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것들(논픽션)/이야기에대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에포닌 2007. 2. 18. 05:59

 가정해 보자. 당신은 영화를 본다. 설정도 참신하고, 각본도 충실하고, 화면빨도 좋고, 사운드도 뛰어나고, 감독의 연출도 센스가 있다. 입에서 "이야, 잘 만들었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다. 그런데

 

 당신이 보고 있는 영화는 에로영화라는 거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을 보며 내가 느끼는 감상은, 비유하자면 위와 비슷한 경우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일단 작화가 꽤 뛰어나다. 배경음악도 합격점. '하루히 댄스'로 유명한 엔딩 테마는 여러 가지 의미로 선세이셔널하기까지 했다. 성우연기도 무난하게 좋은 수준. 어떤 여고딩의 멜랑꼴리를 방어하기 위해 미래인, 우주인, 초능력자들이 동원된다, 는 설정은 누구라도 쉽게 상상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세부 플롯은 일단 개연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시청자의 흥미를 끌어낸다. 인물들의 개성도 확연하고 캐릭터적인 상업성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제작진이 이 작을 꽤나 노력해서 만들었다는 것,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썼다는 것이 눈에 띄게 분명하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확실히 잘 만든 작품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에게 이건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어쩔 수 없는 장르적인 한계를 지닌다. 이 애니메이션은, 21세기 들어 나름대로 독점적인 장르를 구축하고 있는 소위 오타쿠물, 좀더 한국어로 가까운 뉘앙스를 갖게 표현하자면 '오덕물'인 것이다.

 

 

 평범함을 담보하는(실제로 정상적인 인간에 속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남자 주인공의 주관적인 일인칭 시점은 '미연시¹'를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종류별로 등장하는 미소녀다. 작중에도 언급되는 '오타쿠적인' 모에 요소라고 하는 것을 빼놓을 수는 없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히트작이다. 하지만 그 인기의 결정적 원인이, 저 위에서 주절주절 늘어놓은 작화나 각본이 뛰어나다는 등의 '좋은 점'에 기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작의 성공은 더 치밀하게 기획된 '오타쿠 코드'에서 비롯한다.

 

 헐리우드 영화가 안정적인 히트를 기록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헐리우드 영화'라고 비난받는 것과 비슷하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상품의 소비자들을 '소비'로 유도하는 일반적인 코드를 완벽하게 구축했다. 화면효과나 성우연기나 스토리는 도리어 이차적인 것에 속한다.

 

 이차적으로 치장된 수많은 장점들 - 가령 주인공의 시니컬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독백이 참신하다거나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뛰어난 것 등 - 은 극의 뼈대를 지탱하고 있는 요소들이 한정하는 편협한 카테고리에 가로막히게 된다. 스즈미야 하루히나 그 동료들은 결국 미연시에 흔히 등장하는 미소녀 캐릭터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스토리는 잘 각색되었지만 일반적으로 추천되는 업계의 노선을 일탈하지 못한다.

 

 

 작품이 '오타쿠 코드'를 따르건 말건 작품 제작은 제작자의 자유의사에 달린 일이다. 하지만 '오타쿠 코드'라는 게 작품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일반적인 제작자들의 노선이 과연 소비자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것인지는  의문이다.

 

 (대부분의)헐리우드 영화의 패턴처럼, 오타쿠 요소라는 것도 상업적인 요구에 뿌리를 둔다. 그냥 이렇게 하면 '잘 팔리니까', '돈이 되니까'라는 등의 이유로 생긴 관행적인 패턴이다. 소비지향적인 게 대개 그렇듯이, 이 요소는 작품성과는 별개의 목표를 갖고 움직이며 지극히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작품 수준에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천편일률적인 내용을 반복하게 만들고, 불합리한 이성관을 강요하는 동시에, 현실도피적이며 작품의 리얼리티를 추락시킨다. 당장 돈이 되는 것 이외에는 전혀 장점이 없다는 점에서 TV의 대출광고를 연상시킨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분명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참으로 어색하다. 마치 에로영화는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걸작이나 수작 같은 수식어를 붙이는 게 어색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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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