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전 것들(논픽션)/옛날

사건사고

 역사상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인 '적과 흑'. 작가인 스탕달은 어느 사건에 대한 신문기사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을 썼다. 치정살인의 미수라는 치졸한 내용의 기사였다.

 

 사건사고 그 자체는 그저 막장으로 치닫는 인간들의 시시한 이야기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 이런 껀수들은 좀더 많은 이야기의 원천이 된다. 1980년대의, 당시에는 좀 시끌시끌했던 어느 사건을 소개해 볼까 한다.

 

 

 어느 유괴범이 돈을 노려 아이를 납치했다. 유괴범은 하수인을 시켜 아이의 부모에게 협박전화를 걸었다. 범인은 아이를 꽁꽁 묶어 아파트에 가둬놓았다. 며칠이 지났다. 아이는 완전히 탈진상태에 빠졌다. 범인이 박카스를 아이의 입에 부었지만 아이는 마시지도 못했다. 범인은 아파트를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 "죽어버릴 것 같은데, 어쩌지".

 

 1981년 범인은 결국 잡혔다. 재판에서 판사들은 '살인의 고의'와 '살인행위'를 인정했다. 처벌은 사형이었고, 사형이 확정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사형이 집행되었다.

 

 '고의에 의한 살인'이란 결론이 좀 알쏭달쏭하다. 사형이란 처벌이 좀 가혹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뭐, 흔히 있을 법한 악당 이야기다.

 

 

 그런데 당시 이게 왜 좀 시끌시끌했냐 하면, 아이를 유괴한 범인이, 다름아닌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체육교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협박전화를 건 하수인은 여고생으로, 범인의 학교 제자였던 동시에, 그의 애인이기도 했다. 범인인 교사가 유괴된 아이의 어머니와 불륜관계였다는 기사도 보인다.

 

 범인이 돈을 노리게 된 이유도 참 사악하다. 술과 여자에 빠져 씀씀이가 헤펐던데다, 결정적으로 도박에서 진 빚 때문에 생활이 궁핍해진 게 범행 동기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정말 여러 번 죽여도 마땅할 놈 같다.아이를 '죽인' 것을 제쳐놓고라도 말이다.당시 유행했던 현장재연이 성황리에 거행되었고,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재연되는 유괴범의 범죄행위에 광분했다.

 

 

 

 이 이야기는 85년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의 훌륭한 소재가 된다.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최민식이 분한 유괴범 교사는 순수한 악의 화신으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올해 5월, "벌레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 "밀양"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걸, 다들 기억하리라.

 

 아래는 "벌레 이야기"의 작가 서문 중 한 단락이다.

 

 "작품을 쓰기 얼마 전 서울의 한 동네에서 어린이 유괴살해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결국 붙잡히고, 재판을 거쳐 사형수로 집행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과 고통은 굳이 이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범인이 형 집행 전 마지막 남긴 말이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빌겠다'는 요지였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겠지만, 내게는 그 말이 그렇게 들렸고, 그것은 내게 그 참혹한 사건보다 더 충격이었다."

 

 사형이 집행되었던 1983년, 범인은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 속죄하는 마음으로 눈과 신장을 기증한 후 교수대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제5공화국이 시작된 지 2년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