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것들(논픽션)/요즘

합법적인 불의

에포닌 2006. 12. 7. 01:03

친척이나 존속이라던가 하는 사람들 중에 손에 흙을 만졌던 사람은 없다. 조부모님은 가끔 농사도 짓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생활이다. 태풍이 와서 작물이 모조리 날아가도, 아깝네. 정도로 끝.

 

어릴 때엔 모든 세상이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좀 시골로 이사간다고 했을 땐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느낌이었다. 식당에 가면 반찬은 으레 남긴다. 굴러다니는 밥알 한 톨 한 톨을 보며 농사꾼들에게 억지로라도 감사한 마음을 품은 적도 없다. 그렇게 난 농심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집회에 대한 규제라는 게 어쨌든 어처구니없긴 매한가지였지만, 공권력은 항상 국민을 위한다는 핑계를 달고 언제나 약한 사람들만 두들겼지만, 이번에 벌어지는 극작은 꽤 어설프게 날 짜증나게 만든다.

 

경찰은 어차피 폭력 시위할 거니까 시위를 원천 봉쇄한단다. 시위를 금지는 물론이고 아예 농민들을 서울로 올라오지 못하게 길을 틀어막는단다. 그건 좀 아니잖아. 헌법정신에 어긋나잖수. 이런 얘기를 들어도 막무가내다. 헌법원론이 아니라 중고등학교 교과서만 졸면서 배웠어도 알아들을 소릴 흘려듣는 건, 이해를 못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억지로 무시하는 걸까.

 

 

농민들은 국가에게 끊임없이 사기당했다. 그들을 포함한 국민 모두가 사기극의 가해자, 피해자, 수익자로 연관된다. 대한민국의 발전이란 게 민초들의 희생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 아니었나요.

 

당국자들은 사취적인 룰을 완성했다. 너무나 멋져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리고 그 룰을 충실히 따르며 농민들의 노력을 뜯어내 (자신을 위해 약간을 챙겨놓고는) 나머지를 전 국민에게, 물론 극히 불공정한 분배방식으로 뿌렸다. 그리고는 이것이 모든 국민을 위한 일인 양, 마치 합법적이란 게 도덕적인 것과 등치된다는 식의 선전을 쏟아부으며 약탈을 계속했다. 이득을 본 사람은 누구였고, 손해를 본 사람은 누구인가? 

 

그렇게 사기를 쳐놓고는 으레 농민들의 빈곤을 그들의 탓으로 돌린다. 그들은 왜 가난할까, 게을러서?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해 오지 않았는가? 방식의 문제일까? 하지만 농민들은 지금까지 정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지 않았는가?

 

정부는 끊임없이 플랜을 제시하며 농민들을 유혹했다. 이렇게만 하면, 또 저렇게만 하면, 좋은 날이 오겠지? 하며, 농민들은 묵묵히 일하며 끊임없이 기다렸다. 분명 그렇게 해서 국가는 근대화란 걸 이뤘고, 국가 전체의 부는 늘어났겠지만,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무엇? 아무것도 없었다!

 

90년대 정부는 WTO협상을 하며 제대로 사기를 쳤다. 그리고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양해를 구했다. 그래, 어쩔 수 없이 너네는 죽어야겠어. 그래야 '우리'가 잘 먹고 잘살 테니까 말야! 이런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농민들은 소처럼 양순했다. 시장개방을 대비해 수익성 작물을 재배해야지연! 조까는 소리다.

 

어쩌니 저쩌니 해서 21세기가 되었다. 당국자들은 다시 한 번 사기극을 준비했다. 이번에 또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러나 까놓고 보자면 그네들 패거리를 위해서지만, 진정한 자유무역이란 걸 해 봅시다.

 

그러나 사회는 이상하게도 약간 민주화되었다. 그리고 우매한 민중들도 지나치게 속았던 나머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채 버렸다. 이제 농민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도 합법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사기당해 왔다는 걸.

 

이제 권력자들은 비탄에 빠진다. 곧장 펜들이 얼마 안 가 짜장면 덮개로 쓰일 신문지 위를 달린다. 안타깝고 유감스럽게도 신민들이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가 않다. 주제 파악을 하라구. 무지하면 윗사람 말을 잘 들어야 할 거 아닌가. 이봐, 진정한 민주주의란 싱가포르처럼 신민들이 권력에 복종할 때 이루어지는 거라구. 이 빨갱이들아. 북조선의 지령을 받았지?

 

대한민국 법제는 절도보다는 횡령에 더 관대하다. 특히 횡령액의 액수가 치솟을수록 더 관대하다. 마찬가지로 권력이 농민들에게 저지른 폭력에는 지나치게 관대하기 그지없다. 반면 농민들이 한낱 물건에 불과한 도청 문짝을 박살낸 사건 등등에는 대단히 엄정하시다. 너무나도 엄청난 폭력사태라 기본권을 사정없이 제한해야겠단다.

 

 

나는 폭력에 반대한다. 싸움 같은 건 해본 적도 없고(사실 싸움을 못해서 안한 거긴 하다), 누구를 때려 본 적도 없다. 군대에서도 누굴 굴리거나 누구한테 욕해 본 적이 없다(솔직히 권력이 없어서 그런 거긴 하다).

 

하지만 나는 농민들의 폭력을 비난하지 못하겠다. 난 도시민으로서, 중산층의 한 자제로서 농민들의 희생을 짓밟으며 성장해 왔다.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물질의 풍요는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농민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희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만약 여전히 그들이 보상 대신 희생을 강요당한다면, 그들이 도청 문짝뿐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때려부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한 어린아이를 희생시켜 이룩한 지상 천국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나쁜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