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야기
일명 'EBS강사 군대관련발언 파문' 에 관한 소론
에포닌
2010. 7. 26. 22:39
어떤 정치적 발화에서 중요한 건 예의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경청자가 주의하여 살펴야 할 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논리적 정합성이고, 다른 하나는 사상의 건전함이다.
유시민은 이런 소리를 듣기도 했다.
"유시민은 저토록 옳은 소리를 왜 저토록 싸가지 없이 할까(링크)"
이 표현은 흥미로운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함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1. 유시민의 발언은 정당하다.
2. 하지만 나는 유시민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3. 왜냐하면 싸가지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치적 판단은 개인적 감정에 따라 내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데 - 어떤 발언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것이 정당한가 아닌가일 뿐이란 거. 그렇지만 감정은 강력한 것이라 정-부당의 합리적 평가를 매몰시킬 힘을 갖고 있다.
문제다. 하지만 이것은 발언자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문제다. 대개의 사람들이 이딴 식으로 살아가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역감정이나 후보자의 '얼굴', 또는 아파트값 따위를 보고 투표를 한다. 그러니 이 '싸가지' 발언은 매우 솔직하다.
그리고 종종 사람의 사고는 이런 식으로도 발전하는데,
1. A는 싸가지가 없다.
2. 따라서 A의 발언은 정당하지 않다.
3. 나는 A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당함의 기준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것이 된다. 즉 우리 교회 목사를 비판하는 것은 기분나쁜 일이다. 따라서 정당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 교회 목사를 비판하는 것은 그냥 나쁜 일이다.
물론 정당함의 기준이 감정이 아니라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위 1과 2사이에 어떤 '합리적 이유' 란 게 등장하게 된다. 물론 그 '합리적 이유' 란 작위적으로 편집된 성경 구절이라던가, 망상적 현실이라던가, 예수 그리스도(어쩌라고) 같은 것들이지만.
따라서 '싸가지' 발언자처럼 솔직할 수 없는 분들은 대략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된다.
1. A의 발언은 정당하지 않다.
2. 왜냐하면 이러이러한 합리적(으로 보이는) 근거 때문에 그렇다.
3. 게다가 A는 싸가지도 없다.
4. 나는 A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근거가 결론을 낳는 게 아니다. 결론이 근거를 낳는다(프레이저의 통찰에 잠시 경의를).
이런 현상은 골치아픈 문제를 낳는다. 결론이 근거를 낳는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낸 근거란 전혀 중요하지 않기에 그렇다. 그것은 그저 변명에 불과해서, 설령 성공적으로 반박된다 한들 다른 변명이 만들어질 따름이다. 따라서 아무리 그 '근거'를 놓고 토론을 벌인들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따라서 논리와 설득이 상당 부분 의미를 잃는다. 노빠와 유빠들에게, 유시민이 '진보'나 '복지'라는 이념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 인간인지 지적해 본들 별 소용이 없다. 그들에게는 노무현이란 한 단어로 표상되는 환상적 세계상이 더 중요하니까. 그 환상적 세계가 그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고를 파악하기 위해 주목해야 하는 건 오히려 여러 어리석은 이들의 감정이다. 그들이 명목상 내세우는 논리가 아니라.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은 어쩌면 정신분석일 수도 있다.
요 며칠 새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바로
되겠다.
문제가 된 발언을 정리하면 대략 이런 식이 되는데,
A. 인민을 남과 여로 분리하여 관념할 수 있다.
B. 남자들은 군대에서 '죽이는 거' 배워온다.
즉 군대는 (남자들에게) 살인을 교수하는 집단이다. 또는 그 자체로 살인집단이다.
b1. 군대가 살인을 가르치지 않으면 세상은 평화롭다.(B의 부연)
b2. 살인을 가르치는 것이 남성 언어의 폭력성을 낳는다.(B의 부연)
C. B의 이유로, 군대는 '좋아할 게 아니다'.
즉 군대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집단이다.
D. C의 이유로, 군대갔다왔다고 뭘 해달라고 떼쓰는 건 옳지 않다.
내 생각에 문제는 A와 D이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에게,
요는 B발언이다. 많은 사람들은 특히 B발언과, 동영상을 봤다면 분명히 느꼈을 발언자의 태도에서 감정적 결단을 내린다. 나머지는 부수하는 것이거나 우연히 고려되는 것이다. 덕분에 몇몇은 반박을 한답시고 '군대에서는 살인을 가르치지 않는다' 같은 소리를 지껄이게 된다. 1
발언에 심히 분노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남성은 전체 발언에서 '군대는 살인이다' 이외의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저 '분노자'들도 대개 A, B, C, D의 구조를 인식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발언자의 주장을 이해해서라기보다는, 군복무를 둘러싼 대개의 논쟁이 흘러간 구조가 그와 같았기 때문이다. 습관적 사고와 현실적 사건의 우연한 일치다.
어쨌거나 '군대에서의 살인은 살인이 아니다' 라는 궤변은, 뭐 나름대로 납득하는 분도 몇몇 계시겠지만서도 완벽한 논리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발언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분노자'들은 C에 주목하는데, 곧 그들에게 군대는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집단이다. 이에는 C가 D에 미묘하게 영향을 준다는 인식이 개입되어 있다. 무슨 소리냐면,
'군역에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 이유가 군대의 정당함에서 도출된다'는 전제를 '분노자'들도 갖고 있다는 소리다. 여기서 군대논쟁은 얼핏, 일종의 밥그릇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전제'는 쉽게 수긍하기 힘든데, 이런 예를 들어 보면 어떨까 한다.
경관이 수려한 어떤 강이 있다.
어떤 지도자가 관광산업이 어떻다느니 경제를 살리겠다느니 하며 이 강에 다리를 놓았다. 하지만 이 교량건설사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선과 부패로 가득 차 있어, 그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낳지 못했다. 환경은 환경대로 파괴되고, 경제적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부당한 동기와 과정으로 이루어진 부당한 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당하다면, 이 부당한 사업에 동원된 인부에게는 수당을 주지 않아야 하는 걸까? 2
어떤 지도자가 관광산업이 어떻다느니 경제를 살리겠다느니 하며 이 강에 다리를 놓았다. 하지만 이 교량건설사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선과 부패로 가득 차 있어, 그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낳지 못했다. 환경은 환경대로 파괴되고, 경제적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부당한 동기와 과정으로 이루어진 부당한 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당하다면, 이 부당한 사업에 동원된 인부에게는 수당을 주지 않아야 하는 걸까? 2
어떤 사업의 정당함과 그에 참여한 이에 대한 보상은 별개의 문제다. 물론 참여자가 사업의 불의에 개입했다던가 했다면 모르겠지만. 사람을 부렸으면 그 사람이 투여한 시간과 노력에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강제로 사람을 끌고 와 부렸다면 더욱 그렇다. 발언자는 C와 D를 연관했기에 분명히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 군대의 정당성과 군역에 대한 보상을 연관시킨 것이 과연 잘못이라면, 그 잘못은 발언자뿐만 아니라 '분노자'들도 똑같이 저지르는 셈이 된다. 굳이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져 볼까? 그렇다면 여러 분노자들이 훨씬 더 잘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이 링크 기사를 보자. 이 기사의 작자 역시 한국이 징병제 국가이기에 한국인(특히 여자)은 군대를 나쁘게 말하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발언자는 군대의 정당성에서 출발했다. 군대가 좋으냐 나쁘냐는 개인의 윤리적 판단이며, 이를 정치적 영역에서 충분히 주장할 수 있다. 또 주장할 수 있어야만 한다. 과도하게 이상적인 견해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나 석가처럼 군에 대해 과도하게 이상적인 견해를 가졌던 이들을 우리는 '성인'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분노자'들을 보자. 엄청나게 많은 수가 아예 현실적 보상을 원하는 심리에서 출발한다. 적어도 상당수의 '분노자'들의 심사에는 보상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은, 단지 그들의 이익을 위해 군대를 정당화시키려는 것에 불과하다. 이 경우 군대란 국가조직은 그들의 사적 이익보다 열등한 것으로 전락한다. '정당화'에 따른 이익도 현실적으로 별볼일없다는 걸 다들 잘 인지하고 있다. 결국 여러 '분노자'들에게 군대의 중요성이며 정의(正義)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보다 군대를 경시하고 비하하는 자들은 바로, 자기가 군대에서 열심히 굴렀다며 남들을 못살게 구는 작자들일 수밖에. 누가 누굴 욕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들 얼굴에 묻은 침은 그들 자신이 내뱉은 것이니까.
하지만 몇몇 '분노자'들은 진정어린 말투로 이렇게도 주장한다. 자신은 정말 군대에서 고생하며 '국가를 지키다' 왔기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하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기에 화를 낼 수도 있는 일이겠다. 하지만 몇 가지 이상한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병역의무를 직접적으로 지는 사람들이 군대에 대해 갖는 불만은 다음과 같다. 구타, 욕설 등 부대 내 가혹행위. 부조리한 관행에서 나오는 집단생활의 불편함. 쓸데없는 일들의 연속으로 인한 자기계발시간의 부족. 이런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살펴보면, 이런 고난은 국가의 수호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으니, 과연 지금의 모습과 같은 군대제도를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가다. 지금의 한국 군대는 육군, 그것도 특정 부분만 발달한 기형적 구조를 갖고 있다. 북한의 지상전력은 한미연합은 물론이고, 아마 남한의 그것에 비해도 현저하게 퇴보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근 2년의 징병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 그리고 오늘의 군인에게는 국가를 수호하고 있다는 수식이 올바른가? 3
뭐 이런 문제들이다. 여기서 군대의 체질개선과 민주화를 위한 정책적 시도가 이루어진다면, 발언자와 '분노자'가 합의할 수 있는 어떤 정치적 접점이 충분히 등장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발언자 같은 세칭 '평화주의자'도 '필요악'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군대를 만들 수도 있다는 거다. 군이 그 명목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설령 발언자가 '모든 군대는 그냥 악'이라고 생각해도 뭐 별수없는 일이다. 그저 그것은 정치적 입장에 불과하니까. 그렇다고 발언자가 무슨 군대를 없애기 위해 실정법을 위반하기를 했나, 아니면 혁명이라도 일으키려 했나? 과연 그렇지도 않은데, 왜 이리 심하게 분노하는 사람이 많은 걸까? 이것은 분명 특수한 심적 현상이다.
이 현상을 해설하기 위해 정신분석적 방법론을 도입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갖고 있는 무언가다. 자아는 기억의 파편으로 이루어지거나, 적어도 기억의 파편이 자아를 이루는 데에 공헌한다. 기억에는 세계의 모습이 새겨지며, 어쩌면 경험한 세계상의 조각들이 곧 자아를 형성한다. 뭐 어쨌든,
무의식은 기억을 계속적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재현한다. 사람은 항상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어쩌면 사람이 보는 모든 인간과 사물은 기억의 조합이다. 우리는 어머니를 보며, 그녀에게 우리 자신이 갖고 있던 여러 어머니상을 투영한다. 즉 그녀는 나의 어머니이며, 나를 낳았으며, 나에게 젖을 물리고, 나를 키우고 가르쳤으며..... 그리고 방금 아까 내게 밥 먹으라고 소리를 쳤다. 물론 이런 기억에는 개인차가 있다. 5
무의식이 꺼내 놓는 기억은 인간의 의도와는 좀 동떨어진 것이다. 토익 시험을 본다. 의식은 열심히 영어 단어를 머릿속에서 빼내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무의식이 재현하는 것은 어제 본 소녀시대 뮤직비디오다. 아, 가뜩이나 시간도 모자란데 이럴 수가 있나...
어떤 기억이 주로 시연되는가? 여러분은 꿈을 꾸면 대체로 어떤 꿈을 꾸는가? 그냥 멍하니 있을 때, 때로는 문득문득 어떤 생각을 하는가? 이것은 상당 부분 욕망과 관련이 있다.
마음 속에 착 달라붙는 기억은 욕망을 과대 충족하는 것이거나, 욕망을 과소 충족하는 것 대체로 두 가지다. 평범한 사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꿈도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문제는 매우 만족스러웠거나 매우 불만족스러웠던 추억이다. 코브의 꿈에 출몰하는 사건들이 바로 그렇다.
무의식이 수행하는 요구는, 사람이 어떤 기억에 갖고 있는 강렬한 충동에서 기인한다. 프로이트는 꿈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여 욕망을 실현하는 장치라고 믿는다. 적어도 사람이 짜릿했던 순간이나 아쉬웠던 순간을 (꿈에서건 현실에서건) 자주 회상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사람은 그 무대로 돌아가 욕망을 성공적으로 충족하고 싶어한다. 이 증상은 일반적이지만, 만약 지나치게 심해지면, 사람은 과거에 얽매여 현재의 심각한 문제를 제대로 풀어 내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일명 고착이다.
군대는 여러 남성들에게 최악의 경험으로 자리하고 있다. 최악의 악몽은 '깨어 보니 군대에 있는 꿈'이거나, '군에 다시 입대하는 꿈'이다. 예비역들은 군대 이야기를 자주 떠올리고, 술자리에서는 군대 이야기로 여념이 없다.
군대에서는 욕망을 극심하게 억압당한다. 따라서 군대는 부정적 고착이 된다. 이제 군대의 추억은 계속 예비역의 머릿속에서 출몰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부정적인 세계상을 올바로 안고 가질 못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남자다. 그런데 여자들은 다들 당신에게 쌀쌀맞다. 뭐 난 여자한테 인기가 없나보지, 이러고 살 텐가?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못 산다. 현실이 싫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 "여자들은 사실 나를 좋아하는데 겉으로 표현을 안 할 뿐이야. 왜? ...글쎄, 부끄러워서." 이것이 일명 '츤데레'의 시원이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자신이 사회 속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격과 역사를 갖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연애도 마찬가지고, 군대도 마찬가지다. 이제 이 빌어먹을 군생활의 추억을 어떻게 할 것인가? 츤데레의 경우를 생각하라. 곧 객관적 세계상을 개조해버리면 된다.
개인적 차원의 세계상은 개조하기 어렵다. 술자리의 무용담은 그저 허풍일 뿐이다. 기껏 군대 나와놨더니 좋은 건 하나도 없고, 어떤 년은 방송에서 자신을 '루저'라고 놀려대질 않나, 또 어느 '자기가 외국인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인'은 군대도 안 갔는데 부와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군 생활이 개인적으로는 별로였더라도, 나름 국가에 공헌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간편한 방법이다. 조금은 위안이 될 것이다. 바로 이게 '인셉션'이 주장하는 카타르시스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세계상을 왜곡시킨다. 그리고 자기합리화를 계속하여 절대 사람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세계상의 왜곡은 곧 정신병이거나, 정신병의 부분적인 양태가 되는 것이거나, 정신병으로 인간을 수송하는 급행열차 같은 것이다. 6
어쨌든 이것이 '병적'인 것은 아니라도 부적절한 사고방식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왜상은 자기수호를 위해 나름의 방법을 동원한다. 사람은 분노하는 순간 이성적인 사고의 가능성을 잃는다. 그렇다면 요새 무슨 껀수만 생기면 터져나오는 예비역들의 분노는 강박증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고착으로 말미암은 거대한 정신병의 세상에서 사는 거나 다름없다.
뭐 어쨌든 지금까지의 전개를 받아들인다면, 군대를 애써 긍정하는 강력한 동인은 그저 보상심리란 결론이 나온다. D를 끌어들이는 주장이 현실 세계에서의 물질적인 보상을 원하는 것처럼, C에 집착하는 행태는 가상 세계에서의 심정적인 보상을 요구한다. 이는 어느 정도 가산점의 문제와도 유사성이 있는 걸로 보인다(대개의 예비역들은 가산점의 혜택을 받지 못하므로).
이렇게 세계상을 왜곡하는 작자들은 나름대로 불쌍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도 그 고상한 군대란 것에 엿을 먹이는 건 매한가지다. 군대를 나쁘게 표현하면 안 되는 건 고작 자신의 망상을 유지하기 위함이니까. 실제 대개의 경우 '분노자'들의 심리에 이런저런 요소가 혼합되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들에게 별로 동정을 줄 이유가 있을까도 의문이겠다.
이제 우리는 결론을 낼 수 있다.
물론 발언자인 EBS강사는 몇 가지 실언을 했다. 곧 사람들을 남과 여로 획일적으로 이분한 것(A), 군대에 정당성이 있어야만 군인에게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한 것(D)이다. 하지만 이런 오류는 그에게 분노하는 여러 사람들 역시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사과받을 사람이 없으니, 그녀는 누구에게 사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단지 좀 반성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물론 그의 주장에 분노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군대에서 살인을 교수한다는 발언(B)은 사실이다. 그 이유로 군대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건(C) 윤리적인, 또는 정치적 견해 표명에 가깝다. 헌법질서를 부정하는 것도 아닌데, 아니 설령 현체제를 좀 나쁘게 평한다고 해서 과도한 욕설과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
그 발언을 열심히 비난하는 인간들은 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류이거나 약간 제정신이 아니다. 나는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였지만,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정치적 의사표명에 대한 이런 태도는 심히 부당하다.
정도.
좀 사족을 붙이자면 이렇다.
강사의 발언 중 b1을 보자. 즉 군대가 살인을 가르치지 않으면 세상은 평화롭다. 요새 예비역들이 벌이는 수많은 소동을 보면 어느 정도 긍정할 수도 있겠다.
이제 이 폭력적 언어에 찌든 인간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이런 '감성적' 인간들을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따져 비판하는 건 절반의 성과만 얻을 것이다. 그들은 일단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이니까. 그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반감만 살 뿐이겠다.
나는 여전히 이성적 접근을 지지하며, 모든 인간에게 합리적 판단을 요구한다. 이것은 카산드라의 방식이다. 하지만 에밀리 브론테는 정면대결 대신 감성적 접근법을 시사한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 발언자에겐 군살녀라는 별명까지 붙은 모양이다. '죽이는 거'와 살인은 어감상 차이가 있다만,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으니 넘어가기로 한다. [본문으로]
- 그리고 이 사업을 비난하는 것이 인부들에 대한 모욕이라도 되는 걸까? [본문으로]
- 군부는 무슨 비대칭전력이며 핵무기가 어쩐다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비대칭전력은 재래식 전력에 대응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재래식 전력을 강화 또는 유지하자는 군부의 주장은 논리모순이다. 오히려 이런 주장의 전제가 북한 재래식전력의 상대적 약화를 폭로할 뿐이다. [본문으로]
- 글을 쓰다 중간에 인셉션을 보고왔다. [본문으로]
- 첨언하자면 꼭 어머니일 필요는 없다. 어머니와 유사성을 지니는 어떤 다른 기억일 수도 있다. '관념의 만능'을 유념하라. [본문으로]
- 프로이트의 견해는 첫번째에 가까운 것 같다. 일반인들과 정신병자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만 있다. 현대의학의 일반적 견해는 두번째인 걸로 보인다. [본문으로]
- 사건은 대한민국의 병영국가적 현실도 마찬가지로 폭로한다. 이처럼 진실은 우매하기 짝이 없는 사건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