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스포츠찌라시 호리'가 끝이었을 거다. 그 후 딴지일보는 기억에서 잊혀졌다. 시간이 흐르고 오늘, 그들은 부활했다. 화려하게 부활한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적당히 부활했다. 우리는 모두 그 적당한 부활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며, '그 때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해내며, 다시 '난세'가 온 모양이라 농담을 건넨다.
딴지는 적당한 히트작을 냈으며, 김어준도 적당히 입담을 구사하며 몇몇 매체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 나도 한때 그들의 글을 애독하기도 했던 터라, 세상에 떠드는 인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 물론 개인적 취향에는 어긋날지도 모르지만 - 민주주의의 기본적 이념에 따라, 그들의 부활을 적당히 환영하는 바다.
그들의 '부활'에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난세가 부활의 느낌을 낳을망정, 부활의 느낌이 난세를 낳지는 않는 법이다. 나는 반드시 이것을 유념해야 한다 - 관념 그 자체는 사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입 가진 놈이면 다들 할 수 있는 게 비평이다. 변아무개씨는 여기에 무슨 대단한 지적 수준 같은 게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당신의 지적 수준 역시 의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거니와, 대한민국은 어쨌든 민주국가 아닌가? 게다가 김어준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니, 어떻게 생각하든 그에게 떠들 자격은 있다고 해야겠다.
나는 지금 김어준이 걸어 놓은 딴지에 딴지를 걸어 볼 계획이다. 타겟은 총수 김어준 작, '박재범은 돌아온다'라는 제목의,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기사다. 링크는 다음과 같다.
입 가진 사람들은 모두들 이 사건을 이야기했다. 혹자는 이를 백가쟁명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재범' 건이 대폭발을 일으키고 사그러들 때까지 쭉 침묵했다. 사석에서도 '몰라' 정도 말만 남기고 그냥 잠수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애초에 관심도 별로 없어서, 사태의 추이를 실시간으로 관찰하지 않은 게 어떤 판단착오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중이다.
내가 침묵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로 내가 무슨 일간신문도 아니고, 세상만사를 총괄할 이유는 없다.
둘째, 나는 재범을 파멸시키는 것도, 구원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가 그렇게 불쌍하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지금도.)
무엇보다 셋째. 재범의 글은 명확하게 해석하는 게 불가능했다. 따라서 왈가왈부할 적절한 대상이 되지 않았다.
글 몇 줄로, 그것도 전문적인 직업 글꾼이 아닌 사람이 사적 공간에서 휘갈겨댄 글 몇 줄로 그의 인격을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다(그가 무슨 오스카 와일드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때문에 재범을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또 아니다. '침묵해야 했던' 이유다.
나는 악의적 번역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재범이 '우월감을 갖고 한국을 띄엄띄엄 보는 싸가지 없는 미국놈'일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낯선 땅에 와서 좀 투정도 부리곤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 보려고 노력했던 교포 3세'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재범에 대한 자세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의 인격을 재단하나. 그런 행동은 점술과 다를 게 없다.
그렇기에 나는, 입 다물고 있는 게 가장 현명한 처사라는 생각을 했던 거다. 재범에게 관심이 또 많았으면 충동적으로 몇 마디 던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2PM을 포미닛과 항상 헷갈려했으며, 결정적으로 재범이란 인간의 존재는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 '백가쟁명' 이후 사태는 좀 본질적으로 달라져버렸다. 재범의 글 자체보다, 그로 인해 야기된 논쟁에 대한 논쟁이 더 커졌던 거다. 즉 그 글에 대처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태도와, 그 '태도'를 대하는 다른 구성원들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해졌다. 내가 딴지를 걸어 보려는 글도, 재범의 발언에 딴지를 걸은 건 아니다.
그러니 ('애초에 모두 조용히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보건만) 이 '백가쟁명'에 대한 평은 충분한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고 여긴다.
김어준이 시도한 프레임을 보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한다.
1. 재범을 비난한 인간은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소비자로서의 반응, 수컷 경쟁자로서의 반응, 국가주의자로서의 반응.
2. 가장 강력하게 비난을 퍼부은 놈들은 수컷 경쟁자로, 그들은 국가주의자의 언어를 쓰며 소비자의 행세를 했다.
3. 이른바 '먹물'들은 사태의 본질을 오독하고, 타겟을 잘못 잡았기에 판은 뒤죽박죽, 난장판이 됐다.
이것이 그가 제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에 기초하여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자신의 열패감을 애국주의로 치환하는 치졸한 수작들만큼이나 웬만한 ‘애국’ 감성은 간단히 파시즘으로 매도하는 그 게으르고 강박적인 호들갑이 안쓰럽다. 그건 오만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지적 태만이다."
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프레임을 제기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모두 다 싸잡아서 개새끼네 소새끼네 욕하고, 아니 우리들은 그냥 순수하고 착한데 너네 관점이 삐딱한거다, 라는 주장들은 정말, 영양가 없다. 사회적 현상의 이면을 파고, 그것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중요하다. 그 작업이 수행되어야 우리는 그 현상에 올바른 대처를 할 수 있다. 또한 그것과 유사한 다른 현상에도 대응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신선한 시도는 언제나, 적어도 거의 대부분은 권장되어야 하고, 김어준의 지적도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 물론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곧 그것이 정확하고 올바르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먼저 그 프레임 안에 어떤 모순이 없는지, 더 나아가 그 프레임이 사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그렇다면 몇 가지 점에서 김어준의 프레임이 과연 정당한 프레임인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먼저, 과연 '소비자'는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박진영이 장사꾼(물론 평범한 장사꾼은 아니지만)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이 없다. 하지만 국민은 과연 소비자일까? 아니, 규범적으로 어떻게 소비자라고 여기자고 한다 하더라도, 소비자의 심리를 갖고 2PM을 대하는 걸까? 이건 넌센스다.
'우리 동네에서 장사하면서 우리 동네 욕했다' 면 물론 기분 나쁠 수도 있다. 가령 우리 동네 편의점 알바생 A가 '이 동네 학생들 존나 다 병신같음ㅇㅇ' 이러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기분 나쁜 감정은 '얘가 상도의를 어겼어'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 시발 이것이 날 욕한 건가?'에서 나온 걸까?
가령 다음과 같은 예를 보자. 우리 동네에서 장사하는 B씨는 상도의를 어겼다. 즉 법적으로 그 가게에서 취급할 수 없는 공산품을 팔았으며, 가계전표를 조작하여 세금을 포탈했고,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내놓았고, 손님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다. 사람들이 위 각각의 '상도의 위반'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까. 각각 모두 '상도의 위반'이라며 '재범'에게 보이는 것과 똑같은 수준의 분노를 표출할까?
재범에 대한 분노는, 상도의의 문제로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애초부터 한국인들에게는 상도의에 대한 개념 자체가 희박하다. 대부분의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안타깝지만 내 생각엔, 자기에게 좋냐 나쁘냐, 더 넓게 나가 봤자 우리 가족에게 좋냐 나쁘냐 수준의, 말초적인 기준이 대개의 한국인이 내리는 대개의 판단의 최우선 기준이 된다. 1
게다가 대부분의 국민이 2PM을 '소비한다'라고 보긴 힘들지 않나. 법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소비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이 상황에서, 논의의 일부로 상도의의 프레임을 끌고 들어오는 것 자체는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상도의가 메인 프레임이 되어 버리면 상당히 곤란하다. 2
소비자는 없다. 그러면 '수컷'들과 '국가주의자'들은 존재할까? 이 점은 '소비자'와는 달리 분명해 보인다. 수컷들의 '열폭(분노 폭발)'이 재범을 추방시킨 강력한 동력이라는 분석은 나도 동의하는 바다. 국가주의자들도 어쨌든 한국에 존재한다. 하지만 김어준이 위 프레임대로 이들을 '구분'한 것은 정당한가?
"물론 감정이란 게 이렇게 블록을 쳐 칼같이 구획되는 게 아닌데다 아예 무관심하거나 서로 뒤섞인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틀 파악에는 이 구분으로 충분하다." 라는 발언을 보자. 김어준은 분명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짚고 넘어가긴 했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정확히 짚고 넘어갔느냐는 좀 의심스럽다.
가령, 중세 십자군의 예를 보자. 김어준식으로라면,
1. 교황으로서의 관점. 2. 군주로서의 관점. 3. 기사계급으로서의 관점. 4. 상인계급으로서의 관점. 5. 농민계급으로서의 관점. 6. 광신도로의 관점.
등으로 십자군에 참가한 인간들의 태도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군 원정으로 교황은 권위를 원했고, 기사계급은 영지를, 상인은 부를, 농민은 인생역전을 원했다. 정말 순수하게 신앙의 힘으로 십자군에 동참한 인간은 극소수였다. 그렇다면 십자군의 수많은 기행들을 종교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걸까? 김어준의 논리를 그대로 일관한다면 그래야 한다.
그렇다면 맨발로 예루살렘까지 걸어가려 시도했던(실제 도착하진 못했으니) 무지한 농민들의 행각, 프라하에서의, 다마스커스에서의, 예루살렘에서의 학살극, 기병대의 제일선에서 자랑스레 돌격하던 기사들의 행동, 이것들은 종교와 아무 관련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될까? 그렇다면 너무 이상하다.
돈키호테가 여전히 널리 읽히는 건, 사람들이 딱 돈키호테라서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돈키호테적 속성이 다들 약간씩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도 마찬가지고, 국가주의도 마찬가지다. 십자군들의 신앙처럼, 재범을 비난하던 '소비자'들이나 '수컷'들, 또는 그냥 일반인들에게도 국가주의적 속성, 또는 파시즘적 속성이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는 내재되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실을 관찰해야 한다. 과연 대부분의 한국 국민은 국가주의적 속성에서 자유로운가? 정말 국가주의의 광신도들은 인민의 극히 일부분이고, 광신자들은 어떤 곳에 격리수용당해서 '언어'만 여기저기 방랑하는 '안습'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 김어준은 '수컷'들이 사실 '국가주의자'가 아닌데, 기술적으로 그들의 '언어'만 빼다 쓰는 고도의 재주를 부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거, 솔직히 너무 '수컷'들의 수완을 과대평가하는 주장 아닌가? 3
아니, 내가 보기엔 수컷들의 대부분은 국가주의적 속성을 갖는다. 그것도 과도하게. 그렇기에 그들은 국가주의의 언어를 쓰는 거다. 아니, 아니, 군대문화에 찌든 수컷들을 빼고, 어떻게 한국에서 국가주의(또는 미시파시즘)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김어준은 '짚고 넘어갔다'는 수사로 국가주의를 일반 인민과 간단히 분리했다.
김어준은 어떻게 그런 주장을 늘어놓긴 했지만, 어쩌면 무리하게 집단주의를 옹호하는 걸로 비치는 게 아닐까, 자신도 좀 염려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종의 변명이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애국’ 감성은, 일차적이고 원시적인 공동체적 감수성이다. 그게 다치면 집단 반응하는 것까진 당연한 거다. 문제는 그 정도를, 우리 사회가 자율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일 뿐." 을 보라. 이 문구는, 모든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애국적' 성향이 내재한다는 걸, 그것에 따른 '집단반응'이 일어났다는 걸 지적해 버리고 만다. 이건 심지어 '당연한'것이기까지 하다.
이 '애국적' 변명과 앞에서 그가 제시한 '프레임'은 완벽한 논리모순을 이룬다.
김어준이 바보는 아니다. 지적했듯 그는, 프레임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재범사건은 '백가쟁명'으로 논점이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졌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주요한 원인만을 취사선택하여 프레임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 내 소집단을 분류할 때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유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어준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착오로 드러났다. 프레임은 사실과 상당히 다를 뿐더러, 그 자체 내에서도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이유는 무엇인가?
말했듯 내 글은 딴지의 딴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재범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에 대한 몇몇 지식인의 비판에 대한 김어준의 비판에 대한 나의 비판이다.
재범 ← 사람들 ← '지식인' ← 김어준 ← 나
곧 김어준의 글은 국가주의 비판에 대한 반발이다. 내가 보기에 김어준의 '의도'는, 이번 사건으로 쟁점이 된 '광적 국가주의'에 '쉴드'를 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4
그의 글은 많은 부분 사실을 기초로 했으며, 프레임 자체도 참신하기에 - 그 진실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말이 말을 낳아 복잡할 대로 복잡해진 이 사건을 오직 국가주의 발현의 관점으로만 보는 건 편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어준의 지적은 그런 면에서는 분명 타당하다. 국가주의 비판자들도 그런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 사건에서 국가주의는 발현되었다. 따라서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일면의 타당성을 분명 보유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을 단순히 근거 없는 '훈장질'로 매도하는 건 광기에 대한 면죄부와 같다. 다수의 대중은 단순히 '소비자의 분노'를 느꼈을 뿐이고, 국가주의와는 아무 관련도 없고, 참 빨리도 재범에게 '용서'를 베풀어 도덕적으로도 떳떳하다? 이런 주장은 광기를 부린 많은 범인들에게는 달콤한 유혹일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더욱 설득력이 있다.
종교, 또는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위험한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의 맹목성이다. 자신과 다른 개인이나 집단을 간단히 '우리가 아닌 다른 무엇', '비인간' 또는 '절대악'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지난 일들를 돌이켜보라. 대체 얼마나 대단한 상도의, 또는 예비역들의 열등감 폭발이 한 인간을 국외추방시킬 정도의 힘을 지녔던가? 이것은 국가주의의 힘, 그것을 빼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이런 맹목성이면 무슨 대화과 토론 같은 게 개입할 여지가 없다. 정작 '국민들의 편'인 김어준의 글에도 그냥 맹목적으로, 재범의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잘못을, 자신들의 원초적 정당성을 성토하는 댓글이 여러 개 달려 있다. 김어준 말대로 언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을 세련되게 감추는 인간, 그런 놈들은 그리 흔하지 않다. 대부분은 내셔널리즘의 노예일 뿐이다, 적어도 내셔널리즘이 그런 맹목적 복수심에 기름을 붓는 건 분명하다.
김어준은 확실히 알고 있지 않을까. 비판 없는 애국, 실체 없는 '국익'의 프레임이 얼마나 사람들을 현혹하고 잘못된 길로 빠뜨리는지 말이다. 바로 그 자신이 '줄기세포 사건' 때 제대로 당한 바 있으니. 아니 혹시, 지금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건 아닌가? 황우석이 던진 낚시줄에.
p.s 국가는 머리 속의 그림일 뿐이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을 사랑하는 건 또 모르겠는데, 그것에 광분까지 한다면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이런 치졸한 집단적 복수심이 정말 '웬만한 ‘애국’ 감성' 이라면, 애국이란 건 아예 전면적으로 부정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 삼성사건을 보라. [본문으로]
-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구성원 일반은, 연예인을 대체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 어떤 사람은 가부와 자식의 관계에 비하기도 했다. 나름 참신하긴 하지만, 확신이 들 정도의 주장은 아니다. 나는 그에 대해 딱히 이론이나 아이디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본문으로]
- 인터넷 속어. 안구에 습기가 차다, 즉 눈물날 정도로 안타까운 상황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 '쉴드를 치다'. 인터넷상에서 흔히 쓰이는 관용적 표현. A에게 가해지는 비난을 B가 대신 막을 때, 'B는 A를 쉴드치다'고 표현한다. '방패막이하다'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본문으로]