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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대한 이야기

모에, 아이돌, 건축학개론 - 소나기 속 소년으로서의 현대 한국 남성


(2013창비신인문학상 평론부문에 투고했던 글임. 문장 일부 교정)

자잘한 오류 수정. 9월 1일.



 올봄, 여러 인터넷 게시판에는 황순원 작가의 젊은 시절 사진이 떠돌았다. 모두 그에 감탄했다. 사진 속 청년의 미모가 너무나 뛰어났으니까! 어느 남초 사이트에서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일기를 썼는데 소설이래 힝 ㅠ”

 사람들은 이에 다투어 공감을 표했다. 우리 모두 황순원이 쓴 「소나기」란 소설을 안다. 만약 주인공의 얼굴이 정말 작가와 같다면, 소년이 소녀의 관심을 끈 것이, 더 나아가 소녀의 사랑을 이끌어낸 것이 전혀 의아하지 않다. 소설 세계의 사건들은 그것으로 서로 명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그렇게 상상하도록 기대되는 주체도 아니었다. 우리가 상상하던 것은 전혀 달랐다. 따라서 작품이 작가의 개인적 차원의 현실이라면, 즉 우리가 그것을 ‘일기’로 인식하고자 한다면, 그 일기는 독자들의 현실로 기능한다고 할 수 없다. 과연 이 소설보다 한국인들이 많이 읽은 작품이 있을까. 따라서 이는 보편적인 증상이리라.

 이 짧은 글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한다.

 1. 「소나기」의 수용에서 나타나는 반응과 유사한 사태들을 지적하고,
 2. 그 사태들의 사회적, 심리적 원인을 분석하며,
 3. 그것들의 일반성을 규명한다.



 모에

 2천 년대부터 일본에서 유행하는 용어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모에(일본어: 萌え→싹이 틈)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 등의 여성 캐릭터에 대한 사랑이나 호감을 말하는 일본어 표현이다.[각주:1]

 ‘오타쿠’라 불리는 일본 애니메이션 애호가들, 그 중에서도 남성들이 쓰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비교적 널리 소개되었으며, 실제로 쓰는 사람도, 물론 오타쿠인 한국인 한정으로 존재한다. 종이사전은 아니지만 위키백과에 등장할 위상 정도는 된다. 그런데 어째서 오타쿠들에게는 이런 특수한 용어가 필요한 걸까? 사랑이나 호감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이 표현은 어쨌든 은어이다. 그러나 단순한 은어, 즉 일상어와 대체가능한 속어와는 달리, ‘모에’는 상황적 특수성을 전제한다. 하나는 유사연애이고, 다른 하나는 수동성이다.

 유사연애의 문제를 보자. 만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연애할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들과 사랑에 빠져 무엇하겠는가? 가족을 이루지도 못하고, 데이트를 할 수도 없고, 포옹이나 키스, 하다못해 그럴듯한 대화조차 불가능하다. 이런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려는 행동주의자들 - 그들은 원시인의 사상적 후예라 하겠다 - 은 방송의 주목을 받는다[각주:2].

 어째서 이들은 현실의 여인들을 내버려두고, 모니터 속 가상의 세계로 떠났을까? 이 오타쿠들의 면면을 관찰한다면, 의외로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이 자들은 대개 10대와 20대의 남성들이다. 대체로 소극적인 성격이며, 사적인 취미에 헌신한다. 동아시아인으로서, 이들은 성적 욕구를 성취할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이 정도 전투적인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이 국가들은 금지와 억압으로 청소년의 성적 욕구라는 문제를 해결했다. 현대에 들어와 상황은 좀 나아져, 사회는 청소년의 성욕을, 적어도 유사-성애적 행동을 노골적으로 억제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성적 욕구를 정상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개인에게 부여하고 있지도 않다. 한국은 이 중에서도 유별나게 악랄한 편이며, 이는 서구의 산업국가와 분명한 구별점이 된다.

 사춘기를 지난 20대 청년들에게도 사회는 거의 동일한 운명을 지운다. 청년의 노동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 이들 다수가 ‘잉여’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동아시아는 남초 현상이 극심하다. 현실의 이성은 멀리 있고 그들과의 연애는 처절한 노력을 기울여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 상황에서 애니메이션 산업이 제시하는 해법은 간명하다. 망상이다.

 망상은 원래 개인적이다. 돈키호테 이전에는 누구도 그와 같은 기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망상에는 공통성이 요구된다. 그래야 상업적으로 그 망상이 이용될 것이다. 애니메이션 산업은 공통의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상을 창조한다. 이 대상이 가상의 연애감정을 이끌어냈을 때, 오타쿠들은 그것을 ‘모에’라고 칭한다.

 현대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성적인 환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캐릭터에 집중한다. 자본에게 확실한 수익을 보장하기에, 대상들은 수용자들을 애써 유혹하고 있다. 이는 피해자가 없는 매춘업이라고도 할 만하다.



 아이돌

 이같은 현상이 어떤 특정한 소집단의 은어가 아닌, 대중적인 취향으로 성립하는 경우를 들어 보자. 바로 아이돌이다.

 2천년대 후반부터 여성 아이돌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국민 여동생’은 아이돌 가수이다. 누구나 그들의 이름을 알고, 그들의 대표곡을 인지한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전 인민의 관심사다. 가령 모 그룹에서 벌어진 왕따 사건이라든가, 최근 크게 논란이 된 ‘민주화시키지 않아요’ 발언 등.

 그러나 아이돌의 핵심 지지층을 꼽자면, 당연히 10대에서 20대, 좀 더 나아가 3, 40대까지의 남성층이다. 폄하하자면, 이들의 환성이 전 국민에게 들리고 있을 따름이다. 이제 그 이유를 캐물을 때다.

 어쩌면 진화심리학 - 물론 진화심리학은 학문이라고 여기기엔 그저 개연성 있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 에 따른 접근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신라시대의 갑순이가 갑돌이를 보고 해맑은 미소를 내보였다 치자. 그렇다면 갑돌이는 사랑을 확신해도 좋다. 이것은 현실의 연애이다. 오늘날의 TV에서도 아이돌은 시청자를 향해 애교 섞인 웃음을 짓는다. 이것은 현실의 연애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주관은 이 둘을 명확하게 분간할 능력이 없다.

 아이돌 팬들이란, 냉소적으로 말하면, 미소라는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고기떼들이다. 아이돌은 현실의 실체이긴 하지만, 대중으로서의 개인이 그녀와 정분을 나누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유사연애로 분류되며, 범람하는 상품들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를 유혹하고자 하는 접근이다. 그림으로 그려진 만화 캐릭터와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아이돌과의 사랑 역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10대에서 20대까지의 애니메이션 애호 남성이 어째서 ‘모에’하는지 지적했다. 애들은 현실의 연애가 쉽지 않으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왜 아저씨들까지 아이돌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 '삼촌팬‘들에게는 연애할 기회가 주어져 있고, 일부는 이미 결혼까지 한 상태인데도.

 임자 있는 자들이 저지르는 유사한 사례가 있다. 주부들은 일명 ‘막장 드라마’의 가장 큰 우군이다. 한국의 중년 여성들은 TV드라마에서 제공하는 사랑과 전쟁으로 그들의 욕망을 대리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게는 분명 배우자가 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주부들에게도 로맨스가 필요하다. 이것은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대단한 비도덕성을 상징하는 현상으로도 보인다. 사회는, 공식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간통은 아직도 처벌 대상이다.

 하지만 늘 만족스런 배우자란 없다. 그러기나 하면 다행인 것이, 한국 남성들은 늘 일로 바빠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 결핍은 필연적이다. 욕망은 아킬레우스처럼 삶의 최전선에서 질주하기 마련이니까. 인간이 사회적이라면, 그는 늘 욕망에 따라 현실을 개조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적절한 시점에서 후퇴하여 진지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 연애는 중요하지만 모든 것은 아니다. 연애에만 매진한다면, 다른 중요한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적당한 선에서 욕망을 포기하고,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보상으로 잠시 만족을 얻으면 된다. 이 망상적 만족은 오히려 대단히 관념적일 때에 사회적으로 유용하다. 우리 주부들이 정말로 바람을 피우면, 가정 - 정확하게는 일부일처제로서의 가정 - 이 무너질 것이다.

 아이돌의 문제는 이 ‘막장 드라마’의 문제와 대단히 유사하다. 남자들은 관념적으로 외도중이다. 이것을 마냥 사악하다고 여기기에는, 보아 왔듯, 여성동지들도 유사한 증상을 보인다. 어쩌면 인간에게 ‘순수한 사랑’이나 ‘진정성’ 따위는 그저 허황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관념은 현실의 문법을 뛰어넘는 게 가능하다. 아이돌 가수는 자신의 이미지, 즉 대중에게 노출되는 특수한 사정들만 완벽하게 관리하면 된다. 그들의 드러나지 않은 진실 따위는 장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차피 수용자들의 망상이 채워 줄 테니까. 만약 이 망상과 반대되는 행동이 나타날 경우, 아이돌의 인기는 추락한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과 동일하게, 현대의 아이돌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이다. ‘원더걸스’가 혜성처럼 시장에 등장하여 부와 명성을 거머쥔 이후, 돈이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체감한 후발주자들이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경쟁은 치열하다. 정윤희 씨 정도만 상상하면 되었던 과거와는 시장의 구성 자체가 다르다. 그렇기에 아이돌은 소비자를 적극적으로 유혹해야 한다. 그들은 점차 자극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으로 ‘모에’와 ‘삼촌팬’과 ‘막장 드라마’의 공통성이 드러났다. 그러나 앞의 둘은 ‘막드’와 구분할 만한 중요한 차이가 있다. 드라마는 언제나 수용자의 현실적 상황에서 일어날 만한 극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뭔고 하니, 드라마의 주인공 역시 주부들이다. 남편들이 악역을 맡고, 따라서 주부들은 죄책감 없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이처럼 드라마 수용자의 현실적 처지는 드라마의 수용자가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 그리고 그가 처한 상황과 거의 유사하다. 하지만 오타쿠와 삼촌팬들은 사뭇 다르다.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 성인 수용자는 예외 없이 청소년기로 퇴행한다. 아이돌을 사모하는 삼촌팬들이 열광하는 대상 역시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애들이다.

 상업자본은 이런 퇴행을 정확히 이해한다. ‘소녀시대’는 ‘오빠’를 외치며, 아저씨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 이 망상의 연애질에 동참한다. 왜 그들은 적어도 비슷한 나이 대 이성과의 불장난을 상상하지 않는 것일까.



 

 알퐁스 도데의 「별」을 보자. 양치기 목동은 스무 살로, 주인집 아가씨를 사모한다. 어느 날 아가씨는 양떼를 몰고 - 담당하는 하인이 쉬기 때문이다 - 목동의 거처에 찾아온다. 잠시 체재하는 사이에, 아가씨는 목동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목동이 그 인상의 잔상을 애써 부여잡고 있을 즈음, 그의 여신이 다시 그에게 돌아온다. 그녀는 흠뻑 젖어 있다. 강에 빠질 뻔했던 것이다. 이제 날이 늦어 아가씨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

 소설은 목동의 욕망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달리 말하자면, “소년에게 사랑의 앎이란 곧 욕망과의 싸움이다.[각주:3]” 하지만 목동의 행동은 충동을 정확히 따르지 않는다. 그는 별을 바라보며 그의 소망이 순수함을 확인할 뿐이다.

 단지 이것뿐이다. 이것이 사회적 형식에서 목동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의 사랑이다. 소년은 자신을 옭아매는 사회경제적 계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산속의 오두막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게는 다른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이것에서 일탈하려는 노력을 사회는 범죄로 규정할 것이고, 만약, 목동이 아가씨에게 고백이라도 한다면, 사회는 그것을 그저 조롱거리로 삼을 것이다. 사랑의 이념이란 별처럼 멀리 있으며 곧 무의미해 보인다.

 그러나 목동의 이 태도를 단순한 도피로 부를 수만은 없다. 그것이 그저 개인의 증상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굳이 「별」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목동의 사상이 (더 나아가 이 소설이) 현대적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 관념이 어떤 공통의 소망으로서 유효하다. 따라서 둘째, 의례로서도 유효하다. 또한 셋째, 이 관념은 현실의 연애에서까지 요청되는 것이다.

 앞에서 막장 드라마와 아이돌의 문제를 논했다. 현실의 연애가 만족스럽다면, 사람들은 드라마 같은 것을 시청하지 않을뿐더러 아이돌의 허벅지에 눈을 돌리지도 않았으리라. 그 불가능성, 즉 이념으로서의 사랑에 가 닿을 수 없는 현실적인 상황은 단지 알프스 목동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체감하고 있다.


 고흐가 그린 <아를의 별 빛나는 밤>을 보자. 별은 하늘에서 휘황하게 빛난다. 대안의 건물들이 등을 밝히었고, 그 불빛이 항만의 검은 물에 비쳐 일렁인다. 우리의 편에는 초라한, 그리고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부부 한 쌍만이 있다. 둘은 캔버스의 크기에 비해 너무 조그마하게 그려졌다. 그들 사이 감정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오직 서로에게 끼운 팔짱뿐이다.

 간편하게, 또 거칠게, 별은 이념으로서의 가치이고 반대편의 집들은 세속적인 가치라고 가정하자. 빛은 관찰자, 즉 작가와 그림을 바라볼 관객들의 강렬한 소망을 반영한다. 하지만 손등을 어둠이 덮고,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사랑이란 함께 거니는 중년 부부일 따름이다. 작가의 주변은 세속적 행복은 물론 이념과도 전혀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작가는 현실에서의 그 가치와 (그에 이를) 기술적 해법을 발견해내야 한다.

 고흐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아니, 자연물로서의 별들도 충분히 그런 역할을 수행한다. 감동이 공통적인 것이고, 그 공통감이 공동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면, 이제 원시적인 종교의 단계로 발전했다고 보아도 좋다. 소설에서 목동이 아가씨에게 건네는, 별들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자. 별의 이야기는 명백히 목동 스스로의 창작품이 아니다. 오랜 동안 그곳의 생활관계에 묶였던 사람들이 별을 보며 지어낸 이야기이리라. 이야기 속에서, 별들은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로 행동한다.

“어머나! 별들도 결혼을 하니?”
“그럼요, 아가씨.”


 이는 인간의 오랜 전통에 매우 부합하는 행위이다. 원시적 인간은 객관적 사물에 자신의 주관적 심정을 투영했으니까.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는 태양과 태양의 신격, 즉 헬리오스가 언어적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이제 이 소망이 현실의 연애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한정지어 보자. 우리는 연인과 설령 이상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더라도, 모든 시간 속에서 그와 함께 있을 수는 없다. 또 사랑이라는 심정은 어쨌거나 주관적인 것이며, 객관적인 사랑이란 확신의 범위를 늘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간기, 사랑을 다소나마 확인하고 난 사이의 시간에도 사랑의 존재를 확신할 어떤 관념적 매개체가 필요하다. 또한 사랑은 언제나 영원하리라고 기대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현실의 사랑에서도 이념이 필요하다.

 별과, 모닥불과, 목동과 또 그가 사모하는 아가씨에 얽힌 이야기의 원류를 거슬러 오르면, 『돈키호테』의 한 단락에서 끝을 맺는다. 우리의 방랑 기사는 각지를 유랑하다, 부잣집 아가씨 마르셀라를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명을 달리해 버린 목동 그리소스또모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목동들은 친구의 장례를 치르며, 매정한 아가씨를 원망한다. 그러나 장례식장에 나타난 마르셀라는 말하였으니, 자신은 타인의 사랑에 보답할 의무가 없으며, 목동을 죽인 것은 그의 욕정과 성급함이란다. 바로 이 에피소드 직전에, 돈키호테가 그 유명한 ‘황금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건축학개론

 2012년의 문화계에서 가장 호소력 있던 물건은 <건축학개론>이다. 패션잡지에서 흔히 쓰는 말마따나 ‘잇 아이템’이라고나 할까. 영화는 적절한 흥행을 기록했으며, 여주인공의 대학생 시절을 연기했던 여아이돌은 일 년이 넘은 지금까지 상업적 성공을 이어간다. 만인의 연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녀는 다수의 대한민국 성인 남성들이 사랑하는 대상이다.

 영화를 간단히 해설하면 이렇다. 대학 신입생인 남성 A는 학교에 다니는 여성 B와 만난다. B는 A에게 관심을 보이나, 그것이 애정인지 A는 확신하지 못한다. A는 B가 다른 남자와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B와 결별한다. 15년이 지나 B가 A에게 찾아온다. 역시 애매모호한 관계가 계속되는 와중에, B는 A에게 자신이 대학생 때 A를 사랑했노라고 이야기한다. 15년 전과 후의 남녀 주인공은 각각 다른 네 명의 배우가 연기했다.

 이 영화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논했던 심리적 현상들이 모조리 드러난다. 주인공에게 남성 수용자가 감정을 이입하는 유사연애. 주인공에게 여자가 ‘접근’함으로써 실현되는 수동성. 그리고 무엇보다 청소년기로의 퇴행이다.

 시골 지주였던 돈키호테는 돌연 어떤 정의, 곧 이념으로서의 사랑이 현실에 부재한다고 느낀다. 물론 반드시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다. 우리의 기사 양반은 복잡한 인물이다 - 그는 혁명가인 동시에 수도사이며, 행동가인 동시에 몽상가다. 기사는 모닥불 앞에 앉아 목동들에게, 먼 옛날에는 이념으로서의 사랑이 존재했으며, 자신의 여행은 그것을 현실에 재림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당연히 목동들은 이런 변설에 관심이 없다.

 현실에 부재하는 것이 언젠가 존재하였으며 또 존재하리라고 추측하는 경향은 돈키호테만의 증상이 아니다. 이런 경향은 전지구적이다. 예를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 헤시오도스가 말하는 황금시대. 구약성서의 에덴 동산. 플라톤의 이상 국가. 묵시록의 종말론. 왕망의 반동적 혁명. 근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원시 공산 사회와 혁명 이후의 공산 사회.

 한국의 특정 세대 남성들이 회상하는 청년기 역시 이에 포함된다. <건축학개론>이 기대하는 남성 관객들은 정확히 알프스 목동의 나이인 20살로 기꺼이 돌아간다. 그들은 그 안에서 체감한 사랑으로 대단한 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 이 경향 덕택에 여우는 CF가 끊일 날이 없으며, 아이돌은 흥성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모에’하는 것도 살펴본 대로, 단지 대중성이 결여되었을 따름이지, 심리적으로는 동일하다.

 이 현상을 프로이트적으로 설명한다면, 고착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애정을 부르는 심적 동력,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에서 리비도라고 부르는 힘은 딱 20세 정도 나이의 남성 자신을 상상하는 것으로만, 어쩌면 자신이 아직 그 나이라고 잠시 착각함으로써만 강하게 분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직 그 나이의 경험만이 남성이 원하는 이념으로서의 사랑을 소환할 수 있다.

 어째서 청년이나 소년의 사랑만이 본질적으로 순수할 수 있을까 - 아니, 어째서 남성들은 그렇게 인식하는 것일까?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하나. ‘환경의 탓’이라는 방어기제이다. 가로되, 개인은 순수하였으나 외부세계의 영향에 의해 타락하였다. 맹자의 성선설이나, 몸의 단편 「레드」에서 이런 경향을 추측할 수 있다.

 둘. ‘당시에는 능력 부족이었다’는 자각이다. 이 자체는 현실성이 있는 관념이다. 첫사랑이 실패하는 이유는 대개 연애 기술의 부족이다. 실패를 연애의 외적 요소, 이를테면 차나 금전 같은 것으로 돌린다고 하더라도, 남성은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감을 갖는다. 남자의 경제적 권력은 나이가 들수록 가파르게 상승하니까.

 셋. 그것이 실패한 사랑이어서이다. 청소년의 사랑은 말했듯 대체로 어설픈 이유로 말미암아 실패한다. 사실 실패하지 않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어차피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인격이 가지는 모든 국면들을 완전히 그릴 능력도 없었으니까. 따라서 첫사랑이란 존재는 거대한 미지의 부분들로 남는다. 마치 사생활을 숨기는 아이돌 가수처럼 말이다. 이 공백은 환상으로 채워진다. 과거의 이름으로 시연되는 현실의 환상이다.

 이 현상에 생물학적인 근거를 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적 고찰은 나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다른 이들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어쨌든 많은 남성들은 과거의 자신을 그런 식으로 관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열심히 첫사랑을 운운하지만,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따라서 이는 포장된 자기애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자기애적인 관념 자체가 사악한 것은 아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끼를 손에 쥐기 전까지 품었던 흐릿한 공상처럼 말이다.

 이 단락의 주제, <건축학개론>에서 위와 같은 증상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관찰하자.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한때 매우 순수하고 또 ‘찌질’했으나, 세태에 닳고 닳으면서, 세속적이며 요령 좋게 변신하였다. 물론 세태에 닳았다는 부분은 직접적으로 서술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 역시 그러하였다고 믿는 관객들은 모두 그 간격 안을 마찬가지로 상상할 것이다. 어쨌든 이 남자는 어떤 사소한 오해와 젊은이 특유의 결함 때문에 사랑에 실패했다. 그것만 아니면 사랑은 성공 가능하였는데 말이다.

 어째서 감히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영화는 마침내 폭로한다. 여주인공도 사실 남주인공을 좋아했단다. 영화는 대체로 세련된 표현 기술을 선보이지만, 이 부분에서 삐져나오는 서투른 욕망은 너무 노골적이다. 그 욕망은 둘째치고라도, 지적했듯, 설령 서로 좋아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다. 남주인공은 아직 자기애를 극복하지 못했으니까.

 약간의 문제는 있으되 기술적으로 높은 수준이고, 소품들도 관객들에게 고고학적인 만족감을 준다면, 이런 많은 장점들이 있다면, 어떤 사소해 보이는 결함은 덮어두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풍문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비판에 공사를 구분하고, 따라서 나중에 원한을 남기지 않는단다. 반면 한국인들은 평소 공사를 구분하지 않기에, 비판을 하지 않거나 나중에 사적인 해결 방식을 마련한단다. 나는 이 영화가 그럭저럭 양호한 수준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내게는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도 있고, 좋아하는 ‘모에’류 애니메이션도 있다. 작품의 결함에는 관대한 편이 좋으며, 특히 그것이 어떤 단순한 도덕적인 결함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비판이 정지되었을 때, 그 틈에서 발생하는 수용자의 심리적 창조물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현대의 대중은 평론 따위를 읽지 않는 것 같지만. 현대 사회에서 비평이 갖는 이 한계 덕에, 플라톤의 고전적 예술론은 늘 솔깃한 매력을 지닌다.

 앞서 ‘막장 드라마’를 논하며 잠깐 지적한 부분이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편들은 필요 이상으로 악하다는 것이다. 이유는 말했던 것처럼 아줌마들의 죄책감을 완화시키기 위함이다. 건축학개론에서도 비슷한 발견을 할 수 있다. 현실의 남주인공은 속물적이지만, 성실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특히 가정의 문법에 충실하다. 그러나 현실의 여주인공은 자기중심적인 이혼녀다. 이것은 우연인가?

 물론 이 영화의 여자들은, 비록 일면은 사악할지라도, 전체적으로 사악하게 그려지지는 아니한다. 이것이 영화의 기교이다. 그러나 이 차별은 남성이 갖는 어떤 공통적인 소망과 맞아떨어진다. 이런 무의식이 결집하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얻은 현상이, 요 몇 달 새 극렬한 명성을 떨치는 “일베”의 ‘김치녀’ 주장이리라. 그런데 실상을 관찰하면, 타인을 배려하거나 가정에 충실한 쪽은 오히려 여성들이다. 수용자들의 강력한 공통감을 요청하면서, 대상들의 개인차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겠다.

 그렇다면, 한때 인터넷 세계에서 오갔던 ‘현재’역 여배우의 연기에 관한 논란도 다르게 보아야 한다. 영화의 환상은 인물들을 왜곡시킨다. 따라서 남녀 주인공들의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심한 성격적 괴리가 있었다. 그 차이에 오히려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인간의 단일한 인격을 가정했을 때, 그것은 수습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다. 이는 플롯의 탓이다.

 수용자들 역시 이 문제를 나름대로 인식했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 양호한 플롯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다. 또한 그럭저럭 호연을 펼친 남자 연기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도 상상하지 못했다. 남은 것은 여배우 둘인데, 사실 또 굳이 연기를 따지자면, ‘현재’의 여주인공 쪽이 더 무난했다. 게다가 플롯의 문제는 그녀와 전혀 무관하다. 하지만 그녀는 뜬금없는 불평을 듣게 되었다. 이것으로 답은 간단해진다. 관객들은 이상화된 자신과, 그와 동일시할 수 있는 남자배우들, 역시 이상화시킬 수 있는 ‘과거’의 여주인공, 그리고 그 이상화를 가능하게 했던 플롯을 비판하지 않고, 엉뚱한 희생양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아도니스

 이제 국민 소설이라 불리기에 그 명성에 손색이 없는 - 이만큼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익숙한 소설은 없을 것이다 - 「소나기」의 문제에 들어왔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던 대로, 「소나기」 속 소년이 ‘원빈이나 장동건’급의 미남이라면 - 사진기록은 작가가 정말 그러함을 증명해 준다 - 소설은 매우 간단한 내적 구조를 지닌다. 윤 초시 댁 증손녀는 미소년과의 로맨스를 원했던 것이다. 들에서 발견한 미모의 소년. 그렇다면 소년의 신화적 원형은 아도니스(Adonis)다. 그는 자연의 생명력을, 또한 그것과 관념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남성의 성적 능력을 상징하는 존재다. 아시다시피 아도니스는 멧돼지에 받혀 사망하고, 그의 피에서 아네모네가 피어난다.

 나는 잠시 21세기를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20세기였으면, 이 글은 아마 ‘섹시한 미소년과의 로맨스’라는 대목에서 여러 보수적인 분들의 고함에 묻혀 버렸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20세기는 유교와 개신기독교의 시대였다. 이 두 ‘아버지의 종교’는 성을 터부시한다. 우리 국가의 유사-아버지였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기대되어지는 박정희씨도 이에 대해 교시하신 바 있다 - “허리 아래의 것은 거론하지 말지니라.”

 그러나 미소년 아도니스야말로 매우 신성하다. 성을 금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위험하기 때문이며, 성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원초적이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레이저의 지적대로, 숭배와 금지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사실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되지 아니하였던 것들이며, 또 그럴 수도 없는 것들이다. 고대인들은 아도니스를 숭배했고 또한 주인으로 불렀다. 이것은 완고한 유태인들도 마찬가지였으며, YHWH란 금기어[각주:4]을 굳이 ‘여호와’로 부르는 것도 이에서 기인한다. 나의 주인이시여.

 태초에는 행동이 있었고, 욕망을 따르는 원시인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들을 순수하다고 불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이를 순수하다고 부르는 것처럼. 하지만 그들은 순수한 욕망덩어리들이다. 그들이 성을 모른다고 욕망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충동이 성욕과 전혀 무관한지도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흔히 ‘순수한 사랑’ 따위를 말했다. 그러나 이제 순수라는 낱말은 모순에 다다른다. 고결한 기독교도들과 유학자들이 사특하다 하여 배제하려던 것들이 순수하다. 적어도 인류는 그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이것으로 세계를 정제하여 이념만을 남기고자 했던 플라톤주의적 충동은, 또 어쩌면 성리학적 접근은 길을 잃어버린다.

 「소나기」에서도 아네모네가 등장한다. 죽음을 상징한다고 우리가 늘 비평해 왔던 도라지꽃 말이다. 아도니스가 피를 흘리듯, 소년 역시 피를 흘렸다. 소녀의 분홍 스웨터에 든 ‘검붉은 물’ 말이다. 이것이 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이것이 누구의 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것으로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았든, 소년이 아도니스의 후신임이, 적어도 그의 관념적 현전임이 드러난다. 소년은 여전히 순수할 수 있겠지만, 성적으로 결백할 수는 없다.



 증상-남성

 소년이 정말 아도니스의 동격이라면, 소설 속 사건들의 정체는 비교적 분명해진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문제는 이것이다. 어째서 소설은 소년의 성적 매력을 언급하지 않는가? 두 번째는 이렇다. 어째서 살해당한 이는 아도니스가 아닌가?

 첫 번째 문제는 언뜻 간단해 보인다. 우리는 사회상을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말했던 대로 당시의 세태는 가부장적이며 성을 터부시했다. 작금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지만. 따라서 소설의 태도는 일종의 적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성적 능력과 소년의 자연적 생명력은 지적했듯 불가분의 것이다. 이것의 총체가 하나의 매력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적되지 않았을 경우, 독자는 주관, 즉 ‘표현되지 않는 진정성’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내심의 사태가 자연적 생명력으로 자연히 표상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 주관이 사랑의 성패에 결정적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두 번째 문제는 좀 더 심각하다. 아도니스의 신화에서, 희생자는 아도니스다. 히아킨토스와 히폴리토스의 신화 또한 아도니스 신화와 구조적으로 동일한데, 희생자는 역시 소년이다. 심지어 돈키호테가 목격한 희생자 역시 목동 그리소스또모다. 그런데 「소나기」에서는 뜬금없이 소녀가 거부할 수 없는 자연력에 의해 희생당했다. 이것은 이 소설에 아도니스의 신화와는 전혀 동떨어진, 어떤 특수한 심적 동력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

 나는 앞에서 ‘모에’와 아이돌과 건축학개론을 논하며, 남성들의, 적어도 현대 한국 남성들의 어떤 공통의 심리적 문제가 여러 창작물 속에서 일정한 모습으로 발현함을 살폈다. 이 증상을 다시 정리하면, 유사 연애, 수동성, 그리고 청년 혹은 소년기로의 퇴행이다.

 이제 다시 「소나기」를 관찰하자. 위 세 가지 문제는 이 소설을 읽는 남성 독자들에게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 남성들이 소년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다면, 이 소설을 그렇게 사랑할 리 없었다. 소녀는 우리 남성들의 아이돌이었고, 굳이 다가와 호의를 표해 주는 친절한 존재였다. 이제 남성들은 기꺼이 퇴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앞서 퇴행의 심리적 조건을 세 가지 지적했다. 자신의 본질은 순수하다는 방어기제. 당시에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자각. 의도치 않게 실패한 사랑. 「소나기」는 이 세 가지 가능성을 모조리 준비해 놓았다.

 앞서 농촌에 사는 순수한, 그런데 성적인 매력이 이상하게도 표현되지 않는 소년의 특성을 논했다. 만약 이것이 방어기제라면, 소년의 마나(mana)는 단순히 은폐된 게 아니다. 그것은 금제의 두 가지 양상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러나 이 구별은 의례라기보다 오히려 신경증의 측면을 띈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독자의 필요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한국 남성들이 다들 그렇지 않은가! 항상 그것에 자신감을 갖고는 있지만, 혹시 그것이 작은 것이 아닐까, 가끔은 불안에 휩싸이지 않는가. 다른 게 아니라 성적 매력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감은 소망에 가깝고 불안감이 현실에 가까울 테지만. 외모가 전부가 아니긴 하나, 나는 젊은 시절의 황순원 작가처럼 잘생긴 인물을 현실에서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소년은 연애의 능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대체로 서툴러 보이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굉장히 유능하다. 따라서 이것 역시 매력의 문제와 동일하게 평가해야 한다. <건축학개론>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어떤 감출 수 없는 무능함은 순진함이란 딱지를 붙이고 과거로 밀어 놓는 모양이다.

 ‘의외의 실패’란 문제는 소녀의 죽음으로 해결된다. 이 죽음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 물론 그 복선이 지적되지만 - 인 자연력이 원인이다. 이 정체불명의 힘은 고대에는 신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현대에 와서는 심리적인 충동으로 여겨진다. 즉 대중의 소망이다.

 소녀는 희생양이 된 것이다.



 희생양

 이제 한국인이 익히 알던 소설은 남성적 소망의 상징으로 재구성된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 남성들 모두는 무의식적으로 소설을 그렇게 읽는다. 원래 신화적 형상을 이루던 개체 - 소년 - 은 분리되고 재창조되어, 순수라기보다는 모순에 가까운, 망상적 사실과 현실의 허상이 공존하는 표상으로 변화했다. 그는 남성의 이기심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가 여전히 이성에게 매력적일 수 있을까? 나는 여성이 아니니 단언하지 못할 일이다.

 아프로디테는 사랑의 이름이었으며 온전한 사랑을 표상했다. 그러나 이제 소녀의 사랑 역시 솔직하지만은 못한 것 같다. 게다가 결국 희생양이 되었으니 안쓰러운 일이다. 이것의 원인은 명백히, 실패한 사랑에 대한 남성들의 불만이다. 죄책감이라도 좀 느끼면 다행이련만, 아도니스와 그리스도의 신화와는 달리, 사람들은 그러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잠시 느끼는 슬픔은 장난감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성장 소설이 아니다.

 <건축학개론>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실례를 목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의 일상 중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마음이 가난한 남성들은 동일한 심적 동기, 즉 여자에 대한 적개심에 따라 현실의 희생양을 찾아 헤맨다. 물론 이런 악행이 벌어지는 것은 소설의 탓이 아니다. 소설에 우리가 저지르는 악행이 반영되어 있을 따름이다.

 어차피 현실은 만족스럽지 않다. 모든 게 소망대로 이루어진다면 현실과 소망은 같은 단어로 불렸을 것이다. 마르셀라의 말마따나, “혼자의 환상으로 일어난 일을 버림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서는 아니 된다.”



 결론

 현대는 더욱 순수하거나 교활하게 변모해야 한다.




  1. http://ko.wikipedia.org/wiki/%EB%AA%A8%EC%97%90 [본문으로]
  2. 《화성인 바이러스》 십덕후 편 참조. [본문으로]
  3. 『NANA』8권 32페이지. [본문으로]
  4. http://en.wikipedia.org/wiki/Tetragrammaton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