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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

부녀자(腐女子)의 윤리적 우월함에 대하여


[각주:1]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 마태오 복음서 5:28



 박노자는 포르노를 악하다고 말한다. 가령 박노자의 세계와 한국 - “포르노를 불살라버려라” 같은 칼럼. 진중권은 박노자의 이 태도를 일종의 엄숙주의라 비판한 바 있다. 내 생각을 말하면, 나는 박노자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그렇지 않은데, 포르노는 보고 있어서이다.


 애인이 없어서 나는 포르노를 보는 것일까? 하지만 애인이 있는 자들이라고 포르노를 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 사람들이 포르노를 '당연히' 본다고 전제하고 이야기한다. 이는 심지어 미성년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초 사이트 아무 곳이나 들어가 보라 - 포르노는 그곳의 사람들이 즐겨, 그리고 태연히 이야기하는 주제다.


 물론 포르노는 한국에서 불법이다. 흔히 이야기하기를, 한국인들은 불법인 것은 그 자체로 반-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단다. 가령 노조의 파업이나, 간통이나, 외국인 불법체류자 같은 사례들. 그러나 포르노는 이런 경향이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좋은 반증이 된다.


 위에서 대다수의 한국인 남성들이 포르노를 불법임에도 소비[각주:2]하며, 그에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규제는 그 자체로 남성들의 윤리를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포르노 규제는 종부세와 비슷한 면이 있다. 곧 다수의 젊은 한국인 남성들에게는, 포르노와 그 시청자들이 부당하게 탄압받는 것이다. 탄압의 주체는 여성주의자와 엄숙주의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상상된다.


 남성들은 저 두 상상-집단을 증오한다. 물론 포르노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주의에 대한 증오와 엄숙주의에 대한 증오를 잘 대표하는 게 일베다. 여성에 대한 증오는 '김치녀'로 대표되고 있다. 또한 일베인들의 발명품 중 '씹선비'라는 멸칭이 있는데, 윤리를 설파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이다. 이처럼 일베가 유달리 패륜적이기는 하나, 이 증오 자체는 남성들이 대체로 공유하는 것이다. 즉 '나는 일베는 아니지만...' 이다.


 루리웹이란 사이트를 보자. 이곳은 비디오게임 사이트인데, 그와 연관되는 게임이라든가 오타쿠 문화들에 대한 관심을 포괄한다. 당연히 남초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베와는 다르게, 반새누리당 성향이 극히 강하다.


 그럼에도 여성주의에 대한 증오심은 어디 가질 않는다. 이 '비디오게임 사이트'의 대문에 남성연대에 관한 뉴스가 걸린 일이 있다(게임 외적인 사례으로서는 아마 유일할 것이다). '나는 된장녀와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어느 여성 유저가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지금은 거의 '흑역사' 취급이지만). 유저들은 여성가족부를 극렬히 비난해 왔다.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자스민 의원은 거의 악마나 다름없다.


 지난 몇 년 동안을 서로 비교한다면, 루리웹의 반-여성주의 성향은 점차 개선되는 것 같기도 하다 - 과연 이것이 일베를 반면교사로 삼아서인지, 아니면 극단적인 자들이 일베나 IS로 떠나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사회가 점점 나아진다는 증거인지는 모르겠지만.


 엔하위키의 여성부 항목이나 각종 여성주의 관련 항목은 어떤가? 남성들의 순수한 증오가 더없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런 증오는 때로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이에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남자이어서이다.


 하지만 여성주의 탓이 아니다. 여성주의가 포르노와 친하기 어렵긴 하다. 그러나 지금 여성가족부를 움직이는 동인은 여성주의가 아니다. 여성주의가 정부의 정책결정에 저 남성들이 상상하고 있는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남성들의 증오에는 정확히 증오라는 딱지가 붙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망상을 당연한 듯 지껄일 수도 없겠지마는.


 그렇다면 역시 엄숙주의의 탓인가? 아주 거칠게 말하면 그러하다. 하지만 이 '일종의' 엄숙주의의 정체는 의외로 그리 명확하지 않다.



 처음에 소개한 박노자씨의 주장을 살펴보자. 포르노를 반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포르노-노동의 비윤리성이고, 둘째는 포르노-수용의 비윤리성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소비하는 실사-포르노는 제작에 배우가 필요하다. 이 배우의 일은 노동이며, 따라서 일반적인 노동이 요구하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즉 노동자의 수당과 근로 환경이 적절해야 함이다. 그런데 포르노 배우들의 상황은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도 심히 열악하다. 기본적으로 적절한 보수가 장기간 보장되지 아니하기에, 경제적으로 그리 좋은 일자리가 아니다. 또한 폭력 조직이 개입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며, 일방적인 계약 조건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다. 신체적 건강에도 좋지 않은 일임이 명백하다. 직업에 애착을 가지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는 위의 사항들과 맞물려 배우의 정신적인 문제를 낳는다.


 따라서 포르노 배우란 직업은 가장 긍정적으로 상상해 본다 한들 그리 바람직한 직종이 아니다. 여기서 눈을 비-서구권으로 돌린다면, 포르노 배우로서의 일은 감당할 수 없이 끔찍한 것으로 전락한다. 따라서 포르노 산업이 유지되려면, 배우를 강제적으로라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범죄를 암시한다.


 박노자의 말대로, 우리가 노동을 생각한다면, 포르노 배우 자체가 없어야 마땅하다. 아동이나 청소년을 소재로 한 포르노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 흔히 떠도는 '몰카'류는 또 어떤가? 이것은 심지어 의도하고 찍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포르노의 비윤리성은 노동에서 이미 명확하다.


 포르노-수용의 비윤리성은 앞서에 비해 약간 불명확하다. 확실히 몇몇 성범죄 사례는 특정 포르노 유형의 모방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방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숱한 모방 자살을 낳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판금을 먹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그것이 어떤 모방인지를 분류할 수 있어야 한다. 박노자는 '정상성'을 말했다. 이는 '정상'이란 말을 듣고 여러분이 쉽게 상상할 '남녀간의 정상위'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정치적인 것인데, 즉, '비정상'이란 포르노가 갖는 어떤 경향, 즉 폭력적이고 남성우월적인 성적 관계의 일반화 경향이다.


 세상 어느 나라나 할 것 없이 남성이 우월적인 권력을 누리며, 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차별에 대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살인 역시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으니, 차별과 마찬가지로 정당화되었어야 할 것이다. 남성의 이 우월적 권력은 크게 사회제도와 관습에서, 그리고 남녀의 대면적 관계에서의 물리적인 힘 - 완력에서 나온다.


 이 완력의 우월함, 즉 폭력의 소환은 근대국가에서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시쳇말로 남자끼리도 그에 호소하려면 '계급장을 떼어야' 한다. 정당방위는 숱한 폭력들 중에서 극히 예외적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폭력은 빈번히 발생하며 누구나 그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다. 그런데 포르노는 이 불법적인, 또는 그저 기대되고 있을 뿐인 폭력을 실제 용인되는 권력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은 매우 강력하다.


 물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 - 그런 경향이라고 하는 것들은 어쨌든 허구적 연출이 아닌가? 허구를 실제로 믿을 만큼 멍청한 위인들까지 배려해 줄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말했듯, 폭력이 실제 소환되며, 심지어는 그것이 불법이며 비윤리적이라는 딱지도 벗겨지는 상황이, 포르노가 아닌, 실제 현실에서도 빈번히 일어난다. 다음의 경우를 보자.



 이 박희태라는 자는 국회의장을 지낸 위인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위와 같이 변명하였다. 이 권력자에게 경찰은 특혜를 베풀어 '봐주기 수사' 논란을 낳았고, 건국대학교는 심지어 그이를 석좌교수로 재임용하려 시도하였다. 권력이 물리력을 용인하고, 물리력이 또한 권력으로 작용하고, 그리하여 범죄를 낳고, 그러나 다시 권력에 의해 불법성은 희미해졌다. 윤창중이나 강용석(형사처벌되지는 아니하였으나)의 경우는 또 어떠했는가?


 이렇듯 포르노의 허구성을 그저 우스운 수준이라고 넘겨 버리기에는, 기제가 현실과 지나치게 유사하다. 실제 범죄들이 그렇게 벌어지고 있고, 또한 범죄로 특정될 수준은 아니더라도, 남녀 차별의 구조를 공고화시키는 과정도 그렇게 이루어진다.


 포르노라는 '장르' 자체의 문제점 역시 지대한 공헌을 한다. 애초에 장르의 최소한의 내적 윤리가 없다는 것, 또는 그 최소한의 기준이 너무 낮다는 것이다. 말했듯 업계의 제작 윤리도 마찬가지로 너무 저열하며, 그마저도 제작자마다 제각각이다. 이는 자정 가능성에 대한 의심으로도 직결된다.


 오늘날 엄연한 포르노 이용자인 청소년의 '수준'의 문제도 있다. 청소년의 지적 수준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일천함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청소년은 포르노를 굉장히 일찍 - 대부분은 '초딩' 때, 늦어도 중학생 무렵 - 접한다. 그들은 포르노를 일단 보기 시작하면 꾸준히 본다. 디시에서는 이 현상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 포르노를 한 번도 보지 않은 남자는 있어도, 한 번만 본 남자는 없다. 한국은 청소년의 성관계를 죄악시하기에,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에게 경험이란 포르노가 전부이다. 이것은 철저히 왜곡된 성 경험의 세계를 만든다. 마치 인터넷으로 페미니즘을 배운 IS전사 김 군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을 모아 볼 때, 포르노를 보는 것 자체도 아무래도 그리 윤리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강한 경계심을 품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이 박노자와 같은 엄숙주의, 곧 포르노를 반대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지적해야 한다 - 대한민국의 포르노 규제도 이런 엄숙주의의 결과인가?



 말했듯 엄숙주의란 윤리적인 판단에 기초하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볼 때 어떤 행동은 악하니 하지 않아야 한다. 그 윤리의 기준은 종교국가라면 경전일 것이고, 세속국가라면 보편이성어야 할 터이다. 법은 당위를 말하고 있고, 대한민국은 세속국가이니만큼, 우리의 법-윤리는 후자에 따른다.


 그런데 한국은 법-윤리에 충실한가? 말했듯 일베충들은 윤리를 말하는 인간들, 일명 '선비'들을 증오한다. 하지만 '선비'들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소수이다. 그들은 법과 제도에 일정한 영향력을 미치겠지만, 그것은 역시 결정적이지 않다. 물론 일베인들은 상상력이 풍부한지라,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IS만큼 위험'한 만큼 '선비'들 역시 '페미니즘'만큼 위험하다고 믿고 있겠지마는.


 확실히 한국의 행정력은 여러 가지를 규제하긴 한다. 포르노 제작을 규제하고, 배포를 규제하고, 아동 및 청소년 대상의 포르노는 소지만으로도 처벌한다. 성매매는 불법이다. 성범죄 역시, 뭐 당연하긴 하지만 불법이다. 간통은 바로 얼마 전까지 불법이었다. 통제의 틀 자체만 놓고 보면 매우 강력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대체로 이러한데 -



 한국은 성매매가 만연한 국가 중 하나다. 특히 고위층일수록 이런 괴이한 자유를 누린다. 성범죄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박희태의 경우를 보라. 따라서 젊은 남성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성욕 충족만이 확실하게 제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객관적으로도 부당해 보이기는 한다. 이것의 원흉으로, 어쨌든 남성들의 상상 속에서, 여성주의와 엄숙주의가 꼽힌다는 점을 이미 지적하였다.


 그런데 여성주의의 탓이 아니듯, 박노자 류의 엄숙주의의 탓이라고 보기도 역시 어렵다. 그것이 보편성에 기반한 엄숙주의라면, '더 자유로운' 특권층은 없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르노를 윤리적 방식으로 대체하기 위한 행동들도 이미 나타났어야 한다. 즉, 학교 내에서의 자유연애가 허용되고, '씹선비' 성교육 교사가 교실에 들어와 일베충을 정신적으로 고문하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한국은 이 두 가지 점 - 제도 집행의 공평함과, 개인의 권리 보장 - 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 정부가 일을 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성은 더 심각해진다. 여기서 한 가지 맹점이 드러난다. 국가의 행정력이란 것은 일베충이나, 루리웹, 엠팍, 엔하위키 유저들의 상상- 단일한 의지를 가진 사념체 같은 것 - 과 다시 다르다.


 대한민국은 명목상 민주국가이다. 현대의 민주국가에서는 명목상 법률에 따라 국가의 사무를 처리하는 행정관료조직이 있다. 우리가 흔히 공무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법률은 국민이 - 실제로는 선거로 '위임' 받은 정치엘리트들, 즉 국회의원들 - 이 만드는 것이다. 이런 작동방식을 권력의 제1경향이라고 부르자.


 그런데 현실은 어떤 유형화된 정치엘리트들의 권력구도가 선거로 결정될 뿐이다. 그들은 관료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국가를 운용해 나간다. 이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건 여러 이익에 따른 조직 - 대표적으로 기업 - 이다. 물론 '여론'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과 인도의 경우를 보면, 선거를 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낳는 것은 아니다. 국가에서 인민의 의사란 솔직히 말해 희미하다.


 실망하기는 아직 이르다. 위의 도식은 현체제가 이상적으로 존재하는 그림은 아닐지라도, 이상적으로 동작하는 그림 정도는 된다. 적어도 위의 경우는 법질서란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벌써 16년이 지난 씨랜드 사건을 보자.


http://www.hani.co.kr/arti/SERIES/455/597296.html


 정치엘리트와 관료와 이익집단이 결합하여 대참사를 내었다. 건물의 인허가와 회사의 수익사업에 있어, 물론 겉으로는, 관료조직이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법에 따르지 않았다. 법의 편에 있던 공무원은 단 한 명이었고, 그이는 박해당했다. 이처럼 법이 결여된, 또는 법이 장식으로 전락한 정부의 행동, 이것 역시 아주 강력한 경향이다.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자원외교는 어떻게 파산했는가? 이 공-권력의 사유화를 2경향이라고 부르자.


 1경향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집단은 (정치적)자유주의자, 그리고 (어쩌면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한)사민주의자들이다. 물론 대충 이 정도 정치성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막장짓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노빠들과 NL들이 배틀로얄을 찍은 지난 통진당 사태에서 이를 아주 잘 관찰하였다.


 2경향의 지지자들은 아무래도 기업집단이겠다. 그리고 이들의 그림자 또는 양 팔인 종편이나 새누리당의 친박이나 친이계 등등. 물론 이런 '보수적'인 분들 중에도 법률적 사고를 하는 분들이 아주 계시지 않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지난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상돈씨의 경우.


 군대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1경향에 따른다면 어떤 처방을 내릴까? 우리는 노무현에게서(유감스럽게도 대중의 상상-노무현이나 저 노빠들의 행각이나 할 것 없이 고인과 현격한 차이가 있긴 하나) 좋은 실례를 본다. 군의 전투력을 개선하고 예산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려 노력하며, 군인들로 하여금 공적 행위에 있어 법적 절차를 따르도록 강제하는 정책. 어쩌면 당연한 것이, 이것이 정상국가의 - 정확히 말하면 선진 산업국가로서 기대되는 - 정책이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느껴 왔듯, 군의 현실은 제 2경향에 더 가깝다. 물론 나 개인적으로는 노무현 시절 군 생활을 하며, 군의 상태가 개선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고 그런 점에서 노무현에게 감사하고 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자, 이제 포르노그라피의 경우를 보자. 앞에서 간단히 말했듯, 1경향에 따른다면 인민의 의사에, 정확히는 정치엘리트들 나름의 합리적 판단에, 물론 어느 정도는 유권자들의 의사를 고려하여, 정책을 결정지을 것이다. 즉 포르노그라피를 일정 부분 규제하고, 그 공백을 메울 방법들을 모색할 터이다.


 어느 나라나 아동 포르노나 강한 폭력성이 드러나는 포르노 - 이를테면 고어물 - 은 금지하고 있다. 물론 제한되는 수위는 서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마는. 성 경험의 문제는 청소년이나 청년의 연애를 오히려 보장해 주는 것으로 해결된다. 이에는 혼외성교, 피임, 미혼모, 동거 등의 문제가 따라나온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저 같은 사태는 청소년의 성을 억압해도 마찬가지로 발생하는 것들이다. 이런 문제를 '선진' 국가는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려 해결하려 한다. 구체적으로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적인 성교육, 육아에 대한 지원, 어머니의 취업활동에 대한 지원, 동거에 대한 일정한 법적 권리 부여 등일 것이다.


 한국에서 저런 경향에 따른 정책이 수행되는가? 아주 일부만 그럴 뿐이다. 가령 보육지원 사업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장기적 존속(나는 사회주의자로서 이에는 관심이 없다고 해야겠다)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사업이다. 하지만 박근혜의 여느 공약이나 정책과 마찬가지로, 공염불로 전락하였다. 성교육은 어떤가?


http://www.huffingtonpost.kr/2015/03/30/story_n_6965974.html


 위 기사에서 보시다시피, 1경향과는 정확히 반대된다. 자유민주주의의 빛과 요람인 아메리카합중국에서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마당에, 동성애 교육조차 부인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가족은 핵가족 이상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막고, 중학생들의 섹스에는 눈을 감고 그저 임신만 되지 않도록 하라는 지침은 또 무엇인가? 기사에서 드러나는 정부의 정책은 저 미개한 가부장적 종교인들의 수준에 부합하고 있으며, 이는 저 위에서 보는 씨랜드 사태와 지극히 유사하다. 헌법과 법률과 과학적-학문적으로 인정된 지식에 기대지 않고, 특정 집단의 권력과 그것이 표상하는 인습성에만 굴종하려는 자세, 이것은 명백한 2경향이다.


 따라서 이는 박노자의 엄숙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애호하는 류의 엄숙주의도 아니다. 유교-기독교적 엄숙주의, 일반인의 쾌락 추구를 억압하려는 꼰대주의적 발상인 것이다. 쾌락 추구를 일반적으로 금지시켜야만, 특권층의 권위가 강력해지고 쾌락을 분배하는 역할이 커지니까. 아즈텍의 피라미드에서 인육을 잘라 나누어 주는 사제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일베인들의, 그리고 많은 남성들의 상상은 사실과 전혀 맞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일베인들의 착각이란 이해해줄만하다. 그들은 자신을 특권층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남성들 - 뭐 명예남성이라도 될 양 기대하는 일부 여성분들도 계시겠지만 - 이며, '산업화'로 치장된 신종 꼰대주의의 최전선에 서 계시니까들 말이다. 물론 그들은 마음만은 특권층이기에 남들의 꼰대질은 듣기 싫어한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채찍으로 치고 치고 또 칠 날만 고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베는 아닌' 분들이 여성주의나 선비질을 까고 있다면 한참 엇나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일반 대중들의 지적 수준을 운운하며 잘난 척을 하려는 게 아니다. 어차피 오늘날에는 대법관들조차 무슨 종합적 판단 따위란 할 줄 모르니 말이다. 그들이 최근에 낸 판결들이라곤 '도둑질은 했지만 불쌍하니까 안 갚아도 됨', '윗분들이 어렵다면 어려운 거지', 또는 '높으신 분들은 설령 잘못을 했더라도 책임이 없다' 따위다. 아아, 내게 신의칙을 가르치던 교수는 뭐라고 말하였는가! 판결문에 이런 걸 시도때도 없이 적어대는 한심한 위인이 되지 말라고 했잖는가?


 하긴 나는 판결문을 적기는커녕 다투는 사람도 되지 못하였다. 하긴 될 의지가 전혀 없긴 했지만, 적어도 판결문을 경청하는 사람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상술한 바대로, 나는 박노자 류의 엄숙주의를 지지하며 포르노에 대한 세심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박근혜는 규제가 암이라고 또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내가 추구하는 포르노에 대한 규제는 박근혜의 규제보다 덜 발암스러우리라.


 포르노를 규제하더라도 원칙에 따른 규제가 이루어질 것이다. 즉 아동 포르노를 규제하는 것이지 교복 포르노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습적 규제를 오히려 무너뜨린다면, 학생들이 모니터 속이 아닌 현실에서의 사랑을 찾을 기회가 늘어날 것이다. 남녀의 정치적-경제적 조건이 동등해진다면, 조건을 그리 따지지 않은 자유연애의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 청년층의 경제적 상황이 개선된다면, 그들은 연애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 것이 필요하다 - 법치와, 경제의 민주화와, 일베인들이 극도로 증오하는 저 합리적 윤리관이다.



 어쩌면 제목에 적어 놓은 것에서 논지가 심각하게 우회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제목이 그저 낚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앞서 논의를 잠시 보류했던 포르노의 사악함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겠다.


 말했듯 포르노는 사악하거나 사악할 가능성이 높은데, 노동과 수용의 두 측면에서 그러하다. 노동은 포르노 배우들의 실제 피해를 말함이다. 수용은 포르노 자체의 모방, 그리고 포르노가 전제하는 현실사회의 불의하거나 비합리적인 면에 대한 심리적 정당화이다.


 노동의 면에서 보면 강제로 촬영한 포르노가 가장 사악하고, 그 다음이 배우를 고용하는 포르노이다. 그런데 여기서 포르노이긴 한데 약간 덜 사악하다고 볼 만한 여지가 확실한 하위 장르가 있다. 바로 배우가 성우로서만 노동하는 포르노, 즉 '야애니'이다. 확실히 야애니는 성우가 목소리만 내지, 성행위 또는 유사 성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는 노동환경에서 - 물론 연기하며 어느 정도의 모멸감을 느끼기야 하겠지만 - 실사보다는 명백히 우월하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가장 우월한 것은 춘화다. 한국인들이 '망가'라고 부르는 것[각주:3]이 이에 해당한다. 이에는 오직 그림쟁이들의 노동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는 실사-포르노가 지는 여러 문제가 모두 벗겨져 있다.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 하지만 그것은 어느 노동이나 공통적으로 갖는 문제다.


 물론 성인만화는, 야설도 뭐 마찬가지겠지마는, 실사가 아닌 것에 부합하여 내용이 더 폭력적인 경향이 있다. 여담이지만 21세기 테러리스트 익산 오군이 일베에서도 쫓겨난 이유가 이런 것을 아주 '하드'한 쪽으로 팠기 때문이라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위 '혐짤[각주:4]'을 자기 혼자 보지 않고 동네방네 뿌리고 다녀서였겠지만[각주:5]. 이런 자를 애국열사라고 찬양하는 하태경에게 다시 찬사를 보낸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정신분석학적인 문제로 들어가는데, 즉 폭력성과 그 억압에 대한 것이다. 확실히 성욕은 어느 정도는 그 모양을 제한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근친상간이다. 가령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실제로는 연극감독에 가깝다) 에우리피데스는 연극에 '근친관계는 나쁜 짓이지만 끌리는 것'이라는 대사를 넣었다가 관객들의 난동을 겪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안티스테네스라는 사람(디오게네스의 스승격이 되는 위인이다)이 요점은 끌리는 게 아니라 나쁜 것에 있다고 변호해서 요행 무마되었다지만.


 정신분석학의 기본 방침은 성욕을 억압하면 모습을 바꾸어 - 일종의 증상으로 -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익산 오군이 받은 마땅한 박해의 결과가 폭탄테러인 셈이다. 물론 누구나 폭탄을 던지는 것은 아니니, 오군은 다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겠다. 그런데 현상이 이와 같다면, 폭력을 드러내서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니면 그런 드러냄이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는지가 심히 불투명해진다. 이는 심리학의 연구가 - 어쨌든 우리는 심리학이 그리 단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해결할 문제다.


 그렇다면 다소 실용적인 관점에서, 물론 덜 폭력적인 것이 아무래도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은 가능하겠으며, 앞서 말한 장르의 내적 윤리가 일종의 기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모방의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옆집 아줌마와의 썸씽(고전 야설들이 아주 즐겨 다루는 주제였다고)보다는 강간물이 더 문제가 있을 소지가 크다. 따라서 모방의 가능성 - 정확하게 말하면 모방이 일어나더라도 범죄가 될 가능성이겠지만 어쨌든 - 이 적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BL이 가장 우월하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1. 혹시나 해서 덧붙이지만, 글쓴이 본인은 부남자가 아닙니다. [본문으로]
  2. '소비'란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이들이 이용료를 '제작사'에 내지는 않으니까. [본문으로]
  3. 이는 만화의 일본어 발음인데, 한국에서는 오직 외설적인 만화만을 통칭한다. [본문으로]
  4. 혐오스러운 그림. [본문으로]
  5. http://m.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93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