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WoW를 하다 보면 정말 별별 인간들을 다 구경하게 된다. 당신도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가상세계에선 인간들이 괴상하게 변한다고. 1
하지만 현실세계 인간들도 만만찮게 이상하다. 찌질한 걸 따지면 사실 거기서 거기고, 악독한 마음은 오히려 현실의 인간이 더 먹을지도 모른다. 온라인상에서는 살인과 방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정말 나쁜 짓' 이라고 해봐야, 해킹이나 욕설 정도다.
그래도 게임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부딪치고, 트러블이 발생한다. 온라인상에서는 규범도 없고, 권위도 서열도 없어서, 분쟁은 대개 일방적인 탄압으로 끝나질 않는다. 그렇다면 이 분쟁을, 복수의 욕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리니지'에서는 욕망이 폭주하는 바람에, 실제 살인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나는 뼈에 사무치는 증오, 유혈이 낭자한 복수, 이런 걸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피가 튀면 평점 1점을 더 가산하는 특이한 취향의 소유자다. 그래서 박찬욱을 좋아하고, 곧 이 '복수에 대한 욕망'이란 것에도 조금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WoW의 '해결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바로 '차단'이란 해결방식.
인맥관리 카테고리에 '차단'이란 기능이 있다. 이 기능으로 특정 아이디 유저를 지정하여 '차단'할 수 있다. 그러면 '차단당한'아이디 유저가 전송하는 메세지는 '차단한' 유저에게 도달하지 않는다. '차단당한' 아이디 유저도 차단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가 그를 '차단한' 유저에게 개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님은 차단당했음'이란 문구가 돌아온다.
이걸로 끝이다. 뭐 이게 별건가, 라고 생각하시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이 '차단'이란 걸 대단한 징벌인 양 여긴다. 사실 '차단당한' 유저가 약간의 불이익을 좀 입기야 입는다. '차단한' 유저에게 말을 못 건네는 불편함. 그리고 '차단당함'으로 자신의 명예가 약간 훼손되었다는 인식, 두 가지다.
솔직히, 정말 두 가지 '불이익' 다 별 거 아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별거 아닌 '차단'으로 대다수는 그냥저냥 만족해 버리고, 딱히 별다른 수단을 찾아보지 않는다. 물론 이런 허가된 방법을 넘어서는 별의별 유치찬란한 짓거리들도 벌어지고는 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유치찬란한 수준이다. '모 인터넷 사이트에 그 놈의 아이디와 그의 악행을 게시.' 라는 것 정도. 이렇게 되면 지목당한 유저는 그 이름을 갖고 게임을 하지 못하... 는 건 아니고 하기가 좀 불편해지는 정도다. 얄밉게도, 블리자드사는 이름변경 서비스와 주소이전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걸로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들도 소수나마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절차를 다 밟기 마련이고, 블리자드사에 항의성 메일을 몇 개 보내는 선까지 가면 '피해자'가 지쳐 쓰러져 버린다. 공식 홈페이지에서 엉뚱한 제작사를 까다 보면, 어느덧 사건 자체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어떤 기억이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아픔이 상처가 난 그 순간 그대로 지속된다면, 아마 어떤 인간도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차단'을 불러온 악행 그 자체도 서서히 잊혀지지만, '차단 리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대개의 인간들은 한 3달쯤 지나면, 어지간한 사건이 아닌 이상 자신이 왜 이 인간을 '차단'했는지 잊어버린다. 결국 주기적으로 차단 리스트는 초기화되어 '통합'에 이바지하게 된다. 좀 꼼꼼한 인간들은 이 '리스트'를 나름 면밀하게 관리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데 잊어버리는 속도에 차이가 약간 날 뿐이지, 결과는 뭐 어슷비슷하다.
여기서 정말 '독한' 놈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나쁜 놈을 '차단'하는 동시에 '친구' 리스트에도 등록한다. '친구' 리스트에는 간단한 메모를 남기는 기능이 있는데, 여기에 그의 악행을 기록하는 거다. '이 새키는 모월 모일 공창을 도배함. '이 병신은 모월 모일 막공 2에서 헛소리를 지껄임'.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 '친구'가 게임에 접속하면, 효과음과 함께 누구누구가 접속했다는 메시지가 뜬다. 그러면 리스트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풀어질 법한 앙심을 다잡는다는 것이다. '잊지 말자, 그놈의 찌질함을', 이란 식으로. 3
이런 별난 인간들은 분명 드물다. 블리자드사는 앞으로도 분명 '차단' 리스트에 메모기능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복수심이 적당히 해소되고 언젠가 또 풀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게임 제작사가 원하는 건, 유저들의 갈등으로 변화하는 사회가 아닌, 자신들이 기획한 대로 별 큰 사고 없이 무난하게 돌아가는 사회일 테니까 말이다.
적당히 화내고 잊어버려라. 이것이 게임 속의 세상,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다.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도 어쩌면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무슨 사건이 터져도 적당히 넘어갈 줄 알며, 언젠가는 망각해 주는 자세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가정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또 어쩌면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하지만 부디 이것만은 영원히 잊지 말자. 언젠가 끝내 복수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잊지 말자. 세상 사람들 모두 잊어버려도, 나만이라도 잊지 말자. 수첩에 적어서라도, 그림을 그려서라도, 노래를 불러서라도, 비석에 새겨서라도, 그 잔혹한 진실들을 간직해 나가자. 그 피와 죽음의 기억을 이야기하자. 스텐카라친은 반드시 러시아의 대지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