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국어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연극의 유파는 관객이 작품에 '몰입'하는 게, 작품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가로막는다고 믿는단다. 그래서 그들의 연극에서는, 관객의 주의를 의도적으로 분산시키는 소품 - 예를 들면 심각한 장면이 펼쳐지는 가운데 한쪽에서 복싱 라운드걸이 등장한다거나 - 을 개입시킨다고 한다.
밤에는 감정이 과잉된다. 또 추억은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오버플로우시키는지도 모른다. 영화 자체도 꽤 감정적이다. 영화를 보고 있을 때 너무 '몰입'한 나머지, 내가 필요 이상으로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면, 5년이나 10년쯤 지나서, 맹한 정신으로 영화를 분석한 다음에 글을 써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뭐... 어쨌든 변명은 이 정도로 끝내기로 하자.
며칠 전, TV에서 이 영화를 방영했고, 그 때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보았다. 누가 "TV는 바보상자다"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완벽하게 틀린 말이었다. 어느 날 책장에서 로알드 달의 동화를 발견했을 때의 그 놀라움만큼, 한국에도 이렇게 뛰어난 영화가 있었구나 하는 찬탄이 나올 정도였다. 진중권이 말했던 "수준높은 영화적 담론"이 정말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영화에 감탄했다. 몇몇 사람들이 '최고의 한국영화'라고 칭하는 걸 들어, 높은 기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지만, 영화는 찰랑거리는 나의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어 버렸다. 사실 수면 위의 세상이 존재하리라는 건 전혀 예상 밖이었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결말을 선사하는, 특이한 구조다. 1999년 '현재'의 사건은 한 인간이 가진 이야기의 종언을 고한다.
영화는 'XX회'란 친목단체의 사람들이 강가로 야유회를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람들이 잘 놀고 있는 마당에, 뭔가 좀 이상한 상태인 영호가 갑자기 '출현'한다. 영호도 사실 같은 동네 출신인 모양으로, 사람들은 영호에게 '왜 여태까지 연락이 없었냐'며 치사를 한다. 'XX회'란 단체의 사람들과 영호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들의 야유회와 '영호'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단체는 구성원에게 암묵적으로 획일성을 강요한다. 야유회에는 당연히 야유회에 걸맞는 제복 같은 옷차림, 소주와 고기안주, 노래방기기와 신나는 '뽕짝', 이리저리 흔드는 춤판이 등장해야 하고, 모든 사람들은 그 암묵적인 룰에 따라야 한다. 양복 차림에, 술에는 입도 안 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고 청승맞은 노래를 불러대는 '영호'는 '이방인'이다.
결국 '영호'는 그 모임에서 '배제'된다. 모임은 다시 암묵적인 룰에 의해 운영되고,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가운데 영호는 강 다리 위 철길로 올라간다. 영호는 왠지 모르게 매우 흥분해 있고, 기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영호는 자살하려는 듯 철길에서 허우적대지만, 기차는 다행히 영호의 옆쪽 철길로 지나간다. 잠시 걱정하던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그에게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기차가 달려온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달리는 기차 속에서 바라본 풍경이 보인다. 거꾸로 움직이는 사물들. 이윽고 영화는 사흘 전이라는 시간을 제시하고, 영화상으로는 바로 다음의, 시간상으로는 조금 예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는 장면 묘사에 충실하다. 야유회 장면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위에서 암묵적인 룰을 말했지만, 그런 룰 자체도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일상적이다. 그런 일상적인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는 영호를 '배제'시키는 모습 역시 일상적이다. 노래방기기 같은 소품들, 조연들의 연기는 실제의 그것과 동일하다. 정말 강가로 놀러 나온 평범한 사람들의 광경, 영화는 그런 일상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반면에 영호의 기행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일상적이기에, 더더욱 튀게 된다. 주연 배우는 그런 게 없어도, 관객의 눈길을 엄청 끌 만한 광기를 빼어나게 연기하고 있지만 말이다!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장면을 매우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영호의 기행에 관심을 기울인다. 영호의 행동을 찬찬히 살펴보니, 제정신이 아닌 것도 같고, 뭔가 쌓인 울분이 있는 양도 하다. 관객들이 '어째서 저런 행동을 할까'하고 궁금해하고, '의문'이 더해가는 순간에, 적절한 파국이 다가온다.
멀리서 기차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설마 기차에 치이지 않을까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잠깐 주어진다. 기차가 '일단' 옆 철길로 지나간다는 설정은 매우 효과적이다. 관객의 긴장을 잠깐 이완시키는 동시에, 다음에 달려오는 열차는 '영호'을 끝장내 버릴 거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부여하니까. 곧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 속에서 내질러지는 한 인간의 절규는,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곧이어 달리는 열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펼쳐진다. 거꾸로 움직이는 사물들을 보며, 관객들은 화면이 시간을 과거로 거스르며 움직인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뒤이어 선사되는 '영호'의 3일 전의 이야기에서, 관객들은 의문에 대한 약간의 해답을, 그리고 또 다른 의문들을 얻게 될 것이다.
영화가 마치 무관심한 듯 늘어놓는 장면들은, 앞으로 등장할 과거의 사실과 기묘하게 연관된다. 화면에서 지금 보여지는 장면은 과거 사건들의 결과인 동시에, 영화가 나중에 보여 주려고 하는 과거 사건들에 대한 복선이 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영호의 절규는 과거의 불행했던 사건들의 결과이고, 그 불행했던 사건들을 영화는 제시할 것이다. 관객은 세세한 장면 하나하나를 기억해야 한다.
장면들의 연결고리는 매우 치밀하다. 영화에 집중하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장면을 떠올리고, 연결고리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치밀한 구성 덕분에, 영화에 집중하는 것 역시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물들은 가끔씩 헛소리를 지껄인다거나, 뜬금없는 행동을 벌일 것이고, 그럴 때는 잠시 웃어줘도 된다. 하지만 영화가 그렇게 잠시 분산된 긴장들을, 무섭게도 차곡차곡 저축하고 있다는 걸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짜고 풀어나가는 감독의 능력뿐만 아니라, 화면의 주인공인 배우들의 연기 역시 뛰어나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조연들의 연기조차 거의 완벽하다. 군산 술집 아가씨의 연기가 좀 실망스럽긴 했지만. 야유회에 나온 친목회원들은 정말 놀러 나온 사람들 같고, 경찰역을 맡은 배우들은 (늘상 보는) 닳고 닳은 직장인 행세를 하며, 군인들은 진짜 군인들처럼 행동한다.
주연급에서 문소리나 김여진(어린시절은 분장으로 커버가 어려워 보였지만)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설경구의 연기는 압도적이라고까지 할 만하다. 각 챕터(:영화는 7개의 나름 완결적인 조그만 이야기들로 이루어진다)마다 '영호'의 성격과 심리상태는 상당히 변화한다. '처음'의 순수한, '중간'에서의 죄책감에 일그러진, '마지막'의 광기어린 모습들. 그런 각각 다른 모습을 모두 빼어나게 연기했으며, 각각의 연기는 기막히게 연관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인과를 느끼게 한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연기는 관객의 오감을 사로잡고, 감독으로 하여금 터무니없을 정도로 긴 롱 테이크를 주저하지 않게 한다.
영화의 배경은 매우 특수하다. 산업화, 학생운동이나, 5.18 민주화운동 같은 '배경'은, 만약 외국인이라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아마도 몇 세대가 지나면 '한국인들'조차도 생소하게 여길 것 같은 소재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특수성'속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성'을 잘 그리고 있다. '영호'는 대단히 독창적인 인간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그가 겪는 특수한 상황은, 때와 장소에 따라 그 모습만 달리할 뿐, 대부분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내재하는 개인에 대한 권력의 폭압을 암시한다.
'아름다운 사람'이 사회의 폭력적 기제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억눌린 감수성의 암적인 팽창이 어떤 '파멸'을 초래하는지. 그가 겪는 그런 '변화'나 '파멸'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그의 비극은 보편성을 지니며, 적어도 그런 '특수한 상황'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현실적이다. 비록 다른 환경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자세한 이해가 어렵더라도, 마치 그런 특수함을 소유한다는 것이 어떤 추억처럼 여겨져, 왠지 이 영화에 더 끌리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