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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대한 이야기

마더 - 춤

 나는 이 사소한 글을 2009년에 썼다. 하지만 역시 사소한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는데, 이 글로 인해, 물론 잘못 읽음으로 인해, 불안감으로 인해,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을, 그들의 범죄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지도 모른다는 아주 약간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2016년 오늘 나는 배신당하였다.


 분명히 말하니, 정신병자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그이는 정신병자라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만만한 정신병자들을 때리는 비열한 인간들을 규탄한다. 경찰청장 강신명에게 저주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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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춤





 나는 사람들이 춤추는 광경을 불편해했다. 특히 아줌마들이 관광버스 안에서 ‘뽕짝’을 틀고 춤을 추어대는 모습을 혐오했다. 박정희가 초가지붕을 바라보면서 느꼈을 심정, 그것과 아마 비슷하거나 어쩌면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내가 나름 정비하던 ‘선진적 국가관’에 따르면, 그런 야만적인 춤판은 법으로라도 금지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마더”의 마지막 장면을 보았다. 나는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어려운 진실이, 내가 단순한 야만이라고 폄하했던 그 춤이란 것에. 춤은 영화가 남긴 최대의 미스테리였고, 나는 그것을 잠정적인 과제로 남겨두었다.

 “마더”는 독무로 시작하고 군무로 끝난다. 봉 감독과 김 ‘선생님’은 그 두 장면을 너무 인상적으로 처리한 나머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관객에게 그것의 비밀을 성공적으로 은폐해버렸다. 칸트가 처음 루소의 글을 접했을 때, 문체에 너무 감탄한 나머지 내용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했던가. 내가 춤에 담긴 여러 차원의 의미를 간신히 파악하기 시작한 건, 프레이저를 읽기 시작하고부터였다.

 최근 나는 어느 정도 체계적인 이해에 도달했고, 이제 그것을 풀어 쓸 때가 온 것 같다. 간단히 요점만 설명하면 춤은 제의다. 그것은 무의식으로부터 뛰쳐나왔으며, 충동이 현실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양식화의 역사를 거쳤다. 자,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으로 떠나 보자.



- 제의

 나는 춤이 제의라고 주장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고, 최초의 사람도 아니다. 이미 몇몇 평론은 영화의 장면이 제의처럼 느껴진다고 주장했다. 물론 특별한 고찰 없이, 춤에서 받은 어떤 종교적인 느낌만으로 제의란 단어를 사용한 경우도 있다. 하긴 영화 밖에서도 한국 아줌마들은 무슨 신흥종교집단이라도 창설한 양 춤을 추어대곤 하니까.

 제의를 정의한다면, ‘종교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하나 또는 여러 사람의 양식화된 행동’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제의라고 불리려면, 사람들의 여러 행동을 일반화시킬 수 있는 어떤 단일한 꼴이 필요하다. 또한, 그 행동에 종교적인 의미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춤은 어떤 꼴이며, 어떤 신념의 반영일까? 우선 영화의 바로 그 장면만을 따로 떼어 면밀한 분석을 시도해야 할 테다. 하지만, 그 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관찰자에게 무력감을 선사할 것이다. 춤의 동작에서는 ‘몸을 흔든다’ 이상의 규정이 발견되지 않고, 춤의 의미는 그 어느 누구도 모르는 상태다.

 단순하게 설날 차례와 비교해 보라. 차례의 예법과 의미는 어느 정도나마 우리에게 익숙하고, 더 자세한 정보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춤에 대해 우리의 아줌마들은, 한심할 정도로 아무것도 우리에게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러니 다음 수단을 강구하자. 영화의 구성에서 춤의 맥락을 캐낼 수 있지 않을까. 처음 춤을 추기 바로 전, M(앞으로 김혜자가 분한 ‘마더’를 M이라 칭한다.)은 고물상에 불을 놓는다. 그것은 M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고, 살인을 저지른 다음이다. 마지막 춤의 바로 전, M은 허벅지에 침을 놓는다. 그것은 M이 다른 진실을 느끼게 되고, M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재확인한 다음이다. 방화와 침 놓기란 행위는 살인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리고 살인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자행되었다. 즉 둘 다 살인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살인이 대체 무엇이길래, M은 그것을 끝끝내 은폐하려고 할까?


- 금제

 살인은 대표적인 반사회적 행동이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돌판에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적혀 있었다. 신으로부터 내려온 이 계명은 인간에게 금제를 선포한다. 금제란 말 그대로 금하고 억제한다는 뜻이며, 금지와 억제의 대상은 인간의 행동이다.

 고대 중동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한국에서도 금제는 존재한다. 그것은 법이거나, 도덕규범이거나, 그저 한갓 미신일 수도 있다. 예컨대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살인은 죄악이다’, ‘살인이 저질러진 호텔 객실은 불길하다’.

 영화는 수많은 금제를 등장시킨다. 그것들을 위반하는 행동과 쌍을 이루어서. 영화에서는 최소한 두 번의 살인과 한 번의 살인미수가 등장한다. 폭행과 상해는 셀 수도 없이 벌어진다. 그 외에도 절도, 성매매, 주거침입, 손괴, 방화, 증거인멸, 공갈, 무면허의료, 핸드폰 무단개조 등등, 영화는 엄청나게 많은 범죄를 선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탈이 일어날까. 흥미롭게도, 영화에서 법은 그 어떤 범죄도 처벌하지 못하며, 오작동의 극치를 보인다. 살인범으로 잡힌 종팔이는 영화에서 가장 결백한 사람이다. 그나마 쓸 만한 보복을 가하는 것은 도덕원리로, 놀이공원에서 ‘걔 엄마랑 잔대요’란 말을 내뱉은 학생은 진태에게 강력하게 처벌받는다. 그리고 어쩌면, 영화에서 더 효과적으로 개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건 개개인의 양심으로 보인다.

 살인에 따른 M의 죄책감을 보라. 양심은 이 막 나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회를 수호하는 심판관인 듯도 싶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 제각각이다. 전두환과 김현희 씨는 수백 명을 무참히 살해하고도 건강하게 잘 지내지 않는가. 그렇다면 더 양심적인 인간만 손해를 보는 셈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렇게 사람들은 금제를 어겨대는 걸까? 이 정도면, 오히려 금제가 있기 때문에 어긴다는, 청개구리의 심정이 작용하지 않나 의심해볼 법도 하다.

 하지만 이 점을 주목하라. 어떤 금제도 ‘불에 손을 집어넣지 말라’, ‘배고프면 밥을 먹어라’ 라는 식으로 설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즉, 사람이 욕망하지 않는 행동은 금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사회 유지에 아무리 필수적이라 해도.



 - 욕망


 욕망은 인간 정신과 행동의 뿌리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망을 위해 살며, 욕망이 개체의 행동을 이끌어낸다. 욕망의 원천이 또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심오한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욕망을 유형별로 간단히 분류하는 건 그리 무모한 시도가 아니다. 먹고자 하는 욕망, 자고자 하는 욕망, 신체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 등, 영화에서도 다양한 인간의 욕망이 등장한다.


 욕망은 현실과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세상은 자기 원하는 대로 절대 굴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은 일단 자연법칙과 충돌하고, 타인의 욕망과도 충돌한다. 물론 사람들 각자의 욕망을 ‘자유시장경제적’ 힘의 논리에 따라 조절하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그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극한투쟁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오직 그 논리뿐이었다면, 인간 사회는 유지되기는커녕 애초에 형성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욕망을 통제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개인적인 차원, 그리고 사회적인 차원이다. 곧 개인은 이성과 양심, 프로이트가 말한 에고-슈퍼에고의 층위를 내재하고, 사회는 법과 도덕, 종교 등의 제도로서 욕망을 통제한다.


 영화에서 도준은 가장 지적 발달 수준이 낮은 인간이다. 그의 정신 상태는 어머니가 그를 살해하려 시도할 무렵, 5살 때의(명심하라, 한국 나이로 5살이다) 그것 정도로 매우 야만적인 상태다. 그에게는 진태와 같은 물욕이나, 변호사와 같은 권력에의 의지가 없다. 그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기초적인 욕망, 식욕이나 수면욕 같은 것만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 그것 말고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복수욕이다. 즉 ‘한 대 맞으면 두 대 깐다’. 복수심은 사실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 지능이 발달한 동물에게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으니까. 또 다른 하나는 성욕이다. 그는 ‘그날 밤 발정난 개’였다. 말 그대로 이것도 동물 수준에서 흔히 관찰되는 욕구다. 하긴 인간은 발정기가 없는 게 나름의 특징이긴 하다.


 이 두 욕망은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위험하다. 어떤 개인이 줄창 잠만 퍼 잔대도, 그걸로 무슨 사고가 터지지는 않을 것이다. 즉 일반적인 욕망의 충족은, 다른 사람의 욕망과 그리 심하게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복수욕과 성욕은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복수욕은 주관적인 감정을 객관적인 행동으로 대치시키며 발현된다. 도준은 바보라는 말을 듣고 물리적 폭력으로 대응한다. 이런 폭력의 균형감각은 개인마다 감정의 상황이 다르기에 매우 위태하다. 치정에 따른 복수욕는 더욱 심하게 발현되어 살인행위가 되기도 한다. 꼭 M이 도준에게 주입시킨 ‘2배 공식’이 아니더라도, 복수심은 증폭되는 성향이 있다.


 성욕은 그 짝을 요구한다. 물론 일방적인 관계로 일방의 욕망만을 충족하고 끝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의 욕망에는 어긋나는 일이고, 지나치게 높은 확률로 상대에게 정신적 외상을 남길 것이다. 바로 m(앞으로 극 중 고교생인 ‘문아정’을 m으로 칭한다.)의 경우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공동체의 존립에 위험한 것은, 동일한 대상을 목표로 한 여러 인간들의 경쟁이다. 헬레네는 그리스 최고의 미녀였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은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킨다.


 그 무엇보다 위험한 건 바로 근친상간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여자를 빼앗으려 전쟁을 개시하는 걸 상상해 보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인류는 근친관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영화에서 방뇨 장면은 그런 욕망을, 또 그것을 통제하려는 억압의 구조를 은유적으로 설명한다. 복수욕과 성욕, 이 두 가지 욕구는 반드시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도준의 경우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 두 욕망의 가장 극단적인 발현의 경우, 즉 복수심에 의한 살인, 또는 성욕에 의한 폭력적 또는 강탈적 성행위는 강력하게 금지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형법 제250조(살인), 또는 형법 제279조(강간), 그리고 ‘살인하지 말라’, 또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등의 금제를 발견한다.



- 충동 (1) : 방어 메커니즘


 살펴본 대로 욕망이 현실과 충돌하는 건 필연적이고, 금제가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욕망은 맹목적이다. 이것이 이성과 욕망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자, 냉정하게 생각하자, 빵이 없으니 굶을 수밖에 없어. 식욕아, 멈추어라!’ 라고 한다고 식욕이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다.


 아무리 금제가 욕망을 억압한다고 해도 욕망을 근본적으로 해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충동이란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러나 그 충동이 이끌어내는 행동의 극단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면, 개인과 사회는 어떤 대체적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곧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된다’, 즉 욕망을 해결할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빵 대신 고기를, 버터 대신 마가린을 지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동을 일으키듯, 충동은 이성과 양심을 전복해 버릴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결방법도 마찬가지다. 거세가 아닌, 어머니의 대용품을 찾아 주는 게 사회를 투쟁으로부터 방어하는 원만한 수단이 된다. 인간 심리가 강구하는 이런 수단의 목록이 흔히 정신분석학에서 일컫는 방어 메커니즘이다.


 이제 영화에서 도준의 충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살펴보자. 인간인 이상, 도준은 성적 욕망을 갖고 있다. 그의 유년기 성적 욕구의 대상은 그의 어머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감독의 표현대로라면 ‘찢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자신은 M의 살인미수 탓으로 발달이 멈추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계속 ‘잔다’.


 몇몇 비평들은 영화가 제시하는 장면과 대사가 실제 정사를 암시하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서도 설명했듯 ‘잠만 자는’ 괴상한 대체방법으로도 욕망은 충족될 수 있는 법이다. 영화는 도발적이지만, 그 도발성은 어떤 특정한 모자가 ‘자는’ 것을 묘사한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관계’ 자체를 일반적인 한국적 모자관계로 암시해버린 데에 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욕망을 충족하는 건 확실히 불완전연소다. 당신이라면 ‘손만 잡고 자는’ 관계에 만족하겠는가. 도준은 가슴 정도까지 만지는 것 같지만 말이다. 진태는 도준에게 그런 게 무슨 ‘자는’ 것이냐고 조소한다. 그래서 도준은 M에게서 분리되어, 욕망을 확실하게 충족할 수 있는 다른 대상을 찾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찾은 것이 m이다.


 성행위는 결국 실패했지만, 그는 이상한 방법으로 목적 중 일부를 달성했다. 도준은 출옥 후 M과의 식사 장면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m이 ‘피를 흘리’게 만든 것이다.



- 충동 (2) : 관념의 만능


 외부 세계는 반드시 유물론적 사고로 파악해야 할 것 같지만, 우리 관념의 주관적 체계는 그것의 실제 존재양상과는 판이하다. M의 정신건강에 중요한 것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M이 경악하는 순간은 도준의 살인행위가 있었던 순간이 아니라, 도준의 살인행위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즉 인간의 판단기준이 되는 것은 외부세계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외부세계의 그림이다.


 원시인들, 또는 ‘미개인’들, 그리고 아이들이 그들의 사고에서 보이는 특징은 관념의 만능성이다. 즉 그들은 외부세계가 뉴턴법칙이나 상대성이론 같은 독자적인 메커니즘을 갖고 동작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판단기준은 자신이다. 원시인들은 세상 모든 사물이 인간 자신처럼 감정을 갖는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자신의 상상과 객관적 현실을 혼동한다. 꿈에서 개가 자신의 다리를 물었다고 하자. 우리는 ‘개꿈이네.’ 하고 말겠지만, 원시인은 꿈에서 본 환영과 실제 눈으로 본 광경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리고 개가 자신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그럴 것이라고 단정을 짓고, 그 개를 찾아 복수할 것이다.


 이런 과정들을 고찰하면, 위에서 말한 ‘방어 매커니즘’, 또는 대체재 찾기의 중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사고와 사고가 대체되듯, 사고와 행위, 더 나아가 행위와 행위가 서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애들이나 원시인들에게서만 관찰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도 명절이면 선물을, 일부에서는 ‘떡값’을 건네며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잖는가.


 여기서 더 나가면 관념적 유사성이 현실의 같음과 다름을 대체하게 된다. 그러면 원수와 닮은 인형을 만들어 못을 박는다거나 하는 짓을 하게 된다. 지금은 바보들이나 하는 일이겠지만, 고대 중국에서 이런 짓은 살인과 다르지 않은 중범죄였다.


 그렇다면 도준이 말한, m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끌고 올라간 행위의 동기가 밝혀진다. 콧구멍에서 피를 흘리는 것, 월경하는 것, 성행위를 할 때 피를 흘리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각각 다른 기제에 의해서 발생한다. 하지만, 이는 ‘구멍에서 피를 흘린다’는 관념적 유사성에 의해 같은 범주로 묶인다. 이것으로 기행의 이유는 해명되었다. 그는 성적으로 무능하다는 비난에 답한 것이다. m의 몸을 증거물로.



- 억압


 성숙한 인간은 확립된 자아상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자신이 사회 속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격과 역사를 갖췄다고 믿는다. 따라서 아들을 살해하려 한 행동은 ‘살기 힘들었다’는 둥, ‘농약이 사실 약했다’ 는 둥의 변명으로 강력하게 치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들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따져보지도 않고 부정해 버린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충동은 욕망을 변형하여 특정한 행동으로 창출해낸다. 그 대척점에서, 인간의 특정한 관념을 억압하려는 노력 역시 방어 기제의 일부를 이룬다. 대부분의 자아는 진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충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억압 또한 사고와 행동을 낳는다. 충동과 억압은 각각 욕망과 양심의 편에 서고,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그 충돌이 격렬할수록 둘의 대체재 찾기 작업은 치열해지며, 개인의 비상식적인 행동은 증가할 것이다. 이렇게 무의식적 기제가 자연스러운 사고와 행동을 압도하는 단계에서, 강박적 행동이 출현한다.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강박 행동은 기본적으로 죄의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는 ‘억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방어 수단’으로 작동한다. 억압은 특정한 행동을 낳고, 그 행동은 계속 튀어나오는 충동을 강제적으로 은폐한다.


 도준은 살인을 저지르고선, 발작적 행동을 반복적으로 계속한다. 그 행동은 튀어나오는 살인의 기억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다. 강박 행동이 계속되면, 억압에서 기인한 행동뿐만 아니라 충동에서 기인한 행동까지 강박 행동에 무임승차하여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충동과 억압은 양가적 감정을 낳고, 양가적 행동을 부채질한다. 도준에게 M은 그가 욕망하는 대상이며, 동시에 금제에 따른 억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는 M을 사랑하는 동시에 그녀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이런 증상이 사회적으로 확장되면 의례적 행동이라 불릴 것이다. 따라서 의례적 행동은 인간의 본능적 충동을 억압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


 이제 이 의례에 대한 관념이 추상화되면 그것이 곧 종교의 내용이다. 그리고 의례는 종교의 제의로 포섭된다.


  흥미롭게도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대다수는 어떤 양식화된 신앙 체계 - 기독교, 불교, 또는 이슬람교 - 에도 포섭되지 않는 걸로 그려진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앞에서 제의의 내용에 종교성을 포함시켰다. 영화에서 종교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 종교의 정체는 무엇인가?



- 샤머니즘


 프레이저에 따르면, ‘관념의 만능’이 주술적 행동 - 인형에 못을 박는 등의 - 을 낳는다. 주술적 행동이 회를 거듭하면 주술을 전담하는 전문가가 나타난다. 주술사 계급이 출현하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지역에서는 주술사가 종교적 행사를 전담하고, 신(神)의 세계와 인간세계의 교량이 된다. 그들 식의 관념과 현실의 ‘소통’을 위해 그들은 독특한 제의를 양식화한다.


 이런 주술사를 퉁구스-만주어에서는 샤먼이라고 칭했고, 이 명칭이 이런 부류의 종교현상 전반에 붙여진 이름이 되었다. 한국은 이런 샤머니즘의 지배를 받았고, 어쩌면 지금도 받는 지역 중 하나다.


 한국에서 샤먼은 무당이라 불리고, 그들의 제의는 굿이라 불린다. 제의의 기초는 무당의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무아적 행동이다. 무당은 침묵하다, 곧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하고, 이내 미친 듯이 - 사실 실제로도 관념이 현실에서 독립한 상태에서 - 춤을 추어댈 것이다. 이 행동은 무의식적이고, 반복적이며, 발작적이다.


 한국인들은 강박신경증에 기인한 발작을 신기(神氣)라 불렀고, 신경증에서 기인한 종교를 역사 속에서 발전시켜 왔으며, 그 종교를 특수한 양식의 제의 - 춤 - 와 함께 신봉해 왔던 셈이다. 이런 샤머니즘적 특성, 즉 주술적 신앙과 매개자적 주술사를 양대 축으로 한 신념체계의 근본적 구조는 한국 역사에서 강인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샤머니즘을 타도하기 위해, 특히 조선 시대에, 엄청난 탄압이 있었건만, 민중의 확고한 관습을 뜯어고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왕실마저 주술의 유혹 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였으니. 외래 종교는 샤머니즘을 대체하긴커녕, 샤머니즘에 오히려 포섭되어 버리는 기이한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한국 종교의 기복성과, 교리보다는 인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성향은 샤머니즘의 그것이다. 종교의 머리는 공자, 석가인데 몸은 샤먼인 것이다. 오늘날 이런 기현상을 선도하는 신앙조직은 바로 한국 개신교다.


 샤머니즘은 때로 정치적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어느 국어학자는, 북한 공연단이 그들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모둠발로 뛰어 다가가는 영상을 제시한다. 그의 설명으로는 그런 건 무당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쯤 되면, 북한 인민이 지도자를 무슨 신주단지처럼 여긴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사정도, 물론 그보다는 양호한 수준이긴 하지만, 정치를 기복적으로 바라보는 국민의 근본적 사고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은 매우 종교적이다.


 이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춤의 제의적 성격에 대한 답이 나온 것 같다. 샤머니즘이 있다면, 당연히 샤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영화에서 샤먼은 누구인가?



- 샤먼


 샤먼은 춤추는 사람, 곧 M이다. 그 이외에도 M은 그 자신이 샤먼, 적어도 한국 역사 속에서 무수히 등장했을 샤먼의 망령 정도는 된다는 증거를 여기저기 남기고 있다.


 일단 두 번째 시퀀스부터, M은 ‘작두’로 ‘약초’를 썰며 앞으로 닥칠 불행을 ‘예감’하기라도 하는 듯 도준을 바라보고 있다. 작두춤은 무당의 필살기다. 약초는 M의 주업이 무당처럼 치료라는 걸 암시하고, 행과 불행의 예감은 M이 (주관적으로나마) 예지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M은 침을 들고 다닌다. 침은 무당의 칼이나 방울과 같이 남성기의 상징이다. M이 진태의 집으로부터 돌아오는 장면에서, 골프채에 비닐장갑을 씌워 하늘로 든 모습은 솟대를 연상시킨다. M은 동반자살이 성공했으면 지금쯤 하늘나라 꽃밭에서 아들과 놀고 있을 텐데, 라고 사진사 아낙에게 말한다. ‘하늘나라 꽃밭’은 무당들이 소위 ‘신내림’의 고통을 겪을 때 일반적으로 저지르는 망상 중 하나다. 또 M은 삼신할미처럼 아낙에게 애 낳는 약을 지어 주겠다고 한다. 이 아낙은 가족은 아니지만, M과 친(親)하다. 그뿐 아니라 젊은 남자들은 M을 어머니라 부른다. 곧 그녀는 대모이다.


 여자 샤먼은 대개 신과 결혼하고, 그의 아이는 신의 자식이 된다. 물론 이온(Ion[각주:1])의 말마따나[각주:2], 그것은 불특정한 남성과의 성행위를 은폐하는 변명일 뿐이다. 그렇다면 샤먼은 심정적으로 정절과 방탕의 양 극단을 오가게 된다. 이것은 정확히 m의 모습이다. 그 과정에서 m에게 가해진 심적 외상은 신경증을 낳을 것이고, m의 노년은(살아만 있었으면) 아마 M과 비슷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 따라서 m은, 도준이 M에게 가지는 양가감정을 투사하기에 매우 적절한 대상이라고 해야겠다.



- 트리니티


 M의 사회적 위치는 대모다. 이 지위는 어쩌면, 그 옛날 수렵공동체 시절부터 늙은 여성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되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사회는 엄청나게 변화했다. 이제 사람들은 물신을 섬기고 박정희나 김일성이란 대부를 섬기지, 더는 어머니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게다가 옛날 큰어머니의 지위는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었다. 프레이저의 주장대로, 성스러운 것은 엄청난 절제와 불편을 요구한다. 설상가상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대우는 값싸지는데, 억압만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이유 때문에라도, M에 대한 설명을 대모로만 마무리하면 안 된다. M은 단순히 사회에서의 지위만으로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는 어쩌면 그 이전에 한 가정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그보다 더 이전에 하나의 인격을 가진 인간이다. 우리가 보는 그녀의 모습은, 사회-가정-개인의 차원에서 발견되는 세 가지의 위상의 혼합이다.


 개인으로서의 그녀는 독자적 인격을 가진다. 또 인간이라면 당연한 여러 가지의 욕구를 지니고 있다. 정사를 주시하는 그녀의 눈을 기억하라. 그녀에게는 엄연히 성욕이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가정과 사회의 차원으로 가면 이 모든 욕망이 부정되고, 가족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이상적인 어머니상만 남는다.


 하긴 희생하는 건 어쩌면 남자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는 술집에서 여자를 끼고 ‘법률적 대박’을 외칠 수도 있고, 재물로 여고생을 살 수도 있다. 불법이지만, 세상이 법대로 돌아가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하지만, 여성에게는 상대적으로 모든 게 가혹하다. 게다가 늙으면 불륜의 가능성마저 사라져버리고, 아들만 바라보고 살 수밖에 없다. 도준은 M과 같이 ‘자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찾는다. 하지만, M이라고 어찌 그런 관계에 만족하겠는가. 그러나 M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 춤


 기층 민중들의 개개인은, 특히 여성들은 남을 위한 삶을 강요당하고, 욕망, 특히 성적 욕망은 터부시된다. 영화에서 M이 겪어야만 하는 내적 고통의 본원적 구조는, 현실 사회체제가 어느 개인에게나 부여하는 것이다. 금제를 부인할 수 있는 권력이나 대담성을 갖지 못하는, 예외일 수 없는 이들에게. 따라서 M에게 지워진 억압의 운명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이 땅의 모든 여성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이것으로 M의 이름은 일반명사에 합당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M의 고통을 보라. 이 극악한 고뇌를 어찌할 것인가? 프로이트는 인간이 정신병에 빠지지 않고, 그 충동을 사회적 현실 안에서 구현하는 3가지 방식을 제시한다. 그것은 예술, 종교, 철학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서사시를 창작했고, 유대인들은 종교를 창안했다.


 어쩌면 우리 민중도 그처럼 어떤 창조적 소산을 제작하고 전승해 오지 않았을까. 그것 중 하나가 아마 춤이었으리라. 춤은 억압에서 기인하지만, 이내 인간의 모든 추억과 감정을 탑재한 채 시연된다. 그 행위는 죽음과 대결하여 감정을 산화시키고, 자아는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춤은 민중이 생존하기 위해 취해 온 하나의 방법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예술은 그리스나 유대의 그것처럼 고도의 기교를 갖추지는 못한 것 같다. 게다가 그나마 전승해 왔던 것들마저 위대한 ‘일본인’들이 모조리 멸절시켜 버렸다. 이제 옛 방식은 고고학자들이나 관심을 보이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역사에서 어찌 위대한 가인 - 김혜자 씨는 분명히 그들과 비할 자격이 있다 - 한둘이 없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의 춤은 기록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재현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기록하지 않고 있던 것에 대한 재현이기도 하다.





  1. 유리삐드의 비극 "이온"의 주인공. [본문으로]
  2. οὐκ ἔστιν: ἀνδρὸς ἀδικίαν αἰσχύνεται. 341행.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