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훈통치
다른 사람이 언제나 합리적으로 행동할 거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국가의 레벨에서도 마찬가지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부시의 전쟁은 대체로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여기서 굳이 합리성을 추정하려 든다면, 높은 확률로 음모론으로 빠져들게 된다.
얼마 전에 죽은 김정일씨의 외교를 판단해 보자. 물론 그의 외교정책은,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사적 유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외교를 살펴보며 어쩌면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의 행동은 계산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계산이 있는 행동이라고 평가해야 마땅할 것 같다. 물론 계산은 언제나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리 좋지 않은 결과는 그 계산을 평가절하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것과 엄밀하게 구분해야 하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아예) 계산이 없는 행동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3282129295&code=990334
이 기사를 보자. 결론이 매우 간명하고 또 타당해 보인다. 굳이 위성을 쏠 이유는 없으며, 위성을 쏠 거면 협상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물론 위성을 꼭 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 분들은 그 사유를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또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물론 북한인들은 그들 나라 내부의 정치적 사정을 강변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는 정치적 사정이 없단 말인가?
우리는 이미 '삐라도 날리고 협상도 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 각하식 전법의 종말을 목격한 바 있다. 각하는 납득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삐라를 날리지 않으면 정권이 흔들흔들한데, 어째서 북한은 그것을 이해해 주지 않는가? 북한인들도 위성은 전혀 무해한 물건인데 왜 그것을 갖고 트집을 잡아대는지 납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물론 납득하든 말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하게 시사한다 - 그들의 지적 이해력이 낮다는 사실을.
물론 실무자들은 강변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다.
이럴 경우 문제는 조금 더 커지게 된다. 정말 그렇다면, 북한은 최고의사결정기구 차원에서 모순되는 목표를 모두 설정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쯤 되면 거의 정신병이다. 물론 진단은 이런 작업에서 별 가치가 없는 일이고, 중요한 것은 그것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유력한 원인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있다 - 유훈.
김정일씨는 강성대국을 만든다고 공언했다. 이것은 경제와 군사로 나뉘는데 경제야 뭐 밥이고 군사는 비대칭전력이다. 그를 정확하게 계승하는 자는 거기 있는 세목을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 여기서 식량과 위성에 대한 모순된 강박이 나오는 게 아닐까? 물론 김정일씨가 살아 있었으면 둘 중 하나를 태연히 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위성은 실질보다 슬로건의 성격이 강한 물건이니까. 하지만 이게 유훈이 되면 상황이 약간 달라진다. 무언가를 버릴 수 없다. 그리고 슬로건과 실질의 구분이 없어진다.
예를 만든 사람은 그것을 바꿔도 된다. 조선인들이 제사상에 바나나를 올렸으면 지금 사람들도 태연히 올렸을 것이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바나나가 경제적이지 않은가(뭐 국산이야 아니지만)? 하지만 조선은 바나나가 들어오기 전에 망해버렸다. 이제 여기서 뭘 바꾸면 나쁜놈이다. 만사 번거로우니, 또 최신의 과학적 인식에 따라, 제사를 안 지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소리를 들을 것이다 - 이런 호로자식이 있나! 인민은 무지해서, 죽은 사람에게 밥상을 차려 봤자 아무 쓸데없다는 걸 모른다. 적들은 선동질을 시작할 것이다. 이제 어쩔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계산적인 악당이 차라리 낫다. 슬로건에 둥둥 떠다니는 집단은 행동을 어떻게 예측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오히려 극단적인 행동을 자행할 가능성이 더 높을 수도 있다. 그 슬로건이 어떻게 바뀌느냐가 문제지만. 위성발사의 국면은 우리에게 여러 사실을 시사할 것이다. 북한은 의미 없는 구호에 얼마나 얽매이는가, 또 그런 현상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하는 따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