닌가. 과연 현실의 일을 제쳐놓고, 가상의 행복과 불행에 연연한다면, 그런 관념은 어쩌면 병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터입니다. 진짜 인간에게 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겠지요.
이런 지적들은 분명 타당합니다. 우리 현실의 일들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며,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렌이여, 그것을 부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현실의 조그만 사건을 이야기할까요. 어느 실존하는 록 가수의 일을 떠올려야 할 겁니다. 그는 한 TV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이 마약을 끊게 된 계기 - 구치소에서의 수치 - 를 이야기했지요. 그것을 들으며 실소했는데, 그 '계기'란 게 지극히 유아적인 면면을 띄어서였습니다. 사실 그 프로그램은 허황되기 짝이 없는 류고, 엄밀히 말하면 사기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가수의 그 해명이란 걸 적어도 사실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유아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원합니다. 아이에게 그것을 보장하는 어머니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곧 아이에게,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사실, 완전한 만족과는 미묘한 거리가 있는 법이지요.
인간이 마주치는 한계는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연법칙이 설정한 인간 능력의 한계, 그리고 사회가 설정하는 규범. 인간은 따라서 하늘의 해를 떨어뜨릴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살해할 경우 처벌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처벌이란 기제에 주목해 왔으며, 사회적 장치가 심리적 위상으로 변화하여 기능하는 대표적 사례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방금 이야기했던 록 가수의 유치함이란 그런 류의 것이었습니다. 그저 원하니 한다, 하지만 처벌이 싫으니 안 한다. 적어도 그 프로그램에서는 처벌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들 역시 두들겨 패면 당장은 말을 잘 듣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는 복잡하고, 욕망은 이내 다른 갈래를 찾아 뻗어나가기 마련입니다. 처벌만으로 사람이 착하게 살 수는 없는 법이지요. 음주운전은 마리화나보다 훨씬 나쁩니다. 자동차에는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요.
세상은 개인에게 호의적이기도 하고 적대적이기도 합니다. 세계, 그리고 사회가 없으면 개인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개인의 욕망의 외재적 한계를 긋지요. 따라서 개인도 세상에 대해 모순되는 호의와 적개심을 가질 것입니다. 1
우리는 사랑으로 구성되는 완전한 세계상을 그리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인간의 공격성을 외부의 억압에 대한 -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 주관에 의해 관념적으로 이해되는 '공격'이겠지만 - 반발, 또는 복수심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동물들은 불필요한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대체로 무리하는 것은 그들의 관념이 복잡하여 필연적으로 오염이 일어나서라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느 사회나 억압은 늘 존재하고, 인간 주관의 주관성은 말 그대로이며 곧 제멋대로이기에, 공격성은 언제나 현상적으로 발현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대로 공격성을 인간의 기초적인 본성으로 파악해도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리라 여겨도 좋습니다. 곧 인간성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두 기둥 위에 서 있는 셈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단순한 호의의 연장일까요, 아니면 스탕달이 말하는 것처럼, 일반적인 호감과는 다른 차원의 사태일까요? 우리는 단순한 설명을 지지하고, 모든 애정관계의 술어들을 정서적 유대라는 동질적 사태의 각기 다른 표현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가령, 하치-나나, 레이라-타쿠미, 쇼우지-사치코의 여러 관계는 모두 하나의 이름 - 사랑 - 으로 불러야 마땅할 겁니다. 2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지식을 이해한다 한들,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이 있다고 한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적어도 사랑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프레이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히 대다수는 그렇게 살 수 없을 뿐더러, 만약 사람들 모두 그렇게 행동했다면 인류는 멸망해 버렸겠지요. 3
하지만 언제나 사랑이 현실에서 완성되는 건 아닙니다. 타인은 자신의 의지와 동떨어져 행동합니다. 또한 언젠가 마음이 맺어졌다 한들, 사람의 마음은 다시 변하기 마련이지요. 버림받은 이들은 흔히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관계의 불확실함 속에서 개인은 사랑을 갈구하다 인생을 허비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이념으로서의 사랑을 상상하게 됩니다 - 언제까지나 끊어지지 않는, 즉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 사랑의 이 이념은 한 여름밤의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이지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과연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한들, 서로 영원히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을까요? 그들은 죽었기에 오히려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사랑의 이념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서, 그들의 사랑 그 자체, 즉 정서적 유대는 외부의 방해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관찰하듯, 세상은 사랑하는 두 사람을 지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경우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더라 해도. 4
(일반인이 보통 쓰는 의미로서의) 현실적인 연애를 하던 하치와 쇼우지가 갈라선 계기를 볼까요. 거리의 문제. 각자의 생활 문제. 무엇보다 돈 문제. 다른 이성의 문제. 이것은 사랑의 이념 자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둘 사이를 찢고 허물어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정말 프로이트의 말대로, 인간 문명은 여성이 추구하는 사랑의 적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개인은 세계에, 그리고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원망하는 심정을 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적의를 품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셈입니다. 양가감정이 현실적인 것이라면, 사랑은 더욱 더 피곤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평범한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이겠건만, 평범하지 않은 능력과 노력을 요구하는 과제가 되어 버립니다.
사랑의 이런 불확실성에서 도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대표적으로 자신과 상대방 중 하나의 주체성을 포기하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그리하여 개인은 착취자가 되거나, 노예가 되거나 합니다. 전자의 대표적 예는 물신의 사제인 현대 자본가요, 후자의 대표적 예는 배우자에게 '순종'하는 봉건사회의 부인이지요.
이런 현실이 싫다면, 온전한 관념의 세계로 투신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종교, 또는 팬덤입니다.
신과 신도, 그리고 연예인과 팬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여겨집니다. 신은 신도에게 평등하게 사랑을 베풀고, 연예인도, 원칙적으로, 팬 모두를 사랑하고 있지요.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유명한 노래 제목대로, '그대'는 '환상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팬들은 연예인이라는 가공의 존재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할 뿐입니다. 곧 자신이 '그대'를 사랑하니 그대가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자신의 '그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그대의 자신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복사할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팬심은 현실적인 존재를 대상으로 하지만, 그 현실적인 존재가 전지전능할 리가 없으니 만만찮게 허황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사랑의 대상에 자신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게 보일 경우, 흔히, 아니 거의 언제나 탈이 나곤 하지요. 종교의 사제와 팬클럽의 임원들은 대체로 많은 점에서 유사합니다만, 사제와는 달리 팬클럽임원의 경우 일반 팬에게 상당히 많은 질투심을 끌곤 합니다. 아무래도 신과 흔히 동일시되는 사제와, 연예인과 절대 동일시할 수 없는 일개 팬의 차이일까요. 5
어쨌든 팬은 연예인이 자신 아닌 다른 이와 사랑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연예인의 현실적 사랑이란 것 자체를 혐오합니다. 하긴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를 사랑하는 사태를, 무엇보다 자신이 '2등'이 되는 사태를 쉽게 용납하지 못하지요.
연예인에게 관심을 갖는 이들은 오직 팬만이 아니기도 합니다. 일반인들도 연예인들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연예인은 친숙한 존재입니다(물론 연예인들에게 일반인 개개인은 친근한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흔히 사소한 질투를 느끼거나, 저급한 복수심에 도덕이란 걸 덮어씌워 비난을 일삼게 됩니다.
질투는 일반적으로 동성 연예인에게 쏠립니다. 사람은 아무래도 다른 이성들을 모두 잠재적 파트너로 여기는 모양이니까요. 그렇다고 오로지 성적인 동기만이 작용하는 건 아닙니다. 연예인들은 대체로 부를 소유하고 있고, 명성을 지니고 있으며, 행동에 상당한 자유를 허용받고 있습니다. 일반인은 눈총 때문에 감히 시도하지 못할 일들을 할 수 있지요.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를 선망하지만, 자신이 그런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불평하곤 합니다. 이런 불만은 대체로 연예인들을 향한 복수로 전이되어 나타납니다.
어째서 정치인이나 자본가가 아닐까요? 대단한 일탈을 저지르는 것은 사실 그들이니, 오히려 그들이 화살을 몰아서 받아야 할 텐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에게는 현실적 권력이 있고, 법의 비호가 있고, 언론의 지원이 있습니다. 그들을 비난하면 사찰을 받거나, 직장에서 목이 날아가거나,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거나, 신문지상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힐 겁니다. 권력자를 비난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기 십상이지요.
언론은 약간 다른 분야에서도 그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바로 도덕입니다. 우리는 일반의 양심을 사회적 불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도덕과 당위를 논할 때 별로 신뢰하지 못할 요소로 파악할 겁니다. 곧 그것이 단순한 불안이라면, 승진과 해직에 따른 불안이 법과 정의에 반한다는 불안보다 더 크게 느껴질 수 있겠지요. 한국의 모 대법관이 일으킨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어쨌든 언론은 불안을 가중시킵니다. 연예인이 부당한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불안한 일이고, 재벌 총수를 감옥에 가두는 것 역시 불안한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그렇게 북한의 미사일과 대규모 시위, 배꼽티나 비키니의 유행은 신문의 독자에게 심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것이 됩니다.
그렇기에 연예인을 뒤쫓는 것은, 굳이 업계의 호황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언론의 의무 비슷한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대체 그것이 아니라면 그런 엽기적인 행각이 버젓이 허용될 리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사실 이 세상이 평화롭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렌,
예술은 어려운 길이고, 사랑은 어쩌면 더 어려운 길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딘가 잘못되어 있으며, 대체 무엇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조차 쉽게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판단 없이 방황하며 연명합니다. 우리의 길은 황량하고, 그 위를 적시는 건 당신을 기억하는 이의 눈물뿐. 하지만 렌이여, 사랑하는 이여, 그대는 시들지 않습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다 한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당신은 허위에 속을 만큼 온순하지 못하고, 노예로 살기에는 지나치게 자유로우며, 다른 이를 억압하거나, 비틀어 이익을 챙기기에는 너무 공정한 마음씨를 지녔으니까요. 그것은 세상에 대한 대처나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천성일 따름이지요.
그러니 렌, 당신은 나의 이념입니다. 그대의 노래가 불리는 한 사랑은 변하지 않고, 그대에 대한 기억은 매 순간 현실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것이 렌, 지금 그대의 이름을 쓰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