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야기
현대한국의 신화생성 매커니즘
에포닌
2009. 11. 1. 16:12
이번 주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판결이 여럿 나왔다. 한 30년쯤 지나면 역시나 그런 풍경을 보게 되지 않을까. 누군가는 또 '사법부 치욕의 역사' 따위를 쓰고, 대법원은 대법원장이 직접 과거사에 사의를 표하는 게 적절한가 부적절한가 검토중이라거나 하지 않을까. 뭐 그때도 대법원이 남아 있다면 말이지만.
돌려막기의 달인이신 각하께서는 또 아프간 파병을 기획하시어, 그제 또 전투병을 누가 뒤지든지 말든지 파견하시겠다고 하시더니, 어제는 또 공주님께서 한 건 거하게 터뜨리셨다. 그러니 이하의 이 단락 기사는
http://media.daum.net/economic/stock/market/view.html?cateid=100014&newsid=20091029144807453&p=moneytoday
그 '임팩트', 즉 강도라던가 또 무게에 있어서 초라해만 보인다. 너무 훈훈한 이야기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기사의 몸통은 다음과 같다 -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 전 회장이 지난 10일 삼성 양문형 냉장고의 파열 사고를 언론보도를 통해 접한 후 본인이 20여년간 심혈을 기울여왔던 품질경영 기조가 무너진 데 대해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안다"
이후로 무슨 '프랑크푸르트 선언 신화'라던가 '애니콜 신화'따위가 줄줄이 이어진다. 결론은 '전' 회장님 만세! 로 끝.
이 기사는 그 자체로 '신화적'이다. 삼성그룹에서 그간 열심히 만들고 '밀어' 온 신화적 이야기들로 밥을 짓고, 그 위에 '풀이된다', '해석된다' 란 숟가락만 놓았다. 홍보실의 작전이 아닌가 의심되는 수준의, 아주 모범적인 기사 되겠다.
'품질경영 & '전' 회장님의 분노'란 이 '신종신화'는 괴상한 추측성 기사들로 변주되는데, 대표적으로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029185730&Section=02
되겠다. 어쩌면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런 설레발을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신화는 그걸 문자 그대로 믿으라고 던져진 게 아니다. 당신이 '삼성교' 신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당신이 줄기세포교도가 아니라면 황우석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되듯. 당신이 티벳불교도가 아니라면 달라이라마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되듯.
낚아채야 하는 건 신화로 변형되기 전의 현상, 가공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이다. 거기에 신화를 창조하려는 권력의 욕망까지 잡아낸다면 금상첨화겠다. 그렇다면 위 기사 문언에서 두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먼저 ''전' 회장님의 분노'를 보자.
하긴 내가 대주주라도 그랬을 것 같다. 20년간 품질경영에 심혈을 기울이건 말건, 언제 회사 앞에 전화기를 쌓아놓고 홀랑 태워먹건 말건, 멀쩡한 세탁기가 폭발해서 21만대를 리콜하는 사태는 어쨌든 열 받는 일이리라. 그게 다 회사의 손해가 되고, 그러면 주가에 악영향을 미치잖는가. '전' 회장님은 뭐 위와 같은 특별한 상황도 있으니 더 열이 받으셨으리라.
하지만 '왜 화가 나셨는가'는 '전' 회장님 당신만이 아실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당신 자신도 잘 모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정황으로 화가 난 이유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관계자의 말만 듣고 '품질경영 기조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
따라서 사건을 좀더 명확하게 서술하려면, "이 전 회장이 지난 10일 삼성 양문형 냉장고의 파열 사고를 언론보도를 통해 접한 후 본인이 20여년간 심혈을 기울여왔던 품질경영 기조가 무너진 데 대해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안다" 란 문언을 "이 전 회장이 지난 10일 삼성 양문형 냉장고의 파열 사고를 언론보도를 통해 접한 후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안다." 와 "화를 낸 것은 본인이 20여년간 심혈을 기울여왔던 품질경영 기조가 무너진 것 때문일 것으로 안다", 의 두 문장으로 써야 할 것이다. 1
여기서, '삼성전자 냉장고 리콜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들어가면 좀 다른 면면을 관찰할 수 있다.
'삼성전자 냉장고 리콜사건'의 본질은 제품에 어떤 문제가 생겨 리콜을 했다는 것이다. 그 사건에 '실용적'으로 접근한다면, 제품의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며, 리콜의 대상은 무엇이며 리콜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 기사가 떴다. 세간에서 화제가 되는 건, '품질경영 기조가 무너진 것에 대한 '전' 회장님의 분노'다.
이건 어쩌면 워터게이트사건과 비슷하다. 워터게이트는 미국 민주주의의 허상을 폭로했다. 2000년 미국 대선의 플로리다주 부정선거와 별 다를 바 없는, 어쩌면 미국이란 시스템의 훨씬 심각한 치부를 드러낸 사건이다. 하지만 권력은 그 치부마저도 신화로 바꿔버렸다.
모든 걸 닉슨의 부도덕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구조적 문제에는 아무 포커스도 두지 않았다. 미국 민주주의는 대통령의 부덕도 너끈히 극복할 수 있다, 미국 민주주의는 대단한 '자정능력'을 가졌다, 는 식의 결론이 강요된다. 어처구니없게도 워터게이트는 시스템이 올바로 작동한다는 증거가 된다.
이 '신화'도 어쩌면 그렇지는 않을까. 워터게이트처럼 가상의 텍스트를 덮어씌워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면,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다 - 텍스트가 변형되기 전 원초적 문언대로였다면 도출되었을 반응을. 무지한 양반들은 이런 걸 읽고 "역시 건희횽 짱!" 이러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나는 기사를 쓴 기자의 양심을 문제삼아야 한다. 이건 제대로 된 신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기사는 아니니까.
다음으로 '언론보도'를 보자.
내가 지적한 기사는 "삼성전자는 사고 후 약 3주만에 원인 분석과 함께 해법을 찾고 전 서비스 요원을 투입해 이를 즉시 개선키로 한 것도 이 전 회장의 질 경영 중시의 경영철학을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근원설화' 로부터 파생한 다른 기사들은 또 약간 다르다. '전'회장님의 구체적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리콜이란 회사차원의 조치가 이뤄졌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몇몇 기사는 단지 기자가 좀 자극적으로 제목을 뽑던 와중에서의 실수라고 넘겨버릴 수도 있겠는데, 아예 그냥 추측이 '있다'라고 단정지어버린 기사도 여럿 존재한다.
두번째로 링크를 올린 기사(위 프레시안 기사)는 아주 음모론을 쓰고 있다. 이건희씨의 오너 복귀를 위한 삼성측의 수작이 아닌가 의심이 들 법도 하긴 하다. 어쩌면 '전' 회장님은 사실상 회사의 의사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걸 곱씹어 보자면, 정작 포인트를 두어야 하는 건 바로 이 '언론보도'가 아닐까 싶다.
위 머니투데이 기사는 말한다. '전' 회장님은 '언론보도'를 보고 크게 화를 내셨다고. 나는 그 단락을 보면서 생각했다. '전' 회장님은 이제 야인이 다 되셨구나 하고 말이다. 왜냐면,
폭발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언론보도'와의 갭이 문제다. 인터넷 언론으로는 약 12시간 정도고, TV나 종이신문은 1일 이상의 시간차가 있다. 12시간 지난 언론보도만 봐도, 삼성전자는 일련의 조치 - 사고 인지와 제품 회수 - 를 취한 걸로 나와 있다. 아마 즉각적인 대응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전' 회장님이 경영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고 있다면, 뭐 엄청 바쁘지 않은 이상, 언론보도가 나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가정집에서 '언론보도'를 접하고'다. 이건 너무 나이브하다. 그러니 개인적으로는, 리콜결정에 회장님의 의지가 직접 개입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하게 된다. 굳이 이런 에피소드를 슬쩍 언론에 흘리는 것도 너무 속 보이는 짓 아닐까. 그러니 결국, 이건 단지 '신화'를 위한 언론플레이란 거다. 2
정말 상황이 이런데도 '회장님의 의지가 실력을 발휘했다'고 한다면 더 큰 문제가 된다. 냉장고 21만대 리콜이 그리 만만한 사안도 아니다. 과연 그렇다면, 삼성전자는 정보는 위로 올라가지 않는데 지시는 (그것도 막무가내로) 떨어지는 상황이란 말밖에 안된다. 이런 기업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사상 최대의 실적이라고 실적잔치를 하고 있다.
뭐 강만수(어디의 장이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씨는 '다 자기 덕분'이라(는 식으로) 주장하지만.
물론 누군가가 '경영일선'에 강림할 대단한 가능성이라던가가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다. 이 '신화'가 그 강림에 약간의 서포팅을 할 거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리 봐도 '전' 회장님 본인은 아니다. 프레시안 기사는 약간 핀트를 잘못 잡았다. 3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이고, 한 번은 희극이라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두 개 다 섞여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 같다. 자, 이제 여러분께 과제를 부여하겠다.
위 사건과 상당히 유사한 사건 기사의 링크를 건다. 참고로 이건 냉장고 21만대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http://media.daum.net/economic/stock/others/view.html?cateid=100035&newsid=20071001090306272&p=moneytoday - 이 기사는 사실전달에 충실한 편이다.
http://media.daum.net/economic/industry/view.html?cateid=1038&newsid=20071001114213625&p=akn -위와 같은 사실은 이런 방식으로 변형된다.
http://media.daum.net/economic/industry/view.html?cateid=1038&newsid=20091028224908379&p=hankooki - 결국은 이지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