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닌 2009. 10. 18. 15:50

 '삼국지연의'에서 인상적인 대목 하나를 꼽아보겠다.

 여기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오로지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 정도. 사실 삼국지연의에서 정말 유명한 장면들은 거의, 완전한 창작의 결과다. 이를테면 도원결의, 삼고초려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우리들이 '역사'라고 받아들이는 것들도 비슷하지는 않을까.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반동탁연합군이 결성된다. 손견이 선봉에 선다. 동탁군의 화웅과 전투를 벌인다. 그런데 여기서 화웅은 전사하고, 손견은 승리한다. 이걸로 깔끔하게 끝.

 하지만 소설에서는 이렇다. 원술이 손견에게 군량을 대주지 않아, 손견은 패퇴한다(손견은 나중에 처참한 몰골로 원소에게 나타나 경위를 따진다). 기세가 오른 화웅을 상대하기 위해, 연합군의 제후들은 장막에서 대책을 논의한다.


 장막은 완벽한 허구의 공간이다. 이 허구의 무대에 배우들이 등장한다. 원소가, 원술이, 조조와, 여러 제후들과 그 시종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제후군에는 참전한 적이 없는 인물들까지 이 무대 위에 오르는데, 대표적으로 서주의 지방관인 도겸 되겠다. 반동탁연합군은 커녕이다. 한 술 더 떠, 도겸은 동탁에게 '조공'을 바쳐 직위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지방군벌인 공손찬 또한 북방의 근거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수하에 있던 몇몇 무장들 역시, 이 전쟁에 참전했을 리가 없다. 바로 유비, 관우, 장비, 셋 말이다.

 그러니 이 이후에 나오는 그 유명한 장면은 절대 역사적 사실이 될 수가 없다. 이야기의 구조는 사실의 나뭇가지라고는 단 하나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절대 그 시간과 공간에 있을 리가 없는 사건들과 인물들의 조합이 아닌가.

 그러나 이 장면은 '삼국지'란 스토리 전체의 서사구조에는 정확하게 부합한다. 아니 오히려, 구성의 결집성을 강화시킨다. 심지어 이는 그 후에 벌어지는 역사적 사실까지 해설하며 복선의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극적인 완성도도 뛰어나며, 기법도 대단히 참신하다. 그래서 엄청나게 자주 인용되며, '삼국지'의 내용을 제아무리 축소한 판본도 이 장면은 무조건 포함하고 있다.


 소설에서 개개의 사건은 인물의 인격을 제시한다. 원술의 치사한 짓 - 군량 빼돌리기 - 는, 그의 인격을 정의하고, 인격적 결함은 이후 그가 맞이할 파멸의 결정적 이유로 서술된다. 이제 이 장막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천천히 살펴보자.

 제후들이 장막 안에 모여 있다. 맹주인 원소는 공손찬 뒤의 인간 셋을 눈여겨본다. 공손찬에게 그들이 누구인가 묻고, 유비에게 자리 하나를 내준다. 유비는 사양하지만, 원소는 유비에게 자리를 내주는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라 유비가 황가의 종친이어서라고 말한다. 전령이 화웅의 소식을 전한다. 연합군은 대항마로 유섭이란 장수를 내보낸다. 잠시 후 전령이 등장해 유섭은 화웅에게 패해 전사했다 말한다. 다시 반봉이란 장수가 출전하나, 역시 화웅에게 살해당했다는 전언이 도착한다. 제후들은 공황에 빠진다.

 한 장수가 나서 자신이 화웅을 상대하겠다 말한다. 바로 관우다. 관우는 마궁수란 하찮은 지위에 있다. 원술은 신분을 문제삼아 관우를 모욕한다. 여기서 조조가 나서 관우를 옹호한다. 원소는 관우를 출전시키면 적이 아군을 띄엄띄엄 볼 거라며 마뜩찮아한다. 조조는 전장에서 신분을 어떻게 알겠냐며 반대를 무마하고, 관우에게 술을 한 잔 따라준다. 관우는 그것을 잠시 후로 사양하고, 출진한다.

 긴장이 한참 동안 정적 속에 흐른다. 갑자기 장막 밖에서 폭발적인 고성과 함성이 들려온다. 이후 내용은 일단 패스.


 이 그리 길지 않은 장면에서 인물들의 인격은 분명하게 제시된다. 원술은 신분만 따지는 무능한 인간이다. 원소는 우유부단하고 체면만 중시한다. 결정적일 때 정확한 판단을 내릴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조조는 이 둘과 분명하게 대비된다. 그는 능력을 중시하고 합리적이다.

 위 셋은 나중에 대립하고, 그 승부는 역사에서나 소설에서나 거의 유사한 과정과 결과를 낳는다. 그 과정과 결과는 이 장면에서 이미 결정적이다. 원소, 원술, 그 뒤에 병풍처럼 늘어선 엑스트라 제후군들은 조조를 능가할 수가 없다.

 그저 그뿐만이 아니다. 이 장면은 유비의 '인화'의 능력을 제시하고, 그가 언제 한 자리 차지할 인재임을 암시한다. 유비의 조그만 성공은 여기서 혈연과 인맥의 덕을 크게 보고 있고, 이는 역사적 사실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또한 관우와 조조의 인연도 이 장면부터 시작한다. 사실, 이 장면이 없었으면 나중에 조조가 관우에게 왜 그렇게 집착에 가까운 편애를 보였는지 설명하기 좀 곤란했을 것이다.

 이 허구적 장면은 대략 이런 식으로 현실성을 소유한다. 비슷한 유형으로 조식의 '칠보시'를 들 수 있다. '칠보시'의 에피소드 역시 허구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 어떤 기록보다도 조비와 조식의 관계를 잘 설명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역시 매우 유명하다.


 전체 서사구조의 측면에서만 아니라, 이 장면은 순수 극적인 면에서도 뛰어나다. 이야기는 뭇 사람들이 대개 떠올릴 법한 전투장면을 전혀 묘사하지 않고 있다. 소설의 원초적인 유형일 연극무대를 상상하면 더욱 특이하게 느껴질 것이다. 관우역의 배우와 화웅역의 배우가 등장하고, 관우가 화웅을 베는 장면이 등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장이 등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전투장면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관객의 시점은 시종일관 막사 안에 한정된다. 오직 전령만이 장막 밖 세계 소식을 전달한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주연급이어야 할 화웅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관객은, 마치 장막 안의 제후들처럼, 불확실한 정보만을 전달받는다. 화웅의 위협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가중된다. 장막 안에 존재하던 엑스트라 장수들 - 유섭, 반봉 - 은 장막 밖으로 나가고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단절된 외부 세계는 그 자체로도 무서운데, 공공연히 죽음을 경고하고 있다. 관객은 장막 안의 배우들의 두려움을 공유하고, 그들의 도피성 심리, 즉 집 안, 어쩌면 자궁 안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원적 심리를 공유한다.

 하지만 관객은 알고 있다 - 공포에 휘둘려 방황하거나, 자신의 껍질 속으로 도피하는 행동은 나쁜 결과를, 아마 최악의 결과를 낳으리라는 사실을. 이 '통찰'은 관객이 '위협'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기에, 어쨌든 제3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 어렵지 않게. 여기서 조조의 냉정함은 자연스레 빛을 발한다.

 관우는 때맞춰 등장한 구원자다. 그가 낮은 신분의 소유자라는 것은 성공의 희열을 가중시킬 것이다. 찌질한 캐릭터로 설정된 원술의 훼방 역시 마찬가지리라.

 그가 장막 밖으로 나가는 시점, 또는 그가 나간 직후부터가 장면의 절정기다. 장막 밖은 관찰이 불가능한 불확실성의 세계고, 침묵은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킨다. 장면의 최정점을 찍는 것은 역시 의외로, 음성효과다. 강렬한 북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린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그 해답은 잠시 뒤로 미뤄진 상태다.

 여기서 관객은 놀라야만 한다. 그 이전까지 인간 심리를 지배하던 여러 감정들은 순간 폭발한다.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엑스터시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사건의 결과가 등장해, 강렬한 흥분상태를 해소할 것이다. 고양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관객은 장막 안으로 등장하는 누군가에 의해서만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령일 수도 있고, 관우일 수도 있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일 수도 있고, 어쩌면 화웅일 수도 있다. 아직 술은 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