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다지 아름다운 기억 같은 건 없긴 하지만, 보통 은사라고 하는 분을 비난하긴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그분에게는 날 가르쳤다는 사실을 넘어 나란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생소하겠지만. 어쨌든 취임사를 보니 고려대학교는 민족이란 간판달기를 확실히 때려칠 것 같다. 간단히 홈페이지만 들어가 봐도 확실한 사실처럼 보인다. 민족이란 '급진적인' 단어는 어쨌든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이란 이름을 입에 담는 인간치고 좀 멀쩡하기라도 한 인간은 도대체 보질 못했으니까. 게다가 대학 입장에서도, 민족보다는 시장경제, 세계화 같은 게 요새는 더 잘 팔릴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이상은 전부 다 헛소리다. 모조리 잊어주길 바란다. 나도 오늘 저녁이면 잊을 거다. 많이 빗나갔는데, 어쨌든,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학교 어느 건물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 하나다.
포스터엔 체 게바라(Ernesto Guevara de la Serna)의 사진이 있었다. 아래 사진으로 기억한다. 그의 모습은 파란색으로 염색되어, 이런저런 문구들과 같이 건물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 문구들은 무엇을 선전했을까? 그의 사진을 이용해서. 포스터는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을 외쳤을까? 세계 인민들의 연대를 호소했을까? 혹시 '제3세계', 라틴아메리카의 '해방' 같은 걸 이야기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학교 어딘가에서, 그가 가졌던 '이상'을 조촐하게 회고해 보는 자리라도 마련하자는 것이었을까? 안타깝지만 다 틀렸다.
포스터의 선전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체 게바라가 청년 시절 여행했던 코스를 따라 관광상품을 기획했습니다. 이 상품에 관심 있는, 열정 넘치는 대학생들을 모집....."
나는 그 문구를 보고 '체 게바라 평전'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알베르토와 여행을 하던 에르네스토는 어느 교수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된다. 진보적인 사상의 지식인으로, 좌천 비슷한 상태로 벽지에 머물러 있던 교수는 일행을 환대한다. 식사자리에서 교수는 자신의 고산지대에 대한 경험담을 엮어 썼다며, 책 한 권을 건넨다. 비현실적인 낭만으로 세상을 채색한, '허풍스러운' 책을 보고 에르네스토는 말한다. 교수님 같은 분이 어떻게 민중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는 이런 '비생산적'인 책을 썼는지 모르겠다고.
그 대목을 떠올린 동시에, 나는 물신주의의 위대한 승리가 지상에 도래했음을 느꼈다. 저 포스터를 보고 남미에 간 대학생들 중에 누구 하나가 에르네스토와 같이 지상의 모순을 느끼겠는가. 치열하게 고뇌하는 인간 하나 없이, 그저 마추픽추에서 돌더미나 쌓고 티티카카에서 호수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다. 나는 이제 체는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아니 적어도 여기에는 없구나, 하고 소리 없이 외쳤다.
체의 사진도 팔아먹고, 그의 이상도 팔아먹고, 그의 인생을 기록한 책도, 색색의 화보나 다이어리 같은 것까지 끼워 팔아먹는다. 이런 어쩌면 비열하면서도 대개는 모범적인 행위들은 너무나 당연해져서, 이제 일일이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를 힘도 남아 있지 않다. 대학은 당당히 교육을 팔고, 정부는 정책을 팔고, 기업은 인간을 팔고, 머지않아 북한도 침공해서 팔아먹을 거고, 언젠가는 달나라나 별나라도 흰개미떼처럼 달려들어 모조리 팔아먹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믿음이나 사랑 같은 것도 계량해서 가치를 매길 수 있을 테니, 굳이 소중하게 간직할 필요는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