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니와 클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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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니와 클로버 -
원작 : 우마노 치카 감독 : 카사이 켄이치
도쿄의 하나비 미술대학교.
작년에 미대에 합격해 도쿄에 왔는데 학교 주위에는 밭 천지라 깜짝 놀라고, 자신이 지은 밥이 맛이 없어서 깜짝 놀라고, 공중 목욕탕 입장료가 비싸서 놀라고, 많은 숙제에 놀랐지만
지금은 모두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는 주인공 타케모토.

대학교까지 도보로 10분. 지은 지 25년. 방세가 3만 8천엔. 벽이 얇아 소리가 다 새고, 입주자는 전원 학생. 아침 햇살이 눈부신 동향. 3평짜리 방에 목욕탕 없는 자취방.

그곳에 타케모토와 같이 살고 있는 학생들.

냉정하고 이지적인 마야마.

정체불명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기유급생 모리타.
타케모토가 2학년이 된 어느 날, 소탈한 성격의 하나모토 교수의 연구실.

하나모토 슈우지. 하나비 미대 부교수
하나모토 교수는 신입생으로 들어온 그의 사촌, 하구미(하구)를 소개한다.

마야마는 하구를 본 타케모토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아차린다. 뒤이어 연구실에 모리타가 난입하면서,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아가기 시작한다.

잠시 어른이 되는 것을 유예받은 미술대학교 학생들. 수채화로 그려진 청춘의 이야기는 아름답다는 표현 외에 적절한 수사를 찾기 힘들게 한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찾아온 사랑, 톱니바퀴처럼 조여드는 졸업 후의 문제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것들은 그들 스스로 내려야만 하는 결정과, 그에 따르는 냉정한 대가를 요구하니까.
만화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먼저 타케모토와 하구, 모리타의 쪽부터.

꽤나 미움받고 있군.

폴 고갱, 망고를 든 여인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어보았는지 모르겠다(만약 안 읽었으면..).
소설의 화자는 런던에 사는 젊은 작가다. 그는 문단에 데뷔하면서, 어느 여인을 소개받게 된다. 문학애호가인 그녀는 아름답고 지적인 아내다. 귀여운 아들딸과, 무뚝뚝하고 재미없긴 하지만 성실한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간다. 작가는 그 가족을 보며, 세속적인 행복이란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인 찰스 스트릭랜드 씨는 갑자기 파리로 도망가 버린다. 돈 한 푼 남긴 것 없이, 그야말로 가족을 내팽개치고. 스트릭랜드 부인의 부탁에 얼결에 파리로 가게 된 작가는, 분명 여자 때문에 도피극을 벌인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트릭랜드 씨는 파리의 쓰레기통 같은 여관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스트릭랜드는 의아해하는 작가를 주점으로 데려가 술을 마신다. 왜 이런 짓을 하냐고 다그쳐 묻는 작가에게, 스트릭랜드는 말한다.
『I want to paint.』
부인과 자식은 어떻게 하려고? 라는 질문의 대답은 『나와는 상관없소.』 사상 손에 꼽을 만한 악당 등장이다.

히로인인 하구는 작은 키와 가녀린 목소리 때문에 항상 아이로 오해받는다. 아빠처럼 돌봐 주던 교수님이 떠나자 밤마다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는 그녀. 자주 아파 몸져눕고, 마음도 여려 쉽게 상처받기도 한다. 세상물정도 전혀 모르고, 미술을 제외하면 잘하는 것도 없다. 말 그대로, 자연 상태에 팽개쳐놓는다면 가장 먼저 도태될 것 같은 존재다.

만약 제가 그림을 놓게 되는 날이 오면,
그 자리에서 이 목숨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자살증후군이나 우울증 환자 같은 멘트이지만, 이 독백의 의미는 지나치게 간명하다. 마치 스트릭랜드처럼, 그림은 단지 하구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것. 그녀는 무척 어린 나이에삶의 모든 의의를 예술에서 찾아 버린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불가사의한 생동감이 있고, 그녀의 머리에는 열정과 꿈을 이해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그녀는 더 쉽게 상처받고, 더 심하게 고뇌하고, 더 불행하게 짜여지는 삶을 살아간다.

모리타는 아마 하구가 처음으로 만난 동족일 것이다. 하구가 모리타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가 3만 2천 엔짜리(!) 핑크색 반짝반짝하는 뮬(mule)이었다는 건, 절대 부인할 수 없다(젠장). 하지만 그녀를사랑에 빠지게 만든 건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모리타의 모습.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 그리고 그 재능에 의해 운명지어진 사람. 하구와 모리타는 그런 면에서 같은 부류의 인간이다. 그처럼 하구와 모리타에게, 서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할 일이야, 라고 말하지는 않을 사람이지. 너의 왕자님은
그녀는 모리타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지나칠 정도로. 신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그러하듯, 모리타도 똑같은 길을 걸어가야만 할 거라고 납득하고야 만다. 마치 엇갈린 나르시시즘 같은 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이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기에, 그리고 서로가 너무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결국 맺어지지 못한다.

결국 하구는 주인공(?)인 타케모토와도, 모리타와도 이어지지 않고, 사촌오빠인 슈우와 이어지게 된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전개가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결말이 밝혀졌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이건 반전이 아니다, 낚시다!』라며 작가를 비난하는 경향이 주를 이루었다.

화면에 그려지는 하구의 겉모습은 한 명의 어린 소녀로의 이미지가 강하다. 어느 캠퍼스를 거닐다 보면, 정말 그녀와 마주칠 것만 같은, 만화는 그런 평범함을 창조해냈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인 인간상인 스트릭랜드와 달리, 오히려 일반인들의 이해을 얻어내지 못했던 게 아닐까.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는 무도한 인간이다. 가족들은 『17년간이나 먹여살렸으니 이제부터는 알아서 하라지』라는 식이다. 친구의 호의는 잔인한 배신으로 되갚는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뿐.


항상 그녀를 보살펴 주는, 하나모토 교수에게
언젠가 하구는 멀리 여행을 떠나는 슈우에게 주려고 네잎클로버를 찾았고, 모두들 모여 종일 풀밭을 뒤졌지만 결국 하나도 나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4년 동안 그녀를 짝사랑만 해 온 타케모토에게 건넨 보따리엔, 네잎클로버를 포갠 빵이 몇 장이나 들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녀는 풀밭을 헤메었을까. 떠나보내는 안타까움,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그녀에겐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동감할, 그런 잔잔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마지막 장면. 안타까워..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파스텔톤의 작화, 차분한 이야기들, 순간순간 빛나는 재치들이 있어. 대개 그렇듯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상만으로는 행복을 얻지 못하는, 그런 잔혹한 리얼리티가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바램이 있어서.

<여담 : 날아가는 여학생들 - 모리타 작(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