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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

반지성주의 소론


세계의 끝으로 출발하는 급행열차의 경적은 울리고

 이 글을 쓰며, 나는 트럼프가 파리 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를 본다.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이견이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따라서 우리는 지구온난화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트럼프 선생은 과학자들을 불신하고 있으며, 지구온난화가 중국인들이 지어낸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지구온난화의 연구자들은 중국보다는 주로 미국인들이다. 트럼프에게는 뭐 사실이 그러건 말건 상관이 없다.

 트럼프는 옛날부터 밑도끝도없는 이야기를 내놓는 데 천재적이었다. 그이는 오바마를 외국 출신이고 이슬람교도라며 비난해 왔다. 그리고 9.11 테러 당시 미국의 무슬림들 수천 명이 테러에 환호했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그 장면을 TV에서 봤다고 밝혔는데, 뻔한 이야기겠지만, 그런 내용의 프로그램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양반을 광대 취급했지만, 이런, 트럼프님께서는 이제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지구멸망의 시동을 걸고 계시다.

 그분은 바보일까? 아니, 그대는 이제 트럼프가 단순한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그분은 거짓말쟁이다. 그런데 어째서 미국인들은 그런 거짓말쟁이를 대통령으로 뽑았을까? 인류의 생존을, 그리고 저 귀여운 북극곰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를?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하지만 우리 한국인들 역시 만만찮게 거짓말을 잘한다. 지난 대선에서 홍준표 선생은 5.18 음모론을 내비친 데 이어 사대강사업으로 인한 수질오염까지 부인하였다.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 홍 역시 그러고 나서 지지율이 오히려 올랐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심지어 홍준표 본인도 늘 토론을 시작하면서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며 근엄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이는 교도소에 가지 않기 위해서건, 자유당사를 지키기 위해서건, 어쨌건간에 거짓말을 해야 했으니, 여기서 우리는 어떤 거짓말의 유용함을 알아차린다.

 다시 말해 어떤 거짓말은 아주 뻔하지만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성적으로는 믿지 못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믿고 싶어한다. 만약 그 믿음이 결정된다면, 그들은 그런 거짓말을 앞장서서 늘어놓는 사람에게 지지를 보낸다. 그리고 북극곰은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트와 홍이라고 하니, 언뜻, 이런 거짓말들은 왠지 극우의 전유물인 것만도 같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런 경향도 있다. 하지만 다이나믹 코리아는 실로 신비하여서, 자칭 진보입네 하는 분들도 이런 일들을 꽤 즐겨 벌여 왔다. 얼마 전에도 나왔다 - 개표부정 음모론.



 이 음모론을 김어준씨가 제기하였다. 그이는 “더플랜”이라는 소위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지지난 대선의 개표가 조작되었다는 독창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그이와 그 친구분들에 따르면, 박근혜의 미분류표와 문재인의 미분류표의 비율이 약 1.5 대 1이라는 사실은 개표부정을 증거한다. 그들에 따르면, 개표기계는 조작할 수 있다. 그들에 따르면, 개표집계도 조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선거는 조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에 따르면, 우리는 기계를 쓰지 말고 손으로 개표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더플랜보다 더 개연성있는 가설이 있다. 박근혜의 지지자들 중 노년층이 많아서 무효표 역시 많았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 대선에서 홍준표가 얻은 미분류표의 비율은 문재인 대비 1.6:1로, 지난번보다도 오히려 높았다.

 애초에 김어준씨의 주장은 중요한 하나를 간과하고 있는데, 선관위 직원들 외에, 개표를 감시하는 숱한 참관인들과 자원봉사자들도 시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김어준 식의 선거부정이 가능하려면, 그들이 모두 눈뜬 장님들이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음모론은 무슨 조류독감마냥 유행했으며, 결국 참다 못한 선관위가 김어준씨에게 어디 한 번 모조리 까 보자며, 소위 ‘캐삭빵’을 신청하기까지 이르렀다. 김어준씨는 물론 이 결전을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김어준씨가 열성적으로 지지하던 문재인이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적어도 김어준씨와 정파적 이해를 같이하는 음모론자들은 투표함을 까자고 할 필요를 잃었다. 그와 동시에, 낙선한 홍준표의 뒤에서 ‘보수’적인 분들이 수개표를 하자고 외치는 광경을 우리는 보았던 것이다. 

 실로 수개표로 좌우가 하나되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국민통합의 기쁨을 누리면서도, 왜 하필이면 수개표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 알파고의 시대에, 사람의 맨손이 기계보다 정확하다니?



느낌적인 느낌 느낌

 이것은 거짓의 전염병이다. 한국인들은 이 증상의 집단적 발현을 돼지발정제의 사나이 이전에도 자주 목격해 왔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거짓말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대는 아마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디워 사건, 타진요 사건, 일베의 부흥, 가깝게는 시사인 절독파동으로 상징되는 장동민-증후군들을 기억하시리라. 최근 반년 사이에는 유사한 사건들이 제법 많이 일어났는데, 최순실 사건 음모론, 세월호 잠수함침몰설, 그리고 앞서 논한 개표부정 음모론, 그리고 최근 진보언론에 대한, 특히 한겨레에 대한 일부 친노분들이 자행했던 공격이다.

 우리는 앞서 수개표를 주장하는 분들을 보았다. 황우석 사건에서는 소위 ‘황빠’들이 있었다. 그리고 ‘디빠’가 있었고, 타진요나 일베 그 자체가 있었고, 디시인사이드의 두 갤러리가 있었다. 그리고 탄기국이, 잠수함침몰론자들이 있었으며, 지금에 와서는 일부 친노분들이 계신다.

 앞서에서 드러난 유형의 거짓말들은 이런 분들의, 인간적인 특성이다. 그분들은 언뜻 민중의 편에 선 것 같다. 그분들은 지식인들을 경멸하며, 그 펜대와 책상들을 밟고 참된 앎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런데 이 앎이란 엄밀한 의미에서의 앎이 아니다. 레드벨벳의 노래 가사처럼, ‘느낌적인 느낌’이라고나 할까. 기계로는 느낄 수 없는 투표용지의 감촉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바로 반지성주의다.



여기는 광야고, 너는 던져진 거야!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사르트르는 세계대전이 끝나고 얇은 책을 한 권 썼는데, “유대인 문제에 대한 단상”이다. 예상하시겠다시피 이 책은 주로 당시 프랑스의 유대인들과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그이는 유대인에게 주목한다. 하지만 그이가 더 주목하는 이들은 반유대주의자들이다.

 그이는 반유대주의-운동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반지성주의적 충동에 기인한다. 이 태도가 생성되는 토양은 바로 근대의 불확실성이다. 중세의 확실하던 세계 - 봉건영주와 로마 교회가 지배하던 천년왕국 - 는 자취를 감추었다. 사르트르는 사람이 ‘던져졌다’고 비유한다. 

 다시 비유하자면, 그대는 어떤 미지의 역할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겠다. 게임의 세계에 그대는 아무 것도 없이 던져졌다. 그럼에도 그대를 미래가 기다린다. 길에서 주운 목검과 나팔바지로 출발할지라도, 능력에, 노력에, 그리고 운에 따라, 그대는 병사도, 신부도, 학자도, 도적이나 해결사도, 기사도, 그리고 공주도 될 수 있다. 그 세계에 마왕이 존재할 수 있다면, 마왕이 될 수도 있으리라.

 당신이 중세의 농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그대는 평생 농노일 팔자였으리라. 하지만 오늘날 출생은 직업을 결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두 선언적으로는 평등하다. 오늘 누군가는 중산층으로 태어났어도 이론적으로는 재벌이 될 수도 있다. 가능성이야 낮지만. 그리고 극빈층으로 몰락할 수 있다. 그 편이 훨씬 확률이 높다.

 그렇다. 근대는, 특히 자본주의는 뭔가 불확실하고 그래서 좀 불안하다. 자유롭지만. 사상의 문제도 그러한데, 중세에는 모든 이들이 하나의 신앙을 가진 터라 안정적이었다. 

 우리는 그럭저럭 민주적인 나라에 태어나,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를 얻었다. 그에 따르는 책임을 그래서 우리는 아울러 갖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귀찮음까지도. 오늘은 점심을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하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니 오트밀죽밖에 없었던 중세는 얼마나 복되었는가.

 시사저널의 편집장이었던 김훈은 이런 사태에 대한 문학적 직관을 표현한 바 있다. 바로 어떤 사람들은 주체적 판단을 싫어하고, 타인의 결정 밑에서 안주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학적 직관이란 애매한 법인지, 뭇 여성들이 저 ‘어떤 사람들’로 타고났다고 김훈은 결론내렸던 것이다. 분노한 여기자들은 편집장을 축출함으로써 그 가설의 불완전함을 증명하였다.

 그러니까 상반되는 두 태도가 있다. 하나는 이성이고, 하나는 정념이다. 하나는 보편이고, 하나는 민족적 특수이다. 하나는 열린 자세이고, 하나는 닫힌 자세이다. 하나는 잠정적 합의이고, 하나는 불변의 진리이다. 하나는 법-질서이고, 하나는 과거의 기억들이다. 하나는 추상적 법칙이고, 하나는 구체적인 몸이다.

 앞선 하나가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노무현의 시대를 거쳐 현재에 확립되어 있는, 기계장치를 이용한 개표시스템이라면, 나중 하나는 김어준씨가 주장하는, 사람의 손으로 하는 개표이겠다.

 반지성주의는 전자와 후자를 대비시키고 후자의 편에 선다. 반지성주의자들은 정념을, 공통된 감정을 원하고, 그것과 대비되는 이성적인 무언가들은 배척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그분들은 현대 사회가 낳은 불안을 해소하는 최종 해결책을 요구한다.




동조와 감각으로서의 세계

 반지성주의자들이 원하는 세계는 반-근대적이다. 그분들은 오히려 중세쯤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분들은 진리를 원한다. 하지만 그 진리는 과학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분들은 평등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모두와의 평등이 아니다. 그분들은 어떤 탁월함을 믿는다. 그런데 그것은 개인에게 달린 탁월함은 아니다.

 가령 영희에게 꿈이 있으니 바로 훌륭한 과학자라고 하자. 과학자가 되려면, 영희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고, 대학에서 또 연구를 해야 한다. 영희는 가설을 세우고, 치밀하게 검증하는 작업을 반복할 테다. 그 결과물이 다른 과학자들에게 인정받는다면, 영희는 뛰어난 과학자다.

 그런데 영희의 이런 노력에도 그 뛰어난 상태는 일시적이다. 현직 과학자로 계속 인정받으려면, 영희는 계속 연구해야 한다. 그러면서 영희는 과거의 자신을 극복해나간다. 동시에 과학은 전진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과학은 어제보다 낫다.

 이것이 진정한 탁월함이다. 이런 탁월함은 일시적인 것이다. 과학의 진리도 확고불변한 것이 아니다. 단지 개인들은 재주껏 그것에 다다를 뿐인데, 그 기회가 열려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사회는 평등하다.

 영희는 노력해야, 그리고 노력할수록 나아진다. 그런데 나음만 원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이가 반지성주의자다. 우리는 영희와 정반대의 인물을 앞서 언급했다 - 황우석.

 반지성주의자는 어떤 우월함을 줄곧 추구한다. 그런데 이들은 그 우월함을 최대한 오래 느끼고 싶어하고, 독점하고 싶어하고, 도전받기를 싫어한다. 그런데 과학적 진리는 정반대의 속성만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반지성주의자들은 그런 까탈스러운 것들에 증오와 저주를 퍼부으며, 다른 어떤 간편한 길을 찾아나선다.


드레퓌스 사건. 프랑스의 대표적인 반유대주의 사건이었다.

 반유대주의는 사르트르가 살던 시절, 프랑스의 반지성주의자들의 좋은 변명이었다. 유대인들은 지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유대인을 부정함으로써 반지성주의자들은 그런 지성들을 아울러 부정할 수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반지성주의자들은 쉽게 핑계거리들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유대인은 소수이며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따라서 프랑스의 반지성주의자들은 반유대주의를 함으로써 쉽게 다수의 편에 설 수 있었다. 그들은 다수 속의 권력자들과 그 자신을 동일시했다. 프랑스의 대자산가는 여느 반지성주의자와 공통점이 거의 없지만, 반유대주의의 기치 아래에서는 같은 프랑스 민족이 된다. 아무리 하찮은 프랑스인이라도 알랭 들롱이나 나폴레옹, 드가와 같은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이다.

 반유대주의는 다른 사람들을 깔보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반지성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의 나쁨에 대해 온갖 근거들을 나열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태반이 지어낸 것들이었고(유대인은 군대를 빼먹으려고 노력한다), 

 또는 인간이라면 흔히 가질 수밖에 없는 결점들이거나(유대인들은 이기적이다), 

 오히려 유대인들에 대한 오랜 차별의 결과물들에 지나지 않는다(유대인들은 배타적이다).

 그들에게 사실 유대인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다른 희생양을 찾아 나섰으리라.

 일베인들의 전라도 혐오는 이것과 똑같다. 전라도 사람들은 소수이며, 정계와 재계의 권력에서 소외되었다. 그들을 그래서 일베인들은 공격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다. 일베인은 광주 시민들이 고결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며, 영원히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싶어한다. 일베인들은 그 우월감을 위해 광주를 열성적으로 비하한다.

 반지성주의자들이 보이는 열정이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거짓을 늘어놓는 열정이고 차별의 열정이다. 그들은 내적 신념이 강한 것이 아니다. 맹목적일 따름이다. 사르트르가 지적한, 반유대주의자들의 태도를 보자. 1. 불성실함. 2. 언어와 합리에 대한 멸시. 3. 직관적 확실성의 추구. 4. 논리적 체계의 부재. 5. 4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증명책임을 떠넘김. 6. 연극적 성격. 7. 트롤링으로 쾌락을 느낌. 8. 토론 대신 위협과 공포를 동원. 9. 내적 타당성보다 제3자의 시선을 더 중요시. 

 정말 일베와 똑같다. 그리고 다른 것들 역시 같다. 반유대주의자들은 정념으로 결집하는데, 가장 중요한 감정은 분노이다. 이 집합은 일시적이고, 익명성을 강하게 띄며, 구성원들에게 단순한 사고와 반응(일베인들은 노무현의 사진을 보는 즉시 웃음을 터뜨린다!)을 요구한다. 그들의 행동은 허약한 개인에 대한 집단적 린치로 흐른다. 그들은 애국자인 체하지만, 사실은 법과 제도의 적들이다.

 이런 행태들로 그들은 불안에서 벗어나고, 동료를 찾고, 우월감을 만끽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반유대주의는 가난뱅이들의 스노비즘(교양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허위의식)” 이라고 평한다.

 이제 우리는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째서 수개표였는가?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지능의 문제는 아니다. 기계로 표를 세는 게 빠르고 확실하다는 건 핑클은 물론 여러분이나 나나 초등학생이나 심지어 유치원생도 아는 사실이니까. 수개표의 충동은 논리적 장치들과 제도에 대한 적개심이다. 그리고 원초적이고 불변적인 감각들에 대한 그릇된 추구이다. 그것은 반지성의 전형이다.



제군들의 목표는 언론이다

 반지성주의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집단적 힘을 믿고, 그 힘으로 다른 이들을 압도하려 한다. 단지 우월감만 느끼고 싶은 정도에 그치면 양호한데, 그쯤에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부터가 유대인 박해로 나아갔으니까.

 한국의 황빠들은 MBC를 부수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 거의 박살낼 뻔했다. 디빠들은 평론가들과 전쟁하였다. 진중권이 기계장치로부터의 신으로서 강림했지만, 당시에는 디빠들이 확실히 유리했다. 타블로를 공격하며 타진요는 유학생들을 조준했다. 일베는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오유는 윗선에서 지령으로 내려오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탄기국은 JTBC를 해체하겠다고 주장했다. 수개표론자들이 파괴하려던 것은 선거제도였다.

 그러니까 반지성주의자는 골방에 틀어박혀 얌전히 반지성만 하지 않는다. 반지성주의는 사색이 아니라 충동이며, 현대적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행동에 나서며, 무언가를 망가뜨리려 한다. 

 역사에서 보듯, 반지성주의자들의 주요한 타겟 중 하나는 언론이다. 아니나다를까 미주의 트럼프도 회견에서 기자들에게 호통을 쳐대며, 아예 트위터를 매체로서 애용하고 있다. 진보언론에 대해, 특히 한겨레에 대해 일부 친노분들이 최근 보이는 적대는 이런 언론 혐오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고 하겠다.

 가령 한겨레21 문재인 커버로 불거진 진보언론 혐오 논란 같은 경우. 일부 친노들은 주간지인 한겨레21이 지난 대선과정에서 문재인의 단독샷을 싣지 않고 군소후보들만 줄곧 조명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런데 이 선거는 아시다시피 군소후보들이 난립할수록 문재인에게 유리한 선거였다.

 이렇게 일부 친노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사실만을 열심히 수집하여 그들만의 세계를 창조한다. 이것은 마치 일베인들이 노무현 정권의 단점들만 꼽아서 노무현을 악마화하는 것과 같다. 웃긴 것은 일부 친노들 역시 문재인에게 오직 모욕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한다는 것. 더욱 우스운 것은, 한겨레는 따지자면 오히려 친노에 더 호의적인 대표적인 매체라는 점.

 정치혐오자 안철수의 비극/ 호남 자민련이라고요? DJ가 하늘에서 통곡합니다!/ 안철수 대통령은 없다 한겨레가 문재인을 이렇게 비판한 적이 있는가? 이것이 일부 친노들이 말하는 '안빠 언론'의 실상이다.

 물론 한겨레는 왕왕, 문재인 또는 주변의 사소한 잘못이나 좋지 않은 사건들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언론에서나 똑같다. 그런 것들조차 나오지 않으면 언론이 아니다. 그리고 한겨레는 언제나 친노의 변명을 잘 들어 주곤 했다. 가령 거의 백 퍼센트 친노가 잘못한 사건(정파다툼은 대개 시비가 분명하지 않은데, 이 사건만큼은 좀 독특하다) 다음에 나오는 문재인 “뼈마디에 사리 몇 알 생겼을 것” 같은 기사. 그런데 상대인 박지원의 입장에서 쓴 기사는 없다. 명백히 편파적이다. 문재인에게 말이다.


 그런데 왜 저 김어준씨를 비롯한 일부 친노분들은 이웃들을 속이려고 할까? 게다가 김어준씨는 한창 갑갑할 때 한겨레가 내민 손으로, 지금의 반지성주의 팟캐스트 방송인으로 정착할 수 있지 않았는가. 이 글을 보는 그대는 김어준씨가 지금 팟캐스트 방송으로 제법 재미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라(한겨레가 요새 겪는 고난은 여러 면에서 자업자득인 구석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김어준씨 본인이 아닌 분에게도 먹히는 이유는 앞서 논한 반지성주의의 매력 때문이겠다.

 반지성주의자가 언론을 싫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정상적인 언론사의 구성원들은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며, 그것으로 하여금, 사람들이 앎의 체계를 구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어째서 일부 친노들은 소위 조중동이 아니라, 한겨레, 또는 가끔은 JTBC나 경향 등 상대적으로 진보성향을 띄는 언론을 적대하는지,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얼추 나오는 것 같다. 최순실 게이트에서 그대는 목격하였으리라. 그것들이 언론다운 언론들이어서이다. 물론 그 역시 상대적인 의미겠지만 말이다. 한겨레는 광우병 사태 이후로 약간 이상해졌지만 확실히 비교우위에 있다. 얼토당토않은 음모론과 타 정파에 대한 비방을 빼면 아무 것도 없는 분들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언론의 그런 활동은 사람들을 사유의 광야로 내몰고 반지성주의자들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사람들이 지성을 갖는 것은 반지성주의자들에게 끔찍한 일이다! 그들의 집단행동은 제지당할 것이고, 반지성으로 쌓아올린 허위의식은 조롱당할 테니까 말이다.


그대가 삶을 속일지라도

 반지성주의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까? 이 문제의 현신이 계시니 바로 조기숙 교수님이다.

 조기숙 교수는 소위 진보 가운데 김어준씨와 아울러 반지성주의적 세계상을 대표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분은 자신의 ‘일부 친노’ 집단이 ‘신좌파’에 속한다고 주장하는데, 반지성주의자의 것답게, 이 정의는 신좌파의 보편적 정의와는 다르다. 신좌파란 원래 60년대에 나타난 반소련적 사회주의자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조기숙 교수는 사회혁명은 고사하고 애초에 분배문제 자체에 거의 관심이 없으며, 자신들의 특징으로 오히려 ‘문화’적인 면을 든다.

 그것은 말이 문화이지 실은 포장된 정념이다. 조기숙이 구성하려는 ‘신좌파’는 이념이 없는, 단순한 정서의 공동체이다. 민주주의, 복지, 인권, 생태, 여성, 정의, 평화, 탈핵, 조기숙은 그런 것들을 말하지만, 그 무엇에도 사실 관심은 없다. 일단 민주주의부터 전혀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분은 아예 반민주주의자에 가깝다. 조기숙은 독자들에게 권유하니, 곧 시민들은 엘리트들을 꺼려해야, 언론을 멀리해야, 그네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불편해해야 한다. 달콤하지 않은 타인의 의견이나 심지어는 사실에, 사람들이 체질적인 거부감을 갖도록 조기숙은 훈련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노골적인 반지성주의다.

 반지성주의는 소부르주아들, 즉 어중간한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보통 유용하지만, 조기숙 교수 같은 분들에게도 유용하다. 최근에는 유시민씨까지 ‘어용’ 드립으로 한국어를 처절하게 오염시키며 이에 뛰어들었는데, 이로써 우리는 반지성주의의 흥행을 실감한다.

 저런 분들은 일반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다. 물론 이분들은 사업을 위해 서민적인 행세를 마다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분들은 따지자면 조기숙 교수 본인이 그렇게 비난하는 엘리트에 해당할 텐데, 확실히, 반지성주의는 이런 지배계급들이 써먹을 구석이 많다.

 이유는 조기숙 교수에게서 아주 잘 드러난다. 반지성주의는 시민들이 주목하여야 하는, 실제 삶과 진정 밀접한 정책적 문제로부터, 특히 분배문제로부터 그이들의 관심을 돌린다. 그리고 정파적 투쟁으로, 제도에 대한 공격으로, 더 심하게는 소수자 차별로 사람들의 열정을 소진시킨다. 그리고 반지성주의를 낳는 근대의 불만은 더 깊어지는 것이다. 

 곧 반지성주의는 지성뿐만이 아닌, 삶의 기준에서도 진정하지 못하며 자기배반적이다.


결론

 여기서 우리에게는 과제가 남겨지니, 바로 다른 이들에 대한 설득과 그들과의 연대이겠다. 우리는 그것으로 현대사회가 낳는 불만을 해소할, 적어도 개선할 수 있는 반-반지성주의적 연합체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민주주의적일 터이며 아마도 사회주의적이리라. 지난 촛불집회는 그 민주주의의 아주 좋은 예이었다 - 심지어는 수개표를 주장하는 분들도 열심히 참여하지 않았는가.

 물론 대개의 반지성주의자들은 설득이 매우 어려우며, 일부러 정직하지 않기에 토론이 용이한 유형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지성주의자들의 정념 너머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가령 우리는 쉽게 일부 친노들 - 이 글은 일관되게 그들을 ‘일부’라고 부르고 있다 - 의 어긋난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곤 한다. 하지만 이상한 주장들만 눈에 잘 띄는 이유는 반지성주의자들의 행동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머뭇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재인 지지자들 역시, 그리고 여러 보수적인 분들도 당연히, 양식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심지어 그 능력, 다시 말해 ‘지성’은 저 반지성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소유한다. 반지성주의자들은 자기와 정서적 관련이 없는 문제에는 냉정하고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 주곤 한다.



요약

a. 반지성주의는 현대사회에 대한 불만에서 기인한다. 

b. 반지성주의는 열정이며, 진리를 독점하려 하며, 목적은 확고한 우월감이다. 그것을 위해 반지성주의자는 집단을 만들고, 다른 이들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c. 반지성주의를 따른다면 사람은 진정한 앎과 진정성있는 정치적 실천에서 멀어진다.

d. 우리는 반지성주의 너머의 정치적 연대로 반지성주의의 원인 - 근대적 불안 - 을 해소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