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이야기
감수성
에포닌
2009. 1. 26. 16:35
가끔씩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코너를 돌아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른바 '행동지침서'가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에세이나, 교양서, 심지어 고전까지도 '성공'의 커버를 씌우지 않고서는 잘 팔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성공이 아니라 현상유지가, 생존이 중요해지다 보니 판도가 많이 바뀌었다. 베스트셀러 코너는 자존적인 색깔로 물들었다. 한국소설이 눈에 띄게 약진했고, 사랑과 가족을 테마로 한 책이 잘 팔리는 모양이다.
인문계열의 수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책은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였다. 전에 보고선 그럭저럭 잘 팔리는 책이구나 생각했다. 이제는 아주 잘 팔리는 책이 되었다. 작년에 나온 책이 벌써 초판 35쇄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가판대에서 잠시 서서, 몇 장 스치듯 읽어 보았을 뿐이고, 따라서 분석이라기보다는 '인상'에 가까운 판단으로 이야기할 뿐이다. 그렇더라도 이 책의 '뛰어남'은 독보적인 데가 있다고 단언한다. 이 시대의 청년들을 지배하는 감성을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사실. 현대실용문의 모범이라 칭할 만한, 연마된 문체. 쉽고 편하게 다가오는 설명기술. 이런 것을 들어 보자.
하지만 주목할 만한 점을 또 하나 꼽아 보자. 바로 예시다. 작자는 현대인의 심리적 문제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예술작품들을 꽤 자유롭게 인용한다. 예들은 문학, 영화, 음악에까지 다양하며, 길지 않지만 요점은 정확히 간추렸고, 적절한 부분에서 적절하게 등장하여 이해를 돕는다.
나는 그 부분들을 보며, 작자는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그 '소양'은 작자의 '전공분야에 대한 인식을 연장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직업활동에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책을 쓰는 데도, 책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데도 상당한 기여를 했으리라.
그러면서 나는 다른 '베스트셀러'하나를 자연히 떠올리게 되었다. 바로 "디케의 눈" 이다. 한겨레신문에 형사소송법 강의를 했다가, 결국 옷을 벗게 된 검사가 쓴 책이다. 저자가 책의 서두에 쓴 글을 보며, 나는 이 '전직 검사' 역시 '소양'이 있는 사람이며, 일반인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고민을 해 온 사람이구나 하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이 저자의 '소양'은 그의 직업활동에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사법고시를 보고 검사임용을 받을 정도의 사람이면, 당연히 그 세계 안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는 신문에 기고의 형식으로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검찰조직은 '발칵 뒤집혔고', 그는 기고를 계속 해나가긴커녕 검사일도 계속할 수 없었다.
나는 사실들을 종합하며 자문해 보았다. 검찰조직 내에서, 개인의 '문학적 감수성'이란 건 과연 쓸모없는 것일까 하고. 그때까지의 사실만으론, 쓸모없는 차원을 넘어 오히려 '조직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결론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벌어지는 사건들을 구경하노라면, 검찰의 시나리오 짜내는 능력이 너무 빈약한 걸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하고, 상상력의 체계도 필요하다. 그런 걸 감안한다면, 그들은 아깝게도 너무 유능한 인재를 팽개쳐 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