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보다 어린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나보다 너댓 살 어린 애들은 물론. 한두 살 차이나는 애들까지 부러워했다.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혜택을, 걔들은 받고 자란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뭔가 부러워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 내가 부러워했던 것들은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들이고, 따라서 내가 아쉬워해야 했던, 때로는 억울하게도 생각했던 것들이다. 나는 그것들을 아직도 생생하게 꼽을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질지도 몰라, 그것들을 '갖고 싶다'라는 소망이 강력함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겨우 1, 2년 사이에 그어진 극명한 대비를 목격했다.
하나 둘 떠올려 본다. 학교 시설같은 거라도 괜찮겠다. 지방이라 학교 시설은 촌티가 많이 났었지만, 해가 더할수록 나아졌다. 책상들도 좋은 게 놓여졌고, 사물함도 차곡차곡 들어왔다. '국민'학교 시절 교사의 층 사이는 계단이 없는, 슬라이드식이라 위험했는데, 고학년이 되니 계단이 놓였던 걸로 기억한다. 저학년 때 학교 교실에 TV나 비디오 따위가 놓이리라는 상상은 차마 못했던 것 같다. 가전제품은 사치스럽다는 느낌이 남아있던 시절이다. 나보다 어린 아이들은, 나보다 좋은 시설에서 교육받았던 거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에 놀러갔었나, 어쨌든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애들을 만났었다. 서울 학교에서는 학교급식이란 희한한 걸 하고 있다더란다. 요새 심심하면 등장하는 부실급식 뉴스로 말미암아 이미지가 좀 부정적일지 몰라도, 그때는 뭐 경이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급식의 질은 도시락에 비할 수 없이 좋다고 들었다. 여건이 되는 학교만 급식을 하던 시절이어서 그런지는 또 모르겠지만.
학생은 도시락통 들고 다닐 필요 없어 편하고, 어머니는 귀찮게 도시락 마련 안 해도 되니 역시 편할 것이다. 도시락을 못 싸가 빵을 뜯는 일도 없을 것이고. 잘사는 집 애 도시락 반찬을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지는 애들도 없을 것이다. 당시 나는 애들한테 '식물인간' 이라고 불렸는데, 반찬통에 채소만 들어 있어서였다. 정작 나 자신이 신경을 안 썼기에 망정이지, 괜히 그런 말을 의식해 버렸으면 일찍부터 비뚤어질 뻔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4학년 때부터 급식을 시작했다. 난 당시 반장이었는데(학창 시절 얻었던 유일한 감투다), 할아버지가 소식을 듣더니 나에게 "돈이 없어 급식비를 못 내는 학생들에게 학생회의를 소집해서 급식비를 내줘야 할 거 아니냐"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급식비를 못 내 점심을 거르는 아이가 어디 있겠냐고 생각했지만, 예상 밖으로 급식비를 못 낼 형편인 애가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의 예상도 반드시 옳았던 것만은 아니었는지, 그 아이의 급식비는 학교에서 내주었다. 좀 쓸데없는 이야기다.
전학을 간 학교는 규모가 좀 작아서, 내가 졸업한 다음에야 급식이 실행되었다. 고로 같은 학교를 다니던, 나이가 한두살 어린 친지들은 복지혜택을 받았다. 젠장, 안타까운 이야기다. 당시 의무급식이 시행됐던 모양으로, 학교장이 엄청 귀찮아하더라는 후일담이 돌았다. 그리고 국민학교란 파쇼적인 간판 또한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됐다. 나와 급우들은 최후의 국민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공식명칭이 바뀌었다고 해서 초등학교의 파쇼적인 문화가 덜 파쇼적인 걸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진학한 중학교는 꽤 파시스트적인 학교였는데, 마치 군대를 연상하게 했다. 남자들만 다니는 중학교였으니 더욱 그랬다.
신병이 들어온다. 신병들을 연병장에 집합시키고, 장교가 고함을 친다. 대대장이 일장 훈시를 한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이 주르륵 나열된다. 조금이라도 일탈하는 장병들에게는 구타와 욕설이 선사된다. 군대가 그렇지 뭐.
여기서 병사를 학생으로, 장교를 교사로 바꾸면 꽤 그럴듯하게 내 중학교 생활을 표현할 수 있다. 중학교는 요즘의 어지간히 널널한 부대보다 훨씬 군대에 어울렸다. 나는 어렵지 않게 교사와 막사의, 운동장과 연병장의 동일성을 가늠할 수 있다. 요새 군대의 기강 해이를 걱정하는 예비역들이 그 학교의 풍경을 보노라면, 감탄의 수준을 넘어 사뭇 감동에 휩싸일 것이다. 멋지구나아!
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있다 신입생들이 소집되었다. 학생주임이 운동장 조회대에서 "아직도 초등학생 티를 못 벗은 놈이 있다!"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A4용지에 빽빽하게 인쇄된 '주의사항'이 배부되었다. 연단에서는 그 '사항'들을 일일히 지적하고 강조했고, 이야기가 다 끝나니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주의사항 끝머리에는 "본교에서는 3학년의 경우 저녁 9시까지 자율학습을 실시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보며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구나", 하고 우울해했다.
교장 되시는 양반은 이 멋진 중학교의 메인 캐릭터였다. 그분에게서는 전체주의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이 교장 선생님이 나오면 단연 첫번째로 기억나는 것! 조회란 걸 이 양반은 너무나 좋아하셨던 것 같다. 아니 그저 당신의 사명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일 주일에 네댓 번은 운동장에 학생들이 종횡으로 배열되고, 정해진 순서에 맞춰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뭐 좋은 말씀이었겠지만, 무지무지하게 길었다는 것 외엔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굳이 따지자면
『(미군정 시절)국기에 경례할 때 태도가 심히 무례했던 조선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에 분노한 미군 장교가 그놈을 쏘아 죽였다. 한국과는 달리 아메리카의 국가정신은 진정 위대하다!』
정도? 훈화가 너무 긴 나머지, 애들이 멀쩡히 서 있다 졸도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럼에도 교장 선생님께서는 말씀중에 학생들이 움직이는 걸 매우 싫어하셔서,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애들을 지적해 내어 기합을 주곤 했다.
이 교장님이 영도하는 학교의 분위기는, 간단히 말하면 "일단 맞고 시작하자" 정도 되겠다. 영어시험을 못 치면 영어선생에게 두들겨 맞고, 수학시험을 못 보면 수학선생한테 두들겨 맞고, 모의고사 총점이 낮으면 담임에게 맞는 시스템이었다. 담을 넘어 과자를 사러간다던가, 속칭 '쌈치기'를 하다 걸리면 정말 먼지나게 맞았다.
영어시험 틀리면 틀린 개수만큼 맞았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작달막한 체구의 여선생이 학생을 탈진할 정도로 때려 양호실로 실려간 경우도 있었다. 급우들은 '여자가 어떻게 저렇게 지치지도 않고 잘 때릴 수 있나' 신기해했다. 나는 맞기 싫어서라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체육교사는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풍채 좋은 사람으로 얼굴도 그럭저럭 잘 생겼더랬다. 처음 몇 시간 동안 교실에서 체육 교과서를 들고 수업을 했는데, 꽤 괜찮은 사람 같았다. 내 생각만 그랬던 게 아니라 다른 애들도 "좋은 선생님 같아"라고 입을 모았다. 이야기는 구성이 있고, 발음도 분명한데다 적당히 유머 감각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 주일이 지나고, 필드로 나가자 사람이 돌변했다.
사람 변하는 게 무슨 닥터 지킬과 하이드 수준이었다. 때리는 거야 다들 잘 때리니 그다지 유별나다고는 못하겠는데, 폭언이 심했고 습관적으로 기합을 주곤 했다. 그럴 때는 저렇게 성질 더러운 인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들은 그의 '변신'을 보며 괴이하다고 수군거렸다. 운동장에 나가 햇볕을 받으면 사람이 이상하게 변하나보다. 그때까지 국어책에서까지 온통 '정형적인' 인물만 학습해 온 '우리'들은 그 변신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가 기강을 잡아야 할 때(살다 보면 느끼겠지만, 그런 때란 게 있다)'가 다가오면, 이를테면 학기초라던가, 운동장을 쓸며 학생들을 마구 굴렸던 걸 기억한다. 체육시간 시작할 때 운동장을 죽어라 뺑뺑이 돌았던 기억도 난다. 나는 그를 지독하게 미워했지만, 지금 떠올리자면 그는 오히려 열성적인 교사였다. 분명히.¹
아이들은 공부를 잘해야 했다. 전체의 1/3안에 들어야 학업을 제대로 이어나갈 수 있다. 게다가 1/3 내에서도 수준차이가 났으니까, 되도록이면 좀 더 높은 학교 문턱에 기어들어가야 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 촌동네에서 고등학교 학벌은 의외로 강력했다.상위권 학교에 들어가면상대적으로 출세길이 열리는 셈이니, 애들을 갈궈서라도 '좋은' 고등학교에 집어넣어야 했을 것이다. 애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부모들의 알량한 자존심을 위해서.
매년 각각의 고등학교들이 몇 명의 서울대, 연고대의 입학생을 배출했는지가 시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숫자를 늘리기 위해 농대에 원서를 쓰도록 '권유'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는데, 흔히 십수 명의 농대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런 '성과'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점들이 그저 고등학교일 뿐인 각각의 학교들에게 강력한 개성을 부여했다. 각 학교의 고입 학력고사 점수 '커트라인'이라던가. 졸업생들의 직업 - 예를 들면 A학교는 사업가가, B학교는 공무원들이 많았다 - 이라던가. 심지어 각 학교 학생들의 계층차이 - 부모의 소득수준이 꽤 차이가 났었다 - 같은 것까지.
내가 다녔던 중학교의 폭력성은, 당시 제일의 관심사였던 진학문제에 있어 대단한 성과를 발휘했다. 학교의 성적은 시에서 제일 높았다. 또 상위권 고등학교에 어느 곳보다도 많은 학생들을 올려보냈다.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맞고 들어오는 애들을 보며 상심하기도 했었지만², '점수'라는 성과를 보자 대단히 만족했다.
부모들은 학교 정책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또 애들을 언제까지고 붙들어 놓길 바랬고. 어머니들 사이에서 교장 선생의 인기는 정말 하늘을 찔렀다. 3학년 때 교장이 퇴임하자 엄청 아쉬워하고들 했다. 교장은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이었다.
이 학교 학생들 가운데는 '고득점자'도 많았지만, 부적응자들도 은근히 좀 많았다. 일명 '생활'의 세계에 빠져든 학생들의 숫자 역시 시내 중학교들 중 탑랭크였다. 하지만 나는 그러려니 하고 통제에 잘 순응하며 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중3 여름 무렵이었다.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들에게 설문지가 배부되었다. 정부에서 공립 중학교를 모조리 공학화한다는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다. 바로 남녀공학에 대한 찬반을 묻는 설문조사였다. 아이들은 "야, 야, 남녀공학이 됀대! 낄낄낄!" 하며 마냥 좋아했다. 나는 외쳤다.
"이 무지한 민중들이여, 남녀공학이라는 말에 혹해 찬성표를 던지려는가? 생각해 보라. 네놈들은 이제 며칠이면 졸업하고, 이 공학화 계획과는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다! 이건 우리가 졸업한 다음 이 학교에 여학생을 받겠다는 이야기다. 우리들은 결연히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 우리들의 피땀이 어린 이 교사에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연애질이나 일삼을 거다. 어떻게 그런 걸 용납하겠단 말인가!"
하지만 나의 발언은 깨끗히 무시되었고, 설문조사는 학생들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얼간이들! 멍게! 해삼! 단순무식한 것들 같으니라고!! 뭐 그건 그렇다치고, 얼마 있지 않아 나는 적당히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소위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제 휘황찬란했던 중학교 시절은 추억으로만 남는 듯했다.
그런데 내가 나왔던 중학교에는 내 친지들이 은근히 많이 다니고 있었다. 바로 그들에게서, 학교에 대해 뭔가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학교에 찾아갔다. 진상을 확인해야 한다.
나는 교문을 넘어서 학교 건물을 바라봤다. 학교 외견부터 꽤 산뜻했다. 강당이 생겼고, 벽에 금 간 것³도 다 보수했고, 겉에 페인트칠도 새로 했다. 교무실에서 한때 국어를 배웠던 선생을 만났는데, 성격이 많이 동글동글해진 것 같았다. 결혼을 해서인가, 역시 노처녀 히스테리였던 건가?
그뿐만이 아니라, 교무실 분위기가 아주 전체적으로 이상했다. 기분탓이려니 해도 찜찜한 게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아는 교무실은 이렇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종이 울리고, 학교가 소란스러워졌다. 청소시간이 되었다보다. 여자애들 까르르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렇다, 학교는 기어이 남녀공학이 된 것이다!
위화감을 잘근잘근 씹으며 선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년 새 뒤바뀐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보아하니 학교의 가치관도 뒤집혀 버린 모양이었다. 어느 교사분이 말하기를, 예전과는 다르게 방학숙제도 주제별로 테마학습을 시행... 이 시박! 애들 붙잡아 놓고 문제집을 풀게 만들어야지, 테마학습이 뭡니까! 그래가지고 학력이 올라가겠습니까?
사실 교장이 퇴임한 이후로 교사들이 전부 힘이 빠졌다고 해야 되나, 나사가 풀렸다고 해야 되나,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 불길한 예감이 몇 년이 지나 지나치게 현실화된 셈이었다. 사나왔던 선생들도 지금 보니 다 사람 좋은 아저씨 아줌마들이었다.
예의 그 체육선생은 남녀 학생들을 모아놓고 양성평등주의에 대해 설파하더라는 소문이 돌았다. 게다가 교실에서뿐만 아니라 필드에서도 모던한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체육시간에는 남학생 여학생 짝지어 이인삼각 달리기를 한단다. 대체 왜 그런 걸 합니까? 체육대회 종목이라 연습하느라 그렇단다. 아악!
교정을 걸으니 겨울철인데도 분위기가 자못 화기애애했다. 재잘대며 몰려다니는 애들을 보니 참 좋아 보였다.누구 졸업하자마자 이 지랄이라니. 아니, 세상에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나의 분개를, 단지 '여자애와 이인삼각 달리기를 못한' 울분으로 이해하지 않길 바란다. 난 정말 억울하단 말이다. 나보다 3~4년 늦게 학교에 들어온 애들은 정말 행운아들이었다. 은총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좋은 환경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학교는. 혹시 그렇게 애들을 널널하게 놔두면 진학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지역의 '비평준화 세대'는 나로서 마지막이었다. 이후 학생들은 일명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지금은 인문계 학교도 하나 더 생겼다. 애들이 조금 덜 서로 맞부딪치며 경쟁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 때 기억을 떠올리노라면, 과연 교육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란 테마가 내게 던져진다. 많은 사람들 - 대표적으로 중학교 시절 교장 되시는 분 - 은 '시험'과 '점수', '성과'가 제일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 다른 건 대체로 희생해도 된다고 믿는 듯하다. 아마 그는 그의 지도방식이 수많은 일탈자를 낳았던 사실, 학교의 폭력성이 학생들의 폭력적인 문화에 대단히 공헌한 점 같은 건 간단히 무시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낙오자들에게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중학교를 찾아보고 느꼈던 상실감이, '교육의 모습은 어때야 하는지' 에 대한 답을 준다고 믿는다. 그리 좋지 못한 기억도, 때로는 내게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이제까지 내가 어린 애들을 부러워했던 이유를 그럭저럭 이야기한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좀 특이한 감상에 젖게 된다. 현재차기 정부는 차례차례 교육에 관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앞서 말했던 교장선생분이 뛸 듯이 기뻐하실 만한 계획들이다. 혹시 당신이 무덤에 가 계시더라도, 어떻게든 소식을 듣고 흙더미를 헤치고 나오셔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실 것만 같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모양이니, 여러모로 세상은 괜찮게 바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반드시 그렇다는 게 아니라..
1. 내가 늘어놓았던 건, 그 나름대로의 교육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행위였을 거다.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건 마찬가지로 지긋지긋했던 군대 생활 덕분이다. 군대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군.
2. 당시만 해도 잘못한 게 있으니 선생한테 두들겨 맞았겠지, 하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3. 학생들은 건물 벽에 금이 간 걸 걱정하곤 했다. '검사 결과,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