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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

지엽말단




#1 피해자

 노무현 전 대통령만한 사람이 있었을까. 그만큼 달변이며, 그의 말로 인해 성공을 거두고, 또한 말로 인해 화를 입은 이가.

 그의 거침없는 언행은 어떤 이에게서는 열광을, 어떤 이에게서는 우려를, 어떤 이에게서는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일반의 의견을 종합하면, '노무현 그는 말은 잘했으나 너무 신중하지 못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국민 여러분은 이에 동감하실 것이다. 하지만,

 나는 노무현 그가,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부당하게 비난받았다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표현해도 좋다. 그러니까 노무현은 말실수에 대해서는 도덕적 잘못이란 게 전혀 없다.


 가령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다 깽판 쳐도 괜찮다" 를 보자.

 이것은 무슨 뜻인가? 남북대화만 성공시키고 나머지를 모두 깽판쳐야 한다는 말인가? 소위 '언론' 들은 이 말을 그렇게 포장해댔고, 많은 사람들이 그 궤변에 솔깃했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남북관계가 대단히 중요하다', 또는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있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앞뒤 맥락을 놓고 볼 때 이는 매우 자명하다.

 물론 남에게 괜히 트집잡힐 말을 왜 하느냐고 주장할 분도 계시겠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공학의 관점이다. 가령 공주님처럼 애초에 말을 안 하면 - 이것은 민주주의의 이념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 트집잡힐 건덕지가 없다. 민주주의는 되도록이면 시끄러워야 하고, 언론은 곡해 없이 여러 말들을 성실하게 전달하여야 한다. 곧 세상이 정의롭다면 아무도 트집을 잡을 리가 없다.

 그러니 팩트를 왜곡해대는 미친놈들을 고려해서 말을 가려야 한다는 주장은 도덕의 문제를 논하는 게 아니다. 그런 도덕률이 세상에 어디 존재할 리가 없다. 따라서 노무현은 정치적 실수를 했을지언정, 도덕적 과오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지엽말단을 가지고 전체의 뜻을 왜곡하고 얼토당토않은 비난을 퍼부어대는 정신병자들 덕분에, 노무현은 대단히 고생을 했다. 그것도 평생. 기일은 지났지만, 다시 한 번 그의 명복을 빌어볼까 한다.



#2 사건

 그런데, 다시 한 번 유감스럽게도, 그의 이름을 달고 다시 지엽말단의 괴수가 출현했다. 바로


 에 얽힌 이야기 되겠다. 이 기사의 원래 제목 문구는 "DJ의 유훈통치와 '놈현'의 관 장사를 넘어라" 였다. 그런데 나중에 제목을 바꿔서, 보시는 대로 많이 '순화'되었다. 아직 안 읽어보셨으면 찬찬히 한 번 읽어보시라.

 이 기사는 엄청난 폭풍을 몰고 왔으니,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필화사건'이라고 불리는 모양이다. 어쨌든 한겨레는 바로 다음 날 사과문과 반박기사를 실었다. 다음의 링크 기사를 참조하시라.


 유감스럽게도 사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아,


 위에서 보시는 대로, 유시민 전 장관의 '절독선언' 이 이어졌고, 다음과 같이


 편집국장의 사과로 온건하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위에서 보시는 대로, '사건'이 낳은 논란은 계속되는 모양이다. 잘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보통 한겨레 사이트에는 수백 개 리플이 흔하게 달리지 않는다.

 정말 찌질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다! 이게 굳이 얘기할 가치가 있는 건일까, 심각한 의문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가치있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 건 아니고, 또 언제나 가치있는 글을 써 온 것도 역시 아니기에, 논란의 불씨가 다시 타오른 틈을 타 기름이라도 부어볼까 한다.



#3 도둑떼들

 언어는 고정적이지 않다. 고등학교에서 배우셨겠지만, 단어의 의미는 변화하며 어떤 고유한 값을 갖고 있지 않다. '어리다'란 말이 어리석다는 의미를 가질 때가 있었고, 광대라는 말에 지금으로서는 쉬이 상상하기 어려운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을 때가 있었다.

 영국의 정당사는 그런 의미에서 좀 흥미롭다. 영국의 정치는 제임스2세의 왕위계승을 놓고 반으로 갈렸는데, 이것이 영국이 자랑하는 양당제의 시원이 된다고들 한다. 몇몇 분들이 '민심'이니 뭐니 하는 걸 들먹이며 무슨 민주주의의 당연한 양태인 양 떠들어대는 그 2대정당제 말이다.

 그런데 이 2개 당파의 이름은 그리 아름답게 지어진 게 아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인들은 상대편에게 폭도니 건달이니 하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 와중에 보수적인 쪽은 대개 토리로, 개혁적인 쪽은 대개 휘그로 불리게 되었고, 어느 사이엔가 그것은 당의 이름으로 굳어져 버렸다. 이 고상한 명칭들은 각각 '아일랜드 카톨릭 유적떼', '(국체를 부정하는) 스코틀랜드 말도둑떼'를 의미했다.

 자기네들의 이름에 나름대로 불만은 있었겠지만, 영국의 정치인들은 꽤 오랫동안 이 이름들을 사용해 왔다. 한국으로 치면 양대 정당의 이름이 '보부상당', '빨치산당'인 격이랄까. 현재의 보수당은 사실상 토리당을 계승한 당이기에, 토리라는 이름은 지금도 흔히 보수당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위는 '토리당의 블레어'라고 불린 보수당 당수에 대한 기사다. 안타깝게도 위 기사만으로는, 캐머런이 트위터로 'BBC 수신료 납부 거부' 따위를 선언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휘그당의 후신인 자유당의 경우도 비슷하다. 원래 자유란 말은 보다 부정적인 어감을 지녔으며, 자유주의자란 명칭은 휘그당 급진파를 비난하기 위한 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급진파가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해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기야 좌파니 사회주의니 하는 이름도 한국에서는 대단한 증오와 멸시가 담겨 있는 말이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를 자신의 이름 앞에 즐겨 달지 않는가.

 그러니까 그 어느 말도 원초적인 금기를 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이름에 숨긴 지독한 악의는 점점 퇴색하여 장난처럼 여겨질 수 있다. 토리당의 경우처럼.

 또한 가치관이 변하면서, 어떤 단어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또는 부정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흔히 나쁘게 여겨졌던 단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세상의 가치를 혁명적으로 전도시키려 할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의 경우처럼.



#4 금칙어

 이제 '사건'을 낳은 기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서해성은 어째서 '놈현'을 사용했는가?

 먼저 대담을 2줄요약해 보자. 이 대담은 대략


 1. 현재의 소위 '민주개혁세력'[각주:1] 정치인들은 대략 병X

"심슨가족" 시즌 20, 19화.



 2. 김대중과 노무현의 《    》을(를) 본받아야 한다


 로 축약이 가능하다(녹색 괄호 안을 채워 보세요). 어떤 이유로 하여 XX이라고 주장하는지는 본문을 읽어보면 전부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이 그들과 어떤 면에서 달랐는지도 본문을 읽어보면 전부 알 수 있다. 물론 그 '사실'들은 대담자들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 것뿐이긴 하다.

 어쨌든 이 대담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치적 수완에 대한 찬양에 가깝다! 그들이 어떤 과오를 저질렀다고 암묵적으로 동의는 하고들 있지만, 딱히 그걸 지적하거나 결연히 비판하지 않기에, 제3자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치사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노무현을 비하했다고 거품을 무는 분들이 많은 걸까?

 여기서 서해성의 '시도'가 너무 고차원적이었던 것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적어도 노빠들한테는 그렇다. 내 생각대로라면, 서해성의 '놈현'드립은 위에서 지적한, '단어를 다르게 씀으로써 일반의 가치관까지 변화시키려는 노력' 의 하나다. 물론 그렇게 혁명적이고 뭐 그런 것까지 의도한 건 아닌 것 같다만.

 '놈현'은 노무현의 'Raw' 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수사였다. 이건 그 자체로 악독한 말이 아니다. 물론 거기에 여러 악의적인 함의가 들러붙긴 했다. 하지만 그 함의는 노무현의 세련되지 못한, 날것의 이미지로 말미암아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런 이미지를 낳은 것은 노무현의 출신, 행적, 그리고 결정적으로 말(言)이었다. 조중동의 독자들은 그런 이미지 때문에 노무현을, 어쩌면 그런 이미지 자체를 증오했고 멋대로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서해성이 작금의 현실을 보니, 현재 '민주개혁세력'의 가장 큰 결핍은 악이요 깡이요 투지더라, 이거다. 그들이 본받아야 할 것은 노무현의 어떤 기질이다. 그런데 그런 기질들은 노무현의 '적'들이 노무현을 비난하기 위해 썼던 '놈현'이란 말에 잘 드러나 있더라. 기질 자체는 나쁜 게 아니며, 그런 노무현의 기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순간 '놈현'이란 말의 부정적 인상도 반전된다.

 라고 서해성은 생각했겠건만, 노빠들은 전체의 뜻으로 지엽말단의 의미를 파악하긴커녕[각주:2], 단어 하나에 들러붙은 인상을 갖고 대담 전체를 재단해대기 시작했던 거다! 아니, 시종일관 노무현을 위대한 사람이라며 바쁘게 찬사를 보냈는데, 빠들은 갑자기 무슨 고인을 모독했다고 '깽판'을 놓기 시작하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리라. 뭇 노빠들은 서해성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했던 거다.



#5 반성

 하기야 어딜 가든 모자란 인간은 넘쳐나기 마련이고, 모든 사람에게 꼭 대단한 지적 소양이나 언어적 감성을 요구하는 건 부당한 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렇다면 독해력이 부족한 여러 분들에게 차마 실례가 될 말은 쓰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고[각주:3], 그런 의미에서 한겨레의 사과는 굳이 차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예의를 차린 셈이 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정말 그 '반론'이며 '절독선언'은 가관인지라, 꼭 이런 양반들에게까지 그 '사과'란 걸 해야 할지는 나 같은 제3자가 봤을 때 상당한 의구심이 드는 문제다. '반론'을 보면 "비속어나 자극적이거나 튀는 표현으로 하게 되면 반감을 사게 됩니다. 하수들이 쓰는 방법입니다." 운운하는데, 그런 고매하신 예절의 신봉자인 필자께서 왜 '하수'라고밖에 볼 수 없는 분의 재단 사무총장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유시민씨는 노무현의 후예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그 자신이 널리 알린 탓도 있을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의 여러 난리통 속에서 야권의 단일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당선과는 좀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어째서 유시민씨는, TV토론 후 '전혀 가망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던 한명숙씨보다도 선전하지 못했는가? 경기도에서는 진보신당이 발목을 잡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뭔가 문제가 있긴 있었을 것이다. 그 '뭔가'를, 이 '대담'이 완벽하게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그런데 유시민씨의 대응은 고작 말꼬리잡기가 아니었나 의심이 가는데, 이런 행동은 언젠가 어디선가 우리가 자주 보아 왔던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긴 이쯤 되면 대통령 각하의 고견이 우리의 가슴 속에서 새록새록 떠올라야 한다. '국민들은 반성하는 모습이 없어도 너무 없으며 반성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각주:4].' 이런 민족적 결함은 (각하는 물론이거니와) 유시민씨에게도 해당되는데, 이는 무슨 유시민씨가 관을 사고팔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유시민씨의 평소 언어생활에 대해서다.






  1. 실제 한국 정치판을 분류하는 일반적(얼마나 일반적일지는 모르겠다만) 기준에 따랐다. 즉 사상적으로 보수(한, 자선)/민주개혁(민주, 국참)/진보(민노, 진신). [본문으로]
  2. 아무래도 이 부분이 여러 노빠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본문으로]
  3. 그렇다면 대체 신문기사의 수준이 어디까지 유치해야져야만 할지 상당한 고심이 필요하겠지만. [본문으로]
  4. 대통령 각하의 촛불집회 관련 국무회의 발언(5월 11일)에서 채록. 실제 발언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