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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

비문


 "만들어진 고대"에서 이성시는,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은 '묘의 부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가설을 폈다. 즉 광개토대왕비문은 광개토대왕을 위한 것도, 후대의 제왕들을 위한 것도, 고구려인을 위한 것도, (비문만 계속 남아 있다면) 역사 속에서 무한히 등장할 불특정다수의 독자, 일반인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의 가설은 일견 참신하다. 또 어쩌면 비문이란 텍스트는, 단 하나의 의도가 아닌, 여러 복합적인 목적과 또 독자들을 가진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그의 주장은 전부가 꼭 아니라 일부로서라도, 비문의 정당한 해석의 준거로서 이용될 수 있겠다.


 시사IN의, "당신이 그의 비문을 쓴다면?" 이란 기사를 읽고 글을 쓴다. 앞에 말한 '독자'로 비문을 분류해 본다면 어떨까. 첫째로 고인을 위한 것, 둘째로 그의 가족과 후손을 위한 것, 셋째로 그의 동지들을 위한 것, 넷째로 그 비문을 읽는 모든 인간을 위한 것, 정도로 나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럼 한동빈의 “옥은 비록 깨지더라도 흰빛은 변하지 않으며, 대나무는 불에 타도 그 정절은 손상됨이 없다.” 란 문은 첫째 경우가 될 것이다. mamo의 “순교자 노무현, 묻히다.” 란 문은 세 번째 경우가 될 것이다. 굳이 나누자면 그렇겠다. 그러나 뭐니해도 네번째의, 일반적 독자가 완전히 제외된 의견은 없는 걸로 보인다. '비석을 세워달라' 라는 고인의 유언도 네번째를 가장 고려했던 게 아니었을까.


 기사는 초반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들의 비문"을 소개했다. 기자는 그저 소소한 흥밋거리로 소개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유명인사의 비문'들을 바라보면, 우리의 경우와는 약간 다른 점이 발견된다. 말을 남긴 주체가 전부 묘비의 주인들이다.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유명인사들의 비문은, '죽은 나는 이런 말을 남겼소이다'라는 선전이다. 대개 자기 잘난 맛에 살았던 문인들이기 때문일까. 반면 오늘의 경우는, 집단이 고인을 기리며 새기는 말이 되었다. 이것도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의 반영일까. 정말 그렇다면 굳이 적당한 문구를 선택하기도 어려울 것이고, 어쩌면 무엇 하나 꼽아 선택하는 것 자체도 어색할지 모르겠다.

 과학기술을 총동원하여 수십만개의 의견들을 비석에 모조리 적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방법이 현대의 특질을 명확하게 반영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흥미롭게도, 1000년도 전에 죽은 무측천은 정반대의 방법을 선택했다. 거대한 비석에 아무것도 적지 않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가 자신을 너무 잘나고 위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업적을 감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 몰자비()[각주:1]를 남겼다는 것이다.


 김원진은, 어쩌면 보수적으로, (노무현 대통령 연설 중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를 선택했다. 너무 많은 생각으로 치장하기보단, 오히려 고인의 말 중 아무거나 하나 갖다붙이는 게 더 비석다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 처칠의 비석은 "Never Give Up" 이 될 것이고, 고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가 될 것이고, 고 수환옹은 "그대는 나의 형제여", 아직 살아 계신 홍철횽은 "소녀들의 대통령", 준희횽은 "아악 반데사르", 각하는 "이게 다 오해다"가 되지 않을까. 아, 농담이다.

 만약 나보고 비석 문구를 고르라면, 고인이 귀향 당시 외쳤다는 "야아, 기분좋다" 를 들겠다. 왜 이거란 생각이 드는지는 알 수 없다. 합리적 근거는 댈 수 없고, 어쩌면 이 말이 플래쉬 동영상으로 많이 나돌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각주:2]. 내게도 불합리하다는 생각은 계속 들기는 하다만, 그런데도 이상하게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너무 유별난가. 그렇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는 어떨까. 너무 버럭조라고 느껴지면 이 정도로 바꾸면 또 어떨까, "노무현은 말했다, 부끄러운 줄 알라".





  1. 후대에 와선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글을 모르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 이란 의미로 흔히 쓰이게 되었다. [본문으로]
  2. 비석에 비디오 아트를 달면 어떨까, 하는 괴상한 생각이 들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