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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

계획 - 청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급 만평. 한겨레신문 95년 5월 27일자, 박재동 작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작년 초여름,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둥,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둥 노래를 불러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법을 집행한다는 분들은 그게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무슨 개새끼들마냥 뛰어나와 시민들을 두들겨 패대셨으니... 그런 걸 보면 대한민국 헌법 1조라는 건 일종의 '선언적 규정' 또는 '장식적 규정' 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로 전 학기에 북한법이란 과목을 들었는데, 인원부족으로 폐강되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졸업하지 말자' 또는 '책이나 읽으며 판판 놀고 싶어라' 라는 결심이라던가 도피를 감행했고, 지금은 앞에 '계속'자만 붙어 일년이 흐르고 있다. 북한법은 딱 1시간 들었고, 그 중에 그나마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북한법을 배워야 할 필요성'이 되겠다. 그게 뭐냐면,

 흔히 생각하길 북한은 법이고 나발이고 없고, 김모 장군의 명령하에 모든 게 이뤄지는 독재사회로 안다. 실제 돌아가는 걸 보면 약간 더 복잡해서, 교시 -> 노동당규약 -> 헌법 -> 일반법 -> 의 순서가 된다. 뭐 어쨌든 헌법이나 법률이 별 쓰잘데없어 보이는 건 똑같다. 하지만 규범적으로 판단하자면,

 당연히 헌법 -> 일반법 -> 명령 기타등등 -> 노동당규약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 교시[각주:1]가 된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아무리 장군님의 말씀이나 의중이 실제로 용가리 통뼈만한 위력을 발휘한다 해도, 법정에서의 판단기준은 어디까지나 법이라는 거다. 아무리 법보다 주먹이 우선하는 세상이라도, 공정한 재판관은 '니 주먹이 세니 니가 이겼음' 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북한에서 사업을 한다거나 할 때 법률분쟁이 생기면, 재판정에서 주장해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법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이야 완전 난장판이니 '공정한 재판'이 없겠지만, 만약에 북한이 지금보다 더 개방되고 그래도 약간이나마 법치국가로서의 성격을 갖춘다면, 법은 북한에서 성공하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분야가 될 거다.

 또 만에 하나 북한이 붕괴되어 남한에 어쩔 수 없이 흡수된다고 해도 그렇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북한 주민들의 모든 법률관계를 '반국가단체의 소행'이라고 '없던 일'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 정말 설마 북한이 중국에 흡수된다고 쳐도 마찬가지다. 분쟁의 공적 해결은 오로지 규범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


 한국의 경우도 뭐 비슷하다. 사실상 회장님의 힘이 의사판결을 낳는다고 해도, 당장 그 판결 다음날부터

'어제부로 회장님의 안위가 법률에 우선한다는 관습헌법이 확인되었습니다'

 라고 학교에서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강의를 들어 보면 약간은 위장적이라, 절대 '대법원 판사들이 자본권력에 굴복' 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사회가 그나마 좀 민주화돼서 완전히 정신나간 판결들은 다행히 반복되지 않아 잊혀졌고, 약간 이상한 판결들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정립하고 일관하며 교수하고 있다. 사실 내가 추종하는 논리란 절대 그런 게 아니고, 가끔은 굳이 살펴볼 것도 없이 말이 안 되는 게 뻔히 눈에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교수분들이며 신림동 강사분들은 이해가 되게 가르치는 모양이고,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나름대로 체계를 세웠다고 자부하는 모양이니, 그저 신기한 일이라고 해야겠다.

 그러니까 법은 때려 죽여도 법이고 말려 죽여도 법이다. 아무리 각하께서 법치를 싫어하신다고 한들 법이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충분히 법대로 할 것을 주장할 수 있다.

 곧 나라가 아무리 개판 오분전이라도, 국가기관은 법대로 할 의무가 있고, 나는 그들에게 법치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꼭 행정안전부에 다음과 같은 행정절차를 요구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겠는데,

 곧 기획재정부장관 윤증현씨, 지식경제부장관 최경환씨, 노동부장관 임태희씨, 국토해양부장관 정종환씨, 관세청장 허용석씨의 파면이다. 다음 '담화문'을 보라.

 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view.html?cateid=1041&newsid=20091201141207274&p=moneytoday

 대체 '정부담화문' 안의 문장이랍시고 있는 것들 중, 참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명제를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노조가 파업에 들어간 이유는 단체협약을 사측이 해지했기 때문이고, 또한 노조는 사업장의 운용을 위한 필수유지인원을 남겨놓고 쟁의행위에 들어갔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곧 이 파업은 명백한 합법이다.

 그런데도 이 장관님들은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기관 선진화라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고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등 법령이 보장하는 노조활동의 합법적인 범위를 벗어난 불법파업" 운운, "철도공사 노조가 철도를 마비" 운운, 이외에도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거짓말을 늘어놓고 계신다.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합법적인 쟁의행위를 부정하고 비방하고 노조원들에 대한 허위사실을 늘어놓으며 공공연히 협박을 일삼는 이런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것도 공직자란 분들께서? 정부의 이름을 빌어!

 불법, 그 외의 어떤 단어도 이 작태에 적합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공무원은 당연히 법을 지켜야 한다. 그 누구보다도 성실히 지켜야 한다. 국가공무원법 제 56조는 "모든 공무원은 법령을 준수하며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라며 공무원의 성실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장관분들의 불법적 행위의 죄질은 어떠한가? 정말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위반사유로 파면의 아픔을 맛봐야 했던 해직교사들을 생각하라.

 이 분들에게 어울리는 징계는 오직 파면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추신. 장관님들께서는 내 주장에 반발하여 '보호받고 있는 집단의 지나친 이기주의'를 보이시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렴, 한국에서 가장 보호받고 있는 집단은 다름아닌 당신들이니까 말이다.




  1. 법리적으로는 이 '교시'가 어떤 국가기관의 명령적 성격을 띄는 경우도 있기야 있겠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