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야기에대한 이야기

빵꾸똥꾸의 도덕원리


 할 일이야 많지만 막상 하는 일은 없는 연말이다. '연말이니까 나도 연애해야지' 라는 주장은 별 파문도 없고, 없는 놈은 계속 없다는 이른바 '관성의 법칙'만 지적당한다. 크리스마스는 올해도 그냥 공휴일 하나 더 붙은 날인가 보다.

 하지만, 나는 끝내 할 일을 찾았으니, '지붕뚫고 하이킥'을 밀린 진도만큼 따라잡는 게 되겠다. 며칠 전에 초반 몇 편을 봤는데,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냥 세경신이 짱.


 그리고 오늘, 나는 이 시트콤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게 됐으니, '지붕뚫고 하이킥'이 방통위에서 권고조치를 받았다는 소식이 되겠다. [기사참조]


 과연 이것은 적절한 조치인가? 차근차근 살펴보자.

 일단 방통위의 말은 이렇다. "어른들을 포함한 주위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반말을 사용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지나친 장난 등을 치는 모습은 다른 어린이 시청자들의 모방 가능성을 불러와 올바른 가치관과 행동양식 형성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

 극에서는 과연 어느 정도로 도덕이 적용되어야 할까? 정말 고답적인, 어쩌면 현대인들도 여럿 공감할, 그러나 분명히 진부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하나 보자.

 이 주장은 모든 비도덕적인 측면이 완전히 말살된 극을 꿈꿀 것이다[각주:1]. 극은 오직 착한 인간들만 등장시켜야 하며, 착한 인간은 착한 행동만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따르도록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작심하면 근본적인 문제가 생겨 버린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 즉 갈등구조란 게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극 자체가 아예 성립하지 못할 수도 있는 위기에 빠진다. 도덕원칙에 완벽하게 충실한 극에, 우리는 '공익광고' 라던가 '박카스 광고' 란 이름을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누가 이런 걸 굳이 찾아 보겠는가? 이런 극은 어떤 의미로든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갈등구조를 도입하긴 도입하되, 확고하게 도덕의 승리로 결론을 지어버리는 건 어떨까.

 이러면 '전원일기'풍의 시나리오가 나올 것이다. 갈등은 일시적이고, 통합은 필연적이며 또 도덕적인 것이 된다. 악당은 등장하지 않고, 스토리의 개연성 따위는 별 신경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시청률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평론가들로부터도 혹평을 받을 테고.

 여기서 좀더 양보하면, 확고한 악당을 등장시키는 방법을 쓸 수도 있다. 정말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쁘고 나쁘고 나쁘고 또 나쁘고 사악하기까지 한 악당을 등장시킨다. 그러면 정의의 히어로가 나타나 악당을 쳐부순다. 착한 놈은 그냥 착하고, 나쁜 놈은 그냥 나쁘다. 나쁜 놈은 무조건 패배하며, 역시 개연성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어릴 때 보았던 히어로물이 이 정도 수준이다. 어른들은 다를까? 올해를 휩쓴 '막장 드라마' 역시 딱 이 정도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선까지가 소위 '도덕적인 극작'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도덕적인 극작을 만들어 온 역사의 유구함에 감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보다 개개의 '도덕적인 극작'들을 보라. 정말 그 하나하나는 얼마나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는가! 당신이 읽은 이른바 '고전' 중에서 위와 같은 '도덕적인 극작' 이 단 한 편이라도 존재하는지 살펴보라. 어디를 둘러봐도 없다.


 

'다크나이트'가 어째서 명작이라 불리는지 잠시 생각해 보자.


 그러면 도덕은 어떻게 되는가? 몇몇 분들은 선악에 대한 '판결[각주:2]'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극작은 대중의 사고에 위협이 되지 않겠느냐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곧 그들 논리의 취약성을 고백하고 만다. 나는 자칭 도덕의 편에 선 자들에게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진정 인간을 믿는 건 당신네들이 아니라 우리들이라고 말이다. 곧 다름아닌 우리가 도덕의 편에 선 자들이겠다.

 그렇다면, 나는 분명히 한 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극작은 선악을 공정하게 제시하되, 삶의 진실을 충실하게 그리는 것으로써 관객의 자연스런 판단을 도와야 한다. 우리의 극작에서는 악당이 있을 수 있다. 아마 100% 있을 것이다. 어쩌면 조커처럼 매력적인 악당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관객은, 설령 매력적인 악당을 보더라도,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을 것이다[각주:3].


 이제 논의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지붕뚫고 하이킥'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어른에게 반말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지나친 장난을 치는 아이, 그런 부잣집 아이의 존재가 비현실적일까?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하이킥'은 존재할 리 없는 사실을 꾸며내는 게 아니다.

 게다가 극은 부모형제가 그 애한테 무관심하다는 '행동의 이유'까지 제시한다. 사실, '하이킥'은 완전히 도덕의 관점을 벗어난 것은 또 아니다. 극 안에는 그런 '원인과 행동의 복합체'가 어떤 의미에서건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전제가 사실상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도덕을 핑계삼아 '하이킥'을 비난하려는 시도는 완전히 침몰하게 된다.

 물론 그 '행동'에만 초점을 놓고, 구성의 맥락을 도외시한다면 엉뚱한 결론을 낼 가능성이 있긴 하다. 만약 어떤 시청자가 그런 결론을 낸다면, 그는 불성실하거나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다. 공공기관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도덕판단의 능력이 없는 아이들은 좀 다르게 봐야 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뭐든지 잘 따라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일단, '아이들이 도덕판단의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매우 논쟁적인 사안이라는 걸 유념해야 한다. 일단 '도덕판단의 능력이 없는 아이들을 다르게 보는 것' 이전에 '애들이 도덕판단의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결론내리고 넘어가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과연 설령 판단능력이 아예 없다고 해도 '하이킥'을 비난하는 건 좀 우선순위가 비껴나간 면이 있다. 모방의 가능성이란 걸 놓고 판단하자면 어떻게 세상에 안 위험한 게 없기 때문이다. 애새끼보다 더 위험한 건, 롤 모델이 될 만한 어른들의 행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애들한테는 뉴스고 뭣이고 다 못 보게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과연 바람직하지 못한 모방을 야기하는 게 징계조치를 먹을 정도로 반사회적인 행동에 해당하겠냐는 거다. 정말 이런 것에 반사회성이 손톱만큼이라도 인정된다면, 정말 거짓말을 밥 먹듯 지껄이는 총리 대신이나, 아무데나 대고 막말을 일삼는 장관 나으리나, 아니 그 무엇보다 그 두 가지 덕목을 모두 갖추신 대통령 각하께서 일차로 교도소에 들어가셔야 될 게 아니겠느냔 말이다.

 각하께서는 무엇보다 법치를 강조하셨는데, 이런 불공평한 처사가 과연 가당키나 할까? 기사가 나온 지 한참이 지나도록 이 정부의 어느 관료 하나가 교도소에 제발로 기어들어갔다는 소리를 못 들었으니, 논리적으로 '하이킥'에 대한 징계조치가 부당하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이제 휘몰아치던 심정을 진정하고, 천천히 '지붕뚫고 하이킥'을 감상할 준비를 하자. 우리는 극이 시작하기 직전의 방송안내를, 제1화부터 이어진 똑같은 화면을 보고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그 동안 나누었던 모든 논의의 기초가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자각한다. 방송은 15가 그려진 노란 동그라미와 함께, "이 프로그램은 15세 미만의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하므로 보호자의 시청지도가 필요한 프로그램입니다" 라는 자막을 내보내고 있다.

애들이 보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1.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국가)에서 이에 관한 논리를 선보인다. [본문으로]
  2. 판단과 구분하라. [본문으로]
  3. 만약 인간 본성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모조리 해체한 다음 다시 의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도덕뿐만 아니라 '당위'까지 부정한 다음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