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대한 이야기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에포닌 2008. 5. 21. 22:43
장르는 게임을 가장한 그림책.

 군대에 있을 때 부사관 하나가 대책이 안 서는 오타쿠였다. 이 FATE란 게임을 하곤 했다. 널널한 사람이라 그와 친하게 지냈었다. 덕분이랄까 그는 징계를 밥 먹듯 받았는데 무사히 전역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06년에 전역을 했다. 컴퓨터가 생겼다. 04년 게임계 최대판매작이라고 듣고 이걸 깔았겠더랬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게임'이 아니었다. 이건 뭐야 하고 텍스트를 읽어봤는데 웬걸, 괜찮았다. '괜찮았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름 좋게 나갔던, 처음의 나레이션.

 본편으로 들어가 주인공이 바뀌고 대실망. 작가가 여자구나 하고 심심하게 느꼈다 - 남자의 심리를 전혀 모른다. 그러니 생동감이 추락한다.

 어쨌든 작가는 긴장감을 끌어오는 데 자질이 있었다. 또한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글을 쓴다는 장점도. 나중에 안 것이지만, 작가가 정통적인 문학방법론을 공부했던 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럭저럭 재미있다고 평가해도 괜찮을 물건이겠다.


 라고 했다가, 사람들에게 별 쓰레기 같은 걸 한다고 비난을 들었다. "아, 아냐! 중고딩들 정도는 충분히 농락할 만한 퀄리티..." 라고 했다가 더 까였다. 다행히 개중에 좀 도가 지나친 FATE빠가 생겨나면서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보라, 요새 누가 노무현 까냔 말이다.


 과거의 방법론이 꼭 좋은 거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누군가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사람'이라고 비유하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고안해 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신화라던가, 극작의 기본구성이라던가, 문장론이라던가, 알고 있는 사람은 유용하게 써 먹을 수 있는 도구가 존재한다. 작가의 강점 - 물론 다른 '노벨'류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지만 - 은 이런 곳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FATE의 성공을 작가의 '그런 능력'의 결과라고만 보기는 좀 힘든 구석이 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 대한 간단한 평에서 말했듯, 이쪽 업계에서의 성공은 '소비자를 소비로 유도하는 코드', 즉 대부분 '성적 욕망'으로 귀결되는 소비자의 요구에 어떻게 맞춰주는지에 달려 있다. 나머지는 오히려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동네만 그런 게 아니다. 서점에 깔려 있는 '히트'만화들을 보라. 영웅물 아니면 미소녀물이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들도 대개 그렇지 않은가. 이를테면 '007시리즈'나 '아이언 맨' 같은 거. 영웅과 여자다. 개인적으로는 '여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FATE의 3가지 테마스토리를 보자. 1번 '루트'는 여자가 있다. 2번 루트엔 영웅과 여자가 있다. 3번 루트엔 아무것도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3번 루트가 구성도 무난하고 인물의 심리표현이 제일 낫다. 하지만 인기는 가장 없다. 소비자를 끌어들일 만한 결정적 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그럴듯해 보이는 요소'는 작품에 더 끌리게 하는 요소이지, 끌어당기는 직접적인 요인은 아닌 셈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요소'만으로 승부를 건 3번 루트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어떤 부분을 작가가 공들인 티가 나는데, 오히려 한심하게 취급받는 걸 보면 좀 가슴아프다. 상업적인, 오히려 사기술로 여겨질지도 모르는 기교에서 오히려 작가는 좋은 평가를 받고, 많은 사람을 오타쿠의 길로 낚는다. 반면 그런 걸 담보하고 진정한 문학적 감수성(?)을 걸어 본 부분은 혐오스럽다는 평가까지 받는다. 그가 믿는 진실을 걸면, 다른 강점이 사라져 밋밋함만 남는 것일까. 아니면 대중은 진실 따윈 원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걸 보면, 작가는 2류로밖에 설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