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님은 말했습니다.
『“고량바다케와 히로이나!(수수밭은 정말 넓구나)” 언뜻 들은 이 한 대목이 나의 먼 조상이 달렸던 만주 벌판의 바람소리를 듣게 한 것이다.』
라고요.
이 문장을 보면서 저는 참 많은 생각을 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나의 먼 조상이 달렸던 만주벌판의 바람소리를 들었다"란 말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좀 애매모호하기도 하고, 아리송하기도 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지더란 겁니다.
어쨌든 따져보기로 합시다. 다음의 문언들도 같은 선상의 문제가 되겠습니다 - '폭력으로도 지울 수 없는 한자의 문화유전자'란 부제,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아무리 진군나팔을 불고 총검을 높이 세워도 마음의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집단 기억을 틀어막을 수 없다'라는 문장.
문언 그대로 해석해본다면 이렇습니다. 즉 생물학적 기제에 의해 바람소리를 '들은' 겁니다. 뇌세포의 신경작용으로, 바람소리에 대한 정보가 조직되어 자아에게 전달되었다고 해야겠습니다. '3천년 전인가의 바람소리가 진짜로 공기중에 진동을 남겼다'를 뜻한다는 게 아닙니다. 저도 제 자신이 그 정도로 멍청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언뜻 듣기로, 프로이트는 무슨 유전자 속에 집단기억이 존재했던 걸로 믿었던 모양입니다. 하긴 약간의 오류만으로 옛날 사람들을 매도하면 안 되지요. 그가 살던 시대는 19세기였으니까요. 23세기 사람들도 21세기 사람들의 과학적 무지를 비웃고 놀림감으로 삼겠죠. 물론 인류가 선사시대로 퇴행하지 않는다면 말이겠습니다만.
하긴 어떻게 생각하면, 항상 역사에서 이성이 무한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종교가 남아 있고, 창조설이 진화론과 비슷한 지위를 얻으려고 여전히 안간힘을 써대는 걸 보면 말입니다. 하긴,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유전자에 집단기억이 있을지, 또 모르는 일이긴 합니다.
정말 프로이트는 소포클레스를 읽으며, 원시인류가 저질렀던 부친살해의 '기억'을 떠올렸을까요? 진정 그런 기억이 튀어나왔다면 뭐 할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님도 정말 만주벌판에서 살던 조상의 기억을 떠올리셨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기억'들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생기는군요.
3천년 전의 기억이 있다면, 1만년 전의 기억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밀림의 바람소리를 들으면, 원시우림에서 사과를 따먹던 인류의 조상이 생각나지 않을까요? 이건 너무 먼 일이라 힘들까요. 그럼 극동에 정착한 인류는 천산북로를 따라 왔을까요, 남로를 따라 왔을까요, 의외로 인도양 뱃길을 따라 왔을까요? 이 정도는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만츄리아보다 그쪽에 더 관심이 있어서 말이죠.
또 옛날의 기억이 있다면, 최근의 집단기억도 있을 터입니다. 유전자는 섞이고 흩어지기 마련이니, 최근의 기억은 좀 자세히 기억나지 않겠습니까? 구체적으로 조선 영조대의 누군가가 어느 날 점심에 뭘 먹었는지까지 기억날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일제시대 생활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 정도는 별안간 도출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일반인의 기억에 화석 캐듯 접근한다면 말입니다.
왠지 쓰다 보니 바보 같은 말들입니다. 따라서 생물학은 집어치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님의 말을 반드시 문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집단기억은 후천적 학습의 소산입니다. 집단의 전승된 역사...라고 하기엔 너무 좁고, 신화나 전설까지 모두 포함하는 추억 같은 것이겠습니다. 어쩌면 또 설화나 민담 같은, 불확실한 영역까지 전부 포함시켜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반드시 집단기억이란 걸 말하려면, 사회가 갖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총괄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성립과정을 좀 구조적으로 살펴보자면 이렇습니다. 개인은 성장하면서 그 사회가 공통적으로 소유하는 어떤 이야기들을 학습합니다. 그 이야기를 사회 구성원과 공유함으로써 개인은 구성원과 동질화되고 사회의 일원으로 전화한단 말이죠. 굳이 의의를 찾자면 이런 데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뭐, 사회는 약간의 공통성을 공유해야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니깐 말입니다.
그렇다면 '집단기억'은 학습의 결과이며, 실제의 사건과는 동떨어진 심리적 장치입니다. '만주벌판의 바람소리'는, 진짜 조상이 만주벌판에 살았기 때문에 들리는 게 아닙니다. 집단의 조상이 만주벌판에 살았다는 명제를 개인이 긍정하고 내면화시켰어야만 가능한 것이죠.
역사적으로 만주벌판은 만주인의 땅이었죠. 뭐 만츄리아란 이름 그대롭니다만. 그럼 지금 중화되어 버린 '만주족'들의 귀에는 '바람소리'가 과연 들릴까요? 이건 아무래도 불가능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정착한 남방 화교들이 3세, 4세쯤 되어 대한민국 국민이 될 지경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조상이 만주 근처엔 가 보지도 않았음에도 님처럼 '바람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집단기억이란 픽션성이 짙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뭐 앞에서 '집단기억'이 어떻게 의의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씀이야 드렸습니다. 그런데 좀 웃기는 게, 왜 한국인에게 만주에 대한 집단기억만 이렇게 강렬하게 조직되어 있느냐입니다. '우리 집단'의 조상이 만주에 살던 시절은 옛날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옛날 옛날 우리 조상들의 일부만 만주에 살았을 뿐입니다. 솔직히 어떻게 '우리'를 한정한다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만주라는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는 사람이 그리 많은지, 신기한 노릇입니다.
조상들의 일부가 오래 전에 만주에 살았다는 것으로, 만주를 우리의 영혼의 토지 속에 편입시킬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왜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의 바람 소리는 안 들릴까요. 그곳에 대한 이야기의 부재 때문일까요?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고구려 시절의 역사적 기록 역시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상기하셔야 할 겁니다. 비역사적 내러티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근대의 재일, 재미 한국인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내러티브가 더 풍부할 겁니다. 동남아에서 온 이주민들이 가져온, 동남아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풍부할 겁니다. 그런데 왜, 만주만 각별한 취급을 받습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만주란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박혀 있는 일종의 고착점입니다. 이 고착은 근대화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생겨났습니다. 한국인들은 이 아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야말로 만츄필리아입니다.
근대는 강성대국의 신드롬을 만들어냈습니다. 일본은 강국이 되어 영토를 넓히고, 한국을 식민화했습니다. 한국은 실패했고, 피해자가 되었으며,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생각합니다. '아, 우리는 근대화에 성공했어야 하는데'. 우리 나라는 강국이 되었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당했던 것처럼 타국민을 복속시켰어야만 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한국인들은 이것들을 간절히 원했고, 지금도 원하고 있습니다. (이걸 일종의 복수심리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근대화의 과정에서 흔히 튀어나오는 건, 아주 먼 과거의 기억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근대화의 희생양으로 브라질이나, 갈라파고스나, 스와질랜드 같은 땅을 쉬이 상상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만만한 곳은 가까운 곳이고, 손쉽게 여길 만한 목표는 북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화정권의 힘이 약해질 때, 한반도의 정권이 항상 '진출'하려 했던 곳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는 근대에 상당히 재조명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근대화에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간신히 만들어 낸 근대화의 거두들이 민자영, 김옥균 같은 인간들이니, 영웅치고는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영웅들입니다. 일단 식민지의 고난을 겪을 대로 겪고 나자, 잃어버린 그 근대화의 우상에 대대적으로 얽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가히 병적 집착이라고 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과거사는 현재의 의도에 따라 공업적으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자의적 판단이 판을 치고, 취향에 따라 역사를 적극적으로 왜곡합니다. 어처구니없는 허구들이 사극의 이름을 빌어 진실로 둔갑합니다. 토착인들이었던 만주인들은 완전히 추방되고, 가상의 텍스트만이 만주에 대한 기억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진실과의 불일치며, 적극적으로 조작된 거짓이며, 국민 대다수가 참여하는 집단 사기극입니다.
질환은 국민교육과 미디어의 매개체를 타고 모든 한국인에게 번졌습니다. 이 악질적인 바이러스는 사고의 회로를 타고 이동합니다. 그 시끄러운 조류독감과 돼지독감을 뛰어넘은, 진정 오늘날 물신주의와 배금주의에 비할 만한 전염병입니다. 민중의 뇌에 집단의 허상을 조직하고, 증오를 부추기고 비판적 사고를 압살합니다. 따라서 이 괴질은 인간에게 매우 위험합니다. 더욱이, 진정 미를 추구하는 이들의 두뇌에는 치명적인 독소가 됩니다.
황석영이 변절했다고요? 아닙니다. 그 현상은 훼절이 아니라 발병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에이즈가 긴 잠복기를 거쳐 수를 쌓는 것처럼, 허구가 조작한 악성 바이러스가 사람의 뇌 속에서 끊임없이 복제되고 번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에이즈가 피부에 반점을 남기고 인체의 면역체계를 깨뜨리는 것처럼, 이 악성 질환도 순간 갑자기 터져나오며, 명인이 가졌던 당당한 이름을 얼룩지우고 인간의 정신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작가가 무엇을 하든, 무엇을 쓰든 그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위략으로 제한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작가는 과연 그의 책에 무엇을 새기고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뜻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진정 문인의 세계에 인본주의의 전통이 남아 있다면, 평단이 주목해야 할 대상은 정녕 수천 년 전의 불확실한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글이 진정 지향해야 할 곳은 몽골의 사막이 아닙니다. 우리의 투박한 거리, 5천만의 꿈이 잔혹하게 피어오르는 이곳,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이 되어야 합니다. 문인이 기억해야 할 인간은 고구려의 비인격적인 우상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비정규직이란 이름의 유랑민들, 실패자로 낙인찍힌 외로운 노인들, 폭도라고 불리는 거리의 수호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과거의 조작된 영광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피와 땀으로 만들어가는 이 불완전한 사회에서, 화단과 난지도에서 주워 올린 글을 읽고 성장할 어린 영혼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주에 대한 기약 없는 사랑을 이제 끝내야 합니다. 곧 우리의 정신을 충만하게 하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연대의 기치를 높게 올릴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