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과사전에 등장하는 마녀사냥의 사전적 정의는,‘하나의 정치적 신조를 절대화하여 이단자를 유죄로 만드는 현상’이다. 여기서 잠시 착각하면 곤란하다. 위 문장의 요점은마녀에 있는 게 아니다.
중세 유럽에서 행해졌다는 마녀샤냥은, 그것이 곧 마녀사냥이란 말을 지칭할 정도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흔히 마녀사냥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전성기에 자주 행해졌으리라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최악의 학살극이 벌어진 시기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였다고 한다.
보카치오는 1350년경 데카메론을 저술한다. 단테의 신곡은 1321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린 게 1504년께.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해가 1532년이다. 마녀사냥의 광기는, 14세기 르네상스의 여명이 찾아오고 정말 한참이나 지나서야 폭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녀사냥의 요점은, 하나의정치적 신조다. 사냥의 대상이 무엇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지구가 평평하다던 종래의 믿음은 깨어졌다. 갈릴레이와 케플러에 의해, 지구 주위를 행성이 공전한다는 천동설도 잘못되었음이 밝혀졌다. 흑사병의 충격으로 중세의 장원 제도는 치명타를 입고 와르르 무너졌다. 신의 대리인, 지상에서의 절대자였던 교황의 권위도, 1517년 루터의 비판 이후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부흥으로 바닥으로 내팽개쳐진다.
프랑스에서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대립으로 한바탕 학살극이 일었다. 독일은 정도가 더 심해 전쟁통에 인구의 삼분의 일이 저세상으로 갔다. 동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든 터키의 침입도 서방에 공포를 더했다. 신대륙 발견 이후 급변하는 화폐가치도 일반인들에겐 골치였다. 거기에 더해 흑사병은 종종 찾아와서 온 세상을 폐허로 만들었고, 가끔씩 기상이변이라도 일어나 농사라도 망치면 현실은 곧 지옥이었다.
불행이 찾아오면 으레, 사람들은 불행의 원인을 찾는다. 사건의 근원에 대해 품는 호기심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비극의 원흉에 대한 복수심 역시, 인간이 가진 본성 중 하나일 것이다.
농민들은 비탄에 빠져 생각할 수 있다. 천재지변과 전염병은 어찌할 수 없는 거라 치자. 하지만, 영주들이 전쟁을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좀 살기가 나아지지 않을까. 지주들이 착취하지만 않는다면 굶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교회가 십일조만 뜯어가지 않으면 좀 덜 빠듯할 텐데.
사람들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적어도 그건 분명진실이니까. 그러나 진실이란 게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건 항상, 지배층에게는 불리한 것이다. 천한 것들은 절대 진실을 알아서는 안된다. 심지어 지배층 자신들조차도 진실을 감히 말하거나 해서는 안된다 - 단지 마음속 깊은 곳에만 담아둬야 할 뿐.
흔히 지배층은 믿음에 호소한다. 고난마저도 신의 은총이니 감내하고 감사하며 또 기도하면 천국은 곧 너희의 것이니라. 할렐루야, 오오 하느님 아버지의 양떼들이여, 믿습니까! 하지만 과학의 발전과 종교개혁의 여파로, 사람들의 믿음이 예전같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
지배층은 괜찮은 아이디어를 발견했다. 가해자를 찾아내면 되는 거다. 자, 병마를 퍼뜨리는 자, 폭풍을 불러 논밭을 망가뜨리는 자, 악마와 교제하여 온전한 사람들의 영혼을 어지럽힌 자,
찾았습니다. 대체 누굴까요? 그건 바로,마녀랍니다!
자, 여기 너희들의 적을 찾아냈어요! 이 마녀들 때문에 당신들 인생이 그렇게 고달픈 거야. 그리고 그들은 신의 적이고, 교회의 적이고, 기성 질서의 수호자인 우리들의 적이기도 하지. 우매한 민중들이여, 이제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내린 임무를 맡아 성실하게 수행하겠어. 마녀를 찾아 공정한 재판을 거쳐 심판하겠노라!
그런데 마녀나 악마라던가 하는 게 세상에 있을 턱이 없다. 안타깝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군역에 복무하신 분이라면 쉽게 알 수 있을 터, 군역에 복무하지 않으신 분이라도 물어본다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터, 없으면 만들어 내면 된다.
결국 제일 만만한 여성들이 희생양으로 선택된다. 중세의 재판은, 많이들 아시겠지만 각본 있는 드라마다. 그렇게 미개하던 유럽인들이 근대적인 소송질서를 만들어 낸 걸 보면,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와 무릎 꿇고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어쨌든 고문이 성행하는 재판에서는 대개 유죄 판결이 나오고, 혐의없음 결정이 나온 여자들은 박살난 몸을 이끌고 돌아간다. 그리고 무고한 사람들은 자기 이웃들의 부인들과 딸들을 처형하면서 복수심을 풀고, 기묘한 만족감에 젖는다. 이렇게 사회는 잠시 유지된다.
이런 처방은 진통제에 불과할 뿐 사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저번에 마녀를 처형시켰는데, 왜 아직도 세상살이는 개판이지? 이런 질문이 쇄도하면, 아 그게 아직 못 죽인 마녀가 있더라구, 라는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누군가를 또 죽이고, 시간이 지나 누군가를 또 죽이고, 세상살이가 개판이면 개판일수록, 사람들의 불만이 심하면 더 심할수록, 더 많은 마녀를 처형시키는 수밖에 없다.
함의와 암시가 판치는 이런 막장의 무대는, 마치 아프리카나 폴리네시아 토인들의 제례의식을 보는 듯하다.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긴 하다. 아프리카 주술사들은 여인네들을 죽이거나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