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머리를 자르다

청순함의 상징인 긴 생머리. 또한 긴 생머리의 상징적인 존재인 전지현씨. “엽기적인 그녀”이후 무려 7년이나 똑같은 이미지를 울궈먹고 계신다. 하지만 끊임없이 광고는 들어오고, 남정네들은 여전히 그녀에게 열광한다는 거!
“엽기적인 그녀” 막판의 신파극은 영화 자체엔 재앙이었지만, 여주인공에겐 향후 10년의 안정적인 CF수입을 보장해 줬다. 당찬 겉모습의 그녀도, 사실 첫사랑의 아픔을 잊지 못하는 가녀린 여자랍니다!?
글쎄.
어쨌든 비단 전지현씨뿐만이 아니라, 머리카락은 한 인간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한다. 단정한 긴 생머리, 노란색으로 염색한 단발머리, 덥수룩한 장발, 짧은 스포츠머리 - 우리는 그 헤어스타일들을 보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짐작하곤 한다. 이성을 볼 때도 가장 주목하는 건 대개 헤어스타일이다.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여 공산품으로 재창조하려는 전체주의 국가의 학교에서, 학생들의 두발검사에 왜 그렇게 정신병적인 집착을 보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이제 '소녀, 머리를 자르다'의 본론으로 들어간다.
타카하시 루미코 作, 란마 이분의 일
주진창씨의 셋째딸 세나양. 원작에서의 이름은 텐도 아카네.


위로 언니가 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냥 놈팽이.
어느 심리학자가 그랬다던가, 사람의 성격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태어난 순서라고 말이야. 보통 맏이는 책임감이 있고, 둘째는 독립심이 크고 자유분방, 막내는 응석받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제까지 여러 형제자매들을 보면 대부분 그런 모양새였다. 출산률이 끝내주게 저조한 오늘날엔, 이미 먼 옛날 얘기가 돼버렸지만.
아카네의 언니 둘을 보자. 그리고 그들 사이의 대립관계도.

맏언니 카스미씨. 매우 여성스럽다. 텐도가의 살림을 책임지는 전형적인 요조숙녀 캐릭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그녀의 그런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도구다.

돌째 언니 나비키. 잘 나가는 처자. 하지만 “처자다운 맛이 없다”. 짧은 단발머리.

텐도가의 가장, 소운(주진창씨)을 보자. 직업 불명, 생계수단은 임대업인 듯하다. 가장으로서의 권위는 간판 정도에 불과한 수준.
언니 둘의 성격은 ‘태어난 순서’ 와 잘 매치된다. 그리고 그녀들이 집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태어난 순서의 반영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들을 상징하는 것은 머리카락이다.
맏이로서 기대를 안고 자랐고, 일찍 죽은 어머니를 대신하고 있는 카스미씨. 텐도가의 살림을 도맡아하는 부처님 같은 처자다. 항상 웃는 표정 - 다시 말해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어머니 없이 자란 아카네에게, 카스미씨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어린 시절의 아카네와 카스미
나비키는 별 기대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랐고, 집안 일에 대한 흥미는 있지만 책임감은 없다. 체면치레를 싫어하는 나비키는 욕망에 매우 솔직한 사람이다. 무능한 아버지를 보며 자기를 채찍질한 탓일까, 사리에 밝으며 기댈 건 오직 돈뿐, 이란 진리를 일찍부터 깨우쳤다.
Nabiki, "The Man Killer"
집안에서 카스미씨는 제왕이다. 그녀는 살림살이에 대한 무한한 권력을 지니고 있고, 실제로도 능력이 있으며 그녀 없이는 집안이 돌아가질 않는다. 껍데기뿐인 아버지의 권위마저 그녀를 옹호하고 있으니, 지기 싫어하는 나비키로서도 어찌 해볼 수 없는 상대다. 그래서 나비키는 자매간의 대결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밖으로 나다니기만 하는지도 모른다.

막내는 보통 귀여움을 받으며 널널하게 자란다. 역시 널널하게 자란 아카네는 언니들과는 다르게 섬세한 구석이 없다. 별 고뇌랄 것도 없이 고등학생이 되었고, 남자들을 뻥뻥 차대는 일상에도 그럭저럭 잘 적응한 듯하다.


그녀의 실질적인 어머니는 카스미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녀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

이 사람이라고 말하면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그녀와 정서적으로 더 가깝고, 그녀를 잘 보살펴 주며, 또 그녀가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 되겠다. 옆집에서 접골원을 운영하는 토후씨. 어린 아카네는 마치 소녀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처럼 토후씨를 사랑한다. 하지만.
소녀와 아버지와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것은 바로 어머니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짝이 되는 사람은 어머니지 어린애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얄궂게도 '아버지'인 토후는 '어머니'인 카스미를 좋아한다.
아카네는 토후가 카스미를 좋아하는 걸 안다. 아카네는 카스미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지만, 너무나도 완벽한 카스미씨 앞에서는 좌절뿐이다. 항상 온화한 표정의 카스미씨 앞에선 대항할 엄두도 나지 않는 게 현실.
아카네는 언니의 긴 머리카락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여성스러움에도. 만약, 나도 언니처럼 머리가 길다면, (더 여성스러워질 것이고,) 그러면 토후 선생님도 날 좋아해 주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근거없는 기대에 얽매여 아카네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다. 운동을 좋아하는 아카네에게 긴 머리카락은 꽤나 귀찮았을 법도 하다. 하지만 오로지, 사랑을 위하여! 머리를 기르고 길러 어느 새, 언니보다도 더 긴 머리가 되었다.
"꽤 길어졌구나, 아카네의 머리카락!"
하지만 아카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아버지'는 '어머니'를 변함없이사랑한다. 머리를 길렀다고 인간이 카스미씨처럼 변하는 것도 아니다. 소녀의 마음속엔 점점 좌절감이 쌓여간다.
이젠 포기해야 된다, 라는 사실을 애써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 속에는 체념의 기운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던 무렵.
사고로 머리카락이 잘린다. 머리가 잘리는 건 여자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야! 이제 아카네에겐 카스미에게 대항할 수단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걸으며 생각한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방에서 고민고민하다, 드디어 아카네는 결심했다. 소녀는 언니이자 어머니인 카스미에게 가서 잘린 머리를 다듬어 달라고 부탁한다.
"어머, 그 머리 어떻게 된 거니!”하며 깜짝 놀라는 카스미씨. 아카네의 대답은“언니도 참, 오버한다니까.”
그래, 언니가 이겼어. 언니한텐 잘 된 일이잖수!
아카네는 토후씨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왜? 아까 발이 약간 삐끗했으니까. 어쨌든 구실을 만들어 토후씨에게 간 아카네. 토후씨는 여전히 아버지처럼 자상하다."아카네에겐 역시 짧은 게 어울려", 그녀는 펑펑 울고 만다.
머리는 뭐하러 기른 거니?
눈물을 쏟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리를 자르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녀 주변의 풍경들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 사실 달라진 건 없겠지만. 소녀는 생각한다.
사실 잘됐는지도 몰라. 아마 나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 거야.
아카네는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변화한 자신의 모습에는 아직 확신이 없다. 위화감과 불안을 느낀다. 예전 모습에 대한 아쉬움 역시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옆에 있는 남자애 하나가 보인다. 꽤 예전부터 함께 있었지만, 지금의 그 남자의 모습도 뭔가 예전과는 달라 보인다. 그는 쭈뼛거리며 이야기한다.

"잘 어울린다, 그 머리."
그 말이 듣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