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2) - 삼국지연의에서 일기토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이유
일기토란 단어의 어원이 일본쪽이라는 등 적절한 번역어는 무엇이 적합할까라는 등의 무의미한 잡설은 생략한다.
삼국지연의란 소설의 원래 모습은 무엇일까? 바로 희곡이다. 무대용 대본.
백과사전을 참조하면 간단히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삼국시대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유행하기 시작한 건 연극을 통해서였다. 시대는 당나라 때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한다.
원대에 지식인계층이 몰락하면서, 글깨나 쓸 줄 안다는 양반들이 대본 따위나 써서 입에 풀칠해야 하는 안타까운 광경이 벌어진다. 몽골이 자행한 문인들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대중문화의 발전에 나름 기여했던 것이다. 글빨 좀 날린다는 작가들이 쓴 대본의 수준은 전에 없이 뛰어난 것일 수밖에.
그런데 이런 대본은 필연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요구한다. 재미 없으면 누가 연극을 보겠는가. 파우스트의 서문을 보는 것 같다. 사람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극적인 긴장감이 있어야 하고, 등장하는 인물의 개성이 뛰어나야 한다. 청중을 무대에 빠져들게 해야 한다. 관우가 청룡도 한 번 휘두르면 환호와 탄성이 나오고, 조조가 무대에 등장하면 야유와 욕설이 쏟아져야 한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나 죽는다 골골 이러면 다들 쳐 울어야 한다. 그래야 장사가 되고 먹고 살 거 아닌가.
연의의 등장인물이 다 개성이 뚜렷한 것은, 당시 인물비평이 유행하여 자료가 풍부한 탓도 있겠지만, 연극적 요소가 가장 크다. 막이 오른다. 무대에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등장한다. 셋 다 그냥 열라 짱 세고 착한 놈이다. 자, 우리 모두 사이좋게 지내면서 한탕 크게 벌여 봅시다, 이렇게 시작하면 연극 망하는 거다.
뭔가 캐릭터성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주인공인 유비는 착하고 성실한데 좀 우유부단한 캐릭터로 나가고, 그걸 채워주는 관우는 의리있고 신중하고 정의롭고 뭐 그런 캐릭터로 만들고, 너무 애들이 조용하면 재미가 없으니 장비 이녀석은 좀 열혈캐릭에 망나니로 만들어야지. 불쌍한 장비.
그리고 설정이 필요하다. 사실대로 그냥 건달들이 조직 하나 차렸다고 하면 안된다. 1차 보스 황건적의 두령 장각을 토벌한다. 이걸 위해 유비는 파티를 모으는 거다.
여기서도 좀 극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그냥 하다보니 셋이서 어떻게 알게 됐어유, 이거 큰일난다. 의형제! 의형제, 캬아, 이거 멋있지 않나? 남자의 로망이지, 이거!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한날 한시에 죽는다!", 이 대사 내가 만든 거지만 끝내주게 멋지네. 그리고 배경은 꽃발 날리는 화원으로 하자. 무대 뒤편에서 꽃도 좀 뿌려 주면 죽일 거야 아마,
이렇게 대본을 짜는 거다. 이제 공연에 내놓으면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온다. 극이 재미있으면 박수를 받고 돈을 벌 것이고, 재미없으면 욕 좀 먹고 밥 좀 굶거나 두들겨 맞거나 하겠지. 바로바로 청중의 욕구을 학습하고, 다른 극단에서 거둔 성과를 차용한다. 이렇게 변증법적으로 스토리가 발전하는 거다.
그리고 전투씬, 남자의 최고 로망인 전투씬은 어쩌나. 아마 극작가들도 반지의 제왕처럼 몇만 명이 등장하는 사실적인 전투씬을 그리고 싶었을 거다. 그런데 그게 무대사정상 불가능하다. 열 명 나오면 꽉 차는 무대에 어찌 그런 게 가능하리오.
결국 전투는 일대일 대결로 나갈 수밖에 없다. 하후돈군과 여포군이 붙는다. 실제 전쟁이라면 대장들은 뒤에서 소리나 지르고 박터지게 싸우는 건 잡병들이겠다. 그러나 무대에서 하후돈군vs여포군이면 그냥 하후돈이랑 여포랑 맞짱을 뜨는 걸로 표현해야 한다.
그런다고 그냥 칼만 부닥치면 심심하니 특수기술도 쓰고 필살기도 써야 한다. 무기도 그냥 창이랑 방패, 이런 거면 안된다. 장수들의 캐릭터성을 제대로 표현해 주는 무기, 관우-청룡도, 장비-사모, 여포-방천극, 유비-쌍검, 황충-간지나는 활 등등, 이런 특수 아이템 등장해야 한다.
갑자기 무대 뒤편에서 누군가 하나가 화살을 쏜다. 아악! 하후돈씨 맞으셨습니다! 엑스트라 두 명이 하후돈 끌고 퇴장.
이런 무대의 전통이 연의에도 그대로 등장하는 거다. 연의에서 장수들의 일대일 대결이 폭주하는 건 내가 볼 때 이거다. 그리고 솔직히 소설의 형식으로도 이쪽이 독자에게 쉽게 와닿는다.
나관중은 연의를 혼자 힘으로 창작한 게 아니다. 깎아내리자면 이런 역사적인 성과를 편집하고 나름의 가공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연의식의 편집소설은 꽤 많을 텐데, 나관중의 것이 지금까지 대세를 차지하는 이유는 아마, 가장 재미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요소를 깡그리 무시하고 정사 대충 읽었다고 나대는, 누군가씨의 평역 삼국지는 쓰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