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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대한 이야기

아렌델로의 여정


그런데도 그대는 그대의 창가에 앉아 저녁이 오면 그 전갈을 꿈꾼다.
- 프란츠 카프카











 이 글을 쓴 직접적 계기는 채널A에서 저지른 반지성적이며 반예술적인 폭거입니다.

 이에 『겨울왕국』의 현재적 의의를 명백히 밝히겠습니다. 정신병적 주장은 발붙일 틈이 없을 것입니다.


- 목차




 현실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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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은 얼마나 현실적이었는가! 그들은 현실주의자로 자처해 왔으며, 그에 따르지 않은 이야기를 증오했습니다. 나는 판타지에 관한 전설을 들었는데, 그 내용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해리 포터』를 상영하는 도중에, 한 남자가 어떻게 저런 게 말이 되느냐 부르짖으며 극장에서 뛰쳐나갔다는 겁니다. 나는 이 일화가 사실임을 의심하지 않는데, 『반지의 제왕』을 보다가 극장에서 뛰쳐나간 사람을 알기 때문이지요. 다행히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현실주의의 전통은 유구합니다. 조선 선비들은 픽션 자체를 아주 좋게 보지 아니하였지요. '자색이 주색을 침범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일까요? 그들은 삼국지연의를, 그리고 다른 많은 소설들을 탄압하였습니다. 80년대의 영부인 이순자 여사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 "허무맹랑한 로봇물은 아이들에게 해롭다." 그 뒤로 우리는 당분간 TV에서 로봇 만화를 구경할 수 없었지요.

 고백하자면 나 역시 추상미술을 그리 좋아하지 아니하며, 『겨울왕국』을 보며 주인공이 저체온증에 걸리지 않을까 우려한 바 있습니다. 어째서 한국인들은 예술에까지 이런 취향을 일관하는 것일까요? 이상하게만 느껴집니다. 한국인들은 광기라는 분야에서 재능를 발휘해 왔으니까 말이지요. 유학이 지배했던 어떤 현실원칙은 한국인들의 삶의 전체가 아니었던 겁니다. 애초에 그 원칙이란 지금 한국인이 현실원칙이라고 믿는 어떤 것이 아니기도 하지만요.

 어쨌든 오늘날 한국의 이 유별난 현실-애착은 창작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판타지와 SF로 대표되는 장르문학은(나는 일본식의 일명 심리적 추리소설을 인정하지 못하겠습니다), 한국의 경제적 발전을 고려한다면, 사뭇 놀랄 정도로 맥을 추지 못합니다. 독자보다 작가가 많다는 소문까지 나돌 지경이니까요. 하기야 사실주의 쪽도 사정이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마는요.

 예술마저 현실원칙이 지배해야 한다면, 그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어디에 놓이는가요? 장르는 이제 현실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특수한 사람들에 눈을 돌립니다. 바로 아이들이지요. 일본인들은 이 비-현실적 장르에 동화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 명명을 한국인들은 그대로 따라합니다.

 이제 우리는 극장 앞에서 이렇게 외쳐야 하겠습니다. 다 커 가지고 웬 만화영화니!




 아이들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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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란 대체 무엇인가요? 한자에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조갑제 선생의 주장에 따르면, 동화란 온전히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책을 일컬을 따름이겠습니다.

 國은 사람의 주위에 창칼과 성벽이 있는 모양입니다. 民은 발에 쇠사슬이 걸린 노예를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상상해 보세요, 나라를 벽으로 둘러치고, 인민의 발에 쇠사슬을 건다면, 그런다면 얼마나 이상할까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동화 역시 아이들만의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런 이름-결정론적 주장에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론들은 마치 사물의 본질에 직접 들어가는 듯한, 그리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살짝 훔쳐보는 듯한 기분을 선사하니까요. 한때는 이런 작업들도 나름의 학문적 역할 -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보듯 - 을 수행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학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하는 곳은, 법과대학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지요.

 독자층이 작품의 성격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증명하기 위해서,『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 그리고 『트와일라잇』, 세 작품을 들겠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연애담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를 열심히 읽는 팬들 역시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개 10~20대의 여성들이라는 점이지요.

 제인 오스틴은 지극히 사실적인 소설을 썼습니다. 그의 소설에는 비현실적인 사건이 전혀 등장하지 않아요. 플롯은 인물들간의 관계에서 구현되며, 개개인의 감정은 세상을 뒤집어 엎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위할 것! 여기서 절제력과 예의범절은, 그것이 생기를 잃게 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몇 가지 미스테리들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어질러졌던 것들이 자리를 찾아 착착 정리됩니다.

『오만과 편견』200주년 기념, 제인 오스틴 소설 우표


 『제인 에어』는 다분히 관념적인 소설입니다. 겉으로는 현실의 사건들의 집합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건과 사건의 연계는 다분히 심정적입니다. 애인과 싸우고 온 사람의 푸념글을 떠올려보세요 - 화자는 세상일들을 자기중심적으로 짜맞추곤 하지요. 『제인 에어』역시 그렇습니다. 세계는 주인공과 그가 특정한 감정을 갖는 외부의 존재들로 구성됩니다. 이것들은 어떤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실체라기보다는, 작가가 간직해 온 소장품에 가깝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주인공이 갖는 삶의 태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수긍하고, 순응하고, 행운을 기다립니다 - 제인 에어만 빼고요. 그녀는 부인하고, 저항하고, 찾아 나섭니다.

 10~20대 여성들은 '하이틴 로맨스'라는 것들에 역시 열광합니다. 대표적으로 『트와일라잇』. 이것들은 겉보기에 현실적인 것일 수도 있고, 현실적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창작물들에서 그 외양, 즉 배경이 고등학교인지 흡혈귀가 등장하는 판타지 세계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 세계는 소망 실현의 방향으로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인 오스틴 소설이나 제인 에어도 해피엔딩 - 훗날의 낭만주의자들은『이성과 감성』을 두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며 개탄했지마는 - 으로 마무리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의 주인공은 최대한 현실의 규범에 맞추어, 제인 에어는 이런 것을 무시하고 격렬하게 투쟁하여, 소망을 실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노력은 그들이 얻는 행운의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여기서 세계상의 차이점이 밝혀집니다. 앞의 두 소설에서 세계는 주인공에게만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아요. 물론 이 소설들에서도, 특히 제인 에어에서, 세상은 결정적인 순간 주인공의 소망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제인 오스틴은 차분한 복선과 날카로운 현실감각으로 행운을 정당화시킵니다. 제인 에어의 경우에는 세계가 더욱 많은 순간 내보이는 적대성으로, 늘 그런 것은 또 아니기에 오히려 악마적인 불친절함으로 운명의 균형이 맞추어지지요. 애초에 그런 세계가 아니라면, 주인공이 뭐 하러 그리 힘들여 투쟁할까요?




 비-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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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라는 단어에서 오직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 문학장르를 한국인들이 그간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이겠습니다. 많은 다른 한자어들이 그렇듯, 어차피 이는 어떤 외래어의 역어일 따름이기도 합니다[각주:2]. 영미권에서 fairy tale이라고 하는 것, 독일어에서 Märchen이라고 부르는 것.

 따라서 동화는 현대의 사실적인 '아동문학'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동화는 사실주의적이지 않고, 곧 현실원칙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장르이니까요. 물론 전 단락에서 말했듯, 아이들은 '현실 원칙'을 모르는 대표적인 특수집단입니다.

 우리갈 대면하는 물질세계는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도, 비록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우리가 학문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세계의 규칙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이 원칙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동화는 세계를 구성하는가요? 만약 세계를 구성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멋모르는 어린애들도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있지요.

 백설공주를 봅시다. 거울이 비평을 하고 여왕은 변신을 합니다. 신데렐라를 볼까요. 호박이 마차로 변하고 재투성이 아이는 유리구두를 신고 춤을 춥니다. 빨간모자는 어떨까요. 늑대가 말을 하고, 그 말하는 늑대는 빨간 두건을 쓴 소녀의 할머니로 변장합니다.

 이것을 일종의 주술적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현실의 거울은 무미건조하게 대상의 빛을 반사할 뿐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가지지 아니하였지요. 그리고 거울은 그가 비치는 인간의 내면의 것 중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개인의 영혼은 세계와 완벽하게 분리되었습니다. 아니, 이제 그것마저 유물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 당분간은 쉽지 않겠지마는 - 실정이지요.

눈의 여왕, 일러스트 Elena Ringo


 하지만 동화는 이런 것들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럴 것이, 동화란 인류가 아직 과학은 물론이고 철학적인 구분마저 알지 못하던 시기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그들 자신이 겪는 무의식의 심연뿐으로, 잘해 봐야 사회의 좁은 울타리가 만들어 낸 괴이한 관습들이었을 터이며, 그 밖에는 오직 불가해한 경탄만이 존재했겠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딛고 올라서야 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세상의 모든 것에, 그것이 실존하든 설령 실존하지 않는 것이든, 자신의 영혼을 덧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으로 행위와 사고는 동일해집니다. 세계는 완벽하게 관념적으로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원초적인 관념을 이야기로 만들었으며, 바로 이것이 동화의 직접적 근원입니다. 우리 모두는 동화에서 시작했습니다. 비상한 문학적 재주가 있었던(하기야 다른 분야라고 아니겠느냐마는) 그리스인들은 이에 있어 다양한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초창기의 동화적인 소박함에서 발전해 온 화려한 신화들, 마침내 정교하게 양식화된 세계에서 펼쳐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들, 이런 속박에서 자유로워진 서정시들, 애니미즘적인 형식을 수용하나 관습적 사고로부터의 독립에 성공한 아이소포스의 우화들, 삶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희극들.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비극들이 등장하였으며, 사실에 눈을 뜬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들에 이르면, 문학의 장르들이 동화의 영향에서 점점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아마 느끼실 겁니다. 우리는 이미 돈키호테를 알고 있고, 그 이후 소설이라는 장르가 문학(그리고 소설적 내러티브를 전제하는 다른 많은 예술장르들)의 왕위를 차지했음을 압니다. 물론 이것이 환상적 문학의 종말을 알리는 조종은 아니겠지요.




 환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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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에도 분명 환상문학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판타지라고 부르는 특정한 장르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톨킨의 소설들. 이는 분명 고대의 비사실주의적 문학을 연상하게 하는 점이 있습니다. (경험에 비추어) 익숙하지 않은 것들, 그것이 낳는 괴이함과 놀라움이 존재한다는 점이 바로 그러하지요.

 『일리아스』를 옛날 사람들은 실제 역사라고 믿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로한의 성이나 헬름 협곡이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사람들은 아쉬운 대로 뉴질랜드를 찾습니다만). 그렇다고 톨킨의 작품을 순수하게 동화적인 환상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바로 호메로스의 문학이 그러한 것처럼, 정리된 내적 질서가 존재하며, 바로 그에 따라 세계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보는 광경과 거의 유사합니다. 단 한 가지 아주 본질적인 차이, 보상과 운명이 내재하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러하지요.

 덕분에 우리는 가질 수 있으니, 톨킨 세계는 우리 현실 세계에 비추어 개별적인 사회적 조건이나 사소한 물리적인 규칙만이 다를 뿐이라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반지의 제왕』의 괴이함과 놀라움은, 마치 우리가 블루 모스크나 옐로스톤 공원의 바위를 보며 느끼는 경탄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겁니다.


 SF 역시 이와 유사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작품 안 세계의 원칙이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는, 어떤 일말의 가능성쯤이겠습니다. 따라서 『그래비티』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SF와는 명백히 달라요. 그것은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리라고 기대되는(약간의 극적 과장을 제외하면) 내용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제인 에어』가 다분히 관념적이라는 사실은 위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제인 에어의 관념성은 동화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그 세계의 겉모습 자체는 현실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그 자체보다 주인공이 그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 그리고 사건들의 총체를 파악하는 방식이 압도적으로 중요할 따름입니다. 주인공이 감옥이라고 생각하는데, 멋진 저택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요! 이런 태도는 독자가 자전적인 형식의 이야기에 현실감을 느끼고, 주인공에게 동조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제인 에어』의 관념성은 인물에서도 드러나지요. 신사이며 또 섹시하지만 유독 가정생활이 좀 막장인 남자, 그 덕분이랄까 약간 제정신이 아닌 여인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성된 하나의 인물에서 저런 다양한 속성이 드러난다고 보기보다는, 다양한 속성들의 결합으로 인물이 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 창조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겠지요.

 물론 이러한 속성들이 그럭저럭 통합 - 현실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 되어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는 점[각주:3]은 준수하다고 평가해야 합니다. 이 수준조차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니까요. 그리고 이 캐릭터들은 여전히 현실원칙에 구속을 받습니다. 사회의 규범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연법칙에 따라야 합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얄짤없이 죽지요.

 지금까지 두 가지 유형을 분류했습니다. 작품의 겉과 속이 모두 현실적인 것. 겉은 현실적이지만 속은 관념적인 것. 이제 하나의 경우가 남아 있습니다. 세계의 외양마저 관념적으로 동작하는 작품입니다.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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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했다시피 먼 옛날에는 인간의 심정과 세계가 구분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인의 관념적인 신화는 그 무엇보다 현실적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런 근원적인 이야기들은 자신의 실재성을 차츰 상실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우화라는 형식이 등장합니다. 이 장르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는 아이소포스(이솝)입니다. 아이소포스가 너무나 유명했던 탓에, 다른 작가들도 너도나도 그의 이름을 빌려 우화를 만들었습니다. 아이소포스 우화 전집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지요.


 연설가 데마데스가 아테나이 민회에서 연설중이었다. 사람들이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고, 연설가는 화제를 돌렸다.

 "여러분, 내가 아이소포스 우화 한 단락을 이야기하겠소. 데메테르 여신과, 백조와, 장어가 함께 여행하고 있었소. 그런데 강물이 그들을 가로막았고, 강에 다리는 보이지 않았소. 백조는 강 위를 날고, 장어는 물속으로 들어갔다오."

 그리고 연설가는 말을 멈췄다. 사람들은 물었다. "데메테르 여신은?"

 "데메테르 여신은 매우 슬퍼하고 계시오. 시민들이 공적인 일은 방치하고 우화만 들으려 하기 때문이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아이소포스는 동방 출신의 노예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자유인이 되었는데, 델포이 사람들의 분노를 산 나머지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아이소포스의 우화에는 동물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오히려 사람보다도 많지요. 이 동물들은 의인화된 것으로, 일종의 인격을 지닙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집트의 개 머리를 한 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데, 우화가 주목하는 것은 자연의 동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로 나아가, 여우와 사자의 얼굴을 한 인간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이제 이야기는 독자들 자신을,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거울이 됩니다.

 대체 인간을 말하기 위해 어째서 동물이 필요하단 말인가요? 물론 주요한 이유란 사람들이, 그 중에서도 특히 아이들이, 동물을 좋아하기 때문이겠습니다. 『겨울왕국』의 크리스토프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그에게는 애완동물 순록이 있습니다. 또한 작품 초반의 트롤은 크리스토프에게 비슷한 애착을 보입니다.

 여기서 동물 애호의 이유를 세심히 논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일 터입니다. 대신 이것에 주목합시다 - 사람에 동물을 빗대어 말하는 효과를. 소재로서의 동물들은 한 가지 매우 현실적인 장점을 지닙니다. 대상을 직접 지칭하여 말하는 것에서 따르는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가령,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행태를 비판한다고 합시다. 사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이에 대한 부정을 곧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합니다. 이익이 걸리면 좀 더 골치아픕니다. 오늘 박근혜의 패션쇼나 별 의미 없는 해외순방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쓴다면 어떨까요? 이내 일베와 기관의 댓글전사들이 몰려올 겁니다. 하지만 뿔이 나무에 걸린 사슴의 이야기는 무난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분명 동일한 수준의 어리석은 행태이지만, 사람들은 우화의 것이라면 약간이나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화의 중요한 목표가 드러납니다. 그것들은 인간 자신의 어리석음입니다. 단,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어리석음이라기보다는, 우화의 형식을 빌어야 비로소 온전하게 드러나는 어리석음이지요. 우리는 그 어리석음을 싫어하며 억지로 감추고 싶어하니까요. 그렇다면 아이소포스가 델포이인에게 살해당했다는 전설은, 우화의 베일이 아주 완벽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시사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리석음이 대체로 어떤 것인지를 파악해볼 수 있을 겁니다 「개미와 베짱이」에서 보는 단견, 「개와 그림자」에서 보는 불확실한 이익에의 선망. 「왕을 원한 개구리」에서 보는 강자에 대한 굴종. 「북풍과 태양」에서 보는 폭력과 복수심에 대한 지향. 「사람과 사자[각주:4]」에서 보는 자기중심적 사고. 이런 특정한, 세계에 대한 심상들입니다.

 이 심상을 우화는 떨어져 바라봅니다. 그것에서 자유로운 사람만이 세상을 올바로 인식 - 물론 이것은 과학적인 방식이 아닌 직관적, 또는 문학적인 방식에 지나지 않는데 -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아이소포스의 우화는 일종의 처세훈으로도 충분히 읽힐 가능성을 지닙니다. 실제로 이솝우화는 현대로 따지면 자기계발서의 역할을 했다는군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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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문학, 특히 세계의 외양마저 관념적으로 동작하는 작품들, 그리고 그 여러 뛰어난 작가들, 푸시킨, 포우, 고골, 오스카 와일드, 캐럴, 카프카 등을 우리는 꼽을 수 있지요.

 루이스 캐럴은 그가 사랑하는 여자아이, 앨리스 리델을 위해 책을 하나 썼습니다.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어요.

 앨리스는 나무 밑에 있습니다. 누나는 그림 없는 책을 읽습니다. 앨리스는 지루한 나머지, 깜. 빡. . 깜.  빡 . . .   졸. . . . .  기. . . . .  시작합니다.

 앨리스는 꿈을 꿉니다. 토끼를 쫓아 들어간 굴에서, 그녀는 기묘한 사건들과 마주합니다. 이 환상 세계의 사물들은 말 그대로 환상적인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회중시계를 가진 토끼, 물담배를 피우는 애벌레, 하트의 여왕.

 몇몇 사람들은 캐럴의 이 배치에 독특한 내적 규칙이 있다고 믿습니다. 마치 세계 안에 수학으로 정리할 수 있는 어떤 물리적 원리(캐럴은 수학자였습니다)이 내재하는 것처럼요. 비록 캐럴의 규칙이 과학적인 어떤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그것은 예술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독자에게 기괴함과 놀라움을 가져다 줍니다. 마치 동화가 그러하듯이요.

 이 기괴함 속에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앨리스는 어린아이답게 제한적인 지식과 단순한 욕구만을 지닙니다. 이 소녀에게 다른 캐릭터들 - 토끼와 겨울잠쥐와 카드의 왕 따위 - 은 이해할 수 없게 느껴지는데, 이런 자들이 너무 고차원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얘들을 면밀히 살펴봅시다. 이들은 우리가 우화에서 본 것처럼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또 우화와 비슷하게, 『...앨리스』의 동물들의 행태는 전형적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전형성은 성격의 전형성이라기보다는 행태의 전형성입니다. 이 동물들은 어떤 행동을 강박적으로 반복하기만 합니다. 실제 우리가 수족관의 거북에게서 눈을 껌뻑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만 관찰하듯이.

앨리스 리델(당시 11세)


 앨리스가 그들에게 이유를 물어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동물이라서 그럴까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좀 더 나아야 할 테지요. 하지만 이 습관적 행태는 사람다운 사람 - 모자 장수, 공작부인, 왕과 여왕 - 에 이르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해집니다.

 이는 우스꽝스러움을 선사합니다. 여기서 독자, 즉 아이들은 조롱하고 있지요 - 무의미한 것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저들의 쓸데없이 진지한 태도를. 우리도 과거에 틀림없이 그리하였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랬다는 사실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이 조롱은 아동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현대의 가장 성공적인 작가 중 하나인 로알드 달의 이야기 - 이를테면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틸다』의 경우는 더욱 노골적입니다 - 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런 부분이 드러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유명한 단락을 봅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턱에서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의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아, 참 좋은 집이구나!'하고 소리친다."

 이런 관점은 우화가 주목하고자 하는 어리석음과 통합니다. 우화의 총체는 인간의 현실사회를 표상하고, 그것이 비이성과 편협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은연중에 폭로합니다. 『...앨리스』 역시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요. 캐럴은 우리의 세계와 명확히 구분되지만, 마찬가지의 어리석음이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해 내었습니다.

 즉 인습으로서의 세계입니다.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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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가 되었습니다. 자연세계의 인식론에서 과학은 의심할 여지 없이 승리를 거두었지요. 학문은 나날이 정교해지며, 마침내 우주의 모든 비밀을 드러낼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도 그만큼 명징해졌을까요? 인간 사회의 어리석음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제 카프카가 그에 답할 차례입니다.

 카프카의 소설에서 세계는, 마치 캐럴의 이야기처럼, 분해되어 재조직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기괴한 모습을 띕니다. 사람들은 사건의 원인과 해답을 모릅니다. 이것은 앨리스의 세계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제 아이가 아닙니다. 그는 대체로 높은 지성을 갖춘, 또한 자신의 직업에 관해 전문적인 식견을 보유한 성인 남성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사람들의 행동은 미스테리로 다가오는데, 역시 누구도 자신들 행동의 근거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한국인이 주장하던, 바로 환상문학을 멸시하는 근거가 되었던, 그 '현실원칙'이라는 것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아마 이렇게나 이야기했을 겁니다 -

 "네깟 어린 게 세상에 대해 뭘 안다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하지만 아버지의 말하는 앎은 삶의 본질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국면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사회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습으로서의 세계상입니다. 남들 하는 대로 그대로, 야자를 하고 과외를 하고 대학을 가서 토익을 보고 스펙을 쌓아서 취직을 한 다음 결혼을 해라!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매우 완고하고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카프카는 오직 그것으로 작품의 세계를 구성하려고 합니다. 자연과 사회에서, 이성적으로 파악할 부분은 완전히 증발하였습니다. 앨리스가 만난 세계는 이방인 소녀에게 대체로 무관심했어요. 하지만 카프카의 세계는 주인공에게 적대적입니다.

 대체 사람이 성인이 되었고, 사회 역시 유년기를 벗어난 줄로만 알았는데, 이 인습성은 어떻게 된 영문인가요? 우리는 한때의 그리스어로 우화를 열렬하게 읽지 않았는가요? 사람들은 세상의 어리석음을 깨달아, 적합하지 않은 부분을 당연히 내버렸어야 하지 않은가요? 하지만 저들은 오히려 벽처럼 완고해져 있습니다!

 카프카의 아주 짧은 소설 하나를 적습니다.


 <작은 우화>

 " 아!" 쥐가 말했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에는 하도 넓어서 겁이 났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드디어 좌우로 멀리에서 벽이 보여 행복했었다. 그러나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양쪽에서 좁혀드는지 나는 어느새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구석에는 덫이 있어, 내가 그리로 달려 들어가고 있다"

 "너는 달리는 방향만 바꾸면 돼"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



 카프카는 정녕 불행하였는데, 하필이면 전공으로 법학을 선택했다는 점 또한 그러합니다. 우리는 어떤 과학적 공식 - 이를테면 "F=ma" - 를 보고 난해하다는 느낌은 품을망정, 그것이 세계와 전혀 동떨어진 어떤 것이라고 부정하지는 아니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의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하지요.

 사회과학에서 세계상은 자연과학의 그것에 비해 불분명할 수밖에 없어요. 학문은 정치성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상태이지요. 또한 인간의 어떤 일반적 행태를 추출해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류에게 있어 본질적인 것인지, 특정한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인지, 단순한 이기적 습속인지, 병적 징후인지 명백히 갈라낼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분류는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 인간의 삶은 형성적이니까요. 이는 생물학적 진화와 완벽하게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신학에 이르면 과학성이 완전히 벗겨져 있습니다. 법학에서는 불변의 전범마저 상상하기 어려워집니다. 법률(그것에서 민주적 성격이 결여되었거나 단지 형식적일 때 특히)은 부유하는 관습의 총체이지 객관적 지식의 총체가 아닌 바, 그 안에서 아무리 노력해 봤자 그것이 전제하는 인습성에서 달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동화의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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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가 변천하는 양상을 추적하고 그에 내재된 규칙을 논하는 활동을 우리는 역사학이라고 부릅니다. 이보다 좀 더 현재적이고 일반적인 활동을 우리는 사회학이라고 부르지요. 이것들은 과학으로서의 인식입니다.

 문학은 이것과 구분됩니다. 문학의 대상은 삶 자체입니다. 작가들은 삶의 특정한 양상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지요. 여기서 우리는 문학이 갖는 두 가지 태도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 삶 전체를 총체적인 구도 속에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삶에서 본질적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부분들을 추출해낼 것인가입니다.

 대체로 소설은 전자에 가깝고, 극은 후자에 가까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지향일 뿐이며, 모든 작품이 그 시도를 성공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떠올릴 수 있겠지요.

 "SF의 90%가 쓰레기라고 하자, 그런데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다.[각주:5]"


 과학과 구분되는, 소설이나 극과 구분되는, 그리고 위에서 나열한 환상문학과도 구분되는 동화만의 특성이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몇 가지를 들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 과학적 이해의 결여.
 지적한 것처럼 인류는 원래 과학적 지식이란 것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옛 사람들은 세계를 그것의 원래 존립보다 훨씬 단순하고 소박하게 바라보며, 미지의 것들을 많이 허용해 두었지요. 마치 아이들이 그러한 것처럼.


 둘. 단순한 사회.
 동화에서의 사회는 작고 조촐하며, 설령 하나의 국가라 한들 가족이나 작은 마을의 유사체에 불과합니다.


 셋. 애니미즘(다시 말해 의인화).
 초기 인류는 동물과 자연물에 인간의 심성을 투영합니다. 해와 달과 사자와 순록은 인격을 가졌으며, 인간들과 대화나 교감을 나눌 수 있습니다. 어린 안나의 대사를 떠올리세요 - 하늘이 깨어났어. 그래서 나도 깨어났어.

의인화된 태양, 헬리오스


 넷. 관념적-상징적 구성.
 옛날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은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직접 만들어 낸 사회규칙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그저 주술적인 조건에 불과하며, 애초에 그들은 이를 자연법칙과 명확하게 구분하지도 못했으니까요. 물론 어린아이들도 단지 사물을 나열하는 것쯤은 가능합니다. 우리는 귀엽게 그려진 사자나 호랑이 따위를 가리키며 아이들에게 물어볼 겁니다 -

 저건 뭐야? 그리고 이건 뭐야?

 아이들은 사자며, 얼룩말이라고 답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삶을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명명이나, 의인화된 것들 - 이를테면 형성물 - 의 나열뿐만이 아닌, 그것들로 구성한 체계가 필요합니다. 이 체계를 구성하는 방식이 상징입니다.

 상징이란, 인간의 행동과 마음 사이에 굳센 연관이 있듯, 동화세계의 움직임(즉 행동)과 ‘마음’ 사이에도 마찬가지의 결속이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어째서 아더왕만이 엑스칼리버를 뽑을 수 있을까요? 세계가 그렇게 하도록 정했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까닭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의인화입니다.

 그리스신화를 봅시다.
 1. 인식 이전의 세계 :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 2. 이름붙이기 : 대지와 하늘
-> 3. 인격화 : 혼돈이 대지를 낳고, 대지가 하늘을 낳다
-> 4. 체계적인 신화 : 카오스에서 가이아 여신이 나오고, 가이아에서 우라노스 신이 나왔으며,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교합하여 다른 신들을 낳는다.

 세계의 뜻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서로 연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연관성 안에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드래곤이 나오고 곰이 사람으로 변하는 초현실적인 세계, 하지만 세계는 그 안에 자신의 단일한 뜻을 간직하니 혼란스러울 리가 없습니다. 동화의 사건들은 곧 의미가 되고, 의미의 총체가 다시 동화세계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덕분에 동화의 주인공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개별 사건들은 주인공이 딛고 올라갈 단단한 발판이 되어 주고, 세계는 그를 예정된 장소로 인도하고 있으니까요.


 다섯. 아이들에게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의 삭제.
 상징적 구성으로 인해, 동화에서는 인간의 행동양식에서 필수적이라고 여겨지는 것까지 대체가 가능합니다. 가령 『빨간모자』는 성적인 의미가 매우 강한 동화이지만, 성행위 자체는 당연히 등장하지 않지요. 그것은 침대와 옷을 벗는 행위, 그리고 어쩌면 '잡아먹는다'는 것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여섯. 본질성의 추구.
 그 세계가 단순하고, 상징적 구성을 취하는 것에 따라, 동화는 삶의 면면을 충실하게 묘사하기보다는, 삶에서 본질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 - 이를테면 영웅성, 올바름, 고귀함 등 - 을 쟁취하려는 시도로서 이루어집니다. 『겨울왕국』에서는 '진정한 사랑'이겠지요. 이것을 우리는 작품의 주제라고 부릅니다.




 디즈니 동화 - 미녀와 야수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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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동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집단은 아마 디즈니일 겁니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피터팬 등을 이 회사의 영화가 그린 대로 우리는 이해하지요.

 디즈니의 최초 장편애니메이션은 『백설공주』입니다. 놀라운 기술 수준으로 말미암은 세련된 미장센,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틀에 박은 이야기 구조를 가졌습니다. 악당은 나쁜 짓만 하다 결국 파멸하며, 착한 사람들은 늘 착하게 살다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공주님은 살림살이에만 전념하다, 적절하게 출현한 왕자님과 결혼에 골인.

 『신데렐라』에서는 계모에게 시달림 더하기 살림살이라는 설정이 더욱 강화되었지요. 구성 자체는 대체로 백설공주와 비슷비슷하지만, 무도회장에서의 강렬한 비포 & 애프터와, 12시까지만 설정된 시한부 프린세스라는 점이 포인트를 줍니다. 이것은 주술적 마법의 중요한 속성 - 변신과 조건이라는 점을 잘 반영합니다. 유리구두라는 전대미문의 챠밍 아이템은 옵션.

 『피터팬』은 네버랜드에서의 모험을 그립니다. 이쪽의 현실은 그 자체로 더 이상 상징적이지 않으나, 그 보답인지 저 환상의 세계는 오히려 더 동화적이지요. 그곳에는 현실의 사악함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타 의인화된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밤비』, 『점보』, 『아리스토캣』, 『101마리의 달마시안』 등. 모험이라는 내용이 일관되게 등장합니다.

 이 시점까지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일정한 공통점을 지닙니다.

 주인공은 착합니다. 조연들 역시 선량합니다. 동물들은 착하디착한 주인공에게 인격적인 호감을 보이지요. 현실의 개들은 주인이 선하건 개새끼이건 가리지 않고 충성하며, 토끼나 다람쥐는 주인조차 좀처럼 따르지 않지만요.

백설공주의 한 장면. 출처 디즈니위키.


 주인공의 집단은 언제나 특정한 가족상을 표상합니다.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는 것을 상상하면 쉬울 겁니다. 이 가족은 전통적인 성 역할을 고수합니다. 남성은 용감하고 여성은 정숙하며 애들은 귀여울 것.

 악인은 얼굴부터 일단 못생겼습니다. 백설공주의 왕비는 굳이 추한 노파로 변신합니다. 말레피센트는 하고 다니는 꼴이 너무 괴상하지요.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는 악당들입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그 천성이 글러먹었음을 증명하고 있지요.

 세상 사람들은 주인공의 편이지, 악당 편이 아닙니다. 극소수의 악당 동지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외로워요. 그는 반드시 주인공에게 패배하고, 악행의 대가를 치릅니다. 그에 걸맞은 보상이 주인공들에게 주어지는 반면에.

 이 전형성에 예외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 둘 있습니다. 『판타지아』와 『피노키오』입니다. 판타지아는 어쨌든 동화이지만, 위와 같은 디즈니적 특성이 거의 없지요.

 피노키오는 다른 작들과 언뜻 유사하나 실상은 매우 특이한데, 우선 주인공의 선악이 아직 정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말을 하는 귀뚜라미, 여우, 고양이 등 애니미즘적 소재가 등장하긴 하지만, 전체 내용이 지향하는 것은 오히려 강력한 인간성입니다. 그것도 사실 좀 막장스러운 현실의 인간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이지요. 보상이 내재하고 있긴 하나, 그 보상의 메커니즘은 주술적이라기보다는 도덕적입니다.

 칸트 옹 가라사대,


 두 가지 것이 마음을 새로이, 또 감탄과 경외로 채우니,
더 자주 그리고 더욱 꾸준하게 반성할 때 그러하다 :
 바로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이다.


 바로 이런 법칙을 피노키오에게 지미니 크로켓이 설파하지요. 이 귀뚜라미가 떠드는 소릴 애들이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미녀와 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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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디즈니는 『인어공주』를 발표합니다. 에리얼은 발랄한 아가씨예요. 그리고 영화에는 뮤지컬적 요소가 대폭 가미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굉장한 상업적 성공을 거둡니다. '디즈니 르네상스'의 시작으로 이를 우리는 기억하지요. 그리고 2년 후, 디즈니의 다음 작품이 선을 보입니다.

『미녀와 야수』는 어쨌거나 왕자 만나서 팔자를 편 프린세스 이야기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 전에 없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이 시도들이 『겨울왕국』에서 어떻게 계승되는지 눈여겨보셔야 할 겁니다.

 짧은 프롤로그가 끝나면, 주인공인 벨이 등장합니다. 그는 마을을 가로지르며 마을 사람들과 노래합니다. 벨은 착하며 사교성 좋고 얌전한, 전형적인 숙녀일 것만 같아요. 마을 사람들은 매우 밝고 선량해 보이지요. 하지만 실상이 곧 드러납니다. 벨은 '그림도 없는 책을 읽는', 다소 안 좋게 말하면 geek이고, 어쨌든 자의식이 다분히 강한 여자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발명가기는 한데(그의 발명품은 분명한 효과가 있습니다),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합니다.

 과학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얼간이들이 대장 얼간이, 개스톤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어느 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벨은 과학적 기계로 집 밖을 살펴봅니다. 참조, 34초부터 그녀가 발견한 것은.... 편협함! 무식! 경솔함! 어리석음! 우웩! 물론 벨은 이웃들이 흔히 내보이는 순박함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마을을 떠나고 싶어하지요.

어떻게 이런 걸 읽지? 그림도 없잖아!


 이 어리석음의 마을 가까이에, 저주받은 세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왕자는 야수로, 시종들은 물건으로 변해 있어요(어째서 마을 사람들은 바로 옆에 있는 군주를 까맣게 잊고 있을까요?). 여기서 물건의 인격성은 독특한 느낌을 줍니다. 이는 그들이 원래 인간이었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반면 이전의 장편 애니메이션에서 동물이 가졌던 인격성이 여기에서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야수는 인간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그가 높은 수준의 인간성을 찾아 가는 것이 - 마치 피노키오처럼 - 이 동화의 줄거리를 이룹니다. 그 과정은 개스톤이 보이는 탐욕과 야만성,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보이는 어리석음과 정확하게 대비됩니다. 악의 평범함 - 개스톤은 마법사가 아니며 또한 고독하지도 않습니다 - 과 평범성에 내재된 악 - 즉 인습성 - 은 『미녀와 야수』의 독창적인 부분입니다.




 미녀와 야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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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녀와 야수』 이후의 디즈니 작품의 주요한 시도는 성 역할에 관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알라딘』, 『뮬란』에서 기존의 성 역할은 일부 또는 전부 반전되어 있지요. 선악구도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모험과 노력이라는 부분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악당 역시 단순한 권력지향적 인물들임에도 여전히 매력적이지요.

 『라이온 킹』은 스토리에 있어 혁신적인 면이 거의 없습니다. 성 역할에서도 보수적이라고 욕만 먹었죠. 그렇지만 원작인 『햄릿』의 덕일까, 주인공은 특수한 형식의 고뇌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 자체에 대한 고뇌입니다.

 심바는 고민합니다. 자신이 있을 곳은 사바나인가 정글인가? 이는 전작의 주인공들 - 에리얼은 주저 없이 목소리와 다리를 바꾸지요 - 이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뮬란』에서도 약간이나마 드러납니다.

 『노틀담의 꼽추』는 현실주의적인 색채가 가장 강한 작품입니다. 위에서 동화의 속성이라고 지적했던 것들마저 여기서는 흐릿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동용으로 기획되었던 탓에, 원작에서의 등장 인물들의 사악함은 많은 부분 삭제되었습니다. 오직 프롤로에게만 사악함이 남아 있지요.


 그가, 바로 그 덕분에, 가장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반면 굳이 의인화되었던 사물 - 가고일 석상 - 들은 병풍으로서의 가치조차 지니지 못합니다.

 위에 지적한 넷은 분명 멋진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미녀와 야수』에서 보여 주었던 시도에는 모두 미치지 못합니다. 가장 이질적인 실험이었던 노틀담의 꼽추는 흥행에서마저 참패했어요.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는 다분히 개인적인 믿음에는 변함이 없지마는!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동화적 느낌의 배경이지만, 꽤 현실적인 인간상이 등장합니다. 그것과 발맞추어 세계 자체의 관념성 역시 다소 약화되어 있습니다. 페르구스(메리다의 아버지)는 마법을 믿지 않지요. 어차피 마법은 가끔씩이나 세계에 개입할 따름이니까요. 게다가 동물의 의인성 역시 약화되었습니다. 인격성을 지니는 동물 역시 마법에 의해 드물게 등장할 뿐이지요. 그리고 이전까지 본질을 부여한다고 사뭇 여겨졌던 형식(공주 되기)는 이제 시험대에 올라 있습니다.




 현대적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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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는 상징으로서의 체계를 이용합니다. 이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념적 연계만을 전제하며, 이 자체에는 현실적인 타당성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르는 몇 가지 결정적인 위험[각주:6]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는 인간의 노력이나 반성이 아니라, 외부세계의 변덕, 즉 단순한 행운으로 보상을 부여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는 동화를 단순한 소망 충족의 수단으로 격하시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유해한 짓거리인지는 앞에서 『트와일라잇』을 평하며 이야기한 바 있지요. 오늘날 일본의 '라노벨'이며 애니메이션에서도 심각하게 드러나는 문제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 - 그것도 예쁜 여자 - 가 주인공을 사랑하노라고 고백한다, 는 따위 이야기를 정말 저들은 잘도 지껄여댑니다!

 다른 위험 하나를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동화의 스토리를 전개하는 작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단 관념과 상징이 누구에게나 꼭 유효하리라는 확신이 없습니다(현실의 근거가 대개 없으므로). 설상가상으로, 동화가 기대하는 독자의 최소 지적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읽을 수 있어야 하지요. 이제 동화작가의 귀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이용하자는 솔깃한 유혹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런 익숙함으로는 동화의 기둥을 바로 세우지 못합니다. 설령 세운다 한들 그 위에 삶의 본질이라는 들보를 올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판에 박힌 내용이 나올 것이고, 그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위에서 줄곧 지적했던 인습성의 무비판적 수용을 낳을 것입니다.

 가령 여자가 살림을 하고 남자가 바깥일을 하는 가정상을 떠올려 봅시다. 이는 분명 전통적이지만, 더 이상 현대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소설은 이러한 사태들의 면면을 치밀하게 파악하여, 그 문제성을 자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대처할 겁니다. 하지만 동화도 그럴 수 있을까요?

 이것으로 현대 비평의 주요한 두 가지 요청이 따라나옵니다. 즉 주인공의 능동성, 그리고 고정된 성 역할의 부정입니다. 바로 저 두 방식으로 동화의 주된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이 가능합니다. 물론 여기서 여러분은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통찰에 이를 겁니다. 꼭 주인공의 능동성만이 작품의 반성적 성격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며, 또한 현실세계의 인습성은 단지 성 역할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것으로 『겨울왕국』의 대림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동화로서의 『겨울왕국』의 문제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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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ottecinema.co.kr/LHS/LHFS/Contents/MovieInfo/CinemaTodayView.aspx?strArticleInfoId=100181446

 가령 이 칼럼은 『겨울왕국』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적통이 아니라고 평가하며, 모범적인 작품이 아니라 컬트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칼럼의 올바른 점은 단지 그것뿐이지만요.

 과거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특징을 위에서 몇 꼽았습니다. 전형적인 주인공. 전형적인 악당. 선량하며 주인공에게 공감하는 대중. 보상과 운명의 내재적 성격. 또한 최근 작품들에서의 성 역할의 변화 시도.

귀여움!

 안나는 착하지요. 그리고 최근 트렌드에 걸맞게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성 역할 역시 『겨울왕국』에서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졌습니다. 오직 이것들만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서 특징적입니다. 이제 어떤 점이 다른지 차근차근 꼽아 봅시다.

 한스는 선량해 보입니다. 그는 왕자이며, 정확하게 동화 속 왕자의 스테레오타입을 연기합니다. 영화는 조연과 엑스트라들이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장면을 자주 노출시킵니다. 대표적으로 한스가 시민들에게 옷을 나누어 주는 씬.

 더 결정적인 부분은 한스가 타고 다니는 말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의 마지막에 안나를 친 말인데, 이 말 역시 사고는 쳤을지언정 선량해 보입니다. 녀석은 주인에게 분명한 호의를 표하지요. 물론 지적했듯 현실에서 동물이 보이는 호의는 사람의 인성과 무관하나, 이것은 동화이며, 우리는 백설공주를 따라 숲속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광경을 망각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인 엘사를 봅시다. 그는 여왕이며 백성들의 공경을 받지만, 그것은 맹목적인 것에 가깝습니다. 분수대 장면을 기점으로, 시민들의 태도는 정반대로 변합니다. 영화는 『미녀와 야수』처럼 사람들의 인습성을 치열하게 고발하지는 아니하나, 그 결점을 종합하는 대표자격인 인물 하나를 - 마치 개스톤처럼 - 준비해 놓긴 했습니다. 바로 위즐튼 공작.

 엘사는 친구가 많기는커녕 오히려 외롭습니다. 여왕은 전통적인 악역들의 것이었어야 할 고독에 빠져 사는데, 이는 동화의 주인공으로서는 아주 이질적인 것입니다. 이 고독의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이 세계와 대립하고, 그 탓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찾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이 상황 역시 동화적이지 아니한데, 본래 동화의 인물들이란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행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라이온 킹』의 심바 역시 유사한 고독을 겪습니다. 하지만 심바에게는 그래도 친구들이 있습니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 예언적인 힘이 작용하여 그의 자리를 찾아 주지요. 전통적인 동화의 악역들 역시 자신들의 길을 걸어갑니다. 확신에 차서, 아니, 어쩌면 확신이 너무 과도해서 문제겠지요.



 동화의 인물은 고독하다 한들 좀처럼 고뇌에 빠지지 않아요. 거의 유일한 예외가 『노틀담...』의 프롤로겠습니다. 이 점에서 엘사의 위치는 더욱 문제적입니다.

 피노키오의 밝게 빛나는 별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Let it go'의 초반 장면에서 엘사는 잠시 발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봅니다. 이는 길 잃음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새로운 지향을 찾아내지요.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나 신세계를 비추는 등불은 희미하지요.

아름다움!


 주인공이 고독하다는 것. 그리고 더 이상 세계가 그를 본질로 안내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디즈니적일 뿐만 아니라 비-동화적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극적이라고 불러야 하겠습니다. 『겨울왕국』은 이렇듯 정통적이지 않은데, 다른 많은 부분들 역시 그러합니다.

 아렌델은 근대 이후의 세계이며 사람들은 발전된 기술에 익숙합니다. 설정상 엘사의 취미는 기하학이지요. 왕은 의도적으로 궁성을 조용하고 소박하게 만들었지만, 나라는 외국과 법적인 관계를 맺으며 항구에는 범선이 드나듭니다. 오큰은 자본주의적 사회의 계산적인 인간입니다. 근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순진한 인간, 크리스토퍼는 스벤의 목소리를 빌려 노래합니다 - 사람은 후려치고 욕하고 사기쳐, 다들 그렇지, 너만 빼고.

 애니미즘의 문제를 볼까요. 말하는 동물들은 등장하지 않으며, 오직 한스의 말이나, 순록 스벤만이 인간적 감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안나의 말에게서는 이것이 보이지 않지요. 『겨울왕국』은 애초에 동물들이 많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엉뚱하게도 고도의 지능을 갖추고 있는 개체는 눈사람입니다. 근대의 의인화는 과학기술을 이용한 사람 만들기, 즉 로봇으로 귀결됩니다. 그것들은 대중에게 친숙함보다는 공포를 안겨 준다고 여겨지지요. 아니나다를까, 올라프를 보고 사람들은 소리지릅니다 - 으아아악! 살아있어!

 또한 『겨울왕국』의 진행은 아이들이나, 심지어 영화가 익숙하지 않은 다른 이들에게 다소 어려운 편이어요. 어차피 모든 독자들이 작품의 전부를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다음의 두 링크를 참고하세요.

 1. 그럼 악당은 어디에?

 2. 왕과 왕비는 언제 죽어?

 이 비-동화적 성향은 작품의 기둥인 상징에서도 드러납니다. 인물들은 대체로 상식적(물론 근대의 일반인 수준에서)이며, 따라서 마법을 보았을 때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올라프조차 사람이 돌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정도니까요(자기는 말하는 주제에!). 물론 여전히 상징은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법칙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극에서, 혹은 『제인 에어』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상징은 세계의 심리적인 부분에 가까워집니다.




 구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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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왕국』의 동화성은 흐릿해지고 있어요. 물론 "이것이 동화가 아니다" 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피터팬의 네버랜드가 완전한 동화적 세계라면, 『겨울왕국』은 동화의 국경선까지 먼 나들이를 온 셈입니다.

 『겨울왕국』은 과학적으로 예리한 부분을 전개에서 숨겨놓습니다(엘사가 프랙탈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사회의 복잡한 관습 역시 되도록이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작품이 동화라는 경계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려는 소극적인 노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적극적인 노력, 풀어진 장르의 요소들을 구심적으로 종합시키는 힘을 상상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동화적 방법론과 구분되는 무언가일 것입니다.


ㄱ.주인공 - 여왕

 동화의 세계가 현실적으로 변화하면서, 사건과 사물들은 제각기 떨어지게 됩니다. 이제 세계는 더 이상 주인공을 주제로 안내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었던 힘들이 동화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제 주인공은 무슨 수로 삶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누가 동화의 주제 - '진정한 사랑'으로 그를 인도한단 말인가요? 유감스럽지만, 이 일은 이제 주인공이 알아서 해야 합니다.

 작품의 주인공인 인간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무거워집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극의 방식입니다. 주인공은 자기가 무엇을 할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유명한 비극의 주인공들은 다들 이런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왕이나 왕자인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요. 왕들만이 전근대의 사회에서 이런 자유와 책임을 온전히 소유했으니까요. 평민들은 먹고살기 바빠서, 또는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느라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엘사는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계승합니다. 극의 주인공이 외로움 속에서 고뇌해 왔듯, 엘사도 홀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지요. 물론 이런 책임이니 실존적 고뇌니 하는 것은 문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진짜 현실의 왕은 삶에 대한 고민은 제쳐두고 권력에 더 집착합니다.


 ㄴ.주인공 - 공주

 얼음의 궁성에서 아렌델로 눈을 돌릴까요. 안나는 극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현실의 삶을 상징합니다. 안나는 외롭지도 않고 고뇌에 빠져 있지도 않지요. 동생은 마찬가지로 주인공이지만, 언니와 별개의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안나는 『눈의 여왕』의 주인공, 겔다를 자연히 떠올리게 합니다. 겔다는 무모할 정도의 확신과 그에 따른 행동력의 소유자입니다. 이 특질은 동화에서 그 자신을 강력하게 이끕니다. 동화 세계의 구성원들은 겔다의 순수한 지향에 모두 감탄하며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왕자, 공주, 순록, 까마귀, 장미와 도둑의 딸, 흐르는 강물까지 겔다를 열심히 돕는 이유입니다.

 이 확신과 행동력을 안나는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물과 동물의 마음은 사라져 버렸지요. 오직 동화적인 순수함을 간직한 이만이 안나에게 감동하는데, 바로 크리스토프입니다. 얼음성을 처음 보는 장면에서, 그리고 트롤들의 노래에서 크리스토프의 이 특징은 잘 드러납니다.

 따라서 그는 역시 『눈의 여왕』의 순록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올라프가 그를 스벤이라고 부르는 것도 꼭 우연만은 아닌 셈입니다. 하지만 크리스토프의 도움이란 일방적인 조력이 아닌, 동반자 관계에 가깝습니다. 또한 『겨울왕국』의 비-의인화는 안나에 대한 경의를 관객의 몫으로 돌려놓지요.




 ㄷ.뮤지컬

 얼음의 여왕과 현실의 공주, 이 두 주인공의 뜻과 행동이 작품의 구심력으로 작용합니다. 디즈니의 르네상스 양식은 여기에 강력한 무기를 선사했는데, 바로 뮤지컬의 형식입니다. 인물들은 노래로 자신을 고양시킵니다. 이들은 전통적 동화처럼 상징의 계단을 한 발짝씩 내딛는 대신, 시적 형식으로 단번에 도약해 버리지요. 『알라딘』의 주제곡, 「A whole new world」를 봅시다.



 시작에서 쟈스민은 알라딘을 미심쩍어하지만, 마지막에서는 둘의 완전한 유대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설의 방식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어쩌면 성취하려고 해서는 아니되는 술수겠습니다.

 노래를 부여받지 못한 자는 슬플 수밖에 없으니, 이렇게 자신을 고양시킬 기회를 잃게 되니까 말이지요. 이런 슬픔을 우리는 크리스토프에게서 봅니다참조. 이와는 별개로 한스의 후반 장면에서는 짤막하게나마 곡이 있었으면 좋았을 겁니다(아니면 그가 자신을 아예 해명하지 않든가!).


 ㄹ.컴퓨터 그래픽스

 『겨울왕국』은, 현대 기술의 발전에 따라, 다른 지원군을 준비해 놓았어요. 이를테면 3D 애니메이션 기술이라고 뭉뚱그려 지칭할 수 있겠지요(고백하자면 나는 이 기술에 대해 아마추어틱하게나마 아는 게 없습니다). '3D 지원군'이라고 말하면 『넛잡』의 싸이를 연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의 주제가 되는 작품은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겨울왕국』의 기술은 뜻의 표현에 직접적으로 공헌하기 때문입니다.

 안나의 다양한 표정을 보세요. 그리고 안나가 그림들 사이에서 뛰어다니는 장면을 눈여겨보세요. 2D 만화로 그렸다면 실감이라곤 없었을 것이고, 실사 배우들이라면 이내 육체적 한계에 부딪혔을 겁니다. 제작진은 현실감을 최대한 보유하면서 인물의 행동을 과장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풍부한 표정과 행동이 안나의 뜻을 나타내고 강화합니다.



 엘사는 행동거지가 매우 얌전하지만, 여왕의 의향은 때로 기적적으로 현실화됩니다. 바로 마법입니다. 이에 있어서도 현대의 기술적 발전이 결정적이지요. 상대적으로 소소한 부분이지만 엘사의 변신과 그 포인트라고 자주 이야기되어지는 '머리 푸는 순간'에서도 기술의 역할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안데르센의 동화와는 차별적인 부분입니다. 그의 동화에서 수학 공식이며 기하학적 디자인은 일단 부정적인 느낌을 주며, '영원', 즉 본질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에 해당하니까요. 이것은 작가의 개인적 편견일 것인데, 모든 위대한 문학이 그러하듯 그의 작품은 그런 것들을 넘어서 있습니다.




 동화의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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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위에서 중요한 특수성을 발견했습니다. 『겨울왕국』은 주인공에게 집중하며, 그들의 뜻을 강화시키는 두 장치 - 노래와 과학기술 - 을 활용합니다. 이제 이 작품이 현대적 요청에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보겠습니다. 그 요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동화의 주인공은 단지 우연히 본질에 가 닿아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주인공은 인습에서 자유로와야 한다는 것.

 작품의 주제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영화는 이것에서 다시 Act of True Love(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동, 또는 진정한 사랑으로 이끄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그것에의 노정이 우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굳이 시시콜콜히 설명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예의상, 여성상에 관한 주요한 비판을 짚고 넘어가도록 합니다.

 분명 행동력은 안나의 탁월한 자질입니다. 언니에겐 이런 재능이 다소 부족하지요. 하지만, '반성적이라는 점이 진정 여왕의 위대함이다'.

 뜻과 행동력으로 본질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주인공이 마주하는 것이 본질인지, 아니면 본질과 단지 유사하기만 한, 반짝이는 어떤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어요. 단지 반성적 태도만이 구분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왕님 말씀하시길 -

유명한 짤.


 단 한 마디로 한때의 빛나는 로맨스는 근거 없는 습관으로 드러납니다. 딸은 한때 아버지와 강한 정서적 유대관계에 있었음이 명백하지만, 결국 엘사는 '아버지의 말(conceal, don't feel, don't let them know)' 역시 틀렸음을 인정합니다.

 이런 반성적 행위는 오히려 저 '능동적인 여성'들보다 보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익숙함, 즉 인습으로 쉽게 도피하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이 반성이란 실로 귀중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틀렸어, 라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오늘 과연 몇이나 될까요?

 이제 고독이 정녕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 고독이란, 마치 카프카가 그리하였던 것처럼,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들이 실상 무의미한 것으로, 그것들이 한갓 인습에 지나지 않았음이 폭로되는 그 시점에서 비로소 구체화되니까요. 다행히도 이 고독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으니까!

 자매는 한때 분열하고 대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둘의 화해와 결합을 목격하게 됩니다. 화합이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이나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둘 다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엘사는 안나의 결혼을 막았고, 안나는 엘사를 얼음성에서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매의 성격이 다를지언정, 서로를 배척할 이유는 없었지요. 엘사는 냉정하지만 이끄는 힘이 필요하고, 안나는 열정적이지만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각각의 개성은 서로에게 가치있는 것입니다. 다시 패러디하자면, '엘사 없는 안나는 맹목적이며 안나 없는 엘사는 공허하다'.

 이렇듯 『겨울왕국』에서는 개인의 뜻이 매몰되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적어도 주인공 둘은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지요. 이는 아마 가장 디즈니답지 않은 점입니다. 이 '살아 있음'을 바흐친은 '대화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안나의 곡들, '태어나서 처음으로'나 '사랑은 열린 문'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 줍니다. 대개의 디즈니 곡들은 단일한 뜻을 가졌지만요.

레미제라블의 「One Day More」. 인물들이 저마다 노래하여 전체 곡을 이룹니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쨌거나 동화의 뜻은 하나로 모여야만 하고,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라는 단일한 주제를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겨울왕국』은 변증법적이기도 합니다. 헤겔주의자들이 좋아할 부분이로군요.

 반성, 대화적 성격, 변증법. 동화에 대한 현대적 요청은 『겨울왕국』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집니다. 그것도 이전까지의 동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수단으로요. 형식적으로도 또한 『겨울왕국』은 삶의 본질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과정이 객관적으로 성공인가는 관객들에게 물어야 할 것인데, 만약 그렇다는 답을 듣는다면, 『겨울왕국』은 마침내 동화의 목적에 도달한 것입니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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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겨울왕국』의 현재적 문제와 의의는 대부분 규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 주제로의 도달이 대개의 동화와는 다름이 분명한데, 여전히 이것을 동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런 머뭇거림입니다.

 내 의견은 아무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얼마나 『겨울왕국』에 동감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을 터입니다. 동화는 완결을 전제하는 형식이니만큼, 목격한 고결함과 아름다움을 확신할수록, 즉 그것이 인간의 삶의 본질이라고 깊게 믿어 갈수록, 세상의 화려함은 한낱 순간적인 것으로, 근엄한 주장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폭로되고, 그것에 실망하여 다시 믿음으로 회귀하려 할 때, 그대가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면, 그리고 그대가 어른이며, 삶의 서사적 의미를 틀림없이 이해하고 있다면 반드시, 동화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니까.

 반면 완결된 극은 동화적인 그리움을 낳지는 아니하지요. 루카치는 말합니다.

 "비극의 이 같은 문제적 토대는 철학에서야 비로소 분명해지고 문제가 된다.  ...그때에야 비극이 제시하는 존재에 대한 대답은 더 이상 자연발생적인 자명성이 아니라 기적으로서, 깊디깊은 곳 위를 건너는, 단단히 휜 가냘픈 무지개 다리로서 나타난다."





  1. 덧붙이자면, 이 글은 디시인사이드 겨울왕국 갤러리에 연재했던 단편들의 모음입니다. [본문으로]
  2. 그렇다면, 조갑제 선생의 주장을 일관한다면, 우리는 독일어와 라틴어와 그리고 무엇보다 고전 그리스어를 배워야 할 겁니다. 이런 이상적인 커리큘럼에서 무사히 졸업할 수 있는 학생은 많지 않겠지만요. [본문으로]
  3. 동생을 언니보다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의 소설에서는 이런 관념적 요소들이 세계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지요. [본문으로]
  4. 사람과 사자가 길을 가고 있었다. 둘은 사람이 사자를 밟고 선 동상을 목격했다. 사람이 으스대자, 사자가 말했다 - 만약 동상을 만든 이가 사자였다면 어떨까? [본문으로]
  5. http://ko.wikipedia.org/wiki/%EC%8A%A4%ED%84%B0%EC%A0%84%EC%9D%98_%EB%B2%95%EC%B9%99 [본문으로]
  6. 이 위험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따라서 나는 환상문학에 경계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데, 이 위험들이란 사실주의가 실패했을 경우 남기는 진부한 모사들보다 훨씬 더 불유쾌한 것들입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