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이미 '역사적 단계'에 들어선 판국이니, '역사'란에 이 글을 넣기로 한다.
노무현 대선후보자 시절, 그렇잖아도 '불안하다'는 이미지로 떡칠되어 있던 노무현의 가장 불안한 점으로 꼽혔던 건 외교력이었다. 극우언론은 노무현을 지독한 반미세력이라고 비난했다. 여중생참사의 후광을 업고 무대에 오른 기회주의자라고 비난을 일삼았고, 심지어 미국에 '제대로' 다녀오지 않은 것까지 까곤 했다.
어차피 노무현이 반미 어쩌고 하는 건 다 헛소리다. 반미감정의 득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당시 이미 깃발과는 다른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다른 이유에서 그의 '외교력'을 불안해했다. 별다른 이유가 아니라 외교는 꽤 전문적인 기량이 요구되는 분야다. 영어실력이 모자란 건 뭐 그렇다치고라도, 협상이라는 전쟁터에서 노무현이 제대로 역량을 보여 줄 수 있을지가 좀 의문이었다.
당면과제인 북한문제는 엄청난 균형감각이 요구되었다. 최우선적으로 전쟁을 막아야 했고, 북한과 미국을 협상대로 끌어내는 동시에 주변국들까지 포함한 컨센서스를 이끌어내는 걸 최종과제로 삼아야 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하기엔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미, 중, 일, 러 당사자들은 제각각 꿍꿍이가 다르고, 다들 파워는 엄청난 반면 인간 목숨은 파리처럼 여겼다. 게다가 미국과 북한은 국익보다는 특정집단의 정치논리에 휘둘리는 형편이었고, 결정적으로 인내심마저 형편없었다.
그런데다 되도록이면 목소리는 크게 내고 권리는 많이 얻으며, 지출은 적어야 한다. 노무현은 이런 복잡한 문제를 제대로 풀어갈 수 있을까? 경험부터 많이 부족해 보였다. 내가 의구심을 품었던 건 당연했으리라.
하지만 노무현은 유일한 대안이었다 - 반대편 정당은 균형감각이란 것 자체가 없었으니까. 많은 걸 바라는 것보다, 일단 전쟁부터 막는 게 시급했다. 항구적 평화고 개혁개방이고 뭐 하다보면 잘 되겠지, 라고 막연하게 소망할 수밖에.
5년이 훌쩍 지났다. 노무현은 놀라울 정도로 잘 해냈다. 과연 그게 최선이었을까는 여전히 의문이 들지만, 나보고 하라고 했어도, 아니 다른 어떤 사람보고 그런 외교문제를 처리하라고 했어도 더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이 미국의 깃발 안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지만, 노무현 행정부는 전쟁을 막고, 북한과의 대화노선을 텄으며 컨센서스를 구성하는 데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가장 위험시되었던 북한의 핵 위협과 미국의 침공위협은 상쇄되어 사라졌다. 일단 반영구적으로 유지될 평화체제를 구축했다는 데에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노무현 행정부는 덤으로 국제관계에서 한국에게 이성적인 파트너의 지위를 얻어주었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바람직한' 교우관계가 이들 중 무엇인지 꼽아보라 - 첫째. 파트너에게 돈줄로 취급되는 사람. 둘째. 파트너에게 하인이나 종으로 취급되는 사람. 셋째. 파트너에게 합리적인 대화상대로 여겨지는 사람. 노무현 행정부가 끝날 당시, 대한민국은 세번째 지위를 갖고 있었다.
부시는 집권하면서 탈(脫)클린턴 정책, 포스트클린턴 정책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클린턴 정부의 과거 '성과'를 매도하면서 정반대의 길을 걷는 걸 선택했다. 외교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는 무엇인가? 동맹국들과의 관계 악화, 911테러, 끝이 보이지 않는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린 북미관계 정도가 되겠다.
부시는 근 6년간 클린턴 정부의 시행착오를 그대로 반복하며 대북조이기에 나섰다. 하지만 결국 클린턴 정부의 해결책이 옳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북핵문제를 대화로 해결하기로 결정한 것, 2006년 11월경의 이야기다.
협상은 부침이 있었지만 목표궤도가 명확했기에 꾸역꾸역 이루어졌다. 한국은 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능력 있는 조정자였으며, 실로 왕자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다음 대통령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인가? 결론은 모두 나와 있다. 방법론도 모두 나와 있다. 그냥, 노무현이 했던 대로 그대로 하면 된다.
대선기간 중 이회창이 또 정신나간 주장을 하며 이명박 각하의 친화적 대북정책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왔을 때, 참 한심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떤 면으론 안심했었다. 유추해 보면 각하가 당선돼도 판을 부숴먹는다거나 하는 일탈행동은 안하겠구나 하고. 솔직히 제정신을 가진 인간들이라면, 노무현의 성과를 그냥 주워먹기만 하는 편리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유감스럽게도 나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이명박의 선택은 부시와 똑같았다. 포스트노무현을 표방한 이명박은, 판을 모조리 깨먹어 버렸다. 동시에 한국의 우월적 지위가 박살났다.
각하는 북한과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검토한다고 외쳤고, 선제공격계획을 진수시키기까지 했다. 북한은 좀 투덜대다, 곧 보기 좋게 한국을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북한과 미국은 하던 대로 협상을 계속하여 속속 결과를 냈다. 다른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한국이 누리던 왕좌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노무현행정부가 얻어 낸 발언권, 영향력은 순식간에 소멸했고, 지출만 몇 배로 늘어버렸다.
어쩌면 이렇게 모조리 말아먹을 수가! 대단하다면 대단한 재능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단순히 이명박 각하의 능력만은 아니다. 사실 후보자 시절 공약을 봤으면 알겠지만, 각하의 원래 의도는 적대정책이 아니었다. 애초에 현실감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판을 깨먹기로 작심하는 게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이건 지지자들, 소위 '배후세력'의 자질 문제다.
부시 정부의 기행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원인에서 출발한다. 이명박 각하와 한나라당은 노무현행정부에 대한 끊임없는 흑색선전을 퍼부으며 집권에 성공했다. 자, 이제 집권한 다음이 문제다. '햇볓정책'을 좌파들의 선동작전이라고 삐라를 뿌려댔는데, 똑같은 길을 걸어가자니 대체 가오가 안 서는 거다. 지지자들을 도저히 납득시킬 수가 없으니 일단 폼을 잡으려고 북한을 좀 깠다. 문제는 좀 적당히 하고 관둬야 되는데, 각하의 '추진력'이 너무 뛰어나셨던 거다.
지나온 3개월은 각하의 능력을 시험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었다. 삽질은 짧았지만 타격은 컸고, 아차 하는 순간 버스는 영영 떠나갔다. 손을 열심히 흔들어 보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명박 각하는 '공사판 십장' 시절 닦았던 그 특유의 '추진력'으로 3개월만에 모든 걸 잃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