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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

아르마다


 꼭 옳은 일만 모범이 되는 건 아니다. 김일성은 차우셰스쿠의 모범이 되었고, 술라의 정적 학살은 급진파의 모범이 되었다. 중국의 인권경시는 한국의 모범이 되고,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세계 자본시장의 모범이 된다. 어쩌면 사람들은 나쁜 걸 더 잘 따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전쟁에도 모범이 있을 것이다. 아퀴나스는 정당한 전쟁의 요소를 3가지 꼽았다. 권한, 근거, 선의. 즉 전쟁은 정당한 국가권력의 행사과정으로 개시되어야 하고,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하고, 선량한 의도로 이루어져어야 한다. 물론 현실의 전쟁은 전혀 도덕적으로 수행되지 않는다. 모범이 되는 실제 전쟁은 좀 별다르다. 히틀러는 1차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선전전을 높게 평가하고,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래 들어 미국이 벌인 4개의 전쟁을 살펴보자. 1개는 아버지 부시가, 1개는 클린턴이, 2개는 아들 부시가 저지른 일이다.

 위 4개 전쟁 모두 악에 대항하는 성전처럼 선전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특정 지역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적어도 군사적으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하지만 걸프전쟁과 유고전쟁의 특징적인 점을 꼽아보자. 하나는 전쟁의 형식적 근거, 둘은 외교적 동원력, 셋은 선전전략이다.

 전쟁의 근거를 살펴보자. 명분은 어쨌든 모두 방어적이다.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해, 또는 코소보를 침공한 유고군을 몰아내기 위해. 대량살상무기나 테러리즘 같은, 실체가 모호한 이유로 발발한 아들 부시의 전쟁과 비교해 보라.

 역사적으로 쿠웨이트랑 코소보를, 이라크랑 유고와 분명하게 분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 '침공'은 어느 정도는 내전적 성격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방위라는 명분쌓기에 충실했고, 그것은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그 정당한 '방위'로 그 어느 곳 인민의 생활도 더 나아지진 않았지만. 전쟁으로 이라크 국민들의 생활은 비참해졌고, 유고에서는 공습이 대량학살을 부추겼다.

 외교적 동원력을 살펴보자. 명분이 명확했고, 많은 외교적 조율을 거쳤기에 미국은 여러 국가를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걸프전쟁에서는 다국적군이, 유고에서는 나토군이 출동했다. 아들 부시의 전쟁에 비하면 우방국가들의 전쟁참여도가 땅과 하늘 차이다. 독일이나 프랑스도 적극가담했다. 이는 전쟁부담을 상당히 경감하는 동시에, 전쟁이 그 정치적 목적 - 지역의 헤게모니 장악 - 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선전전략을 보자. 걸프전은 적극적인 선전기술이 가장 잘 동원된 전쟁이다. 전 세계인들은 미국이 첨단무기를 동원하여, 그래도 나름 강하다고 생각했던 이라크군을 개관광하는 걸 목격했다. 그것도 실시간으로. 미디어의 엄청난 힘이 전쟁을 스펙터클한 영화처럼 만들어버렸다. TV화면은 어쩌면 사실적일지 모르지만, 전쟁의 참혹한 실상은 완벽하게 가려졌다. 패권국의 권력욕까지 어느 틈엔가 합리화되어 버렸다. 사실은 정당한 전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유고전은 선택과 배제의 전략이 주효했다. 언론은 군사보안의 핑계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었다. 수많은 민족과 이념이 섞인 발칸반도는, 그 어디에나 명과 암이 혼재한다. 하지만 국가와 자본의 의도에 따라 걸러지고 걸러진 언론보도 속에서, 대중은 백색의 아군과 흑색의 적군만을 관찰할 뿐이다. 악당들은 편에 따라 정밀하게 세분되어, 한쪽은 그럴듯하게 재판에 회부되었고, 다른 한쪽은 면죄부를 받았다.


 이런 완벽한 수완의 결과는 무엇인가. 걸프전은 미국이 세계의 절대패권을 쥐었음을 알렸다. 유고전은 그것의 재확인이었다. 중간급의 국가라도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절대 대항해서는 안 되는 초강대국임을 각인시켰다. 지역패권은 도미노처럼 미국에 넘어갔다. 세기말 절대강국의 역사다.

 그러나,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에는 이 셋 중 그 무엇도 없었다. 바보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속지 않았고, 좀 민주화된 국가에서는 반대시위가 매일같이 일어났다. 뻔히 드러날 조작극으로 전쟁을 시작했고, 종속국 몇을 제외하면 누구도 동원하지 못했으며, 전쟁 보고서에는 성경구절이나 적어놓고 있었다.

 치밀하게 기획되지 않은 전쟁이 성공할 리 없다. 목적인 지역 패권을 장악하기는커녕, 몇 년이 지나자 게릴라들에게 밀리고 밀려 실지까지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적당히 순화시킬 수도 있었던 이란은 초강경세력이 되었고, 파키스탄은 반도들에게 넘어갈 판이다. 전비는 끊임없이 나가 본토경제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결국 이라크에서 그다지 원치 않았던 철수가 이루어졌다.

 이제 아프가니스탄은 밑 빠진 독이 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정부수립이 아예 불가능한 정도의 사회구조를 갖고 있는 나라에 쳐들어간 게 잘못이었다면 잘못이었달까. 그러니 자동소총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위대한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부시가 저지른 병신짓은 또 이뿐만이 아니라서, 미국 경제를 완전히 말아먹어 국가경제적으로도 전쟁에 쉽게 버텨낼 수 없는 상황까지 몰고 왔다.


 사실 아르마다는 굳이 열심히 싸울 필요가 없다. 그 존재만으로 위압을 주고, 동네 양아치들이나 가볍게 털어 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중요한 건 어쨌든 그것으로 유지되는 하부구조니까 말이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클린턴이 "나 북한 폭격할거임 뿌우[각주:1]" 라고 외치던 때는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는 뭔가를 아는 사람이었다 - 솔직히 협상을 하려면 가볍게 폭격부터 하고 시작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것이 초강대국의 협상방식인 것이다.

 굳이 폭격하기 싫거나 귀찮으면 '언제라도 폭격할 수 있다'는 믿음 정도는 심어 줘야 한다. 오바마가 아무리 선량하게 자랐다고 해도, 북한문제에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일주일에 다섯 번은 북한을 폭격하는 꿈을 꾸리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미국 대통령이 그 정도의 가벼운 호전성은 갖춰 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미국은 이미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 전쟁을 치룰 수 있는 상황에 있지 않다. 혹자는 무슨 2차대전 이야기를 하시는데, 전쟁이 난다고 GM이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이제 미국이 세계의 공장인 시절은 지나간 것이다.

 북한이 나름대로 믿는 구석은 이런 것이 아닐까. '설마 쳐들어오겠어', 뭐 이런 거 말이다. 비 내린 김에 대청소하자는 심산인 것이다. 이 정신병자들은 어쩌면 히틀러 수준으로 예리한 감각을 소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위험을 담보하는 자세는 말 그대로 정신병자 수준이다. 자신들은 광기를 부릴 대로 부리면서, 미국은 비이성적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 올곧게 믿고, 아니 믿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과연 내일이나 모레나, 오바마가 자다 말고 직통전화를 꺼내들어 "Go!"라고 외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현실적 믿음은, 그 정도로 위태하게 달린 칼 아래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다.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다고 과연, 앞으로도 무사하다 단정할 수 있을까. 시장이란 발명품이, 벌써 우리를 보기 좋게 배신했는데도.





  1. 몇몇 미국 행정관의 회고록은, 이를 김영삼의 개구라라고 주장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