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성에 관하여. 1
손석희는 JTBC에서 행복하신가? MBC의 끔찍한 몰락은 100분토론을 보며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 이것은 토론 프로그램인가? 어쨌든 이 글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정상적인 토론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다.
토론은 사실을 확정하는 게 역할이 아니다. 많은 사실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 속에서 확정되어 있으며, 그보다 더 전문적인 사실을 확정하는 것은 학자들이 한다.
물론 토론에서 패널들은 어떤 논리적인 비판에 따라 사실을 확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부차적인 역할이다. 이런 형식의 토론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시민의 정치적 견해의 디오라마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2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민주사회에서는 정치적인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 아테네 시민들처럼 모두 민회에 나와서 토론하지 못한다. 인구가 4천만인데 그게 될 턱이 있나...
그래서 대표들을 뽑아 놓고, 그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중계한다. 그것을 모형으로 삼아 우리들는 어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시민들 사이에 오가며, 그것들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들이 나중에 투표라든가를 할 때에 참고가 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토론자의 자격이 도출된다. 확정된 사실을 흐트러뜨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고생물학을 예로 들어 보면,
1. 크로마뇽인이 네안데르탈인을 학살해서 멸종시켰다는 것은 불확실한 가설임.
2. 공룡이 운석으로 멸종했다는 건 유력한 가설임.
3. 시조새가 공룡과 일정한 연관이 있다는 것은 정설에 가까운 사실임.
4.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확고한 이론임.
5.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정설임.
1~5번은 그 확실성에서 싸잡아 한 묶음이 아니다. 진화론은 1이나, 심지어 2와도 동급으로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체계 안에 있는 확고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부정한다, 이러면 과학을 부정하는 인간이고, 우리의 지적 세계 밖에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이들과 동등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또 그래서도 아니 된다.
만약 우리가 그들과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보는 것들이 사실인가 아닌가, 우리는 존재인가 가상인가, 이런 철학적인 토론만이 가능할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객관적으로 정립된 사실체계를 부정하는 자들이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가령 종군위안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내용이 확정된 사건이다. 이미 자료가 다 나왔고 반박할 여지도 없다. 그런데 일본 정치인들이 종군위안부는 자발적인 참여였다는 주장을 한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개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 다양한 의견이 있으니 검증이 필요하다.
검증은 무슨 검증인가? 검증은 끝났다.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게 아니다. 학계의 확고한 의견이 있고 그 경계 밖에 이상한 놈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토론하려면, 그 주장이 우리가 인정하는 사실의 범위 내에 들어온 이후에야 가능하다.
토론은 학문의 한계를, 그리고 토론의 한계를 벗어난 주장을 수용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은 마치 일본 텐노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든가 칭기즈칸이 사실 한국인이었다거나 하는 주장과 같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증상에 관하여 토론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불확실한 사실 - 가령 공룡멸종 - 이 확고한 사실 - 진화론 - 과 동급으로 취급되어서도 아니된다. 이런 걸로 물타기하는 놈들은 사기꾼들의 다른 종류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