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하려는 책은 “사랑의 매는 없다”. 작자는 앨리스 밀러, 독일인이다. 정신치료를 담당했던 의사였고, 지금의 업은 작가다.
책의 내용은 매우 '급진적'이다. '애들을 마구 패지 말자'도 아니고, '사정 봐가면서 때리자'도 아니다. '아예 체벌을 금지해야 된다'는 게 작가의 주장이다.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가정에서 부모들까지도. 내용을 간단히 개관하자면,
1. 체벌은 아동에게 일련의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며, 이런 문제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된다.
2. 이런 정신적 문제가 다음 세대에 체벌을 되풀이한다.
3.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어린 시절의 진실을 대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라는 정도로 간추릴 수 있겠다. 한국인들에게는 독일식의 '완전금지'가 매우 생소하며, 또한 무모하다고 느껴지리라 생각한다.
"이상적인 교육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또 "오늘날 교육의 위기는 무엇 때문인가?" 라는 두 가지 질문을 한국인에게 던진다면 어떨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답할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버릇없게 가르치는 게, 교육의 위기를 낳는 유력한 요인이라고. 그리고 교육의 주요한 목적은, 애들을 '훈육'하여 규율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물론 오늘날 '교육의 붕괴'는 빌어먹을 '평준화' 때문이고, '잃어버린 10년' 때문이고, 노무현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비평준화 특목고도 좋아하지만, 매질도 상당히 좋아한다. 방학 때면 으레 다음과 같은 '소식'이 TV를 타고 전달된다. 일부 학부모들이 애들을 청학동 서당 같은 데 보내, 회초리를 맞게 하며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킨다는 뭐 그런 거 말이다. 방송은 은근슬쩍 몇 가지 함의들을 전파에 실어 보낸다. 이런 부모들이 지각 있는 부모이며, 매를 드는 훈장은 이상적인 교사이고, 구타를 수반하는 엄격한 훈육만이 올바른 교육방법이라는.
하지만 독일에서 교사의 체벌은 오래 전부터 금지되어 있었다. 2000년이 되자 심지어 가정에서의 체벌도 금지했다. 물론 반발은 있었다. 교사의 체벌'권'을 '박탈' 했을 때도 심한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독일은 병정 국가로, 가장 권위적인 국가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었으니까. 어쨌든 독일의 누구든, 부모들마저 애들을 더 이상 때릴 수 없다.
애들을 절대 때려서 가르치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면, 극히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아마 놀라 자지러질 것이다. 정말 막돼먹은 인간을 양성하려는, 이를테면 '간첩'의 마인드를 갖고 있지 않나 의심할지도 모르겠다. 체벌금지란, 도저히 한국에서는 통용될 법한 주장이 아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벌어졌다는 얘기들를 듣노라면, 왠지 그 동네에서는 그래도 될 법하게 여겨지는 건 대체 어째서일까.
책의 주장은, 아마 2차대전 이후 독일 사회가 자신이 저질렀던 무분별한 폭력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최후로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가부장권, 또는 친권은 흔히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여겨지고, 권위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책 서두에서 작가가 들고 나온 창세기의 신화는 음미해 볼 만하다.
종교에 대해, 나는 프로이트의 관점에 매우 동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Father'는 가정에서 애들이 느꼈던 아버지의 상(像)을 고도로 추상화시킨 결집체이다. 그는 ‘복종은 미덕으로, 호기심은 죄악으로, 선악에 대한 무지는 이상적인 상태’ 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종교는 하늘의 계신 아버지뿐만 아니라, 지상에 있는 아버지들 - 군주, 상사, 가부 - 의 권위를 영속화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다.
위에서 지적한 서당 훈장을 떠올리자.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종교가 기성 권위를 수호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다. 민주적인 내용의 법 개정이 시도되기만 하면, 버스를 대절하여 상경하는 게 전통종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천상의 아버지과 지상의 아버지의 권위가 내리막을 걷는 독일과는 반대로, 한국의 아버지의 권위는 여전히 강력하다.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특히 부모의 권위는 일종의 신성성마저 갖고 있어, 함부로 그들의 권위를 모독하면 패륜으로 낙인찍힐 위험에 떨어야 한다. 독일과 한국은 분명, 이런 점에서 아동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이 다른 셈이다. 앨리스 밀러의 책처럼 ‘급진적인’ 주장은, 사회가 좀더 민주화된 다음에나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정답은 없다. 칸트나 공자가 말한 것처럼, ‘네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라는 등의 격률도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까지는 인정하기 쉽지 않다. 모든 건 아무래도 선택의 문제다.
저자의 주장대로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때로는 권위적인 통솔자 아래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세상을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생각해 보면 국가의 번영은 국민의 행복과 정신건강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느낌도 든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전부 정신병자였던 것 같고, 당시 히스테리 환자가 어지간히 많지 않고서야 프로이트가 그걸로 밥을 벌어먹고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애들을 때려서 교육시키는 것도 부모에게 주어진 나름의 선택이다. 또한 권위주의적 사회구조를 존속시키는 것도 국민의 선택이다. 히틀러는 독일이 가졌던 폭력성의 상징적 존재이며, 그의 참담했던 유년기의 추억은 그의 엄청난 공격성에 공헌했다. 그렇기에 히틀러의 행위는 독일인의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독일인들은 나라가 폐허가 되고 나서야 그들의 선택을 후회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