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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대한 이야기

즐거운 사드

 장동민 씨의 소위 ‘희극’을 떠올려봅시다. 장동민 씨는 늘 고함을 치지요. 그리고 누군가를 학대하거나, 누군가에게 학대당하거나, 자기 자신을 학대합니다.


 TV를 보는 사람들은 그 모습이 일종의 풍자인 것으로 이해하곤 했습니다. 학대는 사람을 의존적이고 충동적이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바로 그런 모습들을 의도적으로 연기하면서, 그것의 나쁨을 장동민 씨는 에둘러 표현하는 것만 같았지요.


 비슷한 사례가 젊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만화가 이자혜 씨는 자신의 만화에서 가학적인 인물들을 묘사했지요. 그것 역시 지어 낸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평가했습니다 - 인간 내면의 사악함에 대한 통찰을 만화가가 가졌다고요. 하지만 2015년 10월, 폭로가 모든 것을 뒤집어놓았습니다. 독자들은 알아차리게 되었으니, 연출이라고만 생각했던 어떤 부분은 연출이 아니었습니다.


 이자혜 씨는 장동민 씨를 추종하던 디시인사이드 무한도전 갤러리의 유저들이나, 웹툰 갤러리의 유저들과 자주 언쟁하곤 했습니다. 이들은 인터넷상에서 집단괴롭힘을 일삼던 자들이었는데, 꼭 약한 이만 괴롭혔습니다.


 약자를 옹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을 그들은 매우 증오하였는데, 이자혜 씨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이들 중에서 좀 특이한 케이스였습니다. 대부분의 만화가들은 위협에 움츠러들기 마련이고, 바로 이 때 그들의 약함이 확인되는 셈이니, 가해자들은 그때부터 본격적인 괴롭힘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자혜 씨는 좀처럼 기가 죽지 않았고, 오히려 시비를 걸러 오는 이들에게 막말을 퍼붓곤 했습니다. 웹툰 갤러리 유저들은 이자혜 씨를 어찌하지 못했고, 골칫거리로 여겼죠.


 이자혜 씨의 과거 가학에 대한 폭로(물론 그 폭로가 어디까지 진실일지는 논쟁적일지라도)에 페미니스트들이 충격을 받았음은, 반면 장동민 씨의 추종자들은 아주 기뻐하였다는 사실은 잠시 접어두기로 합시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이것입니다 - 괴롭힘은, 적어도 장동민 씨가 상징하는 그 어떤 괴롭힘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특정한 관계가 성립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죠.



#1

 그 ‘관계’란 어떤 것일까요?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아주 익숙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1924년)’에 등장하는 김 첨지를 봅시다.


운수 좋은 날 (위키문헌)


 이 소설에서 김 첨지는 식민지 조선의 인력거꾼입니다. 인력거는 일본인이 서양의 마차를 보고 만든 것인데, 말이 아닌 사람이 수레를 끌었죠. 당시 일본제국에서는 그것이 일반적인 여객운송수단이었어요. 1920년대 초, 일본과 스리랑카에 방문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짐승이나 기계가 하는 일입니다. 일본인들은 어째서 사람에게 그 일을 시켰을까요? 자본주의에 심취한 분이라면 어쩌면, 가령 윤서인 씨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죠 - 돈을 주는데 못 시킬 게 뭐야?


 하지만 인력거꾼의 일은 단지 돈과 노동을 교환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것도 바꾸지요. 달리는 인력거를 상상해 봅시다 - 승객은 윗좌석에 앉아 있습니다. 그이는 안락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이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지요. 반면 인력거꾼은 아래에서 분주히 걸음을 옮깁니다. 승객의 도구 역할을 하며, 그이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태에 놓이죠.


 도구가 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인 동시에 정신적인 고통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인력거꾼인 김 첨지를 보시지요! 그이는 심한 모멸감에 괴로워합니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감정에 시달리지요.


 김 첨지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 그것은 일이니까요. 놀이라면 어땠을까요? 


 가령 말타기는 연인들의 흔한 성애적 놀이 중 하나입니다. 말을 타는 사람이 그 상황에서 우월하며,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도구가 되지요. 덩치가 작은 사람이 위에 타므로, 기수는 대부분 여성일 겁니다. 기수는 ‘말’의 엉덩이를 때리며, 이리 가라, 저리 가라며 명령을 내리겠지요. 하지만 놀이가 끝나면, 그 관계는 해소됩니다.


 이런 관계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놀이일 수 없겠죠. ‘백정각시타기’라는 놀이, 정확히 말하면 놀이라고 불렸던 것이 있었습니다.


 

 “일제시대 신문 기사 중 학교 운동회에서 ‘백정각시 타고 달리기’라는 색다른 경주를 실시하면서 저고리 깃에 검은 천을 단 백정 각시를 찾아내어 소처럼 엎드려 기게 하여 치욕을 겪은 백정 여성이 자살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경리의 “토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놀이가 아닙니다. 이미 차별받는 이들 - 백정에 대한 차별은 일제 시대에도 여전했습니다 - 에 대한 노골적인 가학이죠.


 김 첨지의 일에서 이 ‘치욕’이 드러납니다. 김 첨지가 태우는 이들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입니다. 부자집 마나님, 잘 차려입은 신사, 학생, 그리고 물건을 손에 든 상인. 그들은 지배자들입니다. 김 첨지를 이용하여 쾌락을 얻죠.


 반면 김 첨지는 피지배자이죠. 하기야 무산계급이란 누구나 유산계급에게 지배당한다고도 하겠지마는, 인력거꾼의 일이란 말했듯 특별합니다. 고통이 복속을 늘 확인시켜 주니까 말이죠.


그 고통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 사람의 앞에는 방편이 하나 놓여질 테지요. 앞서 백정 신분의 여인이 선택한 - 죽음입니다. 



#2

 아인슈타인이 놀랐던 이유를 이제 우리는 압니다. 그이는 인력거가 사람을 도구화시킴을 알아차렸으며, 그것의 잔인성을 직감했던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왜 김 첨지라는 예민한 인물이 돈을 벌지 못하는지, 그 실마리를 얻습니다. 직업이 모멸감을 주고, 그 정신적 고통은 사람을 자학으로, 자해로, 심지어 죽음으로 몰고 가기에, 김 첨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일을 피해 온 것이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소설에서 등장하는, 이런 묘사는 무엇이랍니까?


 “그 학생을 태우고 나선 김 첨지의 다리는 이상하게 거뿐하였다. 달음질을 한다느니보다 거의 나는 듯하였다. 바퀴도 어떻게 속히 도는지 군다느니보다 마치 얼음을 지쳐나가는 <스케이트> 모양으로 미끄러져 가는 듯하였다. 얼은 땅에 비가 내려 미끄럽기도 하였지만.”


 그 ‘운수 좋은 날’, 김 첨지는 손님들을 계속 따내며 돈을 법니다. 비 오는 거리를 달리며 그이는 응당 느껴야 할 고통과 함께 어떤 기쁨을 느끼죠. 집으로부터 멀어져서 느끼는 기쁨일까요? 돈을 벌어서 느끼는 기쁨일까요? 그러나 소설에서 이 기쁨은, 앞서의 모멸감과 마찬가지로, 김 첨지의 인력거꾼 일과 분리할 수 없이 밀착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 가학의 쾌락이 아닌, 피학의 쾌락을요.


 가학의 쾌락에 따른 행동 경향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사디즘Sadism입니다. 유명 작가인 사드의 이름을 땄죠. 한자 조어로 옮기면 가학증加虐症이겠군요. 이것의 반대되는 개념은 마조히즘masochism, 피학증被虐症입니다. 이것은 괴롭힘을 당하며 느끼는 쾌락이죠.


 이 단어들을 접하며, 이것들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이미 여러분은 상상하고 계셨을 겁니다. 파트너를 침대에 묶어 놓고 채찍으로 발바닥을 때린다거나 하는, 뭐 그런 것들을 말이죠. 우리는 흔히 그것들을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첫글자를 따서 S/M플레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이 경우, 때리는 사람이 사디스트의 역할을 하고, 맞는 사람은 마조히스트의 역할을 하는 것이겠죠. 앞서의 ‘말타기’는 그것의 ‘소프트’한 모습 중 하나이겠습니다.


 S/M ‘플레이’는 말 그대로 놀이입니다. 그것이 규칙을 갖추며, 이를테면 피학자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으며, 현실과 구분될 때, 곧 자유로운 개인들의 합의에 기초하고 그 종료와 함께 가학이 해소될 때, 그 행위는 무해한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이런 이상적인 규칙이나 구분이 언제나 존재하리라는 보장은 역시나 없음을 우리는 목격했으니, 바로 그 유명했던 ‘소라넷’에서죠. 그곳에서 가학의 문화는 현실권력에 의한 강간 사건으로 나타났지요.


 지배하며, 괴롭히며 느끼는 쾌락은 일반적으로 지주의, 자본가의, 상급자의, 남성의, 백인의, 제국주의자의, 비-장애인의 쾌락입니다. 반면 소작인은, 노동자는, 하급자는, 여성은, 유색인은, 식민지인은, 장애인은, 곧 피-지배자는 괴롭힘을 당하며, 반드시 그렇지는 않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즐거움을 느끼곤 한다는 것이죠. 단순-육체노동자이자 식민지인인 김 첨지는 분명 이런 쾌락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이는 빨리 달리며, 계속 손님을 태우며, 열성적으로 지배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죠!


 많은 분들이 그 비슷한 기분을 경험한 적이 있으실 겁니다. 적어도 목격하셨겠지요, 학생이나 군대의 하급자는 가학적인 교사나 상급자에게,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종종 더 잘 지배당하곤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가학적인 지배자들에게 동경을 넘어 존경심을 품으며, 때로 그들과 애착관계 비슷한 것을 형성하곤 하죠.


 이것은 정치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가령 억압적이었던 독재정권에 향수를 느끼는 시민들.


 어째서 사람은 억압에서 만족을 느끼고, 때로는 학대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까요? 이것을 어떤 적응으로, 곧, 김 첨지처럼 자학하거나 위의 백정 신분 여성처럼 심지어 죽는 것을 막도록, 불가피하게 선택되는 신체적 반응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맥락에서 주장했으니, 곧 여성은 월경과 출산의 고통에 적응하기 위해 본성상 피학적이라는 것이었지요.



#3

 장폴 사르트르나 에리히 프롬은 학대에 대해 프로이트보다 그럴듯한 설명을 내놓았습니다. 프롬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인간을 흔히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칭하지요. 말 그대로 사람은 타인과의 유대를 필요로 합니다. 이런 유대를 가능하게 하는 많은 방법들 중 하나가 지배하는 것, 또는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유럽의 중세로 돌아가 볼까요. 당시 세상은 거의 변화하지 않았고, 직업이란 신분에 따라 고정된 것이었죠. 사람은 장원이나 조합에 속한 동업자들과 함께 일생을 보냈습니다. 또한 사람은 사후의 천국을 기대하며, 신과의, 또 온 기독교 세계의 교우敎友들과의 믿음 안에 있었습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자유는 비록 없었지만, 사람에게는 집단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르네상스 시기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그리고 학문이 발전하면서 저런 중세의 틀은 깨졌습니다. 사람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하지만 교회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 도달한 곳은 천국 없는 죽음이었어요. 봉건제도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 마주한 것은 경쟁과 계급추락의 공포였죠. 자유의 대가는 삶의 불안정이었던 겁니다.


 특히 근대의 자본주의는 사회 전체의 부를 팽창시켰지만, 일반인들의 경제적 수준은 쉽게 퇴보하곤 했죠. 이 사회적 불만과 불안감 속에서 사람들은 유대관계를 어떻게든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새로운 형태의 지배가, 새로운 가학이 출현했던 것이지요.


 가령 칼뱅의 신학은, 프롬의 설명에 따르면, 현실에 대한 불만과 이웃들에 대한 적개심을 반영합니다. 여기서 신앙인은 신에게 굴종하며 배타적인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칼뱅주의는 이웃의 머리 위로 떨어질 지옥불을 기대하는 심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념은 사람을 근면한 노력가로,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한 인간형으로 단련시킵니다. 


 이 ‘노력’은 단지 불안으로부터의 도피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바로 소설의 김 첨지처럼, 사람은 돈을 벌 수 있어요.


 이후 나타난 국가주의의 경향 역시 강력한 무언가를 소환하곤 합니다. 권위주의적 국가가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고 그들을 복종시킬 것입니다. 개인은 자기 스스로의 사고를 중지하고, 국가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면 됩니다. 마치 “국제시장”의 국기하강식처럼 말이죠.


 물론 국제시장의 이 장면은 권위주의에 대한 풍자입니다. 어쨌든 풍자죠. 하지만 우리는 장동민 씨와 이자혜 씨의 사례를 뛰어넘는 경우를 이미 목격했는데, 다름아닌, 국가원수였던 박근혜 씨[각주:1]가 이런 굴종을 풍자로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겁니다. 이 ‘진지한’ 체제는 사람들에게 권위와 집단에 복종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럼으로써 대신,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지는) 유대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죠.



#4

 IS(이슬람 국가)가 출현하고, 유럽의 이슬람 젊은이들이 그 야만적인 조직에 굳이 가입한답시고 고향을 떠나는 것을 사람들은 목격했습니다. 그들 중에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었죠. 하필이면 그런 성차별적인 집단에서 억압받으려 하다니요! 하지만 한국인들은 아울러 기억합니다 - 한국의 비-이슬람인이었던 소년 하나도 IS에 가입하기 위해 터키로 떠났지요. 그이는 학교에도 나가지 않고 외톨이로 지냈고, 무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어요.


 타인과의 유대가 그것이었습니다. 현대 서구 사회는 이슬람을 믿는 이민자의 후손들에게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주지 않았고, 적어도 덜 부여했고, 그들은 소외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죠. 자유, 또는 근대인으로서 재능을 발현할 기회는, 사람에 따라서, 사회 안에서의 고립을 해결하는 것보다 덜 중요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런 유대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서 IS의 문제성이 드러납니다. 미학자 진중권이 이미 IS의 홍보 동영상에서 그것의 사도마조히즘적 함의를 예리하게 지적하였죠. 터키로 떠난 한국인 소년은 지배하러 간 것입니다. 반면 IS에 가입한 여성들은 지배당하러 간 것이죠. 그 소년이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을 극렬히 증오하였다는 사실은 이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를 한층 부각시키죠. 그이에게 여자란 (자신이 지배할) 피지배자여야 마땅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여성들은 용납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가르기 위해 IS가 동원하는 수단은 억압입니다. IS의 언뜻 불필요해 보이는 가학성 - 가령 포로를 참수하는 동영상들 - 은 이것과 불가분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학성은 권위에 대한 무비판적인 굴종과, 다른 종교인들을 ‘노예’로 삼는 성적 충동과 맞물리지요.


 이쯤에서 정리해 볼까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유대관계. 그 안에 일부 관계들은 권위주의적입니다. 그 권위주의 안의 일부는 폭력적이죠. 그리고 그 폭력 안에는 사도마조히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IS는, 가장 마지막 것으로 가장 먼저 것을 원하는 자들이겠죠.


 우리는 이런 가학적 폭력의 극단을 나치 독일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버금가는 전체주의 사회가 일본제국, 바로 김 첨지가 사는 식민지 조선의 지배체제였지요. 그 체제의 결과물들을, 인신人神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강요를, 칼을 차고 다니는 교사들을, 자살돌격기를, 순사들의 태형을, 피지배민족 언어의 말살 정책을, 종군위안부라는 이름의 성노예를, 강제 노동을, ‘마루타(통나무)’라는 암호명의 생체 실험을, 거대한 병영으로 기능하는 국가의 그 온갖 가학적인 행위들을, 체제의 피해자로서 한국인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 첨지는 이 체제의 피지배자로서, 그리고 피학자로서 훈련되었습니다. 그이의 직업이 그런 피학적 성격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것이어서 유난히 그렇겠지만, 설령 다른 직업을 가진다 한들, 제국주의 체제의 식민지인으로서 모멸감을, 적어도 어떤 소외감조차 느끼지 않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식민지인이라면 누구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피해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온전히 피해자들일까요? 우리는 마치 그런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일본인 - 이른바 내지인 - 은 언제나 가해자로만 여겨져야 할 것입니다.



#5

 사디즘과 마조히즘, 이 두 가지는 서로 정반대인 것 같지만, 사람들은 저것들을 묶어 사도마조히즘이라는 하나의 현상인 것으로 생각하지요. 이유는 김 첨지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조히스트가 있다면 대개 짝인 사디스트가 있는 법이어서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 가학자일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는 피학자로 행동하여서이죠.


 앞서 말했듯 마조히즘은 약자의 특성입니다. 김 첨지는 약자로서의 여러 상황을 갖고 있었죠. 그런데 김 첨지의 상황 중 몇 가지는 약자의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기혼) 남성이라는 것, (조선사회의 유별난 점이겠지만) 제법 나이가 있다는 것.


 세번째 고객인 학생을 봅시다. 김 첨지는 무산계급이지만 학생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김 첨지는 여기서 일종의 저항을 시도합니다. 바로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죠. 이것은 사실 대단한 반항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그 반항 자체는 김 첨지 자신을 놀라게 하죠. 그리고 독자에게 놀라운 것은, 김 첨지는 바가지가 성공하고 다시 피학자로 돌아가, 더욱 피학적인 쾌감을 느낀다는 사실이겠습니다.


 사도마조히즘적 경향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개인의 삶에서 복합적으로 드러나며, 우리는 그 전체적 경향의 강화와 약화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016년 여름, “매 맞고 자란 아이는 때리는 어른이 됩니다.”라는 공익광고가 전파를 탔습니다. 이 광고는 여러 비판에 직면해야 했죠. 맞는 아이가 때리는 어른이 절대 되지 않는다고 가정하여도, 우리는 아이를 때려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 이 광고는 어쨌든, 사람들의 어떤 일반적인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 학대를 당하면 당할수록 남을 학대할 경향이 높아지리라는 추측 말이죠.


 남성들에게 익숙할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바로 군대입니다. 가학이 심한 부대에 들어간 신병은 절대적인 확률로 가학의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였던 그 이등병이 일병이나 상병이 된다면, 아마도 그 자신이 가해자가 되겠지요. 물론 안 그런 개인들이 있겠습니다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변하기 마련입니다.


 가령 이창동의 영화, “박하사탕”은 선량했던 한 개인이 가학적인 환경 속에서 어떻게 피해자이며 가해자로 변하는지를 치열하게 묘사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영화를 보고 공감할 것이니, 바로 자신도 그런 모습의 인간으로 변모할 있다고 느끼는 까닭이겠죠[각주:2].


 학생을 태워주고 나서, 김 첨지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를 보면 이 현상이 명확해집니다. 그이는 호객을 핑계로 어느 여학생을 희롱하지요. 잠시 후에도 김 첨지는 그것을 회상하며 뿌듯해하죠. 몇 년 전 제주지검장이 벌였던 음란사건과 매우 유사합니다 - 범죄성은 약간 덜하겠지만요. 이 사건에서 김 첨지는 중년 남성으로서의 우월한 사회적-물리적 힘을 이용하여, 여학생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지배자적 위치에 올려놓습니다. 여기서 그이의 언뜻 완벽해 보였던 피지배자-피학자의 일면은 기울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망각하기 쉬운 지배자-가학자의 모습이 드러나지요.


 구 일본제국 같은 극단적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피학자인 동시에 가학자입니다. 적어도 체제가 그것을 구성원 모두에게 요구합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을 것 같은 사람조차 더 만만한 사람을 찾아내서 가학하곤 합니다. 정 학대할 사람이 없으면 동물을 괴롭히죠. 이 이중의 저주로부터 비껴날 사람은 천황이나 정신병원에 감금된 여환자 정도일까요. 김 첨지는 심각한 피학자였습니다. 동시에, 그이는 심각한 가학자이기도 합니다.


 김 첨지에게 학대당하는 이들은 그이가 설정한 권력관계 안에서의 상대적 약자들이겠죠. 그리고 우리는 가장 심하게 학대당하는 이, 즉 약자성이 겹치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이는 무산계급이고, 식민지인인데, 가부장의 지배를 받으며, 여성인데다가, 심지어 건강하지도 못합니다. 바로 김 첨지의 아내죠.


 김 첨지는 그 ‘운수 좋은 날’ 이전에도 상습적으로 그이의 아내를 폭행하였고, 병에 걸린 채로 방치했습니다[각주:3]. 그리고 그날에도 그이는 병자에게 폭력을 휘두릅니다. 아내는 남편이 당한 것보다도, 아니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학대당하죠.


 소설은 앞서 몇 번 언급했던, 학대의 어떤 종점으로 정확하게 돌진합니다. 그곳에서 김 첨지의 아내는 남편의 가학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요. 죽음이 그이를 구원한 것입니다.



#6

 피학대자에게는 학대로부터 벗어나는 몇 가지 길이 있지요. 죽거나, 도피하거나, 가학의 권력을 획득하거나, 체제를 전복하거나. 크게 이 네 가지죠. 병자로 설정된 김 첨지의 아내에게 나중 것들이란 불가능하고, 결국 그이는 미치거나 죽을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설렁탕’을 논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보아 김 첨지는 아내를 ‘사랑’하는 모양인데, 적어도 아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사도마조히즘과는 반대되는 것 아니냐고요. 이것은 언뜻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뭐 사람의 심리야 복합적이기 마련이니, 그 ‘설렁탕’ 속에 첨가된 ‘사랑’을 전적으로 부정하여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사디스트 입장에서의 실용적인 해법의 함유량 역시 만만치 않아요.


 언뜻 사디스트들은 매우 자상해 보입니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상대방과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기를 원하지요. 하지만 그 이유는 전적으로 지배자들이 그 본성상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논자들은 말합니다 - 기업의 투자심리다. 고용절벽이다. 낙수효과다. 무산계급은 자본가들에게 굉장히 의존적인 상태이며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들은 선전하지요. 그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반대의 의존을 약자들이 깨닫는 순간, 그들에게는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아까 말했던 김 첨지와 학생의 경우를 되살펴볼까요. 김 첨지가 자기 딴에는 막무가내로 바가지를 씌워도 학생이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그이가 빗속을 자기 발로 뛰어갈 깜냥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이는 그런 난처한 경우에서 늘 타인의 노동에 의존해 왔겠지요. 즉 무산계급이 유산계급에 그러한 것보다, 오히려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에게, 그것도 훨씬 의존적입니다.


 우리는 이 의존의 숱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조현아는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따라서 매우 자유로워 보였지만, 그이는 사실 스튜어디스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가장은 오히려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의존적입니다. 대체 가부장조차 아니라면, 그 남자가 무엇이나 되겠습니까?


 사디스트는 여느 권위주의자들처럼 피지배자(들)의 존재를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권력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사디즘적 쾌락을 느낄 테니까요. 따라서, 마조히즘이 언뜻 겸손과 조력으로 비추어지는 것처럼, 사디즘은 외향적이며 세심하다는 인상을 주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는 실로 무관하죠. 그리고 사디스트가 피지배자들에게 은혜를 베푼다 해도, 그것은 사도마조히즘의 입장에서는 피지배자가 계속 피지배자로 존재해 주기를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요.



#7

 살펴보았듯 사디스트에게 피지배자의 존재란 너무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다른 의문이 던져집니다. 그런데 왜 사디스트는 피지배자를 도피로, 정신착란으로, 때로 죽음으로 몰고 가는 걸까요?


 김 첨지는 심한 피학자이자 더욱 심한 가학자이며, 가학의 결과 역시 극단적 - 죽음이었습니다. 몇몇 경우, 특히 근대의 유산계급에게 무산계급이란 그 수가 너무 많은 관계로 설령 죽더라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제국은 이런 습관이 뼛속까지 든 나머지, 숙련된 비행기 조종사까지 그렇게 ‘대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렸지만요. 김 첨지의 아내도 김 첨지에게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김 첨지는 가학으로 그 사람을 죽여버렸단 말이죠.


 이제 사도마조히즘의 독특한 문제 하나가 드러납니다. 린 챈서는 “일상의 권력과 새도매저키즘”에서 이 현상을 사도마조히즘의 동태성이라고 명명했어요. 즉 사디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일정한 권력이 성취되면 사디스트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이것은 피지배자에게 어떤 대안을 - 그것이 전복적인 것이든 자멸적인 것이든 - 강구하게 만들죠. 여기서의 사디스트의 심정이란, 마치 열렬한 사랑의 고백이 받아들여지자 사랑 자체가 식어 버린 구애자의 그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일반적으로 권위주의는 안정적일 것으로 기대되지만, 사도마조히즘이 결합됨으로써 불안정해집니다.


 앞서 말한 조현아의 경우가 좋은 예이죠. 이 ‘땅콩회항’ 사건은 이른바 ‘모범 사례’에 가까운데 이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뭐 비슷한 사례인 포스코 임원의 ‘라면갑질’ 사건을 봅시다. 가학으로 권력을 확인하는 것이 도가 지나쳐, 라면의 온도 같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을 핑계로 승무원들을 못살게 굴기 시작했고, 결국은 피지배자들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죠.


 즉 가학의 쾌락은 그것이 지배를 가능하게 하기에 유용하지만, 가학에만 몰두하면 지배 자체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이것이 가학의 역설이겠죠.


 이것으로 김 첨지의 아내는 가학적 체제로부터 자유로워졌지요. 김 첨지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8

 김 첨지는 과연 사도마조히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자유로워지기는 할 것인데 -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 법이니까요 - 이것이 이 소설이 남기는 문제성입니다.


 2015년 페미니즘이 한국에서 주요한 사회적 담론으로 떠오른 이후, 문학 역시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죠. 식민지 시절의 한국어-근대-문학 또한, 주로 트위터에서 시작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가장 지탄받았던 것은 여성 문인, 특히 김명순을 둘러싼 남성 문인들의 패륜난동이었습니다만, 현진건의 소설들, 그 중에서 이 ‘운수 좋은 날’ 역시 평자들의 관심사였습니다.


 평자들은 소설에서 성차별적인 면이 드러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되곤 한다는 점을 문제삼았습니다. 작가는 한편으로 김 첨지가 가지는 사도마조히즘의 문제성을 보시다시피 치밀하게 드러내면서도, 김 첨지를 틀림없는 연민의 대상으로 삼고 있죠.


 어떤 이들은 악질적인 수준의 가학행위를 일삼는 사람을, 그이가 설령 체제의 심각한 피해자라도, 동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가령, 노신의 ‘아큐정전’이나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서 작가는 비-윤리적인 인간들에게, 설령 그자들이 하층계급이라도, 쉽사리 연민을 베풀지 않지요.


 물론 이야기에서 인물의 죄악은 어떤 전주곡으로 기능하기도 하죠. 이 때 그이의 죄란 그이에게서 거둘 참회의 극적 효과를 배가시키는, 일종의 장치입니다. 가령 “쇼생크 탈출”의 레드(모건 프리먼 분)는 과거 김 첨지와 마찬가지로 아내를 살해했던 사람이지만, 이야기가 서술되는 시점에서는 도덕심을 갖춘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지지요.


 그런데 김 첨지가 자신의 가학적 행동을 어떻게 참회한다고 보기는 쉽지 않죠. 반성하는 인물은 명백히 아닙니다. 이 반성 없음이 피학자로서의 정체성과 만날 때, 앞서 말한 피학자의 가능한 선택 - 죽음, 도피, 가학, 혁명 - 은 하나로 좁혀집니다. 오직 만만한 타인을 찾아내 가학하는 것이죠.


 심지어 더 이상 자신이 피학자가 아니어도 그이는 여전히 가학자일 것입니다. 한국은 일본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더 이상 식민지인들이 아니죠. 그렇습니다, 독재정권의 수괴들은 일본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하수인들은 일본인들이었나요? 숱한 폭력 교사들이나 폭력 가장들은? 맷값을 주고 노동자를 폭행한 재벌 3세는? 장동민의 광신도들은? 오유인들은? 마찬가지로 어느 날 갑자기 성소수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던 워마드 유저들은?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드러나는 저 많은 사회의 ‘어른’들은?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그 가학적이던 한국인들은 일본인이었습니까? 아뇨, 그들은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입니다.


 각종 집단괴롭힘을 열성적으로 옹호하는 나무위키의 ‘운수 좋은 날’ 항목 서술을 봅시다. “남존여비의 사상을 가진 시대에는 남편이 아내를 구박하는 일은 당연했고 이를 비난하는 여론이 없었다. 따라서 이 시대 사람들은 그것이 범죄라는 인식하지 않았다.” 이 글을 처음 쓰던 시점(2016년 12월 22일)의 단락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일제시대에도 배우자를 부양하는 것은 의무였고, 간호해야 할 병자를 방치하고 심지어 구타하는 것은 학대였으며, 그렇게 해서 사람을 죽이면 유기치사였죠.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범죄입니다. 하지만 나무위키의 ‘한국인’들에게 이런 행위란 ‘당연’한 것입니다. 이들은 심지어 일본제국보다도 훨씬 가학적이죠.


 만약 사회에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사회의 가학성은 절대 줄어들지 않겠지요. 자신이 가학자라는 사실조차 모르는데 무슨 가학의 개선이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자신을 피학자로만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학을 어떤 저항처럼 여기게 되지요. 김 첨지가 그 여학생에게 그러했듯, 고작 추행이나 저지르고 마는 겁니다.


 그리고 가학에 대한 진짜 저항을 이들은 억압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역차별한다거나, 유색인종이 백인종을 겁박한다고 말합니다. 또는 페미니스트들을 ‘나치’로 부르거나, 여성운동을 IS와 비교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가학의 노예들이며, 자유의 방해꾼들입니다. 가령 한국의 노동자들이 너무 많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동의합니다 - 하지만 성차별주의자들은 여성문제가 등장하면 야근을 하지 않는다며 여성들을 비난하지요.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배신하는 사적 카르텔들 - 가령 최순실 게이트 - 을 규탄하죠. 하지만 여성을 배제하기 위해서라면, 성차별주의자들은 바로 방향을 바꾸어 술자리에서의 ‘사회생활’을 옹호합니다. 바로 김 첨지처럼, 자신의 믿음과 이익조차 그들은 배반하게 됩니다.


 따라서 김 첨지에 대한 소설의 태도가 문제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무위키에서 소설을 저렇게 해독하는 것은 소설 자체의 어떤 나이브함 탓이기도 해요. 아무리 사도마조히즘의 주관적 심리에 치열하여도, 그 문제가 반성적으로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소설은 문제 그 자체로 기능하게 되겠지요. 물론 아내의 죽음을 대부분의 독자들은 어떤 벌로 여기겠지마는요. 최소한 “홉뜬 눈은 조금 바루어졌건만 이슬이 맺히었다. 김 첨지의 눈시울도 뜨끈뜨끈하였다.” 같은 문장들은 서로 떼어 놓는 게 옳지 않았나 싶습니다.



#9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가학성은 대체로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반면 개인의 자유는 더 보장되고 있었지요. 우리는 그런 것들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게 되었으니, 과거의 권위주의를 많은 이들은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는 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심화시키죠.


 살펴보았듯 사도마조히즘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유대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세의 경우에서 가학과는 별개의 유대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았죠(물론 중세가 현대보다 더 나은 세계였다거나, 덜 가학적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학은 물론이고 지배, 심지어 상하의 위계조차 없지요. 그들은 그런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어나갑니다. 연애담에 흔히 나오는 연인들이 하나의 예일 것입니다. 또는 어쩌면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라든가. 사도마조히즘이나 권위주의가 한국인으로서의 우리의 일면이라면, 저런 모습 역시 우리의 다른 얼굴일 수 있겠습니다.


 사도마조히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런 모습을 사회와 개인에게서 빼앗아간다는 것이겠지요. 가학적인 사회는 공동체의 연대를 죽입니다. 가학적으로 변해 갈수록, 사람은 진정한 사랑과는 멀어질 것입니다.


fin.



  1. 원래 이 글은 박근혜 씨가 국가원수일 때 썼습니다. [본문으로]
  2. 그런데 이 영화의 촬영은 가학적이었던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심지어 가학을 고발하는 영화도 가학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3. 소설은 분명히 김 첨지가 밥값은 물론 약값도 의욕만 있으면 댈 능력이 있었다고 묘사합니다. 물론 그것을 못하게 한, 무력감의 가장 큰 원인은 개인이 아니라 체제지만요.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